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지음 / 김영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내가 국회의원들의 싸움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전 세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때문에 시끄럽다. 오랜 세월을 이끌어온 증오심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과 이스라엘군의 공습은 당사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대 아랍권이라는 대형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커져만 가고 있다. 여전히 이스라엘을 편드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아랍권의 행동을 보면서 전쟁이 쉽사리 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관한 기사를 검색하다가 옆에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30일 이스라엘이 가자 접경 지구로 기갑부대를 배치하는 가운데 한 병사가 기도하고 있다. 그의 기도하는 모습 가운데 절박함과 독실함이 뭍어 나는데 과연 그는 무얼 위해 기도하는 것일까? 로켓포를 들고 공격하는 하마스에 대하여 공군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돌팔매에 탱크로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 하나님은 돠연 어떤 마음으로 그의 기도를 들으실까? 아니 듣기나 하실까? 오랜 세월 동안 박해를 받는 자신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고백했던 이스라엘이 박해자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것을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과연 그들과 함께 계시기는 하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기갑부대의 맞은 편에서 돌팔매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계실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면 미국은 물론 한국 교회에서도 이스라엘을 편드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진다. 로마서와 서신서를 설교하면서 그렇게도 이스라엘의 율법적인 모습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유대인과 아랍권의 대결이라는 구도에서는 이스라엘을 편드는 입장을 취한다. 내가 보기에 유태인이든, 아랍인이든 모두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비켜나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교회 안에 성공주의가 들어오면서 일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석학들, 기업가들 가운데 유태계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교회가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축복해줘서라고 설교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자는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조근조근 따져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예수에 대한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일진대 그 고백까지 포기하면서 유태인과 같이 축복을 받자는 말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이스라엘을 편드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라는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작금의 한국 교회는 무언가 상당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덩치불리기에 어느 정도 성공해서 외형적인 모습은 거대하지만 그 기반은 아주 빈약한 이상한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예수 대신 맘몬을 섬기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언한다. 죄인을 정죄하는 율법을 공격했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죄인을 양산해 내고 있다. 나누고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더 높은 건물, 더 큰 건물을 바벨탑처럼 쌓아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 선전하면서 자신들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교회 가운데 중앙, 제일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살펴본다면 교회야 말로 가장 오만하고 독단적인 조직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도대체 어느 조직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중앙과 제일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증발해 버리고 교리적이고 교조적인 십자가만 남아 있는 한국 교회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때 십자가를 지고 가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면서 십자가 밑에 바퀴를 달아 구설수에 올랐던 한국 교횡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깊이 이해하기는 할까? 자기 부인과 자기 비움이라는 십자가의 의미를 실천할 수나 있을까?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면 다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려고 하지 않으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 답답하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예수님 앞에서 죄송하고, 세상 앞에서 죄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없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목처럼 예수님이 없어도 사는 한국 교회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내가 가는 길에 걸리적 거리면 예수님마저 부정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없어지고 대신 십자군과 같은 승리 지상주의와 영광의 신학만 남아 있다.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자신을 비우는 비천의 신학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면서 왕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셨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광의 관이 아닌 가시관이요, 상위 1%와 친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위 1%를 위하여 기꺼이 낮아지는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다. 예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예수의 사랑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가 예수없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없어도 예수는 있는 집단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의 원래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93년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새도우 랜드라는 영화가 CS 루이스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욱이 섀도우 랜드가 헤아려본 슬픔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군다나 모를 것이다. 혹시 헤아려본 슬픔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함께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루이스, 지성인이자 대학교수이자, 무신론자였던 루이스가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것은 한국에서 이어령 교수가 세례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된 루이스는 기독교를 대변하는 최고의 변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루이스는 사랑에 관하여서는 이야기하지 못하는 반족짜리 신앙인일 뿐이다. 기독교인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빼고 난다면 무엇이 남을까? 이런 루이스에게 조이는 당돌한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 사랑을 아는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면서 기독교에 고나한 책을 쓰는가?" 이 말을 들은 루이스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니 가르쳐 달라고 말했고, 60이 다 된 나이에 1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조이와 결혼하게 된다. 사랑의 힘이 위대했는지 3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결국 조이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홀로 남겨진 루이스가 자신의 슬픔을 돌아보면서 끄적거렸던 일기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너무 산만하기도 하고, 대론 문맥이 맞이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서 이 책은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슬픔에 못이긴 나머지 하나님을 원망해 보기도 하고, 부정해 보기도 하면서 루이스는 좀더 성숙한 단계로 성장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용운님의 님의 침묵이 생각이 났다.

님의 침묵(한용운)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깨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키쓰>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 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希望 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
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난 뒤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에 사로잡혀 버린다. 나도 아버지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는데 그 때 같은 심정이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한 느낌에 방황했고,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라는 회의 때문에 방황을 했었다. 정말로 기독교 신앙을 거의 포기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루이스와 같은 과정을 밟아 갔다. 세상에 대한 회의,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순간들, 마치 그것이 아버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 같아서 답답해 미칠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 ㄴ단계가 지나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추억하는 것이며, 내 삶을 통하여 아버지의 삶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때 루이스를 만났더라면 방황을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이별을 만나 놀라고 슬픔이 터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다시 맡겨진 일을 시작한다는 한용운 님의 글과 어찌 그리 일맥상통하는지... 님을 보냈지만 그때 비로소 님을 영원히 더나보내지 않았다는 역설이 이 책의 핵심이리라. 루이스가 이후 더 정력적으로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별한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겨진 내가 그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더 깊이 들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슬픔의 원래 목적이 아닐런지?

  헤아려 본 슬픔을 읽는 것은 루이스의 슬픔을 아는 것임과 동시에 그의 사랑의 방식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서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유기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이 책의 모든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유기성 목사는 큰 교회 목사답지 않게 소탈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전병욱 목사같은 쇼맨쉽도 없고, 그렇다고 김동호 목사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지만 끌리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유기성 목사는 이것을 예수가 살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아는 청년에게 선물로 책을 건네주면서 나도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신앙서적이 대체로 그렇듯이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어느 분들은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책을 가지고 설교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책을 내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 책은 기본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는다면 그만큼 실망하게 될 것이가. 특별하게 새롭고 신기한 해석은 없다. 다만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자기 신앙의 고백위에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신앙의 고백이 없이 그저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으로 성경을 읽고 교리를 배우고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 저자의 초등학교 4학년 딸처럼 말이다. 그러니 인생의 문제를 만나면 믿음이 흔들린다. 말뿐인 공허한 메시지만이 한국 교회에 가득하다. 빛과 소금이 아니라 빛과 소금인척 한다. 신앙의 자기 고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신앙 고백에 서서 담대하게 외치는 유기성 목사의 말이기 때문에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가 가진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 돈을 믿고 의지하는 만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이시고 나의 주인이시라고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만원짜리 만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나의 성질과 이기심과 생각들이 죽고 예수로 살고, 예수님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이고, 우리가 극복해야할 시험이리라. 이 책은 이런 시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광의 무게 믿음의 글들 26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C.S. 루이스! 누가 뭐래도 그는 이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다. 철저하게 무신론자였던 그였기에 이렇게 순도 높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어릴 적부터 기독교인이었던 나의 말은 그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함을 철저하게 통감한다.

  영광의 무게! 그에게 영광의 무게란 비천과 영광이라는 믿기 어려운 두 가능성 사이에서 칼날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치열함일 것이다. 이 시대 기독교는 영광의 신학을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는 것, 그것이 이 시대 교회의 최대의 메시지이고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광이란 말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루이스는 이 사실을 철저하게 직시했던 것이다. 당시 2차대전이라는 혼란스러운 사회 가운데에서 기독교인의 의무를 항상 기억하고 살았던 그이기에 그의 글에선 무게가 느껴진다. 전시라고 할지라도 매일 해야하는 학문의 길을 걸어가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반전을 이야기할 때 사랑으로서의 전쟁을 선언할 수 있는 그의 입담은 단순히 이상이나 머릿 속의 사고가 아니라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기독교는 애국도 없고, 그저 다른 사람의 피에 무임승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더군다나 집총 거부를 외치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루이스가 이야기했듯이 철저한 개인적인 종교는 없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적인 규약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인 평화를 외쳐야 한다. 광우병을 이야기하고, 미군 기지 철수를 외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빨갱이라 말한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란 쓸데없이 이런저런 일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고 오해한다. 말만 앞서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단호히 기독교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내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지옥에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겠노라는 바울의 말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루이스는 이 시대의 바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나니아 연대기에 분명히 드러난다. 다른 아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비천에 떨어지는 사자의 모습, 이것이 예수의 모습이고, 기독교의 나아갈 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러한 그의 사상이 한국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반지의 제왕에 열광하면서 영웅이 되기를 꿈꾸지만 사자와 같은 비천함을 통하여 다른 이를 사랑하는 나니아 연대기에는 시큰둥하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고,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부디 바라기는 한국 교회가 영광의 무게를 자각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 교회는 결코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여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곳곳에 스며있는 단편적인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숙고할 가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모르는 예수 - 톨스토이 스토리 바이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동진 옮김 / 해누리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톨스토이라는 러시아의 대문호가 성경을 새롭게 썼다. 그 부제만으로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너무 두거워서 읽기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문고판인 관계로 가지고 다니기도 쉽고, 내용도 그렇게 빡빡하지 않았던 관계로 읽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그러나 그 내용이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책들이 아니고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작가의 상상력과 철학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일 뿐인데 왜 이리 읽기가 어려운 것일까? 마지막까지 책을 읽고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인생의 문제를 만나 종교에서 답을 찾고자 했던 톨스토이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만난 기독교, 그가 발견한 성경의 진리, 그가 가진 철학과 신학이 이 안에 녹아 있기 때문에 쉬운 문체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너무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 치우쳐 버렸기 때문에 읽기가 더 난해한 것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배제하고 있다. 서론에서 기독교의 복음서들이 그 안에 잘목된 가르침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겠다는 포부를 접하면서 톨스토이의 생각의 단면을 알게 된다. 성경의 율법적인 부분들을 빼내어 하나로 재구성하려는 노력들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분명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을 조금식 변형시켜 놓았을 뿐인데 왠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신비와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버리고 그의 사역과 말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잇었다. 십계명을 대체하려는 듯한 예수의 5계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의 계명과 가르침이란 구약과 대립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톨스토이의 시각이 내 신경을 계속 긁고 있다고 할까? 원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교회가 만들어온 역사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그의 신앙관은 순수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신앙관이 절대로 원시 기독교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도 원시 기독교에 가가워지려고 노력하면서도 왜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신비와 부활이라는 신비의 사건과 구원을 빼버렸단 말인가?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낙관주의의 한 단면을 여기에서 바라보게 된다.

  성경은 분명 윤리와 율법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책이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전부는 아니다. 성경의 본질이 윤리이고 도덕이라면 차라리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고 변화가 된다는 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성현의 가르침이나, 윤리적인 지침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비한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꿈꾸었듯이 윤리적으로 살기 때문에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 이 책은 지금까지 게으름을 피워온 기독교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힘이 있다.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뒤로 하고 지위를 높이고,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지향하는 성공을 꿈꾸는 오늘날의 교회에 원시 공동체가 품어 왔던 삶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니 2011-10-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혼어쩌구 하는데 톨스토이도 결국 중요한걸 배제한듯한 유물론적인 냄새가나네요.
머리말을 읽고서 뭐가 그리 문제가 될까 상당히 주목했는데
흠.. 읽는 도중입니다만 좀 위험한 책임.
톨스토이는 구원을 얻었을까 의문이네요 ㅎ

saint236 2011-10-24 01:34   좋아요 0 | URL
윤리와 신비! 믿음과 행함! 둘 중 어느 하나라도 포기되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성경은 지나치게 윤리와 행함으로 치우친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부분만 감안하고 읽는다면 오히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삶이 따르지 않아 손가락질 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만 톨스토이가 한쪽 편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만 분명히 기억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