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3 - 최후의 노력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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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권의 부제는 ’최후의 노력’이다.

13권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서기 284년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한 서기 337년까지의 53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는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단 2명의 황제만 취임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내에서도 후세의 역사가들에게서도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출생지도, 출생년도도 불명확한 상태라고 한다.
다만, 오늘날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바닥’에서 태어나 로마군대에서 한 단계씩 진급하여 경호대장까지 하다가 황제가 된 인물이었음에도 권력에는 욕심이 없었다.
자신이 즉위한 해에 친한 친구였던 막시미아누스를 처음 ’카이사르’에서 몇 개월 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격상시켜 공동 황제로 함께 취임한다.
디오클레레티아누스는 당시 야만족의 침입과 방위선에 대한 대처가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음을 인정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서방을, 자신은 동방의 방위선을 담당한다.
황제로 즉위한 이후 약9년 동안 두 황제는 서방과 동방에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페르시아국을 위협하고 도적떼를 소탕했다.
 
그리고 그들은 293년 역사적인 ’사두정치’를 선보인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각자 ’카이사르’를 한 명씩 임명한다.
서방의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쿠스를, 동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둘 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골랐고 모두 군단에서 경력을 쌓았다.
군장교 출신의 4명의 황제(정제와 부제)는 각자의 담당지역에서, 그리고 일부 협동작전으로 방위선의 야만족을 격퇴하고 페르시아와 전쟁에서까지 승리를 거두어 150년 전의 로마제국 영토와 방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 병력 증강 : 기존에 30만명에 달하던 로마군을 두 배로 증가시켰다.
  이는 군사력의 질을 떨어뜨리고 4두 정치를 담당한 황제들 사이의 유동성을 약화시켰고
  로마시민과 속주민들은 엄청난 방위비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 민군 분리 : 갈리에누스 황제가 원로원 의원이 로마군 장교에 취임할 수 없게 하였는데 그에 더하여 민간 경력과 군대 경력을 완전히 분리해 버린다.
- 황제에 대한 개념 변경 : 기존과 같이 대관식은 별도로 없었지만, 보석을 아로새긴 ’디아테마’라는 호화로운 관이 황제의 머리 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호화로운 옷차림과 함께...
- 관료조직 확대 : 4두정치에 이어 황제를 대리하여 각 지역을 다스리도록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그에 따라 관료조직이 늘어나고 인력도 늘어나고 비용도 늘어났다.
네 황제는 자신의 근거지에 모두 수도를 지정하고 황궁과 대규모 도시를 건설했다.
- 세제 개편 : 제국이 1년에 필요한 액수를 황제가 결정하고 시민들의 수입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 세무는 모두 통합하여 중앙정부가 관리. 세금은 ’토지세’와 ’인두세’로 양분.
- 가격통제 정책 실시
- 기독교 탄압(303년) : 기독교 교회 파괴. 신도들의 모임 금지. 성서와 미사에 쓰이는 소품 소각. 기존 특전 박탈. 법정에서 보호받을 권리 박탈. 교회 재산 몰수. 공직 추방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이 위기임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대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황제는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일방적인 권력으로 밀어붙이면서 로마제국의 기반을 또 다시 무너뜨리게 된다.
원로원과 지식인층만 소외되었던 로마제국의 황제권력은 잘못된 군대 개혁과 세제개편으로 부유층 뿐 아니라 로마시민과 속주민들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안겨준다.
로마의 역사이자 기반이었던 제도와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 다시 제도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악순화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나서 욕심 없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너무 일찍 은퇴해버려(막시미누스를 강제도 동반 퇴임시킴) 또 다른 분란이 싹트도록 한다.
 
2차 사두정치는 305년에 콘스탄티우스 클로투스가 브리타니아/갈리아/히스파니아를, 세베루스가 이탈리아/북아프리카를, 갈레리우스가 발칸과 그리스를,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오리엔트 전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여 사두정치가 붕괴되고 황제가 6명으로 난립한다.
310년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이 강요로 자결하고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한다.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와 손잡고 막센티우스를 공격하여 전사시키고 325년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와 항쟁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한다.
이리하여 기독교도가 추앙해 마지않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7년 단독으로 집권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집중적으로 추진한 일은 무엇일까...
그는 313년 리키니우스와 공동으로 기독교를 ’공인’한다.
황제의 재산을 기독교에 기증하도 기독교 성직자가 공무를 맡지 않도록 결정하다.
316~317년 도나우 강을 건너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강화를 맺다.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했다.
방위선의 로마군대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여 ’파트타임’ 군인으로 바꾼다.
325년 니케아에서 기독교 공의회를 열어 ’삼위일체’파를 공식적인 해석으로 결정한다.
글자 그대로 로마제국과 로마시민, 속주민을 위해 별로 한 일이 없다.
대신, 로마제국을 약화시키는데 앞장 선 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왜 기독교를 공인하고 진흥하려고 애쓰고 수도를 옮겼을까...
콘스탄티누스는 재임 중 기독교로 개종한 것일까...
객관적인 자료와 사료로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죽음 직전에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 313년 기독교를 ’공인’시킨 황제의 칙령의 문구는 그 이전까지 금지하고 박해하던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같이 로마제국에서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하지만 ’기독교 공인’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진흥하기 위해 애쓴다.
실제 아주 편파적으로 기독교와 성직자들이 부와 권력을 잡도록 제도화시킨다.
 
작가는 콘스탄티누스가 ’지배의 도구’로서 기독교를 고려했다고 주장한다.
계속되는 군대의 반란, 황제 참칭, 원로원과 지도층의 무능, 정국 불안정 등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 또는 중단기적인 대책의 하나로 기독교를 품에 안았다는 것...
콘스탄티누스가 그동안 황제를 추대하고 승인하고 인정하던 인간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유일한 ’신’이 권력을 황제에게 주게되면 주요 성직자 한 두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로부터 황제의 권력이 안정되리라고 예상 or 판단했다는 것...
기독교의 ’왕권신수설’에 기울었기 때문이라나...
콘스탄티누스 치세 하에서 진행된 과정만 보면 그렇게 분석할 수도 있다...
나쁘지 않게 해석하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콘스탄티누스의 의도가 그랬다면 그는 아주 머리가 나쁜 황제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교활하고 야비하고 사악한 기독교도인 것이고...
’콘스탄티누스 로마제국을 다시 융성시키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자 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팩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후세의 역사가들이나 기독교들이 붙여주는 호칭인 ’대제’는 전혀 아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3개 과제’에 제대로 기여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3개 과제’를 무시하고 파탄시킨 측면이 컸다.
로마군에 대한 정책을 엉망으로 만들어 방위선을 지키기는 커녕 소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야만족으로부터 침입, 약탈 당하도록 방치했으며,
끝없이 늘어나는 로마시민과 속주민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로마의 주요 재산인 ’황제 재산(황제 재산은 황제에 위임된 로마제국의 재산일 뿐 개인 재산은 아니다.)’을 자기 멋대로 기독교도에게 기증하는 횡포를 부렸다.
하드 인프라와 소프트 인프라를 유지,보수,관리하기는 커녕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수도 로마를 그대로 둔채 임의로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로마제국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제국의 자산을 탕진한 황제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즉위한 해부터 로마사를 더 이상 쓰지 않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많다고 하는데 많은 부분 동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콘스탄티누스 이후 1,000년을 뒤로 돌리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하여 서구에서는 결국 모든 종교를 공인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다.
그런데 왜 그런 황제에게 ’대제’라는 표현을 쓸까나...?? 
 
작가는 여러번 책 속에 카이사르의 명언을 제시했었는데 나는 비로소 13권 서평에 그 말을 옮기고자 한다. 13권에 그 말이 제일 어울릴 것 같아서...
"비록 나쁜 결과를 낳은 사례라 해도 그것이 시작되었을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2010년 10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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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2 - 위기로 치닫는 제국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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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의 부제는 ’위기로 치닫는 제국’이다.

12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가 즉위한 서기 211년부터 카리누스 황제가 암살되고 경호대장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서기 284년까지의 73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는 22명의 황제가 취임했다가 사라진다.
그 사이 14명의 황제가 경호대, 근위대, 군단병, 측근들에게 암살되거나 살해된다.
이 시기, 즉 3세기 로마의 위기는 그 이전의 위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산 채로 적에게 붙잡혔을 뿐 아니라 제국이 3등분으로 분리되기도 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진데다가 제국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황제가 일방적으로 결정,집행하는 ’칙령’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제국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힘있는 권력자들만이 일방적으로 국가를 움직이는 ’독재정권’이나 ’왕정’과 다를 게 없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대부분 3세기 위기의 원인을 제국 지도자층의 질적 수준 저하, 야만족 침입의 격화, 경제력 쇠퇴,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기독교의 대두로 꼽는다.
하지만 작가는 기독교의 대두를 제외한 나머지 위기 요인은 그 이전 로마에도 자주 부딪혔다면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정국 불안정’에 두고 있다.
로마 황제가 73년간 22명, 약 3년 반만에 한 번씩 바뀌게 되면 아무리 로마가도가 제국 전체에 깔려있다고 해도 서기 3세기의 통신 수준으로는 정보의 전달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라 제국 통치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사를 돌아보면 서기 1세기에 이미 30년간 7명의 황제가 즉위(3년에 한 명꼴...)하고 그 중 4명이 암살 또는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도 로마는 위기에 처했지만 곧바로 극복하고 로마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풍요로웠던 네르바와 트라야누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오현제’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두 세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기 1세기를 다시 분석해보면,
네로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 군대의 신임을 잃은 후 측근에게 암살되었다.
갈바는 속주 총독간 내전으로 다른 속주 총독 오토에게 암살당하고, 오토는 뒤이어 군단장 출신에게 살해된다.
비텔리우스는 내전에서 패배한 후 도망치다가 살해된다.
도미티아누스는 황후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노예에게 암살된다.
즉, 1세기에는 암살과 살해가 특정한 경향을 띠지 않았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는 실정과 측근에게, 나머지 황제들은 내전의 패배에 따른 여파로 암살, 살해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원로원의 정치력과 지도층이 살아있었고 황제들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을 무서워했다.
로마 군대 역시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은 원로원의 결정을 존중하였고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서기 3세기는 상황이 무척이나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황제들의 사망 원인은 전투 중의 전사(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나 병사(고티쿠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단병들에게 황제로 추대되고 피살되었다.
원로원은 황제를 추인하는 ’거수기’에 불과하게 되었고 로마군대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속주 총독이나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한다.
내가 추측,평가해 볼 때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이후 국방/외교에 대한 안일한 인식과 정책, 속주민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과 정책 변화가 로마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23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19년, 콤모두스 치세 12년, 내란기 20년... 모두 합하여 64년 등 약70년 동안 로마의 황제들은 로마군대의 군사력과 방위선 체계, 인프라를 유지,보수,관리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이전 황제들이 쌓아놓은 업적에 안주할 뿐이었다.
이에 더하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로마군대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결정한 정책들이 로마군을 안정지향형으로, 기득권층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황제 추대에 대한 로마군의 집착은 로마군단이 더 이상 평화수호와 방위선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카라칼라는 로마군을 기존에 편성했던 로마시민병과 보조병 대신 젊은 병사만으로 기동부대를 편성했다.
가정을 가진 나이 든 병사들은 군단기지를 지키도록 하고 젊은 기동부대만으로 전선을 이동하여 전투를 치르게하여 상당수의 로마군을 노령화되도록 만들어 방위선이 취약화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갈리에누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을 로마군 장교급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법률을 통과,시행시키면서 그나마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되던 민간 지도층과 로마군 간의 인적교류와 경험, 제국 상층부의 정치적이고 군사외교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막아버렸다.

다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방위선 정책으로 대표되는 ’로마화’ 동화정책은 역설적으로 ’오현제’ 시대에 그 의미가 퇴색하여 더 이상 진화,진보하지 못하였다.
서기 3세기이면 이미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로부터 약200년 이상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국방/외교정책이 수립되어야 했으나 어떤 황제도, 원로원이나 지도층도 이에 대한 입장이나 정책이 없었다.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가 서기 212년에 발표한 ’안토니누스 칙령’이 또 하나의 로마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카라칼라는 로마 제국 영토내의 속주민들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속주민들이 로마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로마군 보조부대에서 20년간 근무하거나 교육/의료 등 공공사업에 기여하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제국에 기여하는 자에게만 부여되는 ’취득권’이었으나 212년부터 ’기득권’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 여파는 장기적이고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
로마의 정기적인 직접세는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10%의 세금이 가장 컸다.
그 이외의 상속세(5%)와 관세(5%)는 비정기적인 세금이고 매상세(1%)는 규모가 작았다.
한동안 계속 이어지던 영토 확장과 전쟁이 없었기에 그에 따른 전리품이나 노예판매금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고...

  
원로원의 무능, 지도층의 질 저하, 새로운 야만족의 출현과 침입 등은 모두 외부적인 조건에 불과할 뿐이고 어찌보면 이 부분 역시 제국의 시스템이 오히려 그러한 경향을 확대시킨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다른 시각으로 로마사를 보면 인류사회의 전개과정에서 늘 존재하던 결말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동안 군대와 문화를 통해 지배공간을 넓혔으니 때가 되면 힘을 갖게된 원동력이 결국 그 힘을 빼앗아 다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리는...
작가 말대로 로마 역시 ’로마적인’ 이유로 쇠퇴한다고 볼 수 있다.


 

[ 2010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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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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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국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처음 프랑스에서 출판된 후 7개월 만에 200만 부를 돌파하여 프랑스 사회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섰던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외교관을 지낸 93세 노인이다. 그가 이 책에서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화두는 ’분노’이다. 저자는 전후 프랑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레지스탕스 정신이 반세기 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프랑스가 처한 작금의 현실에 ’분노하라!’고 일갈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사회 양극화, 외국 이민자에 대한 차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금권 등에 저항할 것을 주문한다.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이며, 인권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찾아가 기꺼이 힘을 보태라는 뜨거운 호소다.

[분노하라]의 원서는 표지 포함 34쪽의 소책자다. 이 책의 출발은 나치에 맞섰던 레지스탕스의 성지(聖地) 글리에르 고원이었다. 저자는 2009년 ’레지스탕스의 발언’ 연례 모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젊은이들에게 ’분노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의 즉흥 연설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앵디젠 출판사의 편집인들(실비 크로스만, 장 피에르 바루)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곧장 에셀에게 달려갔다. 이 책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이 프랑스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2010년 10월 초판 8,000부를 찍어낸 책은, 불과 7개월 만에 200만 부가 팔려나갔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출판사로 저자 인터뷰와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프랑스 언론은 100년 전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에 버금가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흥분했다.

2010년 프랑스의 현실은 한국에 비해 거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법, 언론, 학계, 교육, 복지 등 모든 부분에서 한국의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조금 위협하는 상황에서 93세의 노인은 쉬고있던 집에서 박차고 일어나 프랑스 국민들에게 ’분노하라’고 외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상황인가? 저자의 시각에서 한국을 바라보면, 한국의 사회 전반적인 상황은 ’분노’를 넘어 참여와 행동으로 나가도 한 참 나갔어야 할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프랑스에 ’레지스탕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87년 6월 항쟁’이 있다. 비록 ’레지스탕스’에 조금 모자란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감히 주장할 수 있다. ’87년 6월 항쟁’이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를 살려냈고 한국의 사회 각 분야에 민주주의와 국민의 권리를 되찾기 시작한 계기라고... 
 
---------------------------  * 저자 스테판 에셀은 누구인가 ? -----------------------------------
1917년 독일 출생. 유대계 독일인 작가인 아버지, 화가이자 예술애호가인 어머니는 트뤼포의 영화 [쥘과 짐](Jule et Jim)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7세에 부모를 따라 프랑스로 이주하여 20세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193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 선배 사르트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입대한다.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1944년 파리에 밀입국해 연합군의 상륙 작전을 돕던 중 체포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으나 극적으로 탈출한다. 전쟁이 끝난 후 외교관의 길을 걷는다. 1948년 유엔 세계 인권 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유엔 주재 프랑스 대사,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한다. 퇴직 후에도 인권과 환경 문제 등에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세기와의 춤](1997), [국경 없는 시민 - 장 미셸 엘비그와의 대화](2008), [참여하라 - 질 반데르푸텐과의 대담](2011) 등이 있다. ----------------------------------- 
 
그렇다면 이 책의 무엇이 프랑스인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 것일까? 프랑스 [르몽드] 지는 서평 1면에 ’전달의 몸짓으로서 더욱더 관심을 끄는 책’이라고 이 책을 소개했다. 레지스탕스의 노투사의 호소가 21세기의 젊은 세대에게로 70년 전 레지스탕스 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1943년 프랑스의 주요 레지스탕스 단체들은 반나치 투쟁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프랑스 레지스탕스 평의회’를 결성했다. 이 평의회에서는 1944년 3월 15일 프랑스 해방에 대비하여 새롭게 구성될 정부의 개혁안을 채택했다(본문 40쪽). 에셀은 이 개혁안이야말로 "자유 프랑스가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 곧 프랑스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가치"였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이 시기에 구축된 것이 사회보장제, 퇴직연금제도, 공공재의 국영화, 대재벌의 견제, 언론의 독립, 교육권이었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레지스탕스가 얻은 성과가 토대부터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가 그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프랑스다. 저자는 선대 레지스탕스들이 나치에 저항하여 싸웠던 것처럼 젊은 세대가 "이런 모든 일들에 암묵적인 찬동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분노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레지스탕스의 동기는 ’분노’였다고 규정했다.

에셀은 이 책에서 "분노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의 본의는 "참여하라!"다. 그는 자신에게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 사회로 오면서 분노의 대상을 찾기가 매우 힘들어졌다는 점은 인정한다. "분노의 이유가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누가 명령하며, 누가 결정하는가." 자신이 나치와 싸울 때처럼 투쟁 대상이 명확하지 않음은 이해한다는 것. 그렇더라도 그는 "이런 세상에도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이 있으며, 각자 분노할 대상을 찾고, 그 분노를 밑거름 삼아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집시들을 추방하는 프랑스 정부의 야만, 자본에 종속된 언론, 가자 지구를 포격하는 이스라엘 정부가 그 예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나쁜 태도라고 나무란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란 우리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인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에셀이 ’분노’와 ’참여’를 말할 때, 그것은 폭력적 봉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비폭력이라는 길을 통해 인류가 다음 단계로 건너가야" 하며,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로 든 인물들은 넬슨 만델라와 마틴 루터 킹. 이렇게 보면 그는 평화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그도 사르트르처럼 우리가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은 수긍한다.
"자신이 지닌 무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우월한 무력적 방법에 의해 점령당한 쪽의 입장에서 보면, 민중의 반응이 꼭 비폭력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어떤 타격도 주기 힘든 로켓포를 끝내 이스라엘군에 발사한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몸짓’을 이해 못할 행위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테러리즘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폭력으로는 어떤 희망적인 결과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에셀이 여기서 말하는 비폭력이란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타인들의 폭력성향마저 정복하는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비폭력이다."(p 27~34) 폭력적인 희망이란 없다." 이것이 폭력으로 얼룩졌던 20세기의 8할을 살아낸 인물의 결론이다.    
 
한국 사회는 어떨까? 비정규직 비율 세계 최고, 청년실업, 갈수록 커져만 가는 빈부 격차,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급감하는 출산율, 치솟는 생활물가와 대학 등록금....... 이것이 프랑스보다 분노할 게 훨씬 더 많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추천사를 쓴 조국 교수는 이 소책자가 한국 사회에도 큰 메시지를 던진다고 말한다. "1970~1980년대 (......) 민주화운동의 기본 동기는 실로 분노였다. (......) 당시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는가.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 대표자를 직선으로 뽑는 것, 시민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 야당과 자유로운 언론의 존재가 보장되는 것, 국가권력이 시민의 인권을 자의적으로 박탈하거나 제약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 당시 우리들의 절박한 꿈이었다."(p.72~73)

우리에게도 4·19 민주항쟁, 5·18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6·10 민주항쟁처럼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분노의 역사가 있다. 긍정적인 ’분노’란 시대를 건강하게 지켜줄 수 있는 힘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사회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도저히 권력자의 오만을 두고만 볼 수 없을 때 시민들은 촛불시위의 형태로 분노를 표출했다. 분노 유전자는 우리 몸속에 흐른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다. 청년시절 나치에 분노했고, 그 분노의 힘으로 역사의 한 흐름에 참여하는 운동가가 된 에셀. 그는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이 분노와 변혁의 중심에 설 것을 주문한다.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대량 소비’와 ’지나친 경쟁’을 경고하는 저자의 외침이 결국 지구 전체 구석구석을 침투하여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 하다.
 
 
’분노(憤怒)’라는 단어를 보면 학생시절의 나와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1980년대 당시 우리 세대들은 선배건, 동기건, 후배건 간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일은 끝이 없었다. 일제 앞잡이들이 한국현대사를 주물렀던 역사에 대해, 군화발로 시민들을 학살하고 국가권력을 찬탈한 정치군인데 대해, 소련/중국과 대결하기 위해 한국을 자신들의 동북아 군사전진기지 겸 식민지처럼 삼아 광주학살에 동참한 미국에 대해, 노동자와 농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재벌과 ’가진자’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는 정부관료에 대해, 아무런 양심과 자책 없이 목숨을 연명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소위 ’486세대’가 1980년대 군사정권과 목숨을 걸고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을 걸고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동력은 조국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아픔, 새세상에 대한 희망도 있었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모두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분노가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이고 시민들도 함께 하면서 ’87년 체제’를 수립하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분노’와 열정은 어설펐고 제도적이거나 장기적이지 못했다. 우리 세대들은 1987년 항쟁의 열기가 지나고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이 분열하면서 급속하게 사그라졌다. 우리 세대의 대부분은 ’직선제’와 몇 가지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만 이루어 놓은채 다시 ’자신의 기득권’을 향해 나아갔다.
유럽의 ’68세대’들처럼 80년대 세대들은 그 ’분노’와 적극적으로 실질적 민주주의로, 경제 민주화로, 사회문화 등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정치권을 비난하고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해 버렸다. 우리는 해방 후 40년 동안 한국을 망쳐놓은 온갖 과거사를 바로잡고 부정,부패,불법,불의한 세력을 일소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를 기약하면서 조직적으로 그 구조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결과는 그 뒤 10년 동안 정치계, 경제계, 언론계, 관료계, 법조계, 학계 등 각 분야에 진보와 민주주의를 심지 못했고 소중하게 얻은 결과물을 함량미달의 정치인들이, 탐욕스러운 재벌들이, 저널리즘도 모르는 조중동이, 보신주의와 무책임성으로 일관하는 관료들이, 자신들이 잘난줄 만 아는 법조인들이, 본분도 모르는 학자들이 가져가도록 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요구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고 재벌과 경제인들은 탐욕을 주체하지 못했고 관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결국 그 10년의 결과는 정치에서는 ’보스정치’와 ’명사정당’의 확대재생산을, 경제에서는 IMF를, 언론에서는 조중동의 ’언론권력화’를, 관계에서는 ’극심한 관료주의’를, 법조계에서는 ’검찰권력’을, 학계에서는 부패하고 무능한 학자와 교수들을 양산했다.  
  
 
그나마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1997년과 2002년에 극우, 보수, 기득권 세력의 대표가 아닌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전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나마 그것도 아주 어렵게 만들어야 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김종필이라는 보수반동 세력과 노무현 전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재벌,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80년대 세대와 그 전후 세대들, 노동계와 농민계, 빈민계와 여성계는 뿔뿔히 흩어져 각각 개별적인 단체와 정당을 조직하였고 자본과 기득권세력의 공세에 대응하는데 급급하기만 하였다. 기층 민중들과 시민들을 광범위하게 결집하지 못한 정당과 시민단체는 80년대에 만들어낸 소중한 권리를 20년 동안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국민들은 계속 양극화와 소득감소, 부동산 버블, 사교육 확대, 물가상승 등 수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한국의 헌법 체계에서 국민들, 민중들의 일상사와 주요 이해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과 의사결정 구조다. 즉, 정치에서 멀어질수록, 무관심할수록 국민들, 민중들은 더욱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진보개혁세력의 대변자라고 생각한 것은 우리의 착오였고 자기기만이었다. 수 천년의 인류 역사는 "조직되어 상호작용하지 않는 사람은 대변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는 정부와 정치권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두 분이 한국에서 1,2위를 다투는 정치지도자였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들 역시 부족한 부분이 있고 잘못한 것도 많다. 특히 정치조직, 시민조직과 호흡을 함께하지 않은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다시 말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국민들의, 민중들의, 486세대의, 노동자와 농민의 대변자가 되기 위해서는 같은 정치조직 안에 함께 묶여 있어야 했고 강력한 시민조직의 견제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유언이다시피 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는 절반은 맞고 절반을 부족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틀린 부분은 시민은 아무리 많이 조직되어도 스스로 국회에서 법령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고 정부정책을 만들고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조직과 시민조직을 함께 발전해야 하고 서로 긍정적인 작용을 하며서 필요할 때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 책 속의 문장 :
-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理想)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정치계·경제계·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 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p.15)
 
[ 2011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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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1 - 종말의 시작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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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의 부제는 ’종말의 시작’이다. 

11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한 서기 161년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은 서기 211년까지를 다룬다.
11권의 부제가 ’종말의 시작’이기는 하지만, 실제 로마가 ’종말’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손인 콤모두스가 황제로 올라서면서부터, 즉 180년부터가 된다.
로마는 왕국에서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서기 직전에 제정으로 체제를 변경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자로 자리를 굳혔고 ’오현제’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시점이 로마 제국의 가장 최고의 전성기라면 이제 그 이후 제국의 역사는 줄곧 내리막길이 될 수 밖에 없다.
산이 높은 만큼 골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골은 로마를 강대하게 만들었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아 제정 시스템이 더 깊게 만들게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자연도 인간도 그렇게 활짝 피고 지는 것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마르쿠스 황제는 동시대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거의 2천년 동안 줄곧 높은 평가를 누린 황제다
그는 ’오현제’의 마지막 인물이고 ’철인(哲人)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가 ’철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명상록>이라는 저서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명상록>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 같은 통치,정책 서적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으로 자신의 생각, 성찰과 사색을을 기록한 책을 남겼기에 ’철인(哲人)’으로 남았을 것이다.
업적과 능력으로 보면 마르쿠스보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누스가 더 위대한 통치자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기마상을 남겼고 그 기마상은 로마 황제의 기마상 22점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동상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의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에서 서기 121년에 태어났다.
그는 베루스 집안 출신이었기에 엄청나게 부자였다. 물론, 그 가문도 히스파냐 속주 출신이다.
마르쿠스가 태어나기 100년 전에 로마로 이주했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여러번 집정관에 선출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아버지는 그가 세살 때 여의었다.
10대때부터 그리스 철학과 학문에 빠지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마르쿠스 안토니누스의 됨됨이와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베루스를 고려하여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마르쿠스를 후계자로 삼으려한 것이다.
마르쿠스는 17세의 어린 나이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후계자를 위한 양자로 삼았을 때, 황제와 협상할 정도로 자질이 있었다.
(물론,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아내와 마르쿠스의 아버지는 친남매 사이였기 때문에 아들이 없었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마르쿠스를 양자로 삼기에 부담이 없었던 것도 마르쿠스나 로마에게는 운이 따른 것이었다.)
마르쿠스는 18세에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고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받았다. 차기 황제로 지명된 것이다.
다음 해 집정관 선거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19살의 마르쿠스를 집정관 2명 중에 한 명으로 추천하여 선출되도록 하였다.
마르쿠스는 24세에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였고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자신이 재위기간 23년 동안 로마 이외의 지역을 방문하지 않았을 뿐더라 마르쿠스에게도 속주 경험이나 군단 경험을 시키지 않았다.
그것이 나중에 황제가 된 마르쿠스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게 된다.
 
마르쿠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어 40세에 황제에 취임한다.
그리고 로마 제정 사상 처음으로 ’공동 황제’ 체제를 출범시킨다. 함께 양자이자 후계자로 키워졌던 31세의 루키우스와 함께 황제에 취임한 것이다.
마르쿠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로, 루키우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로...
그의 치적은,
161년 악천후로 홍수와 기근 처리
          파르티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파견한 카파도키아 1개 군단이 궤멸됨.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프리스쿠스를 카파도키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시리아로 진격
163년 프리스쿠스 군대가 아르메니아 전투에서 승리. 친로마 왕을 앉힘.
165년 프리스쿠스 군대와 시리아의 카시우스 군대가 파르티아군 격파
168년 마르쿠스와 루키우스가 도나우강 전선 시찰
169년 루키우스 도나우강 전선에서 돌아오다가 병사
170년 다키아 속주 총독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게르만족과 전투에서 패배. 2만명이 포로로 붙잡힘.
          마르코마니족과 코스토보치족이 도나우강을 건너 그리스 중부까지 쳐들어옴. 270년 만에 방위선이 뚫림.
171년 북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인이 이베리아 반도 베티카 속주에 침입. 빅토리누스 군대가 소탕
172년 1차 게르마니아 전쟁. 고전 끝에 마르코마니족과 전투에서 승리함.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진압.
          아르메니아에서 쿠데타 발생. 카파도키아 총독 베루스가 외교로 해결
173년 로마군 총공세로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과 전투에서 승리. 강화를 맺음.
175년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믿고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황제를 자칭
          원로원이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
          콤모두스가 성년식을 치르고 ’카이사르’ 호칭 받음.
          마르쿠스 도나우 전선에서 계속 전투를 치르고 게르마니아 족들과 강화를 맺음
          카시우스 부하 백인대장에게 살해됨.
177년 콤모두스 집정관에 취임. 마르쿠스가 공동 황제로 지명
179년 2차 게르마니아 전쟁 시작.
          로마군 총공세로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 격파. 도나우강 북쪽 120km까지 진격
180년 마르쿠스 겨울철 숙영지인 빈에서 사망(58세)
 
마르쿠스 황제에 대한 나의 평가 : 그는 비록 황제로서는 무난한 인물이었지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하여 뒤를 이은 여러 황제들과 원로원, 로마시민, 속주민들이 정착시킨 로마의 시스템과 정책, 로마군에 힘입어 경험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속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달리 그럼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정비하지 못한 인프라와 방위선은 뚫리게 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게르마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임 시절 다른 속주민들처럼 살고 싶다고 요구했지만 안토니누스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종합적인 준비와 계획도 수립하지 못했고 그것은 마르쿠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 콤모두스 >
19세에 황제로 취임한 콤모두스...
콤도두스는 황제로서 부적격자였다. 마르쿠스는 왜 실력이 부족한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선정했을까?
작가는 마르쿠스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력이 있는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정하면 자식인 콤모두스 주변 사람들로 인해 내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과연 그랬을까...??
나는 네로 황제 사후에 벌어진 로마의 30년 간의 대혼란 역시 콤모두스 시대와 비슷하게 전개된 것으로 생각한다.
마르쿠스가 네로 사후의 위기를 제대로 분석,평가했다면 더 적절한 선택과 판단, 준비를 하지 않았을지...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대한 나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콤모두스 치세의 과정을 보면,
180년 콤모두스 황제로 취임
          게르마니아 전쟁을 끝내고 부족들과 강화를 맺음.
181년 콤모두스의 누나 루킬라가 황제 암살을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유배된 후 살해됨.
          근위대장 파테르노 황제 암살기도 혐의로 살해됨.
182년  원로원 의원 8명 비슷한 혐의로 숙청됨
           근위대장 페렌니스 통치의 실권 장악
184년  브리타니아 1개 군단이 칼레도니아에서 침입한 야만족에게 패하고 군단장 전사.
          페렌니스 라인강 방위선에서 마르켈루스를 급파하여 패배를 설욕
185년  브리타니아 속주 군단이 콤모두스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하고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
          페렌니스가 파견한 페르티낙스가 군단병을 설득
          콤모두스의 하인 클레안드로스의 음모로 페렌니스 살해. 클레안드로스가 근위대장이 되어 실권을 장악
186년 황제암살 기도 혐의로 매형 마메르티누스와 매제 부루스를 처형
189년  배급용 밀이 부족하여 일어난 폭동으로 클레안드로스가 민중에게 살해됨
          그 후 콤모두스의 애첩 마르키아, 남편 에클렉투스,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가 권세를 휘두름
192년  페르티낙스 콤모두스와 집정관에 취임.
          콤모두스 애첩 마르키아와 하인 에클렉투스, 나르키소스 등에게 암살됨(31세)
 
콤모두스가 살해된 이후 로마는 또 다시 내란에 휩싸인다.
 
< 내란의 시대 >
193년 페르티낙스,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황제로 취임.
         원로원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함.
         페르티낙스, 레토 휘하의 근위병들에게 피살됨.
         전 아프리카 속주 총독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황제에 취임.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 세베루스가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알비누스가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시리아 속주 총독 니게르도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원로원 세베루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
         율리아누스가 근위병에게 피살됨.
         원로원, 세베루스에 대한 ’국가의 적’ 규정을 취소하고 황제 취임을 요청
         원로원 세베루스와 알비누스의 공동 황제 취임을 승인
         세베루스 비잔티움 서쪽 페린투스에서 니게르와 전투에 패함
194년 소아시아 니카이아에서 세베루스가 니게르에게 승리. 니게르 전투 중 사망.
195년 세베루스가 니게르를 지지한 파르티아에 쳐들어감. 동방 방위체제를 재구축
197년 세베루스가 리옹 근교에서 알비누스와 전투에서 승리. 알비누스 자결함.
         세베루스가 원로원 26명을 알비누스파라는 이유로 숙청
198년 파르티아를 원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속주화
201년 오스티아에서 테라치나까지의 세베레니아나 가도 공사 착수
202년 세베루스 아들 카라칼라 집정관에 취임
205년 카라칼라와 게타가 집정관에 취임.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카라칼라에게 살해됨
209년 브리타니아 원정. 하드리아누스 성벽 넘어 북쪽으로 진격
211년 세베루스 브리타니아 요크에서 사망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로 즉위
          칼레도니아인과 강화를 맺고 로마로 귀환
212년 카라칼라가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게타를 살해
 
이 내란의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콤모두스 황제의 무능력과 정책 실패에 기인한 것이지만, 구조적인 문제점은 국가의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사망하면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고 이를 견제하고 제어할 세력이 없게 되는 것....
제정 시대에도 원로원이 제기능을 했다면 얼마든지 황제 공백 상태든, 내란 상태든, 군단이나 속주의 반란을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원로원은 카이사르 집권 시기 때부터 이런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군인 출신의 속주 총독겸 사령관을 황제가 임명하는 것도 부작용이 되었다.
지도층에 대한 장병들의 존경과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에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기만 하면 장병들이 황제를 추대하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이런 경향을 정비하지 못한 데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추가적으로 로마군대를 약하게 만든다.
 
세베루스는 재임기간 중 로마군에 대한 처우개선책을 몇 가지 시행했다.
1. 기존에 데나리우스 은화 300개를 지급하던 장병들의 기본 봉급을 375개로 인상했다. 115년 만에 인상이었다.
2. 모든 군단병이 금반지를 낄 권리를 주었다.
3. 일개 졸병이라도 능력이나 실적에 따라 백인대장이나 기병대장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한다.
4. 정식 결혼을 허가한다. 동거는 불가.
 
그런데 이 처우개선책이 선의로 시작되었지만 장기적으로 로마군을 약하게 만든다.
군대 생활이 너무 편해진 것이다.
봉급은 인상되고 출셋길도 열리고 20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근무 중 결혼도 가능해졌다.
이제 예전처럼 만기 제대할 날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 것이다.
작가는 이것들이 제국의 ’군사정권화’의 시초라고 보았다.
카이사르는 강력한 군대를 원하되 제대한 후 민간 신분으로 돌아가서 정착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의원 출마 자격도 군단병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
퇴직 후 정착할 수 있도록 퇴직금 제도를 만들었는데 장병들이 군대에 안주하면 헛일이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역사가들은 세베루스를 ’비로마적인 전제군주’로 평가한다.

 
 

[ 2010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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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 구술로 풀어 쓴 한국전쟁과 전후 사회
이임하 지음 / 책과함께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최근 한국전쟁에 대한 단상 두 가지...
한국전쟁에 참여한 백선엽이라는 사람을 이데올로기로 미화시키고 있는 관제 언론의 작태와 아직도 남아있는 거리의 사진전...
 
일제시대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탄압,살해하고 조선민족을 억압하는데 앞장선 일찍 ’청산’해야 할 백선엽이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군의 ’위대한’ 장교로 ’미화’되는 것을 보면 한국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되고 정의롭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친일부일 반역자에 대한 국민적 규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인간들이 이 땅에서 떵떵거리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얼마나 한국현대사를 비틀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지난 주 광화문 근처를 지나는 길에 동아일보사 앞에 00단체 이름으로 625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내용과 함께 각종 사진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보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두 세대 가까이 지났음에도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전쟁의 상흔과 이데올로기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한국전쟁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여러 종류의 영화와 방송 프로그램, 소설과 연구서적도 출판되었다. 하지만 기존에 상영되거나 출간된 콘텐츠들은 한국전쟁의 기원, 발발, 전개과정, 휴전 등 전쟁의 과정과 성격을 정치사적으로 다룬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쟁 종사자나 군경, 유엔 참전군인, 피난민, 피학살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그 연구 대상은 개인적 경험이 대부분이었거나 국가 또는 남성이었다. 그동안의 연구는 ‘그들만의 한국전쟁’만을 다룬 셈이며, 한국전쟁의 전체상을 그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정부기관이나 연구소, 주류학자나 방송영상 관계자들이 다룬 대상은 고위 장교나 간부급 경찰, 반공반북 단체 간부나 어용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연구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실제 전쟁터에서 참혹한 전투를 치른 사병, 하사관들, 경찰들이고 절차도 동의도 없이 국가폭력과 우익폭력에 끌려간 국민방위군, 학도병, 민간인,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한 피학살자, 행방불명자, 납북자들이다. 한국전쟁 후 60년 넘게 국가와 사회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만 할 뿐, 밑바닥에서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낸 그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도 않았고 위로하지도 보듬지도 배려하지도 않아왔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들의 아내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전쟁 전후의 한국사회는 아직도 여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제도와 관행, 문화가 엄존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았을 것이다.

*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 2009년 자료 인용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미망인’은 연구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탄생한 전쟁미망인은 ‘국가적 차원의 전쟁’이 ‘개인의 일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전쟁 후 국가가 어떻게 개인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미망인 연구는 기존 한국전쟁사의 비어 있는 반쪽을 채워줌으로써 한국전쟁의 전체상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전쟁미망인의 전쟁 경험이나 전후의 삶을 남긴 기록은 거의 없다. 정부와 언론의 자료, 전쟁 주체들의 회고록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 발발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기본적인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인터뷰를 통해 전쟁미망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 구술 내용을 토대로 그들의 삶을 복원하고 분석했다. 그 대상은 전쟁미망인(군경미망인·피학살자미망인·상이군인미망인)과 그 자녀 45명이다(인권 보호 차원에서 책에 실린 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이들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또는 자신의 어머니)이 전쟁과 전후(戰後)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있는 그대로 증언한다. 전쟁 당시 남편을 잃게 된 경위, 피난 과정, 전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 가장이 되어 사회로 진출한 정황, 국가의 전쟁미망인 서열화 정책 등이 그들의 입을 통해 서술된다. 저자가 사용한 ‘구술사’ 방법론은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시선을 중시하고 행위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최근 역사학 연구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전쟁미망인이라는 주제가 ‘구술사 방법론’과 결합됨으로써, 그동안 문헌 사료에 갇혀 있었던 한국현대사의 폭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게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 동아일보 및 서울신문 각 1950년 10월 7일, 11월 28일 

이 책은 오늘(28일) 공부모임의 교재다. 저자인 이임하씨가 직접 세미나에 참가하여 참석자들과 이야기하는 기회도 마련되어 있다. 저자가 구술자들과 나누었지만, 책 속에 담아내지 못한 많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약속 때문에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저자 이임하는 ‘한국현대사와 여성’이라는 주제에 10년 넘게 천착해온 역사학자이다.
박사논문 [1950년대 여성의 삶과 사회적 담론](2002)을 통해 1950년대 한국전쟁과 여성, 여성의 경제활동과 지위 변화, 성 담론 등 그동안 한국현대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문제를 제기했다. 저자는 2006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연구과제로 한성대학교 [전쟁과평화연구소]에서 ‘한국에서의 전쟁경험과 생활세계 연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서 ‘전쟁미망인’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쟁미망인(과 그 가족) 45명의 구술과 5년여에 걸친 각고의 연구 끝에 이 책을 완성했다.
저자는 전쟁미망인 연구를 통해,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 들려준다.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국가) 폭력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고통에서 살아왔는지,’ ‘그 고통을 말하지 못하고 왜 침묵해야 했는지,’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등등, 이들의 이야기는 국가의 공식 기억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 뒤에도 지속된 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를 들려줄 것이다.  
 
------------------- * 저자 이임하는 누구인가? ----------------------------
965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여성의 삶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한국전쟁 연구의 변두리에 머물렀던 ‘전쟁미망인’의 존재에 주목했고, 5년여의 연구와 전쟁미망인 45명의 구술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한국 여성사 편지]가 있으며 [동아시아와 근대, 여성의 발견][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1970년대 민중운동 연구][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등의 집필에 참여했다. 그 밖에 [한국전쟁 전후 동원행정의 반민중성] [1950년대 여성교육에서의 성차별과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해방 뒤 국가건설과 여성노동] [‘전쟁미망인’의 전쟁경험과 생계활동], [상이군인들의 한국전쟁 기억] [한국전쟁기 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인구조사와 통제] 등의 논문이 있다. ------------------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전쟁미망인’을 주제로 설정한 배경을 설명하고 구술사 방법으로 이 연구를 진행했음을 강조한다. 1950년대에 정부의 통계와 언론의 보도를 통해 50만명에 달하던 ’전쟁미망인’의 수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의 조작과 정책을 통해 1963년 27,000명으로 축소되었다. 마찬가지로 상이군인 수도 축소하였다.  "이는 여성이 입은 피해와 국가의 책임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 아래 이루어졌다. 이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의 힘을 분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역사적 주체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 보건사회부 1954/1957/1959년, 육군본부 1955년, 대한군경원호회 1960년 자료

’구술사 방법’은 그동안 정부와 학계가 방치하여 자료와 정보가 전무한 경우에 적절한 연구방법이 되며 소수자와 약자층에 대한 연구로 중요한 방법이다. "구술은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시선을 중시하기, 행위자 중심의 역사 구성, 남성 중심의 역사에 대항하기, 기억 저편에 있는 민중의 기억 읽기, 경험에 내재된 권력 읽기" 등을 제기한다고 구술자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1부. [전쟁과 집 밖 세상]에서 저자는 전쟁미망인의 전쟁 경험을 군경미망인, 피학살자미망인, 상이군인미망인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고(또는 보도연맹 등에 의해 남편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남편의 전사 소식(학살 소식)을 접하면서 ‘전쟁미망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글 속에서 국민방위군에 참여했던 미망인들은 모두 남편이 스스로 자원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군대, 경찰의 폭력과 강제로 끌려간 것임을 말한다. 이를 통해 상당수의 남자들이 타의로(국민방위군 자격으로) 전쟁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처음부터 국민방위군은 동원 대상자를 적으로부터 격리시킨다는,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동원 대상자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한 상태에서 조직되었다."면서 이승만의 연설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국민방위군은 당시 무리한 징집과 지휘부의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상당수가 행방불명 또는 굶어 죽거나 얼어죽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해체되었다. 

* 여기서 저자는 전쟁의 원인을 다루지 않았듯이 정부, 군대, 경찰, 우익폭력자들의 ’국민보도연맹’이나 민간인 학살의 원인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다. 추정컨대, 당시 정부관료와 군인, 경찰력의 80% 이상을 점유하던 일제 앞잡이들(우익폭력단의 경우 99%)은 북한에서 일제 앞잡이에 대해 철저하게 처단한 것을 알고서 법절차와 제도를 무시하고 사적으로 좌익성향, 가능성이 있는 사람, 개인적인 원한을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으로 보인다.

2부. [낯선 세상에서 생존하는 길]에서 구술자들은 남편들이 전쟁터에 나간 후, 혼자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전쟁미망인에게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말한다 . 그들은 농업 노동과 가사 노동을 병행해야 했고, 행상과 좌판은 물론이고 공장노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미망인은 남성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남성은 바깥일 하고 여성은 살림과 육아를 맡는’ 기존 시스템을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깨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구술에 참여한 전쟁미망인들은 대개 한국전쟁 당시 임신한 몸이였거나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도 많았다. 그들이 전쟁에서 겪어야 했던 이중, 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3부. [가부장과 ‘아직 죽지 아니한 아내’] 남편이 부재한 집에서 젊은 전쟁미망인은 시부모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시부모는 전쟁미망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감시했고, 전쟁미망인은 가족관계 안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전쟁미망인에게 남편의 집은 억압의 장소였다. 일상의 감시와 통제는 ‘며느리 만들기’의 하나이다. ‘며느리 만들기’는 가족단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전쟁 피해를 ‘전쟁미망인’에게 책임지우는 방책의 하나였다.

4부. [여성 가장과 새로운 공간의 창출] 전쟁미망인들은 어떻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고 전략들을 세웠는가? 군경미망인에게 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피학살자미망인에게 분가는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처지에서 여성 가장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공간과 전략을 만들었을까?
전쟁미망인들은 법과 제도, 문화에 의하여 가족과 남편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이나 관리권을 친척들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그나마 쥐꼬리만큼 나오는 정부의 원호자금 역시 상당기간 동안 시부모나 시댁 식구들에게 갈취당하였다.

5부. [봉쇄된 균열]
한국전쟁으로 기존의 가치는 모두 중심을 잃어버렸다.
한국전쟁 종전 직후부터 대부분의 정권,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권에게 현충일은 전쟁 피해자에게 살길을 마련해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 아니라 ’군사주의’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전쟁의 사후처리를 담당하는 국가보훈처와 그 담당 공무원들, 관변단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해야 했고 해결책은 희생양을 찾는 일이었으며, 그 희생양은 주로 여성이었다. "국가는 전쟁미망인의 목소리를 침묵으로 가두었고, 자신의 전쟁 책임을 일상에서 감추어버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에필로그 : 전쟁과 트라우마] 전쟁미망인들은 한결 같이 "전쟁은 없어야 돼"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쟁미망인 연구를 통해, 한국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 여성들의 성 차별은 21세기인 지금도 사회 곳곳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남아있다. 가족법과 상속법 등 제도적인 평등조치는 일부 이루어져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아내 만들기’와 ’며느리 만들기’는 많은 가족에서 잔존해 있다. 여성의 가치와 여성의 가사노동은 아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가사노동과 보육 역시 국가,사회적으로 올바르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와 사회가 더 바꾸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 스스로도 깨닫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고 여성 뿐 아니라 남성, 시민단체, 정치세력 역시 생활 하나하나에서부터 변해야 하고 노력해야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치른 생존자들은 대부분 지금 7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그들은 어떤 이유와 경험을 통해서든 한국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겪었고 그 피해가 몸과 마음에 남아 있다. 그들은 90% 이상이 피해자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60년 동안 생활과 의식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고 그들에게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그들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가족에게, 아들딸에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전달되었고 따라서 우리 역시 그 영향을 그동안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그들의 상처를 위로해야 하고 보듬어야 한다. 아무리 늦었더라도 그들에게 보상해 주어야 하고 한국전쟁 동안, 그리고 그 이후 국가와 사회가 그들을 보살피지 않은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남은 여생 동안이라도 한국이라는 국가,사회 공동체에 몸 담았던 인생을 보람있게 기억할 것이고 피해의식과 죄의식에서 벗어날 것이고 후손들에게 공동체의 중요함을 이야기할 것이고 자기 세대들끼리, 후배 세대들과 화해하고 어울릴 것이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적당한 때일 수 있다’라는 말을 이제라도 떠올리면서...
 
전쟁피해자 뿐 아니라 한국현대사는 어떤 측면에서 돌아보아도 왜곡과 부정의 연속이다.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지 않았고 독립투사들은 배제, 탄압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 사법, 행정,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친일 매국노들이 수 십년 간 한국의 모든 기득권과 원력을 행사하였다. 역사는 그들을 단죄하지 못했고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도 못했다. 봉건제도는 기형적으로 미군정과 식민지식 한국사회에 잔존했다. 한국 현대사는 ’부정과 부패’의 역사가 되었고 지금도 정치, 경제, 사회, 사법, 언론, 학계 등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기득권 세력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은 그러한 왜곡된 제도와 질서를 더욱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갔고 민중들은 한동안 이에 대항하지 못했다. 그들은 군사적인 폭력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유지하였고 국가의 권력과 부를 일부가 나누어 강탈해왔다.
다행히 1987년에 민중들이 주축이 되어 기득권에 항거했고 그 과정을 통해 최소한의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냈다.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를 이루어내기 시작하면서 경제 민주화도 조금씩 확대되어 갔다.
하지만, IMF는 경제 민주화의 진전을 가로막았고 민주개혁을 표방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국내외의 자본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침탈을 방어해내지 못해다. 그 결과 어렵게 확보한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지금 위협받고 있고 경제 민주화는 후퇴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지켜야 하고 정치경제적 민주화를 진전시켜야 한다. 그와 동시에 왜곡된 한국현대사 역시 하나씩 바로 잡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보복’과 ’처단’이 목표가 아니라 ’진실’과 ’정의’와 ’사과’와 ’화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지난 현대사를 바로 잡지 않으면 여기 저기 숨어있던 ’부정과 부패’가 지금보다 더 기승을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억하고 되새기고 노력하고 바로잡지 못할 경우, 역사는 후퇴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 책 속의 문장 :
- 한국전쟁 기념사는 대개 ‘북의 침략’은 자유를 위협하는 행위이므로 세계가 ‘침략자를 분쇄’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당면한 과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한국전쟁 기념사는 매년 이러한 형식을 취했는데 ‘국군 장병’과 ‘유엔군’을 추모하는 것 이외에 어디에도 전쟁을 겪은 ‘국가’로서의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원인뿐 아니라 전쟁의 과정과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 들려준다.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국가) 폭력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전쟁 뒤에도 폭력은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 ……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 이들의 이야기는 국가의 공식 기억인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구도와 다르게,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 뒤에도 끝나지 않았던 한국전쟁의 잊힌 역사를 들려줄 것이다. (p.19~20)

- “쏙 빠져나가면 될 텐데 …… 그 바보 같은 놈이 따라갔다” 곽희숙의 남편은 “군인 끌려 나갈 적에”도 “소 끌고 가서 일하고 온 사람을” 갑자기 영장이 나왔다며 “저녁에” 데리고 나갔다. 곽희숙은 다섯 살, 세 살, 백일 지난 아이들이 있었고 매일 벌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음에도 그런 개인(가족)의 생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 국가는 동원으로 인한 생활고로 가족이 해체될 위기에 있는데도 그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우리 친정아버지가 만날 …… ‘그 바보 같은 놈이지. 여― 여이― 문전(처갓집 앞)을 지내야 하는 놈이, 우리 처갓집에 잠깐 들어다보고 올 꼬마 이카고 쏙 빠져나가면 될 텐데 …… 그 바보 같은 놈이 따라갔다’고 ……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배운 것도 없고 골짜기에서 살아놔 노니 그리 그리 …···” 되었다고 이경순은 말한다. (p. 47~48)

- 임신 3개월이었던 구영선은 남편이 소집되어 나간 뒤 집이 통영이었기 때문에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갔다. 임신 초기라 먹지도 못하고 토해냈다. 굶주리면서 임신 내내 전쟁터를 돌아다녀야 했다. 자신을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의식이 없는 몸 상태로 지냈다. 만삭인 채 통영 시댁으로 갔을 때, 본인을 향해 겨눈 총도 ‘아― 튀어나오는 건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각이 둔해지고 의식이 없었다. 이 과정을 박수영은 “아이고― 배는 불러가지고 30리를 걸어가는데 요기만 조만치만 가도 오줌이 마렵고, 어휴― ‘여기서 차라리 내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죽으면 너[희]들도 편하고 나도 편하겠다’”라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숙자도 만삭이어서 출산일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피난을 갔는데도 피난 가지 않았다. (p.62~63)

- “음흉하기가 짝이 없다” 이들의 결혼은 대개 남편의 상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정상호는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친구 사이라 “서로들 약주를 좋아하다 보니께 ‘네 딸 나 다구?’ ‘사위 삼자’”면서 결혼에 이르렀다. 그이는 시집에 와서 아랫목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고 나서 ‘속아서’ 결혼했음을 알았다. 정끝남도 형제들 가운데 막내로 올케 친정어머니의 소개로 결혼했는데 남편의 상이를 모른 채 결혼하고 나서는 1년 동안은 무서워서 말도 못 건넸다고 한다. 이성원은 자신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때 정신대에 동원시키지 않기 위해 결혼했던 것처럼 피난 때문에 결혼을 서둘렀다고 했다. 서둘러서 간 곳은 ‘경상’이라고 듣던 것과는 달리 방에 누워 있는 신세였다. 이를 두고 이성원은 “음흉하기가 짝이 없다”고 표현했고, 시댁 쪽은 상이 등급이 결혼에 지장을 줄 거라고 염려해 상이 등급도 내려놓았다고 했다. (p.121)

- 먼저, 전쟁미망인은 노동을 통해 근대의 기획, 곧 공사 영역의 분리와 사적 영역에서의 현모양처라는 틀을 깨뜨렸다. 공사 영역의 분리는 근대의 기획 가운데 성별 그리고 노동시장을 조직하는 중심 논리이다. 남성은 노동시장에 나가 노동자이자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 부양을 책임지는 존재임에 반해 여성은 가정에 남아 어머니나 주부로서 남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존재로 여겼다. …… 그런데 이 논리는 전쟁미망인에게 적용될 수 없었다. …… 전쟁미망인들은 쟁기질만 못했을 뿐 모든 농업 노동을 혼자서 해왔다. …… 이처럼 농업 노동에서 차지하는 남녀의 역할은 한국전쟁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가속화시킨 장본인은 전쟁미망인이었다.(p.172)

- 상이군인의 몸은 결혼한 여성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생계 활동을 하면서 남편의 몸을 돌보아야 했다. 육체적 고통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정신적 타격은 오랫동안 남아 있게 마련이다. 전쟁미망인은 분가를 통해 시가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누워 있을지라도 ‘가부장’인 남편이 존재했고, 남편의 의심과 언어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언어폭력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멸시를 동반했고, 그 폭력에 노출되었던 당사자는 자존감을 상실했다. (p.208)

- 성장하면서 학살당한 아버지를 기다린 시간은, 성인이 된 뒤에는 짐이 되어 앞길을 막는 작용을 했다. “우선 내가 받은 건 그런 스트레스. 그래 크게 요약을 하면 첫 번째 내 연좌제 했던 이런 것에서 오는 경제적인 어려움, 두 번째 그 산소 없을 때 자식들에 대한 저기, 또 그 아버지 없이 자란 저기 평판. 이런 거를 그냥 말로는 쉽게 표현하는데 이것을 살아오면서 피부로 느낀 사람은 엄청난 그 저기가 오는 거여. 그래 제가 우리 자식들한테는 후회 없이 할려고 노력을 했어요.”(이성모) 그는 연좌제로 인해 사회생활에서 좌절을 겪었다. (p.269~270)

- 유럽 여러 나라들이 전쟁 피해자로 군경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은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원호법은 군경, 군속과 민간인을 구별했고 전쟁 피해자인 민간인은 이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연금을 비롯한 보상을 받는 대상자 면에서도 군경미망인뿐 아니라 군경과 군속의 인원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소수의 군경미망인만 전쟁미망인으로 인정하고 그 외 다수의 전쟁미망인은 전쟁 피해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전쟁 피해자를 수적으로 줄이는 방식은 전쟁미망인뿐 아니라 상이군인에도 적용되었다. (p.368)
 
[ 2011년 6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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