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8 - 위기와 극복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8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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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의 부제는 ’위기와 극복’이다.

8권은 네로가 죽은 뒤부터 트라야누스가 등장할 때까지인 서기 68년부터 97년까지를 다룬다. 
이 30년도 안되는 기간에 제위에 오른 사람은 무려 7명(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우스아누스, 네르바)이나 된다.
이들이 집권하고 사라지는 과정은 로마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무척이나 정신이 없다.
 
- 서기 69년 -
갈바는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갈바는 네로가 집권 중 에스파냐 동북부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으로 임명한 자다.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 오토의 명령으로 갈바 암살.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되고 원로원도 승인.게르마니아 군단이 갈바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하고 저지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
비텔리우스 군단이 오토 군단을 격파. 오토 자결.
원로원 비텔리우스의 황제 취임 승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 5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 지지 선언.
키빌리스, 게르만족, 게르만계 갈리아인이 모여 ’갈리아 제국’ 창설 결의
베스파시아누스 군단과 비텔리우스 군단이 이탈리아 반도 내 크레모나와 로마 도심에서 내전.
비텔리우스 군단이 패하고 비텔리우스는 포로 로마노에서 피살.
 
- 서기 70년 -
원로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 승인
73년 국세조사 실시
 
- 서기 79년 -
베스파시아누스 사망. 공동 지접관 티투스 황제 등극
베수비오 화산 폭발. 폼페이 매몰.
- 서기 80년 -
로마 도심에서 대화재 발생
 
- 서기 81년 -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염병 발생
티투스 사망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 등극
 
- 서기 83년 -
도미티아누스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 착수
110년 만에 병사들의 급료 인상
 
- 서기 96년 -
도미티아 황후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해방노예를 시켜 도미티아누스 암살.
원로원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 원로원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기로 결의
원로원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
 
- 서기 98년 -
네르바 사망
트라야누스 황제로 등극
 
이 시기에 대해 동시대 역사가 타키투스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 제국에는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 찬 시대의 이야기다. 적과의 참혹한 전쟁 동포들 사이의 불화와 반목, 속주민의 반란이 되풀이되었고 본국의 평화조차도 많은 피를 흘린 뒤에야 겨우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4명이나 비명에 죽고(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로마 시민끼리 전투를 벌인 것도 세 차례나 된다. 속주민이나 외적을 상대로 한 전쟁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것도 로마인끼리 벌인 전쟁의 여파에 불과하다."
또한, "도나우 강을 건너 침입해온 야만족에 대해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고 제국에 대한 갈리아 속주의 충성심은 흔들리고 브리타니아는 제패가이루어졌는데도 방치되고 사르마타이족과 수에비족은 로마 군단에 소해를 끼치고 다키아족은 로마에 패했을 때도 기세를 올리고 파르티아 왕국은 네로를 자칭하는 가짜를 옹립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려 하고 있었다"
"수도 로마에서 자행되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다도 무시무시했다. 고귀한 신분도, 재물도, 공적도, 공직을 거부하는 것조차도 죄로 간주되었다. 고발자에게 금품을 주어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 결과는 더 많은 악을 낳을 뿐이었다. 고발자들은 사제나 집정관 같은 명예직마이 아니라 황제 재무관을 비롯하여 실권을 가진 관직까지 대가로 요구하고 그리하여 사회를 온통 증오와 공포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돈에 매수되어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을 배반하고 해방노예는 옛 주인에게 반항하고 적이 없었던 사람조차도 친구 때문에 파멸당했다." 
네르바에 이르러서야 로마는 안정되었고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부터 후세의 역사가들이 ’오현제(五賢帝)’라 부르는 황금기로 접어든다.
 
작가는 30여 년 간의 이 시기를 ’위기’과 ’비탄’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로마의 위기라고 하면, 제2차 포에니전쟁으로 16년간 이탈리아 반도가 한니발에게 점령당했을 때, 기원전 90년 당시 반도의 여러 부족이 단결하여 로마에 반기를 든 ’동맹시 전쟁’, 마리우스와 술라가 내전을 벌이고 수 천명을 숙청했을 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국가 형태를 둘러싸고 벌인 내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붙은 14년간의 내전 등 수 없이 존재했다는 것...
그럼에도 로마는 다시 ’위기’와 ’분열’을 극복하고 지중해의 패권자로서 서기 1세기까지 군림하였던 것이다.
즉, ’위기’를 극복하면 ’위기’는 ’기회’가 되는 것이고 극복하지 못하면 ’멸망’하는 것...
8권에 그려진 로마는 타키투스의 이야기 만큼 로마 제정, 원로원과 시민, 속주민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작가가 8권의 부제를 칭한 대로 극복해낸 ’위기와 극복’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는 자연도 그렇고 세상 사는 이치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상황 역시 ’동전의 양면’,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자어 ’위기(危機)’가 ’위기’와 ’기회’를 함께 의미하듯...
 
로마는 기원전 2 ~ 기원전 1세기 동안 정책 브레인이자 지도자 집단이었던 원로원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관계로 카이사르에 의하여 제정(또는 원수정)으로 체계가 강제로 변경되었고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로 이어지는 일인자 통치시대로 접어들었다.
그것은 로마 공화정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지중해 전역과 멀리 갈리아, 브리타니아, 도나우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관리하는데 기존의 체제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집정관-원로원-민회로 이루어진 삼각체제가 무너지고 일인 통치시대로 접어든데 따른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포함한채 유지될 수 밖에 없었다.
로마 제정은 강력하고 현명한 지도자가 통치할 때에는 더 없이 적합한 체체지이지만, 그렇지 않은 지도자가 통치할 때에는 늘 암살과 반란, 외적 침입과 정책실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게 된다.
8권은 후자에 해당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혼란기에도 로마가 튼튼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아래와 같지 않을까 싶다.
1. 외적(이민족 or 야만족)의 침입이 적었고 세력도 약함. 파르티아도 잠잠.
2. 로마 내부의 내전이 일어나더라도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들끼리 전투를 치름
3. 로마 건국 이래의 기본 정책 유지
  - 기본 방위체계 유지, 패자 동화 정책(국내외 포함), 로마 시민권 유지/확장, 제국 내 경제 활성화, 세제/재정/행정/통화정책 유지, 사회간접자본 정비 계속, 군사력에 의한 외교 실시 등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법’ 등 일부 기존과 맞지않는 정책이 실시되기는 했으나, 그 뒤의 통치자에 의하여 복원됨...)
 
이 시기의 특이한 사건은 서기 66~70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진압되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이다.
유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망자는 무려 60~110만명이고 포로의 수는 10여 만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유대인 포로들은 노예가 되거나 각 속주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통치자인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예루살렘 대신전을 불태우고 파괴하면서 이후 로마 지배지역 내에서는 유대교도가 유대교의 총본산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대신전에 해마다 바치던 2드라크마의 봉납금을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에 납부하도록 한다. 이것이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 납부하는 세금이라는 명분의 ’유대인세’...
이 사건으로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되어 120년 동안 이어지던 로마의 유대 관용정책이 크게 바뀌게 된다.




 

[ 2010년 10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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