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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1
미우라 아야꼬 지음, 정난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일본 문학을 처음 접하게된 건 미우라 아야꼬 씨의 작품을 대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순수하고 깊이를 가진 작가가 있었다니, 새삼 놀라면서 그녀의 작품을 깨나 섭렵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면 왠지 미우라 아야꼬를 들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에서도 꽤 알아주는 작가군에 속하는 것 같다. 사실 그녀는 일련의 많은 신앙 에세이를 발표했지만, 정작 자신을 일본에 널리 알리게된 계기는 <빙점>이 1964년 아사히신문 현상소설에 당선이 되고부터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원죄'에 그 주제를 삼고 있다. 이것 때문에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원죄 문학'을 만들어 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만큼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한 문학은 이전에는 없었다는 말일게다.
병원 원장인 게이조는 자신의 병원 안과에 근무하는 무라이와 자신의 아내 나쓰에가 불륜의 관계란 걸 눈치챈다. 게이조의 집에서 나쓰에와 무라이가 만나던 날, 그의 딸 루리코가 유괴 납치되 살해 당한다. 루리코가 죽은 것은 결국 아내 나쓰에와 무라이의 만나선 안되는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단정한 게이조는 나쓰에에게 복수할 양으로 루리코를 죽인 범인인의 딸을 입양해 키우게 한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범인이 딸을 남겨놓고 자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의 입양한 딸 요코의 정체를 나쓰에가 알게될 때의 배신과 모멸감을 게이조는 지켜 볼 수 있게되길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게이조도 자라가고 있는 요코를 지켜보는 것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나서 그전까지 요코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묘하게도 딸을 향한 부정(父精)이 아닌 육욕이었고, 자신이 아내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한 것인가를 반성하게도 되었다. 그런데 게이조 하나만 입다물고 있으면 될 줄 알았던 요코의 정체를 결국 나쓰에가 알아버렸고 결국 게이조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일이 번져 간다.
나쓰에는 당연히 그전까지 요코를 지극 정성으로 키웠지만 이젠 180도 변했고, 남편도 좋아하지 않게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오로지 아들 도오루 밖에 없다. 하지만 도오루 역시 요코의 정체를 알고부터는 요코에 대한 한없는 연민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오빠로서가 아닌 한 남자로서 요코를 사랑해주고 돌봐주고자 한다.
이 사실을 안 나쓰에와 게이조는 도오루와 요코를 떨어뜨려 놓기위해 신경전을 펼치고, 나쓰에는 모든 면에서 도오루보다 앞서는 요코에 대해 심한 실투와 잘못된 모성을 드러낸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다 큰 청년이 된 아들의 친구 기타하라에 대해 연정을 품게되고, 요코를 좋아하게된 기타하라를 보면서 강한 질투와 애증을 품은 나쓰에는 결국 기타하라 앞에서 요코의 정체를 폭로하고만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된 요코는 결국 자살을 하게되고 미수에 그쳤지만, 그 순간 요코가 범인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게이조는 요코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된다는 것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어찌보면 작가는, 게이조의 가족을 통해 '가족' 이라고 하는 허울만 썼을 뿐 인간의 원형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한 이불을 덮고 자지만 남남일 수 밖에 없고 가슴에 칼을 품고 살고, 자신만이 불쌍한 요코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도오루는나중에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는 그것은 정말로 요코를 위하는 방법이 아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요코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실이라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편에 흐르는 요코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자신은 선택할 수 있다는 실존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막상 죄는 요코 자신이 아니고 요코의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지었음에도(나중에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하지만)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죄의 피가 그 자식에게도 전승되고 있다는 강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 어디에도 부모가 살인자라고 해서 그 자식도 살인자가 될거라는 건 근거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올가미를 씌우길 좋아하고 자신도 그 올가미의 덫에 걸리고 만다. 그런데도 요코는 항상 바른 생각과 일관성있는 행동으로 그런 인간이 만들어 놓은 운명의 굴레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한 요코를 재외한 나머지 사람은 그 사실로 인해 인간의 육욕과 이기적 자아를 알게 모르게 들어내고 만다.
그리고 요코가 범인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결국 인간은 뭔가의 마법에서 풀려남과 동시에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건 역시 작가의 놀라운 자질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남의 자식이라도 잘 키워 보리라고 마음 먹었던 나쓰에가 범인의 자식이란 걸 알고 요코에 대하여 순간 마음을 닫고 아들 도오루와 가타하라를 사이에 두고 펼치는 여성 심리는 가히 백미라고 해야할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오늘 날의 시각에서 보기에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다. 요코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은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지적되고 있는 우연의 남발과 개연성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60년 대 중반에 쓰여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때는 충분히 특별한 문젯거리는 아니었을 거라고 본다.
내가 이 책에서 이색적으로 본 건 일본 사람들이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대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들의 친구도 아들처럼 대한다. 그래서 그 부모는 처음부터 그 아들의 친구에게 말을 내려쓰기도 한다. 또한 친구의 여동생도 자신에겐 동생 같기 때문에 어느 싯점에선 자연스럽게 말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그런 이해관계 없이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래서 아들의 친구에게도 연정을 품고, 아무리 입양된 딸이라도 욕욕을 느끼는 것을 가감없이 표현한다. 꼭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문득 오래 전 한때 독서계를 강타했던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란 책을 떠올렸다.
물론 이 책은 나중에 일본 사람들의 객관적인 검증없이 철저하게 주관적인 생각으로 일본 사람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사고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요컨대 사람이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나라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많은 미덕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우린 흔히 한물간 책은 잘 안 읽게되는 경향이 있다. 하물며 이제 출간된지 50년을 바라보는 이 책을 선듯 사서 본다는 게 마음 먹은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더구나 재독(再讀)은 더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선물을 받게 됐고 예전에 문고본으로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읽는 기쁨은 만만치 않게 컸다. 다시 읽으면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400페이지 넘는 도톰한 분량 두 권을 읽어 치우는데 동안 내내 즐거웠다. 역시 다 읽기를 잘했고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작가의 겸양과 섬세한 감수성에서 울어나오는 깊이 있는 문체가 이 책이 가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후에 속편이 나오기도 했는데 아마도 요코를 버린 부모를 만나고 용서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아직 속편을 읽지 못했는데, 전편 못지 않은 두께의 책 두 권이 내가 다 읽어주길 기다리는 것 같다. 조만간 속편도 읽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