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3 - 최후의 노력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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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권의 부제는 ’최후의 노력’이다.

13권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서기 284년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한 서기 337년까지의 53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는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단 2명의 황제만 취임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내에서도 후세의 역사가들에게서도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출생지도, 출생년도도 불명확한 상태라고 한다.
다만, 오늘날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바닥’에서 태어나 로마군대에서 한 단계씩 진급하여 경호대장까지 하다가 황제가 된 인물이었음에도 권력에는 욕심이 없었다.
자신이 즉위한 해에 친한 친구였던 막시미아누스를 처음 ’카이사르’에서 몇 개월 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격상시켜 공동 황제로 함께 취임한다.
디오클레레티아누스는 당시 야만족의 침입과 방위선에 대한 대처가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음을 인정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서방을, 자신은 동방의 방위선을 담당한다.
황제로 즉위한 이후 약9년 동안 두 황제는 서방과 동방에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페르시아국을 위협하고 도적떼를 소탕했다.
 
그리고 그들은 293년 역사적인 ’사두정치’를 선보인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각자 ’카이사르’를 한 명씩 임명한다.
서방의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쿠스를, 동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둘 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골랐고 모두 군단에서 경력을 쌓았다.
군장교 출신의 4명의 황제(정제와 부제)는 각자의 담당지역에서, 그리고 일부 협동작전으로 방위선의 야만족을 격퇴하고 페르시아와 전쟁에서까지 승리를 거두어 150년 전의 로마제국 영토와 방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 병력 증강 : 기존에 30만명에 달하던 로마군을 두 배로 증가시켰다.
  이는 군사력의 질을 떨어뜨리고 4두 정치를 담당한 황제들 사이의 유동성을 약화시켰고
  로마시민과 속주민들은 엄청난 방위비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 민군 분리 : 갈리에누스 황제가 원로원 의원이 로마군 장교에 취임할 수 없게 하였는데 그에 더하여 민간 경력과 군대 경력을 완전히 분리해 버린다.
- 황제에 대한 개념 변경 : 기존과 같이 대관식은 별도로 없었지만, 보석을 아로새긴 ’디아테마’라는 호화로운 관이 황제의 머리 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호화로운 옷차림과 함께...
- 관료조직 확대 : 4두정치에 이어 황제를 대리하여 각 지역을 다스리도록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그에 따라 관료조직이 늘어나고 인력도 늘어나고 비용도 늘어났다.
네 황제는 자신의 근거지에 모두 수도를 지정하고 황궁과 대규모 도시를 건설했다.
- 세제 개편 : 제국이 1년에 필요한 액수를 황제가 결정하고 시민들의 수입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 세무는 모두 통합하여 중앙정부가 관리. 세금은 ’토지세’와 ’인두세’로 양분.
- 가격통제 정책 실시
- 기독교 탄압(303년) : 기독교 교회 파괴. 신도들의 모임 금지. 성서와 미사에 쓰이는 소품 소각. 기존 특전 박탈. 법정에서 보호받을 권리 박탈. 교회 재산 몰수. 공직 추방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이 위기임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대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황제는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일방적인 권력으로 밀어붙이면서 로마제국의 기반을 또 다시 무너뜨리게 된다.
원로원과 지식인층만 소외되었던 로마제국의 황제권력은 잘못된 군대 개혁과 세제개편으로 부유층 뿐 아니라 로마시민과 속주민들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안겨준다.
로마의 역사이자 기반이었던 제도와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 다시 제도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악순화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나서 욕심 없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너무 일찍 은퇴해버려(막시미누스를 강제도 동반 퇴임시킴) 또 다른 분란이 싹트도록 한다.
 
2차 사두정치는 305년에 콘스탄티우스 클로투스가 브리타니아/갈리아/히스파니아를, 세베루스가 이탈리아/북아프리카를, 갈레리우스가 발칸과 그리스를,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오리엔트 전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여 사두정치가 붕괴되고 황제가 6명으로 난립한다.
310년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이 강요로 자결하고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한다.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와 손잡고 막센티우스를 공격하여 전사시키고 325년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와 항쟁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한다.
이리하여 기독교도가 추앙해 마지않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7년 단독으로 집권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집중적으로 추진한 일은 무엇일까...
그는 313년 리키니우스와 공동으로 기독교를 ’공인’한다.
황제의 재산을 기독교에 기증하도 기독교 성직자가 공무를 맡지 않도록 결정하다.
316~317년 도나우 강을 건너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강화를 맺다.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했다.
방위선의 로마군대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여 ’파트타임’ 군인으로 바꾼다.
325년 니케아에서 기독교 공의회를 열어 ’삼위일체’파를 공식적인 해석으로 결정한다.
글자 그대로 로마제국과 로마시민, 속주민을 위해 별로 한 일이 없다.
대신, 로마제국을 약화시키는데 앞장 선 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왜 기독교를 공인하고 진흥하려고 애쓰고 수도를 옮겼을까...
콘스탄티누스는 재임 중 기독교로 개종한 것일까...
객관적인 자료와 사료로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죽음 직전에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 313년 기독교를 ’공인’시킨 황제의 칙령의 문구는 그 이전까지 금지하고 박해하던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같이 로마제국에서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하지만 ’기독교 공인’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진흥하기 위해 애쓴다.
실제 아주 편파적으로 기독교와 성직자들이 부와 권력을 잡도록 제도화시킨다.
 
작가는 콘스탄티누스가 ’지배의 도구’로서 기독교를 고려했다고 주장한다.
계속되는 군대의 반란, 황제 참칭, 원로원과 지도층의 무능, 정국 불안정 등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 또는 중단기적인 대책의 하나로 기독교를 품에 안았다는 것...
콘스탄티누스가 그동안 황제를 추대하고 승인하고 인정하던 인간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유일한 ’신’이 권력을 황제에게 주게되면 주요 성직자 한 두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로부터 황제의 권력이 안정되리라고 예상 or 판단했다는 것...
기독교의 ’왕권신수설’에 기울었기 때문이라나...
콘스탄티누스 치세 하에서 진행된 과정만 보면 그렇게 분석할 수도 있다...
나쁘지 않게 해석하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콘스탄티누스의 의도가 그랬다면 그는 아주 머리가 나쁜 황제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교활하고 야비하고 사악한 기독교도인 것이고...
’콘스탄티누스 로마제국을 다시 융성시키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자 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팩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후세의 역사가들이나 기독교들이 붙여주는 호칭인 ’대제’는 전혀 아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3개 과제’에 제대로 기여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3개 과제’를 무시하고 파탄시킨 측면이 컸다.
로마군에 대한 정책을 엉망으로 만들어 방위선을 지키기는 커녕 소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야만족으로부터 침입, 약탈 당하도록 방치했으며,
끝없이 늘어나는 로마시민과 속주민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로마의 주요 재산인 ’황제 재산(황제 재산은 황제에 위임된 로마제국의 재산일 뿐 개인 재산은 아니다.)’을 자기 멋대로 기독교도에게 기증하는 횡포를 부렸다.
하드 인프라와 소프트 인프라를 유지,보수,관리하기는 커녕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수도 로마를 그대로 둔채 임의로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로마제국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제국의 자산을 탕진한 황제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즉위한 해부터 로마사를 더 이상 쓰지 않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많다고 하는데 많은 부분 동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콘스탄티누스 이후 1,000년을 뒤로 돌리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하여 서구에서는 결국 모든 종교를 공인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다.
그런데 왜 그런 황제에게 ’대제’라는 표현을 쓸까나...?? 
 
작가는 여러번 책 속에 카이사르의 명언을 제시했었는데 나는 비로소 13권 서평에 그 말을 옮기고자 한다. 13권에 그 말이 제일 어울릴 것 같아서...
"비록 나쁜 결과를 낳은 사례라 해도 그것이 시작되었을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2010년 10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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