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91 | 92 | 9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는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 1990-1995
박성미 지음 / 백산서당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 KBS, MBC, SBS에서 방송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활약한 열 세 명의 인터뷰와 한국방송다큐멘터리 연보를 정리한 책으로 1995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당시 다큐멘터리에 몰입해 있었던 저자는 자신이 감히 선배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 10년~20년 연배의 프로듀서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들의 열정, 사명감, 그리고 그들의 세상에 대한 애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해 마치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매달려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저자는 그 현장에서 그들을 보았고 그들의 작품에서 그들의 눈빛 속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PD들은 한 마디로 한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선도하고 정착시킨 ’방송인’들이다.
그들은 1984년 한국 방송인의 자체 능력으로 안방 TV에 최초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었고 한국 방송업계 최초로 외주전문제작 ’프러덕션’을 차리기도 했다.
처음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이니만큼 그들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의와 개념, 제작방식과 절차, 기획과 구성, 촬영과 편집, 영상과 음악 등 모든 부분을 하나에서 열까지 틀을 만들어야 했고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러한 그들의 노력으로 한국 방송사와 방송업계에서도 ’다큐멘터리’가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열 세 명의 PD 중에서 ’일벌레’가 아닌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몇몇은 이 책의 제목처럼 ’세상을 바꾸어 보기 위하여’, 방송이 개인이나 권력이 아닌 ’국민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방송이 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이 되도록 청춘을 바친 PD도 있고,
그 중에는 80~90년대 방송사의 답답한 구조와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비전과 능력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하여 독립한 PD들도 있다.
또한, 여전히 지상파에 남아서 궂궂하게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고...
8명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이 쉽지 않아 현재의 지위와 역할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열 세 사람의 이력을 열거해보면,
- 권재홍 : 다큐멘터리답게 만든다.
 58년 영월생, 1981년 서울대 생물학과 졸업 및 MBC 입사, 1984 한국방송 최초의 자연 다큐멘터리 [한국 야생화의 4계] 제작, 보도국 앵커, 편집부장, 워싱턴 특파원 역임 및 ’MBC 100분 토론’ 진행자 역임, 2010년 5월부터 ’뉴스데스크’ 앵커
- 윤기호 : 프러덕션 시대를 열다.
 48년 서울생, 1973년 외대 불어과 졸업 및 KBS 입사, 1988년 [한국인의 건강] 연출, 1992년 퇴사 및 ’제3채널’ 설립, 1995년 ’제3영상’ 설립, 1998년 ’제3비전’ 설립 및 현재 대표이사
- 김태영 : 잘 닦인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57년 서울생, 1983년 서울예전 방송연예과 졸업, 1984년 [벽]으로 대한민국 단편영화제 우수작품상 수상, 1991년 ’다큐멘터리 서울’ 입사, 1988년 광주항쟁 진압군을 소재로 한 [황무지] 제작, 1989년 [황무지]로 벌금형, 1992~1993년 [베트남 전쟁, 그 후 17년] KBS에 방영, 1994년 [카리브해의 고도, 쿠바] KBS 방영, ??
- 전용길 : 정직하지 않으면 프로그램이 아니다.
 56년 서울생, 1982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및 KBS 입사, 1984년 [추적 60분] 제작, 1985년 [사람과 사람] 연출, 1987년 [뉴스비전 동서남북] 제작, 1988년 [히말라야 오지를 가다] 연출, 1994년 [세계는 지금] 제작, 1996년 뉴욕특파원, 2004년 제작본부 시사정보팀 팀장, ??
- 장윤택 : 프로듀서는 저널리스트다.
 49년 평양생, 1973년 TBC 입사, 1974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3년 [추적 60분] 기획/팀장, 1987년 [미국을 다시 본다] 연출, 1987년 [뉴스비전 동서남북] 기획/팀장, 1993년 보도제작국 제작3부장, 2005년 편성본부 본부장, 2007년 KBC미디어 감사, ??
- 유창영 : 영원한 약자, 그대 이름은 프로듀서이니라.
 55년 거창생, 1983년 서울대 국어교육과 졸업 및 행정공시 합격, 1984년 MBC 입사, 1990 [인간시대] 연출, 1993 [신인간시대] 연출, 2005 편성국 국장, 2006 홍보심의국 국장, ??
- 김종오 : 시를 쓰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47년 부산생, 1969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73 MBC 입사, 1975 [카메라출동] 제작, 1984 [한국 야생화의 4계] 제작, 1986 [그때를 아십니까] 제작, 1988 파리 특파원, 1992 보도제작국 국장, 1994 [시사매거진 2580] 제작, 1995 보도국 편집국장, 2003 대구MBC 사장, 2010 OBS 대표이사
- 정 훈 : PD들이여, 땅으로 내려오라
 51년 정읍생, 1977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및 TBC 입사, 1981 EBS 입사, 1983 AFP 입사, 1984 KBS 입사, 1987 [이제는 파란 불이다] 제작 및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창설, 1989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사무국장, 1992 SBS 프러덕션 입사, 1995 A&C 코오롱 편성제작본부장, 2004 OBS 전무이사, 2005 한국DMB 회장, ??
- 신언훈 : 나의 색깔로 승부한다.
 54년 대구생, 1978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80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1984 MBC 입사, 1985 [인간시대] 연출, 1991 SBS 입사, 1993 [그것이 알고싶다] 연출, 1998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부회장, 2001 제작본부 교양1CP, 2005 제작본부 제작위원, ??
- 진기웅 : PD가 PD인 이유
 53년 마산생, 1978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1981 KBS 입사, 1984 [추적 60분] 제작, 1990 [양자강] 제작, 1994 SBS프러덕션 입사, 2001 프리랜서로 [몽골리안 루트] 제작, ??
- 이동석 : 아들아, PD가 되고 싶지 않으냐?
 48년 김제생, 1974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및 TBC 입사, 1981 KBS 입사, 1989 [김용운교수의 한민족탐험] 제작, 1991 MBC프러덕션 입사, 1992 [잊혀진 전쟁] 연출, 1993 ’리스프로’ 설립, 현재 대표이사
- 이규환 : 영원한 아마추어
 52년 경북생, 1980 성균관대 불문과 졸업 및 부산방송국 입사, 1983 KBS 3TV 입사, 1985 [사람과 사람] 연출, 1989 [제3의 선택] 연출, 1993 [다큐멘터리 극장] 연출, ??
- 전형태 : KBS의 필요악
 55년 서울생, 1981 KBS 입사, 1983 연세대 독문과 졸업, 1989 [진도] 연출, 1990 [해방과 분단] 연출, 1992 [자본주의 100년 한국의 선택] 연출, 1994 SBS프러덕션 입사, 1997 (주)제이알엔 설립, 1999 [병원 24시] 제작, 현재 대표이사

저자는 그들이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고 제작,연출하고 방송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적어도 1990년~1995년에는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TV방송에서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주었고 (많은 주관적, 객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많은 PD들이 다큐멘터리로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의 노력만으로 사회는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고 그들이 철학과 의지를 가지고 ’사회변화’를 일관되게 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눈으로 25년 뒤의 현재 방송업계 PD를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1995년 이후 15년이 지난 2010년을 뒤돌아 보면 어째 과거로 회귀된 듯한 느낌이다.
뉴스와 심층보도 프로그램은 사회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정부의 정책만 일방적으로 홍보할 뿐더러, ’사회에 유익한’ 프로그램보다 ’재미’와 ’시청율’로 기울어진 온갖 예능 프로그램과 스포츠가 범람하고 있다.
지상파 종사자들은 거시적인 안목보다 무기력과 집단 이기주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20년 넘는 그러한 관성과 무기력, 보신주의가 MB정권 이후 지상파 종사자들의 수난과 허탈함을 가져온 근본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과 더불어 1990년대와 2000년대 방송사에 몸담았던 PD, 기자, 제작진, 기술진, 전문가들은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작년부터 전두환 정권 이래로 다시 한 번 ’권력의 시녀’라고 불리고 있는 KBS...
천천히 한 단계씩 자율성과 객관성을 읽어가고 있는 MBC...
개국 이래 상업방송 이상의 아무런 기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SBS...
도저히 방송이라고 하기에 멋쩍은 케이블과 IPTV...
하루하루 여의도에서 사라져 가는 외주제작사와 각종 프러덕션...
장기적인 안목도, 조직력도, 단결력도, 업계의 최소한의 생존도 보장하지 못하는 KIPA를 비롯한 각종 협회와 단체들...
3D업종으로 이미 자리잡은 방송프로그램과 영상물 제작분야...
의사협회나 변호사협회는 고사하고 간호사협회, 법무사협회, 음식업협회, 영화인협회의 반에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방송영상업계 종사자들...
 
작금의 상황은 아직 방송영상업계가 아직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아 그렇다고도 보인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꼭 ’밑바닥’까지 간 다음에 바닥을 쳐서 올라가야 하지?
언제까지 정부탓, 정치권탓, 지상파탓, 소비자탓만, 경제탓만 하고 있을 것인지...

p.s) 근데 1996년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왜 없을까?
 
* 저자 소개 : 박성미
1968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서울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원 영상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다큐멘터리, 방송프로그램 및 영상전문 제작회사인 (주)디케이미디어 대표이사다.
시민단체인 미디어연대와 남북경제문화교류재단의 이사를 역임했으며,
인문콘텐츠학회와 광주전남영상진흥협회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김홍재, 나는 운명을 지휘한다>가 있다.  

[ 2010년 10월 21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중과 지식인
한완상 / 정우사 / 1989년 12월
평점 :
품절


공부모임 100회 특집 ’내 인생의 책’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때는 1985년 6~7월 경이었다. 대학 신입생이 된 후 처음 맞이한 방학 기간이었다. 본디 6월 하순에 과학생회에서 진안군으로 농촌활동을 떠나는 일정이 있었고 나는 먼저 고향에 내려간 후 시간에 맞추어 익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함께 농촌활동에 참여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농촌활동에 참가하지는 못했고 고향에 틀어박혀 시간만 때웠다. 그 와중에 읽은 것이 선배로부터 선물받은 이 책이었다.
 
당시의 내 지적 수준이라는 것이 형편 없는 상태였기에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1/3 가량 읽은 후 머리가 복잡하여 덮어버렸다.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단어와 개념 하나하나가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래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미였는지 책을 선물해준 선배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기 위해 엽서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고. 그렇게 책을 덮고 나서 나중에 3학년이 되어서 다시 읽었다.
 
이 책은 ’엽서’라는 매개를 통해 그 선배와 나를 엮었다. 나는 선배에게 엽서를 보낸 사실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고 선배 역시 한 동안 책과 엽서에 대해 나에게 아무런 애기도 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술자리에서 선배는 엽서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나무랐다. 내가 보낸 엽서의 내용은 조금 구구절절한 이야기인데, 가장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가 "민중이 무어냐?"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과학적, 역사적 의식이 전혀 없던 신입생으로서는 저자가 정의하는 ’민중’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1985년이면 전두환 군사정권이 시퍼렇게 눈을 번득이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압살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입생 하나가 선배에게 공개된 엽서 뒷장에 ’민중이 무어냐?’라고 써서 보냈으니 선배가 잔뜩 쫄아서 기가 막혔을 것이다. 당시 이 책은 ’금지도서’ 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민중’이라는 단어도 ’금지된 단어’였다. 그것도 그 엽서의 수신처는 선배 집이 아니라 과사무실이었다.ㅋㅋ
 
그렇게 이 책과 인연을 맺었고 민중, 지식인, 지식기사, 자유, 평등, 노동자, 자주, 통일, 종교 등에 대한 개념은 나에게 1학년 내내 화두이자 고민거리였다. 그렇게 개념을 터득하고 배우고 익히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배워야 할지에 대한 나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우고 살아나가는데 있어 이 책도 큰 역할을 한 셈이다. 
 
-------------- * 한완상(韓完相, 1936년 3월 5일 生)은 누구인가? ----------
사회과학자, 행동하는 양심, 자원봉사자의 본보기가 되는 한완상. 그는 교육계, 정치계, 학계, 종교계를 넘나들며 참 지식인상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 사회와 교계의 환부를 예리하게 진단, 처방하는 소명을 다하고 있다. 엄혹했던 현대사의 격랑으로 두 번의 해직과 수형 생활을 겪어야 했지만, 힘의 논리 위에 서 있는 ‘평화 지키기’보다 나눔과 비움을 통해 세우는 ‘평화 만들기’를 끝까지 주창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을 경험하고, 껍데기뿐인 민주주의로 말미암아 독재와 비리, 사회의 부조리를 일찍부터 경험했기에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치료하는 예수 같은 의사’ 곧 소셜 닥터(social doctor)의 길이 그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소명이었다. 그 이력은 높고 범상치 않으나 지향점은 항상 ‘낮은 곳’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와 상지대 총장,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대한적십자 총재를 역임했다. 저서로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현대사회와 청년문화>, <지식인과 허위의식>, <대학생이 된 당신을 위하여> 등 다수가 있다. ------------
 
이번에 중고책으로 구해서 다시 읽어보니 대학생 시절에 내가 제대로 책을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책 내용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전체 4개의 장 중에서 첫 번째 장에 불과했다. 책은 그동안 내가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깊이도 있고 내용도 충실하다. 국가와 사회, 시대와 역사, 민중과 지식인, 대학과 대학생, 학문과 교육, 종교와 교회, 젊은이와 문제의식, 제국주의와 제3세계, 여성과 차별 등 1970년대에 한국이 처해있는 모든 사회적, 시대적 문제와 과제들에 대해 저자가 풀어놓은 문제제기와 방향은 놀라운 수준이다.
 
제1장. [민중과 지식인]에서 저자는 민중, 지식인, 사회과학 등 중요한 개념을 정의한다. "정치적 통치수단과 경제적 생산수단과 사회문화적 군림수단으로부터 소외되어 부당하게 억압받고 빼앗기고 냉대받는 사람들이 바로 ’민중’이다."(p.14) 따라서 민중의 대립개념은 지배엘리트다. 민중을 성격으로 분리해보면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이 있다. 그리고 저자는 지식인을 ’유토피아’의 정열을 가진 대자적 민중으로 정의하면서 민중에 포함시킨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의 창조와 분배와 보급을 하는 사람은 둘로 나뉜다. 그것은 지식인과 지식기사다. 지식기사는 지식의 분석과 관찰에 그칠 뿐 인간과 사회의 아픔에는 무관심하다. 사실은 말하되 진실을 증언하지 않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식기사는 지배집단의 조역이나 주역으로 자리하게 된다. 지식인은 일상성의 세계의 두꺼운 뚜껑을 열어보려, 꿰뚫어 보려고 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민중과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며 의식화되지 못한 즉자적 민중을 의식화된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대자적 민중이다. "오늘을 사는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민중의 사람들로서 민중이 주체가 되는 역사를 만드는 일에 온갖 힘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 정치, 경제구조를 엮어가는 일에 마음과 뜻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p.31)
 
제2장. [이 땅의 젊은이와 문제의식]에서 저자는 편지글의 형식을 빌려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현상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중고등학교의 군사적,제국주의적 시스템, 사회 전반의 전체주의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호연지기를 기르고 상대방의 이견을 경청하고 이성적으로 비판할 것을 당부한다. 그러면서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은 민중과 여론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하며, 여론의 심판보다 역사의 심판이, 역사의 심판보다 진실의 심판이 더 무섭다는 것을 강조한다.
 
젊은이들을 무자비한 경쟁자, 영악한 개인주의자, 호연지기나 의분심을 상실한 창백한 기능주의자, 원칙 없이 적응만 잘 해나가려는 요령주의자로 변질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내일의 엘리트가 되어야 할 젊은이들이 옳으냐 아니면 그르냐의 도덕적 질문을 던질 것을 당부한다. 또한 역사 이래 한국의 여성들이 억압받고 길들여져온 현실을 깨닫고 여성들이 ’현모양처’의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민중을 중심으로 여성의 지위향상과 여성해방을 위해 나설 것을 주문한다.
 
저자는 또한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그 방향은 학생운동이 기성세대의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남북 분단 상황에서 스스로 오해받을 구실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조국통일에 대한 뜨거운 정열과 날카로운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 민주화와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 것 등이다.
 
제3장 [학문, 교육, 사회]에서 저자는 한국 교육의 부조리와 대학의 이념이 실종된 상황에서 사회에 필요한 학문과 교육의 방향을 제시한다. 한국의 교육현장이 학생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파괴하고 있고 이타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을 파괴하고 경쟁위주의 이기주의자를 양성하고 있다. 자유, 정의, 진리 등을 이념으로 삼고 연구, 교수, 사회봉사를 기능으로 삼는 대학이 스스로의 이념과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공동체마저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에 따라 대학이 연구만 하는 연구소로 전락하거나 교육이 아닌 교수만 하는 강습소로 전락하고 국가에 통제되어 이데올로기나 PR 제조공장이나 사회인력조달소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대학이 자신의 상황을 수정하고 개선 발전시킬 자유를 지녀야 하고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인력을 길러야 한다. 저자는 또한 한국 사회가 뿌리깊게 가지고 있는, 척결해야 할 병폐로 이분법적인 사고양식과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관용의 부족, 권위주의의 횡행, 주체성과 유연성의 상실, 체면 치례와 허위의식 등을 지적한다.
 
제4장 [이 시대와 이 상황의 의미]에서 저자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3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압축적인 개발과 성장을 지상구호로 삼아온 것에 대한 폐해를 먼저 지적한다. 그러한 폐해는 사회 전반적으로 속도 지상주의와 능률 지상주의, 외형적 성장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으며 비극으로 향하고 있음을 우려한다. 성장의 달콤한 열매는 전체적인 민중이 아니라 소수의 지배 엘리트와 기득권자에게 돌아가고 있음이 명백하다.
 
TV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있던 1970년대의 사회상황에 대해 저자는 크게 우려하고 있다. TV가 대중적인 소비욕구를 결정적으로 자극하고 있고 지배엘리트가 공중파 언론을 독점하여 대중을 우민화하고 상대적 불행감을 자극하여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각종 비행과 범죄를 유발시키고 가족안의 인간관계를 둔화시키고 사회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가치관을 혼란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한국이 나아갈 길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그 중심 주제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적 평등의 가치를 제창한다.
 
 
이 글이 1970년대 폭력적인 파시스트로 널리 알려진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시대에 쓰여졌기에 저자가 단어와 문단을 풀어나가는데 있어 많은 애로가 있었음이 행간마다 읽힌다. 그럼에도 책 속에는 저자가 사회와 대중에게 발언하고 싶은 내용, 젊은이들에게 문제제기하고 제시하고 싶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그동안 후배들에게 꾸준히 이 책을 소개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아쉽다.
 
저자가 처음 이 책을 발간한 시점이 1978년이고 발간한 이유를 "민중이 역사와 구조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틈틈히 썼던 글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보았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판매 금지 도서 목록이 사라진 후 어느 정도 서점에서 판매된 다음에 현재 절판되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책을 발간한 이유가 한국에서 사라졌을까? 민중의 한국사회의 주역이 되었는가? 아직 그렇지 않다. 저자가 소박하게 정의하고 문제제기한 민중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상황은 크게 변하지 못한 상태다. 한 때는 민중보다는 계급이 더 앞서기도 했고 이제는 민중이라는 개념과 정의보다 시민이나 국민이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사회적, 역사적 의식은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어제 광주 518 민중항쟁 기록에 대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서평을 썼다. 광주민중항쟁은 518 사건이라는 단일한 역사의 주인이 민중임을 증거하고 있는 책이다. 극우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 먼저 ’민중’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역사적인 제자지를 찾는 것도 우선 과제라고 생각한다. 
 
[ 2011년 6월 09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보름 전인가... 친구와 점심을 먹다가 전날 화장실에서 잠시 읽으려고 이 책을 들고 갔다가 결국 꼴딱 밤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이 책을 보고싶다고 Facebook에 메시지를 남기자 대학선배가 즉시 선물해주어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작가의 ’작가정신’이 이루어낸 작품이다.
여러 문학평론가와 언론에서는 이 작품을 극찬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많이 아쉽다.
내가 아쉬웠던 것은 이 작품이 한 권으로 끝나서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내가 작가의 전작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에 대한 기억이 강렬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쉼이 큰 진짜 이유는 작가가 담고자 하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처럼 한 권으로는 절대 끝날 수 없는, 장구하고도 깊숙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다움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하는 문학은 이제 그 물음과 응답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작가의 ’작가정신’과 ’시대정신’은 작가의 초기 작품인 [불놀이], [대장경]에서부터 대하작품인 [태백산맥]과 [한강]까지, 그리고 그 이후 작품인 [인간연습]과 [오, 하나님]까지 초지일관 이어진다.
이런 작가정신은 김지하씨와 같은 다른 문인, 작가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이자 정신이다.
한국이 낳은 최고의 작가, 세계 어느 작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명품’이라 할 수 있다.
 
조정래씨에 앞선 세계적인 문인들 역시 작가와 비슷한 정신을 간직하고 있었던 듯 하다.
톨스토이는 ’진정한 작가이길 워하거든 민중보다 반발만 앞서가라. 한 발은 민중 속에 딛고.’라고 했고
타고르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문학의 길이다’,
빅토르 위고는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한다’,
노신은 ’불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은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어리저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료, 옳은 것을 찬양하고 약한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라고 했다.
 
동시에 작가는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화두에 나섰음을 선언한다.
그는 정치의 민주주의 뿐 아니라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경제 민주주의 역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을 통하여 작가는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천민자본주의와 기업비리들을 고발한다.  

작가는 연재 시작 전 계간 [문학의문학](2009. 여름호)과 한 인터뷰 대담 자리에서 차기작에 대한 계획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문학 작품은 모국어의 자식이다. 따라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시대, 그 사회의 모순과 비극을 써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모국어의 나라에 빚 갚음하는 작가로서의 책무이다. …… 자본주의의 천박성에 전 세계가 휘말리고 있다. 돈에 환장하는 인간들의 작태를 스케일 크게 집필할 계획이다. 각 분야 지배 계층들의 조직적 결탁과 그들의 위선, 그리고 그 횡포와 돈을 쫓는 각축에 대해 구상 중이다.”라고..
이 책은 그런 약속 끝에 세상에 나왔다.

작가도 책의 서문에 이야기했듯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우울’하였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마치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이나 ’SK그룹’을 빗대어 말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태봉그룹의 비밀조직의 핵심인 박재우를 일광그룹에서 그의 대학 후배인 강기준을 통해 영입한다.
그동안 태봉그룹은 치밀한 조직과 년간 1조원 가량의 비자금으로 언론계, 정계, 법원, 검찰, 국세청, 정부, 학계 등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탈세와 비자금 조성, 불공정 거래 등을 법과 언론의 화살을 피했다.
일광그룹의 남회장은 자신이 태봉그룹 수준이 아닌 통상적인 로비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자신이 검찰에 구속되어 구치소에 들어갔다 온 것으로 생각하여 태봉그룹을 넘어서는 대대적인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일광그룹이 박재우에 대한 스카우트를 성공시킨 후 박재우의 전략에 따라 국정원, 국세청, 검찰, 정부, 언론계의 주요 인사들을 추가 스카우트하고 년간 1조원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하여 뿌려댄 결과, 시민단체와 정의로운 교수들의 고발과 문제제기를 피해나가게 된다.
재벌가의 주요 등장인물로 일광그룹의 남회장, 비서실장이자 ’문화개척센터’ 총본부장 윤성훈, 기획총장 박재우, 실행총무 강기준, 김종석 실장, 검사 출신 신태하 팀장, 국세청 서기관 출신의 정민용 팀장 등이 등장한다.
이들의 생각과 태도, 전략과 방식, 말과 행동에서 썩어빠질대로 썩은 재벌가의 역사인식과 사회의식, 황금만능주의와 결과만을 중시하는 무한경쟁, 태연한 부도덕과 불법행위는 한편으로는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돈과 지위 앞에 신뢰나 의리를 휴지처럼 내팽켜치는 재벌가의 구성원들 모습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강기준이 다른 재벌그룹으로 이직하는 것으로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다행히 작가는 아무리 재벌과 정치권, 법조계와 언론계, 관계와 학계가 썩어있을 지라도 그 속에 남모르게 순리와 정의, 진실과 인간중심주의, 신뢰와 의리를 지켜나가고 불의와 싸우는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의 자그마한 노력 하나 하나가 모여 사회의 썩은 웅덩이를 치우고 암과 같은 폐해를 도려낼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의 말...
"우리의 자본주의는 60년이 넘었고, 경제발전의 역사는 50년을 헤아린다. 우리는 세계를 향하여 ‘정치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해 냈다’고 자랑한다. 세계 또한 ‘2차 대전 이후에 제3세계 중에서 정치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며, 그건 20세기 기적 중의 하나다’라고 평가한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 것은 분명 우리 모두의 긍지이며, 맘껏 자랑해도 자만일 것 없는 우리들의 떳떳한 자존심이다."
 
* 새로 배운 한글
- 두물머리 : 두물머리[兩水里]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한자로는 ’兩水里’를 쓰는데, 이곳은 양수리에서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장소를 가리킨다.
- 가직하게 : 거리가 조금 가깝다.
- 땅띔 : 무거운 물건을 들어 땅에서 뜨게 하는 일.
- 보비위 :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줌.   

[ 2010년 10월 23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엮음, 황석영 기록 / 풀빛 / 198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공부모임 100회 특집 ’내 인생의 책’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읽은 두 번째 책이다. 이 책 역시 처음 출판 즉시 ’판매금지’되었고 나는 대학교 1학년 시절인 1985년 책이 발간된 해에 읽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책 형식이 아니라 자료집으로 읽었던 것 같다. 교정에서는 518 민중항쟁에 대한 사진전이 학생회관을 비롯한 교내 곳곳에서 진행되었고 수 많은 대자보가 학생회관 벽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이미 각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의 실체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성격과 의미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대자보에는 1학년 학생들과 다른 학생들을 위해 광주학살의 책임자를 ’5적’, 즉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이희성(혹은 주한미군,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워컴을 지칭했음)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유엔사령관이자 주한미군사령과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고 20사단을 광주에 투입하는 것을 용인, 허가한 것 때문에 이미 선배들로부터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의 원흉이자 배후조종으로 규탄되고 있었다.
 
광주항쟁에 대한 자료는 학교 내에서 선배로부터 전달받았음에도 우리는 강의실이나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아닌 비공개 지역에서 읽어야 했다. 당시 교정에는 사복경찰과 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프락치가 상당수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료집을 도서관 1층 열람실에 숨어 읽었다. 광주학살에 대한 전후 배경과 공수부대 및 20사단의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20년 동안 살아오면서 내 머리 속에 굳어진 국가, 군대, 정부, 정의, 양심, 자유, 평등, 헌법, 법치주의 등 모든 개념이 무너졌다. 이미 3월부터 교정의 각종 대자보와 유인물로 인하여 어느정보 고정관념이 깨었고 역사, 철학, 사회, 근현대사, 민중 등에 대해 어렴풋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나에게 ’광주학살’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진실을 깨닫게 하였다. 
 
우리 부모 세대들이 죽을 때까지 일제와 625 전쟁에 대한 잔상과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광주항쟁’은 나에게, 우리 세대에게 씻을 수 없는 분명한 생각과 의식을 각인시켰다. 광주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살인마들이 이 땅에 버젓이 살아있고 권력을 누리는 한 나와 우리 세대들에게 대학도, 평온한 삶도, 공부도, 꿈도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가슴 속에 티끌만치라도 양심과 인간성이 살아있다면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현실과 체제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렇게 이 책은 내게 다가왔고 ’광주’는 내 마음 속에 자리잡았고 그 이후의 모든 세계관과 생각과 행동의 준거틀로 자리잡게 되었다.
 
--------------------- * 황석영(黃晳暎)은 누구인가? --------------------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 중 단편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한일회담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의 공사판을 떠돈다. 공사판과 오징어잡이배, 빵공장 등에서 일하며 떠돌다가 승려가 되기 위해 입산, 행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해병대에 입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이때의 체험을 담은 단편소설 [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특히 1974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장길산]은 지금까지도 한국 민중의 정신사를 탁월한 역사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9년 방북 후 독일 미국 등지에서 체류했으며 1993년 귀국하여 방북사건으로 5년여를 복역하고 1998년 석방되었다. 이후 장편 [오래된 정원] [손님][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를 발표하며 불꽃 같은 창작열을 보여주고 있다.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중국, 일본, 대만,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장길산] [오래된 정원] [객지][무기의 그늘][한씨연대기][삼포 가는 길]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객지][가객][삼포 가는 길][한씨연대기][무기의 그늘][장길산][오래된 정원][손님][모랫말 아이들][심청, 연꽃의 길][바리데기]등이 있다. ---------------------------

1부. [밀려드는 역사의 파도]
1. [역량의 성숙]과 2. [민중항쟁의 발단]에는 1979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사살한 이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정치군인들이 군사쿠테타를 일으키는 사건에서부터 518 광주항쟁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1980년 들어 민주화와 민간정부 수립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드높은 가운데 최규하 과도정부가 정치일정을 제시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집회와 시위의 현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전남 민주화운동권과 광주 학생운동 세력의 성격을 정리한다.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다다르던 5월 14일부터 15~17일 동안 서울 지역의 시위현황과 광주시만의 독특한 시위 모습을 정의한다.


2부. [피와 눈물의 5일간]
3. [산발적이고 수동적인 저항]에는 5월 17일, 18일 양일간 전두환 쿠테타 세력이 권력의 주도권을 쥔 이후 전국에 확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화려한 휴가’로 명명된 공수부대를 광주시 전역에 투입하여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학살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4. [적극적 공세로의 전환]에는 5월 19일부터 공수부대는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고 광주시의 항쟁의 중심이 학생운동에서 민중봉기로 진화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어용언론과 제도언론은 광주시의 참상과 진실을 함구하고 왜곡했다. 광주의 시위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하고 시민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는 형태를 보인다.
5. [전면적인 민중항쟁]에는 5월 20일부터 광주시 전체 민중의 전면적인 항쟁을 다룬다. 택시 부대가 등장하고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자동소총에 짱돌과 몽둥이로 대적했다.
6. [무장투쟁과 승리의 쟁취]에는 5월 21일 차량 시위가 이어지고 시위대의 지도부와 계엄군간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총기를 든 시민군의 등장이 나타난다. 시민군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차량을 징발하여 계엄군과의 전투에 동원했다. 오후부터는 광주시를 빠져나간 시위대가 전남의 소도시 지역으로 시위를 확대하면서 영광, 무안, 화순, 강진, 장흥 등지에서 소총을 들고 시내에 진입했다. 급기야 계엄군은 전남 도청에서 전술적으로 퇴각한다.



















3부.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7. [해방기간 1]에는 5월 22일 해방 첫 날의 모습을 기록했다. 대학생들과 지역 유력자들 중심으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고 도청 앞 광장에서는 민중들 중심으로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도청 지휘체계는 처음부터 총기 수거와 협상 여부에 따라 혼란과 분열을 거듭한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발동하여 전두환이 광주시를 무력진압하는 것을 동의한다.
8. [해방기간 2]에는 5월 23일의 광주를 기록했다. 광주시 외곽을 차단한 계엄군과 시민군을 전투를 계속한다. 광주시를 빠져나가려는 시위대와 광주시 외곽으로 나갔다고 광주시로 들어오는 시위대는 계엄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다. 수습위원회는 협상과 투항의 갈림길에서 분열되고 숨은 지도부에 의해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된다.
9. [해방기간 3]에는 5월 24일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의 모습과 학생 수습대책위원회의 분열을 기록했다. 항쟁기간 동안 광주시는 범죄율과 사건사고가 대폭 줄어들었다.
10. [해방기간 4]에는 5월 25일 벌어진 계엄군 스파이에 의한 독침 사건을 고발한다. 재야 민주인사들의 모임과 청년지도부가 도청 상황실을 장악한다.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하여 본격적인 항쟁지도부가 탄생한다.
11. [해방기간 5]에는 5월 26일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의 모습과 항쟁지도부의 활동, 계엄군의 전략과 공작을 기록했다.
12. [항쟁이 확산]에는 5월 18일 이후 목포, 함평, 무안, 나주, 영산포, 영암, 강진, 장흥, 해남, 화순지역으로 어떻게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어떻게 시위와 항쟁이 진행되었는지 기록한다.










 
4부.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13. [항쟁의 완성]에는 5월 27일 마지막 투쟁을 준비하는 도청 상황실의 모습을 기록했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항쟁지도부와 시민군의 결연한 의지와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27일 새벽 최후의 항전을 기록했다.
14. [끝나지 않은 투쟁]에는 5월 27일 항전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과 새로운 연대, 그 후의 사건들을 기록했다.
부록에는 부상자 명단과 구속자 명단을 담았다.



처음 이 책을 도서관에 숨어서 읽어을 때에는 장면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듯 했다. 방망이로 머리가 깨지는 장면, 대검으로 쑤시는 장면, 발가벗겨서 트럭에 집어던지는 장면, 안타까워 하는 얼굴과 분노하는 표정, 전옥주씨의 목소리... 5월 17일 장면부터 시작하여 5월 19~20일에 살해되는 대학생과 직장인, 여학생, 시민들의 모습은 결국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한참 눈물을 흘린 뒤 이를 악물고 마지막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언젠가 외국 기자가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학생회관에서 상영하여 본 적이 있었고 1989년에는 광주항쟁을 다룬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를 학생들이 함께 보기 위해 대학마다 대대적으로 경찰들과 싸웠다. 2007년 영화화된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 주연 김상경, 안성기, 이요원, 이준기)를 볼 때에도 아련한 기억이 여전했다.
 
이제는 내 나이 사십대 후반에 접어든 탓인지 26년 만에 읽으니 대학교 1학년 시절과 같은 감정이 복받치거나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광주항쟁에 대한 광주시민의 상징이던 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절차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2011년 현재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를 맞이했는데...
 
이 땅에서 다시는 광주와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광주를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다시는 일제와 같은 군사적 제국주의에 이 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31운동과 반일투쟁, 독립투사를 기억하고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정치군인이나 잘못된 정치인을 만나면 국민을 살해할 수 있다는 교훈,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미국에게 주어진 서글픈 현실,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총을 들고 일어선 광주민중들의 고귀한 의지와 넋... 이 모든 것들은 대대손손 기억하고 되새기고 다짐해야만이 미래가 불안하거나 비극적이지 않고 희망에 가득할 것이다.
 
* 책의 집필 등에 대한 논란의 진상 : 주간지 [신동아]의 2010년 12월호 기사로 인해 올해 초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인터넷 언론사인 [광주인
http://gwangjuin.com]의 1월 3일 기사를 옮겨 놓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집필과 경위

2011년 01월 03일 (월) 17:02:26 전용호 문화활동가 475story@naver.com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집필과 출판 경위 
월간 <신동아> 2010년 12월호의 의도(?)는 무엇?

1980년 5·18항쟁의 실상을 다룬 최초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간과 관련하여 집필자인 황석영 작가에 관한 월간 <신동아> 2010년 12월호의 기사 등의 내용을 반박하며 실제 당시의 출판 경위를 밝힌다.

필자 전용호는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으로 5·18항쟁에 ‘투사회보’ 제작자로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현재는 5·18항쟁 국가유공자로 광주에서 살고 있다. 전용호는 1980년대 초반, 광주·전남기독청년회, ‘일과 놀이 문화운동기획실’, ‘민중문화연구회’등의 조직에서 상임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자료수집 등 활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책의 집필과 제작경위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



   
▲ 책 표지.
아래 글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황석영 작가의 집필 경위와 관련하여 2010년 월간<신동아> 12월호가 인용한 2009년 5월 19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다.

“황석영은 그동안 1980년 5월 광주항쟁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라는 책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이 책을 쓴 작가가 황석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 글은 광주시민 전체가 저자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기자이자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소속인 이재의 기자가 쓰고 상황지도는 조양훈이 그렸다는 구체적 반박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그 책이 황석영 기록이라고 되어 있지만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황석영은 이에 대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왜 ‘황석영 기록’이란 이름을 넣어야 했는지, 그 책의 인세를 왜 자신이 가져갔는지, 왜 이 책의 지은이라고 약력에 버젓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는지.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황석영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 가장 잘못된 대목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을 왜 황석영이 마지막 작업을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인세를 황석영이 가져갔다고 허위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대목도 그렇다. 그리고 정리 작업을 맡았던 이재의도 당시에는 대학 제적생 신분이었으며 훨씬 나중인 1990년대 이후에 광주일보 기자를 역임했다.

위 기사는 내용도 조잡하지만 기사 작성의 의도도 매우 불순한 것으로 보인다. 정론지라고 불리는 오마이뉴스에서 왜 이런 기사를 내보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중략)---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중략)---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위와 같이 비난과 비방투의 기사는 매우 비겁하고 유치하면서도 졸렬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집필과 출판 경위를 밝힌다.

5·18항쟁이 발발한 후 참혹하고 처절했던 항쟁의 진상을 낱낱이 기록하여 온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항쟁의 현장인 광주에서 모든 참상을 몸으로 겪고 낱낱이 지켜보았던 광주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소위 ‘5·18항쟁백서’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 중 항쟁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실행하고자 했던 당시 광주지역 그룹은 크게 세 갈래였다. 그 그룹의 대표적인 운동가를 꼽아보자면 첫째는 1979년 광주에 설립된 현대문화연구소 정용화 소장(당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이다. 둘째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1980년 8월 이후 출옥한 조봉훈 이다. 셋째는 전남대학 출신 민주화 운동가인 이재의, 조양훈 이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민청학련’ 사건 출신 운동가 윤한봉이 지역 재야인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총의를 모아 1979년 설립한 연구소로 광주·전남권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연구소는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후원자들을 조직하여 감옥에 갇힌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와 시국 강연회 등 계몽문화운동을 펼쳤다.


   
▲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2008년 10월 8일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초청으로 교육공학관에서 ’나의 근작에 대하여’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광주인
정보과 형사들은 현대문화연구소 전화를 도청하고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파악하는 등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1979년 11월 윤한봉과 김희택의 뒤를 이어 정용화가 소장이 되었다. 5·18항쟁이 발발하자 정용화는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비교적 일찍(1980년 11월) 형집행정지(형면제?)로 출감했다. 5·18항쟁 이후 정용화는 광주권 재야인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유일한 소통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둘째는 조봉훈의 활동이다. 조봉훈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80년 8월 이후 출옥하였다. 조봉훈은 1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시나 소설을 읽고 공부하던 문학서클 ‘아들’의 회원들과 함께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고 5·18항쟁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는 유인물을 여러 차례 만들어 광주시내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1981년 6월 30일경 그 중의 한명이 잡히면서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그 때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수배되어 광주에서 도피하고 있던 소준섭(외국어대 78학번)도 조봉훈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당시 조봉훈 도 5·18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셋째는 이재의 등의 활동이다. 이재의는 5·18항쟁 이후인 1980년 9월 경 전남대학에서 유인물 배포와 관련하여 구속되어 형기를 마쳤다. 이재의는 ‘5·18항쟁백서’ 작업이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주장하며 개별적으로 자료를 모으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5·18백서 간행작업이 세 갈래로 진행되다가 1983년께부터 작업이 통합되었다. 광주 운동권에서 여러 팀이 5·18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 작업이 통합될 필요가 제기되었다. 조봉훈의 구속도 통합을 부추기는 요소가 되었다. 자료를 한 군데로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전담할 사람에게 제공할 최소한의 활동비도 준비되어야했다. 1984년 11월 18일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창립준비위원장; 정용화)가 창립(의장; 정상용, 수석부의장; 정용화)되면서 5·18백서 간행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때 광주일고 출신으로 서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근무하던 임상택(당시 서울상대 중퇴)이 자신의 저서(알기쉬운 경제이야기?)를 출판하고 받은 인세 전액을 5·18백서작업 비용으로 정용화 부의장에게 넘겨줬다. 정용화는 자료취합과 정리 작업 실무를 이재의에게 맡기고 매월 일정액의 비용을 지급하였다.

그렇게 5·18백서 간행작업이 시작되었다. 1985년 5·18기념일에 5·18백서 간행을 목표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5·18자료 수집과 정리 및 집필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5년 초 5·18백서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출판 문제가 거론되었다. 누가 집필의 책임을 지고 어느 출판사에서 제작할 것인가였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치하로 집필자는 물론이고 출판사 대표도 모두 구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 문제를 두고 서울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가들이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 서울에서 회의 참석자는 정상용, 문국주, 나병식 등이고 광주에서는 정용화, 이재의, 전용호 등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광주출신 민주화운동가인 나병식이 운영하는 풀빛출판사에서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출판 책임은 당시 광주권 민주화운동 연대기구인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책임을 지고 대표 집필은 소설가 황석영 씨에게 의뢰하기로 하였다.

황석영 소설가가 집필 책임을 졌을 때 획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째, 출판했을 때 대중적 파급 효과가 커지면 5·18항쟁의 진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황석영 소설가가 유명 작가이기 때문에 수사당국에서 쉽게 연행하거나 구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셋째는 거친 문장의 초고를 명쾌하게 다듬고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보다 사실적이고 박진감 있는 기록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황석영 씨가 그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출판사 대표인 나병식 씨의 의견이기도 했다. 출판 결정이 되기 전인 1985년 초에 서울에서 최종 회의가 있었고 이 자리에는 김근태(당시 민청련 의장, 전 국회의원), 신동수(민문연, 풀무원 창립위원), 정상용(도청항쟁지도부 외무부위원장, 전 국회의원), 채광석(민통련, 문학평론가, 작고) 나병식(풀빛 출판사 대표) 황석영(소설가) 등이 참가했다. 황석영은 이 자리에서 대표집필의 책임을 질 것을 기꺼이 수락했다.

여기서 논의된 내용은 책임 및 각계 배포 문제였는데 나병식과 황석영이 출판과 집필의 책임을 전적으로 감당한다는 결정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조직 사건이 될 수도 있으니 출판사와 집필자 두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연루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그렇게 하여 일차적 접촉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정용화에 의해 이재의 팀이 정리한 초고가 같은 해(1985년) 3월 초 전용호를 통해서 황석영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초고는 문장이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여기저기 중복되어 있어 나중에 완성된 원고 분량의 서 너 배 쯤 되었다.

황석영 작가는 약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그 원고를 다시 정리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5·18항쟁을 체계적으로 담은 최초의 기록으로 완성해냈다. 원고는 풀빛출판사로 넘겨졌고, 제작과정에서 사찰당국에 의해 1만권이 통째로 압수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 사건 때문에 나병식 사장은 수배가 되었고 수배 중에 몰래몰래 제작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은 디자인도 없는 하얀 백지의 표지로 시중에 배포되었다. 그 사건으로 나병식은 구속되고 재판까지 받았으며, 황석영은 도피 중에 연행되어 수사를 받았다. 당시의 공안 당국은 김지하 시인의 전례를 보아 대중적으로 알려진 황석영을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 되면 광주의 진상이 더욱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출국을 권고했다.

황석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3세계 작가대회’에 참가했다가 유럽, 미국, 일본 등지를 순방하며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광주항쟁 보고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해외 운동권이 광주항쟁을 주제로 결집되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황석영은 애초부터 인세를 원하지도 않았고 풀빛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주는 인세는 정용화에게 전달되었으며 정용화는 그 돈으로 광주권 민주화운동 활동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황석영은 어떠한 작업 팀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또한 당시의 상황 아래에서는 불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기록 과정에 대하여 우선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대담이나 인터뷰 등을 통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사람들이 동참했던 작업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방북과 십여 년에 걸친 망명 투옥 등의 기간 동안 이러한 사실들은 잊혀졌던 것이다.

이제 삼십년이 지나서 이러한 비방과 헛소문이 나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한 광주의 불찰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작업은 당시 상황에서 개인의 공명심이나 명예를 위한 일이 아니었고 ‘진상’을 알리는 위험한 책임을 감당하는 일이었다.

황석영과 광주운동권

황석영 작가와 광주운동권은 어떤 관계이기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대표 집필을 맡게 된 것일까. 어떻게 작가가 자신이 정리한 자료도 아닌데 대표집필이라는 역할로 자신의 이름을 걸 수가 있는 것일까. 보통은 그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그것은 황석영을 유명한 소설가로 보는 일반적 통념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당시 1980년대, 더 정확히 말하면 1978년부터 1984년 경까지 황석영과 광주 민주화운동권과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살던 황석영 소설가는 한국일보 <장길산> 연재 중에 전라도 해남으로 이사와 김남주 시인과 더불어 농민학교 운동에 참여했다가 광주로 옮긴 것이 1978년이었다. 광주에 온 황석영은 그 때부터 광주의 민주화운동권, 그 중에서도 특히 문화예술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기획하고 참여하였다.

1978년 겨울에 광주 문화운동권을 창립하기 위해 진행했던 청년 학생들을 위한 ‘탈춤학습’으로 서울과 다른 지방 연희패와의 연결을 해냈으며, 1979년 진보적 연희운동을 표방한 마당극단 ‘광대’의 창립과 1979년 돼지파동을 극화한 마당극 ‘돼지풀이’공연에 그는 후원자이자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깊숙이 참여했다.

1980년 5월 18일 항쟁이 일어났을 때 황석영이 광주에 없었던 것도 극단 광대가 공연할 소극장의 계약금과 무대세트 등 건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로 돈을 구하러 갔다가 5·18항쟁으로 길이 막혀 광주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양림동 그의 집에는 계엄사 합조대가 예비검속을 하러 들이닥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서울의 그에게 연락해준 바 있다. 새로 임대한 소극장에서 연습 중이던 극단 광대 단원들은 5·18을 맞아 궐기대회 등을 주도하면서 항쟁에 깊이 참여하였고 항쟁이 끝난 후에 김태종, 박효선, 김선출, 김윤기 등 여러 명이 투옥되고 수배되었다.

1982년 황석영 작가 운암동 자택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하여 제작한 노래극 ‘넋풀이’는 그 중에 실린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지금도 민중애국가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 노래극은 황석영이 백기완 선생의 시집 등에서 몇 구절의 시를 골라 노래 가사용으로 고치고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대학가요제 수상자인 김종률이 작곡하고 광주 민주화운동가이면서 노래를 잘했던 김은경, 오정묵, 임영희, 임희숙 등이 노래를 불러 만들어진 것이다.

그 테이프는 당시 기독청년협의회에 넘겨져 2천여개가 제작되어 전국 대학가에 배포되면서 국민들에게 공개된 것이다. 우리는 그 테이프를 시작으로 십여 종류의 노래와 방송 테이프를 지하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들 모두 우리들과 함께 황석영이 주도하였고 비용도 모두 자신이 제공했던 것이다. 그 이후 ‘님을 위한 행진곡’과 관련하여 저작권을 주장하거나 저작료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다.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사실상 그 후에 진행된 작업이다. 황석영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원고 마감에 쫓겨 원고 보따리를 서울까지 가지고 가서, 출판사 부근에서 여관생활을 하면서 원고를 마무리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어떻든 1978년부터 1986년 광주를 떠나기 전까지 황석영은 작가이기 전에 광주의 민중문화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다. 광주에서 문화운동을 지도하고 직접 실천하고 온갖 경비를 모두 제공하였던 실질적인 광주 운동권, 특히 문화운동권의 ‘맏형’이었다. 1980년대 광주 시절 황석영의 활동은 같이 늙어가는 우리와 시민들이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 2011년 6월 08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섯 개의 수 - 마틴 리스가 들려주는 현대 우주론의 세계 사이언스 마스터스 11
마틴 리즈 지음, 김혜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주제는 그림1 ’오우라보루스’로 상징되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사이의 긴밀한 관계다.
소립자 세계의 힘에 의해 우리의 일상 세계가 존재하게 된 것 또한 우리 우주의 잘 조율된 팽창 속도와 은하 형성 과정과 고대의 별에서 만들어진 탄소와 산소 덕택이다.
몇 가지 기본 물립칙이 ’규칙’을 결정한다.
간단한 대폭발로부터 우리가 출현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6개의 ’우주의 수’에 민감하다.
이 수들이 정확하게 조율되지 않았다면 복잡성의 한 층 한 층을 차례로 벗겨 나가는 일은 이미 끝나 버렸을 것이다.
’나쁘게 조율된’,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한 다른 우주들이 무한히 많을까?
우리의 전체 우주가 다우주 속의 하나의 ’오아시스’일까?
혹은 우리의 6개의 수가 행운의 값을 갖게 된 다른 이유들을 찾아야 할까?
우리 앞에는 아직 무수한 문제가 남아있다." 


 
이 책은 < 섹스의 진화 >, <원소의 왕국>, < 마지막 3분 >, <인류의 기원>, <세포의 반란>, <휴먼 브레인>, <에덴의 강>, <자연의 패턴>, <마음의 진화>, <실험실 지구>에 이어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의 열 한번째 책으로, ’우주의 기원과 진화’를 소재로 삼았다.
 
’여섯 가지 수’란 무엇인가...
이 수들은 인류가 기원 전부터 ’수학’과 ’과학’이라는 분야를 탐구한 이래 모든 결과물의 핵심적인 총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이 수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 ’모든 것의 이론’에 파고들고 있다.
 
1. N : 원자들을 결합시키는 전자기력의 세기를 원자들 사이의 중력으로 나눈 값으로 그 값은 무려 10의 36제곱이나 된다.
         하지만, ’N’의 수에서 ’0’이 한 개만 줄었다면 우주는 커다랗게 성장하지 못하고 단명했을 것이다.
         그러한 소형우주에서는 어떤 생물도 벌레보다 크게 자랄 수 없고 생물학적 진화를 거칠만 한 시간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2. ε : 수소 원자 2개가 헬륨으로 핵융합을 일으킬 때 에너지로 전환하는 양으로 0.007이다.
         ’ε’는 원자핵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지구의 모든 원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결정한다.
         이 수는 별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과정을 통해 수소가 주기율표의 모든 원자들로 변환되는 과정을 통제한다.
         이 수가 작으면 원소 생성이 줄어들고 0.006이면 헬륨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수가 크면 원소 생성이 늘어나고 0.008이면 수소가 남아있지 않아 물(H2O)도 부족하고 별이 일찍 사라질 것이다.
 
3. Ω : 우주의 임계밀도에 대한 실제 밀도의 비로 그 값은 0.04다.
         이 값은 은하, 흩어져 있는 기체 그리고 암흑물질 같은 우주 안에 있는 물질의 양을 측정한 것이다.
         ’Ω’는 우주 안에서 중력과 팽창 에너지의 상대적 차이가 가진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 수가 특별한 임계값보다 높앗다면 우주는 오래 전에 붕괴했을 것이고 낮았다면 은하나 별이 생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4. λ  :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진공의 에너지 밀도를 나타내는 기본상수, 즉 ’우주상수’를 의미하며 그 값은 6.2201×10^-40 N·m-2·kg-2·s-1다.
          1998년에 측정된 값이며 이 수는 반중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고 우주의 팽창을 통제한다.
          ’λ’가 조금만 컸어도 은하와 별이 형성되지 못했을 테고 우주의 진화는 시작하기도 전에 억제되었을 것이다.
 
5. Q : 은하의 구조를 와해시키는 에너지와 전체 정지 질량에너지의 비를 말하며 그 값은 0.000001이다.
     만약 Q가 훨씬 더 작다면 우주는 불활성이 되어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 컸다면 우주는 격렬한 장소가 되어 그곳에서는 어떤 별이나 행성계도 살아남지 못하고 거대한 블랙홀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을 것이다.
 
6. D : 수 백년 전부터 알려진 수로 우리 세계의 공간 차원을 나타낸다. 즉, 3이다.
         ’D’가 만약 2나 4라면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수는 ’초끈이론’을 통해 6이나 10으로 확장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것이다.


 
저자는 스티븐 호킹과 더불어 이 시대의 가장 창조적이고 뛰어난 우주론 학자로서 우주론의 수많은 핵심 개념들을 창안해내었고 환상적으로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준성의 핵이 거대한 블랙홀로부터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내놓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속에서 현대 물리학과 천문학, 우주과학이 이루어낸 성과를 자신있게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과학적 승리주의’에 빠지지 말고 끝까지 겸손하고 성실하게 연구와 탐구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제목만큼 최신 우주론에 대해 핵심을 짚어주었고 생각보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 2010년 10월 25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91 | 92 | 9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