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1 - 종말의 시작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권의 부제는 ’종말의 시작’이다. 

11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한 서기 161년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은 서기 211년까지를 다룬다.
11권의 부제가 ’종말의 시작’이기는 하지만, 실제 로마가 ’종말’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손인 콤모두스가 황제로 올라서면서부터, 즉 180년부터가 된다.
로마는 왕국에서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서기 직전에 제정으로 체제를 변경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자로 자리를 굳혔고 ’오현제’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시점이 로마 제국의 가장 최고의 전성기라면 이제 그 이후 제국의 역사는 줄곧 내리막길이 될 수 밖에 없다.
산이 높은 만큼 골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골은 로마를 강대하게 만들었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아 제정 시스템이 더 깊게 만들게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자연도 인간도 그렇게 활짝 피고 지는 것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마르쿠스 황제는 동시대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거의 2천년 동안 줄곧 높은 평가를 누린 황제다
그는 ’오현제’의 마지막 인물이고 ’철인(哲人)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가 ’철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명상록>이라는 저서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명상록>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 같은 통치,정책 서적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으로 자신의 생각, 성찰과 사색을을 기록한 책을 남겼기에 ’철인(哲人)’으로 남았을 것이다.
업적과 능력으로 보면 마르쿠스보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누스가 더 위대한 통치자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기마상을 남겼고 그 기마상은 로마 황제의 기마상 22점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동상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의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에서 서기 121년에 태어났다.
그는 베루스 집안 출신이었기에 엄청나게 부자였다. 물론, 그 가문도 히스파냐 속주 출신이다.
마르쿠스가 태어나기 100년 전에 로마로 이주했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여러번 집정관에 선출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아버지는 그가 세살 때 여의었다.
10대때부터 그리스 철학과 학문에 빠지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마르쿠스 안토니누스의 됨됨이와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베루스를 고려하여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마르쿠스를 후계자로 삼으려한 것이다.
마르쿠스는 17세의 어린 나이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후계자를 위한 양자로 삼았을 때, 황제와 협상할 정도로 자질이 있었다.
(물론,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아내와 마르쿠스의 아버지는 친남매 사이였기 때문에 아들이 없었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마르쿠스를 양자로 삼기에 부담이 없었던 것도 마르쿠스나 로마에게는 운이 따른 것이었다.)
마르쿠스는 18세에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고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받았다. 차기 황제로 지명된 것이다.
다음 해 집정관 선거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19살의 마르쿠스를 집정관 2명 중에 한 명으로 추천하여 선출되도록 하였다.
마르쿠스는 24세에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였고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자신이 재위기간 23년 동안 로마 이외의 지역을 방문하지 않았을 뿐더라 마르쿠스에게도 속주 경험이나 군단 경험을 시키지 않았다.
그것이 나중에 황제가 된 마르쿠스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게 된다.
 
마르쿠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어 40세에 황제에 취임한다.
그리고 로마 제정 사상 처음으로 ’공동 황제’ 체제를 출범시킨다. 함께 양자이자 후계자로 키워졌던 31세의 루키우스와 함께 황제에 취임한 것이다.
마르쿠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로, 루키우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로...
그의 치적은,
161년 악천후로 홍수와 기근 처리
          파르티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파견한 카파도키아 1개 군단이 궤멸됨.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프리스쿠스를 카파도키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시리아로 진격
163년 프리스쿠스 군대가 아르메니아 전투에서 승리. 친로마 왕을 앉힘.
165년 프리스쿠스 군대와 시리아의 카시우스 군대가 파르티아군 격파
168년 마르쿠스와 루키우스가 도나우강 전선 시찰
169년 루키우스 도나우강 전선에서 돌아오다가 병사
170년 다키아 속주 총독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게르만족과 전투에서 패배. 2만명이 포로로 붙잡힘.
          마르코마니족과 코스토보치족이 도나우강을 건너 그리스 중부까지 쳐들어옴. 270년 만에 방위선이 뚫림.
171년 북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인이 이베리아 반도 베티카 속주에 침입. 빅토리누스 군대가 소탕
172년 1차 게르마니아 전쟁. 고전 끝에 마르코마니족과 전투에서 승리함.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진압.
          아르메니아에서 쿠데타 발생. 카파도키아 총독 베루스가 외교로 해결
173년 로마군 총공세로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과 전투에서 승리. 강화를 맺음.
175년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믿고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황제를 자칭
          원로원이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
          콤모두스가 성년식을 치르고 ’카이사르’ 호칭 받음.
          마르쿠스 도나우 전선에서 계속 전투를 치르고 게르마니아 족들과 강화를 맺음
          카시우스 부하 백인대장에게 살해됨.
177년 콤모두스 집정관에 취임. 마르쿠스가 공동 황제로 지명
179년 2차 게르마니아 전쟁 시작.
          로마군 총공세로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 격파. 도나우강 북쪽 120km까지 진격
180년 마르쿠스 겨울철 숙영지인 빈에서 사망(58세)
 
마르쿠스 황제에 대한 나의 평가 : 그는 비록 황제로서는 무난한 인물이었지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하여 뒤를 이은 여러 황제들과 원로원, 로마시민, 속주민들이 정착시킨 로마의 시스템과 정책, 로마군에 힘입어 경험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속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달리 그럼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정비하지 못한 인프라와 방위선은 뚫리게 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게르마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임 시절 다른 속주민들처럼 살고 싶다고 요구했지만 안토니누스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종합적인 준비와 계획도 수립하지 못했고 그것은 마르쿠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 콤모두스 >
19세에 황제로 취임한 콤모두스...
콤도두스는 황제로서 부적격자였다. 마르쿠스는 왜 실력이 부족한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선정했을까?
작가는 마르쿠스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력이 있는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정하면 자식인 콤모두스 주변 사람들로 인해 내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과연 그랬을까...??
나는 네로 황제 사후에 벌어진 로마의 30년 간의 대혼란 역시 콤모두스 시대와 비슷하게 전개된 것으로 생각한다.
마르쿠스가 네로 사후의 위기를 제대로 분석,평가했다면 더 적절한 선택과 판단, 준비를 하지 않았을지...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대한 나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콤모두스 치세의 과정을 보면,
180년 콤모두스 황제로 취임
          게르마니아 전쟁을 끝내고 부족들과 강화를 맺음.
181년 콤모두스의 누나 루킬라가 황제 암살을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유배된 후 살해됨.
          근위대장 파테르노 황제 암살기도 혐의로 살해됨.
182년  원로원 의원 8명 비슷한 혐의로 숙청됨
           근위대장 페렌니스 통치의 실권 장악
184년  브리타니아 1개 군단이 칼레도니아에서 침입한 야만족에게 패하고 군단장 전사.
          페렌니스 라인강 방위선에서 마르켈루스를 급파하여 패배를 설욕
185년  브리타니아 속주 군단이 콤모두스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하고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
          페렌니스가 파견한 페르티낙스가 군단병을 설득
          콤모두스의 하인 클레안드로스의 음모로 페렌니스 살해. 클레안드로스가 근위대장이 되어 실권을 장악
186년 황제암살 기도 혐의로 매형 마메르티누스와 매제 부루스를 처형
189년  배급용 밀이 부족하여 일어난 폭동으로 클레안드로스가 민중에게 살해됨
          그 후 콤모두스의 애첩 마르키아, 남편 에클렉투스,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가 권세를 휘두름
192년  페르티낙스 콤모두스와 집정관에 취임.
          콤모두스 애첩 마르키아와 하인 에클렉투스, 나르키소스 등에게 암살됨(31세)
 
콤모두스가 살해된 이후 로마는 또 다시 내란에 휩싸인다.
 
< 내란의 시대 >
193년 페르티낙스,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황제로 취임.
         원로원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함.
         페르티낙스, 레토 휘하의 근위병들에게 피살됨.
         전 아프리카 속주 총독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황제에 취임.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 세베루스가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알비누스가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시리아 속주 총독 니게르도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원로원 세베루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
         율리아누스가 근위병에게 피살됨.
         원로원, 세베루스에 대한 ’국가의 적’ 규정을 취소하고 황제 취임을 요청
         원로원 세베루스와 알비누스의 공동 황제 취임을 승인
         세베루스 비잔티움 서쪽 페린투스에서 니게르와 전투에 패함
194년 소아시아 니카이아에서 세베루스가 니게르에게 승리. 니게르 전투 중 사망.
195년 세베루스가 니게르를 지지한 파르티아에 쳐들어감. 동방 방위체제를 재구축
197년 세베루스가 리옹 근교에서 알비누스와 전투에서 승리. 알비누스 자결함.
         세베루스가 원로원 26명을 알비누스파라는 이유로 숙청
198년 파르티아를 원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속주화
201년 오스티아에서 테라치나까지의 세베레니아나 가도 공사 착수
202년 세베루스 아들 카라칼라 집정관에 취임
205년 카라칼라와 게타가 집정관에 취임.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카라칼라에게 살해됨
209년 브리타니아 원정. 하드리아누스 성벽 넘어 북쪽으로 진격
211년 세베루스 브리타니아 요크에서 사망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로 즉위
          칼레도니아인과 강화를 맺고 로마로 귀환
212년 카라칼라가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게타를 살해
 
이 내란의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콤모두스 황제의 무능력과 정책 실패에 기인한 것이지만, 구조적인 문제점은 국가의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사망하면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고 이를 견제하고 제어할 세력이 없게 되는 것....
제정 시대에도 원로원이 제기능을 했다면 얼마든지 황제 공백 상태든, 내란 상태든, 군단이나 속주의 반란을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원로원은 카이사르 집권 시기 때부터 이런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군인 출신의 속주 총독겸 사령관을 황제가 임명하는 것도 부작용이 되었다.
지도층에 대한 장병들의 존경과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에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기만 하면 장병들이 황제를 추대하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이런 경향을 정비하지 못한 데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추가적으로 로마군대를 약하게 만든다.
 
세베루스는 재임기간 중 로마군에 대한 처우개선책을 몇 가지 시행했다.
1. 기존에 데나리우스 은화 300개를 지급하던 장병들의 기본 봉급을 375개로 인상했다. 115년 만에 인상이었다.
2. 모든 군단병이 금반지를 낄 권리를 주었다.
3. 일개 졸병이라도 능력이나 실적에 따라 백인대장이나 기병대장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한다.
4. 정식 결혼을 허가한다. 동거는 불가.
 
그런데 이 처우개선책이 선의로 시작되었지만 장기적으로 로마군을 약하게 만든다.
군대 생활이 너무 편해진 것이다.
봉급은 인상되고 출셋길도 열리고 20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근무 중 결혼도 가능해졌다.
이제 예전처럼 만기 제대할 날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 것이다.
작가는 이것들이 제국의 ’군사정권화’의 시초라고 보았다.
카이사르는 강력한 군대를 원하되 제대한 후 민간 신분으로 돌아가서 정착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의원 출마 자격도 군단병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
퇴직 후 정착할 수 있도록 퇴직금 제도를 만들었는데 장병들이 군대에 안주하면 헛일이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역사가들은 세베루스를 ’비로마적인 전제군주’로 평가한다.

 
 

[ 2010년 10월 05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