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2 - 위기로 치닫는 제국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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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의 부제는 ’위기로 치닫는 제국’이다.

12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가 즉위한 서기 211년부터 카리누스 황제가 암살되고 경호대장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서기 284년까지의 73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는 22명의 황제가 취임했다가 사라진다.
그 사이 14명의 황제가 경호대, 근위대, 군단병, 측근들에게 암살되거나 살해된다.
이 시기, 즉 3세기 로마의 위기는 그 이전의 위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산 채로 적에게 붙잡혔을 뿐 아니라 제국이 3등분으로 분리되기도 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진데다가 제국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황제가 일방적으로 결정,집행하는 ’칙령’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제국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힘있는 권력자들만이 일방적으로 국가를 움직이는 ’독재정권’이나 ’왕정’과 다를 게 없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대부분 3세기 위기의 원인을 제국 지도자층의 질적 수준 저하, 야만족 침입의 격화, 경제력 쇠퇴,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기독교의 대두로 꼽는다.
하지만 작가는 기독교의 대두를 제외한 나머지 위기 요인은 그 이전 로마에도 자주 부딪혔다면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정국 불안정’에 두고 있다.
로마 황제가 73년간 22명, 약 3년 반만에 한 번씩 바뀌게 되면 아무리 로마가도가 제국 전체에 깔려있다고 해도 서기 3세기의 통신 수준으로는 정보의 전달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라 제국 통치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사를 돌아보면 서기 1세기에 이미 30년간 7명의 황제가 즉위(3년에 한 명꼴...)하고 그 중 4명이 암살 또는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도 로마는 위기에 처했지만 곧바로 극복하고 로마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풍요로웠던 네르바와 트라야누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오현제’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두 세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기 1세기를 다시 분석해보면,
네로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 군대의 신임을 잃은 후 측근에게 암살되었다.
갈바는 속주 총독간 내전으로 다른 속주 총독 오토에게 암살당하고, 오토는 뒤이어 군단장 출신에게 살해된다.
비텔리우스는 내전에서 패배한 후 도망치다가 살해된다.
도미티아누스는 황후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노예에게 암살된다.
즉, 1세기에는 암살과 살해가 특정한 경향을 띠지 않았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는 실정과 측근에게, 나머지 황제들은 내전의 패배에 따른 여파로 암살, 살해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원로원의 정치력과 지도층이 살아있었고 황제들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을 무서워했다.
로마 군대 역시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은 원로원의 결정을 존중하였고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서기 3세기는 상황이 무척이나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황제들의 사망 원인은 전투 중의 전사(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나 병사(고티쿠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단병들에게 황제로 추대되고 피살되었다.
원로원은 황제를 추인하는 ’거수기’에 불과하게 되었고 로마군대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속주 총독이나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한다.
내가 추측,평가해 볼 때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이후 국방/외교에 대한 안일한 인식과 정책, 속주민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과 정책 변화가 로마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23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19년, 콤모두스 치세 12년, 내란기 20년... 모두 합하여 64년 등 약70년 동안 로마의 황제들은 로마군대의 군사력과 방위선 체계, 인프라를 유지,보수,관리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이전 황제들이 쌓아놓은 업적에 안주할 뿐이었다.
이에 더하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로마군대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결정한 정책들이 로마군을 안정지향형으로, 기득권층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황제 추대에 대한 로마군의 집착은 로마군단이 더 이상 평화수호와 방위선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카라칼라는 로마군을 기존에 편성했던 로마시민병과 보조병 대신 젊은 병사만으로 기동부대를 편성했다.
가정을 가진 나이 든 병사들은 군단기지를 지키도록 하고 젊은 기동부대만으로 전선을 이동하여 전투를 치르게하여 상당수의 로마군을 노령화되도록 만들어 방위선이 취약화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갈리에누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을 로마군 장교급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법률을 통과,시행시키면서 그나마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되던 민간 지도층과 로마군 간의 인적교류와 경험, 제국 상층부의 정치적이고 군사외교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막아버렸다.

다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방위선 정책으로 대표되는 ’로마화’ 동화정책은 역설적으로 ’오현제’ 시대에 그 의미가 퇴색하여 더 이상 진화,진보하지 못하였다.
서기 3세기이면 이미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로부터 약200년 이상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국방/외교정책이 수립되어야 했으나 어떤 황제도, 원로원이나 지도층도 이에 대한 입장이나 정책이 없었다.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가 서기 212년에 발표한 ’안토니누스 칙령’이 또 하나의 로마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카라칼라는 로마 제국 영토내의 속주민들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속주민들이 로마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로마군 보조부대에서 20년간 근무하거나 교육/의료 등 공공사업에 기여하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제국에 기여하는 자에게만 부여되는 ’취득권’이었으나 212년부터 ’기득권’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 여파는 장기적이고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
로마의 정기적인 직접세는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10%의 세금이 가장 컸다.
그 이외의 상속세(5%)와 관세(5%)는 비정기적인 세금이고 매상세(1%)는 규모가 작았다.
한동안 계속 이어지던 영토 확장과 전쟁이 없었기에 그에 따른 전리품이나 노예판매금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고...

  
원로원의 무능, 지도층의 질 저하, 새로운 야만족의 출현과 침입 등은 모두 외부적인 조건에 불과할 뿐이고 어찌보면 이 부분 역시 제국의 시스템이 오히려 그러한 경향을 확대시킨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다른 시각으로 로마사를 보면 인류사회의 전개과정에서 늘 존재하던 결말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동안 군대와 문화를 통해 지배공간을 넓혔으니 때가 되면 힘을 갖게된 원동력이 결국 그 힘을 빼앗아 다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리는...
작가 말대로 로마 역시 ’로마적인’ 이유로 쇠퇴한다고 볼 수 있다.


 

[ 2010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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