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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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라부를 또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라이면 어떤가? 이라부가 뭐 어때서. 이 사람만 같이 살아도 세상이 지루할새가 없을지도 모른다.

선단공포증에 걸린 야쿠자의 두목. 공중 그네에서 늘 실패만을 하는 서커스 단원. 장인의 가발을 벗기고 싶어 안달이 난 이라부의 동창. 입스에 걸린 야구선수. 심인성 구토증에 걸린 여류작가가 그의 주요 환자다.

이들은 하나같이 뭔가의 강박증에 걸려있다. 그래서 가장 잘 기능해줘야 하는 부분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예를들면 선단공포증에 걸린 야쿠자. 야쿠자라면 칼을 비롯한 뭐든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부분을 무서워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서커스 단원이 공중에 매달리는 게 생명이라고 보는데 늘 공중 그네에서 실패해서 떨어진다면 말이 되는가? 야구 선수가 입스에 걸렸다면 선수로서의 생명은 끝 아닌가? 늘 작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혀나가길 바랬던 여류 작가는 어떤가?

왜 하필 가장 중요하게 기능해 줘야할 그것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살기 보다는 뭔가의 만들어진 틀 또는 가면에 규격화된 삶을 살아갈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도 처음엔 그 틀 또는 가면을 쓰지 못해 안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것을 쓰고 좋아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가면이 웬지 부담스럽고 이게 과연 나에게 맞는 것인가 회의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날 결국 그것 때문에 탈이나 이라부의 병원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환자들의 이야기만을 늘어놨다면 재미없었을 것이다. 진짜 재밌고 독특한 것은 이라부이다. 그는 신경과 의사로서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을 내리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범주를 벗어나 환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체험해 본다. 야쿠자는 야쿠자의 세계로, 서커스 단원은 서커스 단원으로 그것도 100kg로의 뚱뚱한 몸으로, 야구선수로, 작가로. 이라부의 세계는 온통 호기심 천국이다. 더구나 친구가 자신의 장인의 가발을 벗겨보고 싶다고 했을 때 기꺼이 공범이 되기를 자처하는 이라부.

실제로 이런 의사가 있을까 싶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가 만들어 준 가면을 쓰고 살지 말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는 같다. 그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기꺼이 자기 한몸 환자와 동행해 주는 이라부가 오히려 고맙지 않은가. 하지만 처음 이라부는 사람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존재는 못된다. 의사러고 하기엔 매력적인데가 어느 한군데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병원은 그야말로 후지기까지 하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겉보기에 매력적인 사람도 어느 한구석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고, 매력이란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 가만이 뜯어보고 겪어 볼수록 매력적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놀라운 것은 일본. 그 나라도 아직까지 신경 정신과 의사들은 의사 세계 안에서도 그렇게 선망 받지 못하는 분야일까 하는 점이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 될수록  인간 소외의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기 때문에 신경 정신과 의사들 또는 상담가의 위상은 그 중요도를 같이한다고 볼수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얼마전까지만해도 정신과 의사는 변방이라는 인식이 있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 몇년 사이 그들의 위상은 얼마나 높아졌는가? 그래도 아직까지는 자신이 신경 정신과 병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쉬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인간 사는 세상이 어떻게 좋아지길 기대하겠는가?

사람의 정신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가 정신에 병이 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라부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호기심 천국에 천진난만으로 만들었다. 이것도 자기나름의 건강 비법은 아니었을까? 사람의 하는 행동이 그다지 도덕적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과감하게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난 왠지 이라부가 또라이라기 보단 상당히 매력적인 인간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그 사람이 의식을 하든지 안하든지 어느 한구석 자기 약한 구석은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 또는 그 반대로 지나치게 그 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고착되어 있기도 하다. 자신을 좀 자유롭게 놔둘 필요가 있다. 저 창공을 날아오르는 공중 그네처럼. 설혹 그 밑은 떨어지면 나락이 될지언정.

나는 일본 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편인데 이 작품은 꽤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나오는 몇몇 단편은 그나름대로의 문학성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읽는내내 만족감이 있었다.

이 책을 선물해 주신 바람돌이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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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16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의 선물이라 질투심이 불타나
그대의 정성에 감흥하여 추천을 날리고 밥먹으러 휘리링~~(밥에 강박증 걸린)
-편파적인 추천만 하는 파란여우-

stella.K 2005-07-1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고맙습니다. 밥 맛있게 잡수이소.^^
 
지구 속 여행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읽는데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나 역시도 '과학'이란 말만 들어가면 겁부터 내는 체질이라 너무나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어도 선듯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쥘 베른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 콜렉션으로 기획 출간한 그 첫 권이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책들을 번역해서 유명한 김석희 씨가 또한 번역해서 낸 책이고. 최근에 프랑스 문학에 관심을 같게된 나로선 이만하면 탐을 내 봐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책을 붙들었을 때 과연 한마디로 술술 잘 읽혔다. 삽화도 끼어있어 재미를 한층 더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사람의 책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 베스트 5에 들어갈 만큼 유명한 책이란다.

그렇지 않아도 쥘  베른의 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만치 유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것은 성서를 제낀 수치라고 한다.('옥스퍼드 세계 고전 총서'에 포함된[해저 2만리] 의 영역본 '윌리엄 버치 번역 서문에 나온 말이란다.)

쥘 베른의 소설은 어린 아이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과학 교양 소설답게 과학에 관해(아마도 지질학이나 고고학 또는 지리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의 행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도 독득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겁많은 악셀(나중에 많은 고초 끝에 영웅으로 거듭나지만), 고집이 세고 엉뚱한 한번 마음 먹은 일은 끝장을 보고야 마는 악셀의 삼촌 리덴부로크 교수, 그리고 냉철하고 조용한 한스가 나온다.

특이하게도 지구 속 여행을 하면서 악당 같은 것은 만나지도 나오지도 않는다. 그들이 만나는 세상은 그저 놀라움 그 자체로만 되어있다. 특이하지 않은가?

악셀도 악셀이지만  내가 끌리는 인물은 악셀의 삼촌 리덴부로크 교수다. 언제나 그렇듯이 과학과 문명의 발전은 이렇게 고집세고 엉뚱한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죽을 고비를 눈 앞에 두고도 그는 절대로 자기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나랑은 정반대의 인물이다.

결국 그들은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닌다. 아마도 이것이 쥘베른을 어린 독자들에게 흡인력있게 다가가게 만드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아이들이 꿈과 포부를 이루어 가게만드는 정형을 보여주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모순과 제약들이 이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가는 동안 깍여지는 것일까? 그래도 살아가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그래서 신화를 만들어 내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를 쥘 베른은 촉구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하면 너무 과장됐다고 하려나?

나 역시도 이런 리덴부로크 같은 사람을 요즘엔 잘 만나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숨어 있는 걸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양식화되고 사회화된 인간군들이 더 많다. 그들은 더 이상 이상을 말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고 겉으론 강한 척 외롭지, 않은 척 하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지나치게 자기 고집이 강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은 타협할 줄 모른다고 해서 배척당하기도 쉽다. 하지만 길고 짧은 건 데봐야 안다고, 결과적으로 누가 인류 발전에 공헌을 하게될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기사 이들의 모험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끝에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도 쥘 베른은 그들을 성공적 인물로 만들었고 동시에 그의 작품도 성공을 거두게 됐다. 과학과 문학의 개가라고 해야하려나? 아니면 신화와 문학의 개가라고 해야하려나?

하기사 오늘 어떤 이의 블로그에 들어가서 유난히 눈에 띈 구절이 있었다. 인생을 망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좌절이라고.  문학에 있어서 좌절된 욕망의 투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승리를 쟁취한 해피 엔딩이 더 낫지 않을까?

아무튼 이 책은 흥미진진한 책이다. 읽으면서 내내 리덴부로크 같은 사람이 그리웠다. 다소는 엉뚱해도 자신의 사명에 매달리고 충실한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쉬운 작금의 현실에서 고전의 새로운 발굴은 이 사회를 어느만치 희석시켜 줄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나름의 공헌은 할 것이라고 본다. 고전을 읽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독서 행위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을테니. 그런 와중에 전문 번역가의 이러한 작업은 반갑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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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4-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을 선물해 주신 발마스님께 다시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근데 궁금한 것이 생겼다. 번역가 김석희 씨는 프랑스 문학 전문번역간데 어떻게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번역할 수 있었을까? 시오노 나나미는 알다시피 일본인이면서 이탈리아에 거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녀가 일본어러 책을 썼던가, 이탈리아어로 쓰지 않았을까?
중역을 했나? 헷갈린다. 누가 정확한 정보를 주셨으면 한다.

잉크냄새 2005-04-21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저 이만리>인가요? 초등학생때 읽은 소설중 기억에 오래도록 남은 소설인데...
지금 다시 읽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stella.K 2005-04-21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쥘 베른은 문제적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결혼생활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나와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작품에서도 여자는 그다지 중요하게 나타나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굉장히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쉬워서 씹히는 맛은(생각하게 만드는) 좀 덜한 것 같긴 하지만 읽어서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빙점 1
미우라 아야꼬 지음, 정난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일본 문학을 처음 접하게된 건 미우라 아야꼬 씨의 작품을 대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순수하고 깊이를 가진 작가가 있었다니, 새삼 놀라면서 그녀의 작품을 깨나 섭렵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면 왠지 미우라 아야꼬를 들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에서도 꽤 알아주는 작가군에 속하는 것 같다. 사실 그녀는 일련의 많은 신앙 에세이를 발표했지만, 정작 자신을 일본에 널리 알리게된 계기는 <빙점>이 1964년 아사히신문 현상소설에 당선이 되고부터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원죄'에 그 주제를 삼고 있다. 이것 때문에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원죄 문학'을 만들어 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만큼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한 문학은 이전에는 없었다는 말일게다.

병원 원장인 게이조는 자신의 병원 안과에 근무하는 무라이와 자신의 아내 나쓰에가 불륜의 관계란 걸 눈치챈다. 게이조의 집에서 나쓰에와 무라이가 만나던 날, 그의 딸 루리코가 유괴 납치되 살해 당한다. 루리코가 죽은 것은 결국 아내 나쓰에와 무라이의 만나선 안되는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단정한 게이조는 나쓰에에게 복수할 양으로 루리코를 죽인 범인인의 딸을 입양해 키우게 한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범인이 딸을 남겨놓고 자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의 입양한 딸 요코의 정체를 나쓰에가 알게될 때의 배신과 모멸감을 게이조는 지켜 볼 수 있게되길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게이조도 자라가고 있는 요코를 지켜보는 것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나서 그전까지 요코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묘하게도 딸을 향한 부정(父精)이 아닌 육욕이었고, 자신이 아내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한 것인가를 반성하게도 되었다. 그런데 게이조 하나만 입다물고 있으면 될 줄 알았던 요코의 정체를 결국 나쓰에가 알아버렸고 결국 게이조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일이 번져 간다.

나쓰에는 당연히 그전까지 요코를 지극 정성으로 키웠지만 이젠 180도 변했고, 남편도 좋아하지 않게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오로지 아들 도오루 밖에 없다. 하지만 도오루 역시 요코의 정체를 알고부터는 요코에 대한 한없는 연민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오빠로서가 아닌 한 남자로서 요코를 사랑해주고 돌봐주고자 한다.

이 사실을 안 나쓰에와 게이조는 도오루와 요코를 떨어뜨려 놓기위해 신경전을 펼치고, 나쓰에는 모든 면에서 도오루보다 앞서는 요코에 대해 심한 실투와 잘못된 모성을 드러낸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다 큰 청년이 된 아들의 친구 기타하라에 대해 연정을 품게되고, 요코를 좋아하게된 기타하라를 보면서 강한 질투와 애증을 품은 나쓰에는 결국 기타하라 앞에서 요코의 정체를 폭로하고만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된 요코는 결국 자살을 하게되고 미수에 그쳤지만, 그 순간 요코가 범인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게이조는 요코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된다는 것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어찌보면 작가는, 게이조의 가족을 통해 '가족' 이라고 하는 허울만 썼을 뿐 인간의 원형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한 이불을 덮고 자지만 남남일 수 밖에 없고 가슴에 칼을 품고 살고, 자신만이 불쌍한 요코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도오루는나중에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는 그것은 정말로 요코를 위하는 방법이 아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요코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실이라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편에 흐르는 요코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자신은 선택할 수 있다는 실존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막상 죄는 요코 자신이 아니고 요코의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지었음에도(나중에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하지만)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죄의 피가 그 자식에게도 전승되고 있다는 강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 어디에도 부모가 살인자라고 해서 그 자식도 살인자가 될거라는 건 근거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올가미를 씌우길 좋아하고 자신도 그 올가미의 덫에 걸리고 만다. 그런데도 요코는 항상 바른 생각과 일관성있는 행동으로 그런 인간이 만들어 놓은 운명의 굴레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한 요코를 재외한 나머지 사람은 그 사실로 인해 인간의 육욕과 이기적 자아를 알게 모르게 들어내고 만다.    

그리고 요코가 범인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결국 인간은 뭔가의 마법에서 풀려남과 동시에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건 역시 작가의 놀라운 자질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남의 자식이라도 잘 키워 보리라고 마음 먹었던 나쓰에가 범인의 자식이란 걸 알고 요코에 대하여 순간 마음을 닫고 아들 도오루와 가타하라를 사이에 두고 펼치는 여성 심리는 가히 백미라고 해야할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오늘 날의 시각에서 보기에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다. 요코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은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지적되고 있는 우연의 남발과 개연성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60년 대 중반에 쓰여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때는 충분히 특별한 문젯거리는 아니었을 거라고 본다.

내가 이 책에서 이색적으로  본 건 일본 사람들이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대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들의 친구도 아들처럼 대한다. 그래서 그 부모는 처음부터 그 아들의 친구에게 말을 내려쓰기도 한다. 또한 친구의 여동생도 자신에겐 동생 같기 때문에 어느 싯점에선 자연스럽게 말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그런 이해관계 없이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래서 아들의 친구에게도 연정을 품고, 아무리 입양된 딸이라도 욕욕을 느끼는 것을 가감없이 표현한다. 꼭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문득 오래 전 한때 독서계를 강타했던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란 책을 떠올렸다.

물론 이 책은 나중에 일본 사람들의 객관적인 검증없이 철저하게 주관적인 생각으로 일본 사람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사고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요컨대 사람이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나라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많은 미덕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우린 흔히 한물간 책은 잘 안 읽게되는 경향이 있다. 하물며 이제 출간된지 50년을 바라보는 이 책을 선듯 사서 본다는 게 마음 먹은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더구나 재독(再讀)은 더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선물을 받게 됐고 예전에 문고본으로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읽는 기쁨은 만만치 않게 컸다. 다시 읽으면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400페이지 넘는 도톰한 분량 두 권을 읽어 치우는데 동안 내내 즐거웠다. 역시 다 읽기를 잘했고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작가의 겸양과 섬세한 감수성에서 울어나오는 깊이 있는 문체가 이 책이 가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후에 속편이 나오기도 했는데 아마도 요코를 버린 부모를 만나고 용서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아직 속편을 읽지 못했는데, 전편 못지 않은 두께의 책 두 권이 내가 다 읽어주길 기다리는 것 같다. 조만간 속편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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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2-17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고맙습니다 여울효주님.^^

stella.K 2005-02-17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 책은 전에 물만두님이 선물 하신 것인데, 좋은 책 읽게해주신 물만두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잉크냄새 2005-02-17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빙점...참 오래도록 많이 들은 말인데, 그 소설속의 내용을 님의 리뷰를 통해 알게 되었네요. 원죄 문학...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본이 이 부분에 대한 탐구가 심오한것 같아요.

stella.K 2005-02-17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도 한번 읽어 보세요. 추천 고마워요.^^

니르바나 2005-02-1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작가로 드물게 기독교 사상을 소설에 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내용이 온전하게 기억나지 않지만요.
저도 미우라 아야꼬의 글을 좋아하였습니다. 스텔라님

stella.K 2005-02-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고맙습니다.^^

인터라겐 2005-03-1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책 고등학교때 보고 난후 작년이던가 다시 읽었어요..
같은 책을 읽어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달르게 느껴지는건 책을 읽는 기쁨같아요...마지못해 읽어야했을때와 내가 원해서 읽을때가 또 다른거든요..ㅎㅎ

안녕, 토토 2005-04-2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일 좋아하는 소설중에 하나예요. 어렸을때 완역본으로 읽어서 그랬는지 나쓰에의 심리가 제일 쇼크였고, 그만큼 설득력있었구요. 아마 이 소설을 읽은 뒤로 '엄마도 여자다.' 라는걸 받아들일 수 있었나봐요. 나쓰에와 요코의 관계라는건 실제 모녀지간이라도해도 가능한 일이고, 그걸 어떤 범죄를 계기로 설득력있게 만들어준 것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음.스포일러 되지는 않겠죠? 2부에서는 나쓰에와 친해지는 과정, 그리고 나쓰에 아빠(요코 외할아버지)네 놀러가서 나누는 대화, 요코의 친부모 (엄마는 몸이 약했나 그러고, 아빠는 전쟁에 참전했나 암튼 둘다 젊어서 죽은걸로 이야기 전해듣는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지가 않네요.)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깊었구요. 진짜 범인의 딸-도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전편에 비해서 뒤편은 기독교 색채가 더 진해지고 용서라는 주제에 더 깊이 들어갔던것가아요.

꼭읽고싶어요 2008-10-07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책 구입 하고 싶거든요^^;; 이미 절판되서 다른 인터넷 서점이나 중고책 조차 구하기 힘들더라고요 ㅠㅠ 혹시 이 책 소장 하고 계신분은 저한테 판매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빙점1권 과 속빙점1권만 구입 하고 싶지만 판매자에 따라 4권 모두 판매 하신다고 하면 모두 구입 하겠습니다.
가격은 각권당 최고 15000원까지 드리겠습니다.. 판매의향이 있으신 분은 메일로 연락 주세요^^teation@naver.com
 
세상 끝의 정원 - 바깥의 소설 30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독자들이 흔히 외국 문학을 대할 때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나라는 어느 나라가 될까? 아마도 러시아 문학이 일순위에 놓이지 않을까? 그것은 아마도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또는 체홉 같은 당대 최고의 문학가들의 명성이 오늘 날까지도 전해지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또한 그것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거쳐야할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접하게되는 외국 문학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등이 되겠지. 그리고 독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최근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도가 되려나?

그러고보면 지구상에 몇 백 개의 나라가 있고 그 나라마다 고유 문학이 있을 것임에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외국 문학은 극히 한정적적이란 생각을, 나는 가브리엘 루아의 <세상 끝의 정원>이란 책을 붙잡으면서 새삼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권위있는 출판사 중의 하나인 <현대문학>이 '바깥의 소설'이란 기획하에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있지 않은 제3 세계 문학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번역 출판된 모양이다.

가브리엘 루아는 이미 MBC <느낌표!>란 프로에서  <내 생애의 아이들>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캐나다 출신의 작가이다.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인데, 이 <세상 끝의 정원은> 우연치 않게도 나의 서재 이웃인 플레져님께 선물을 받음으로서 읽게된 책이다.

그러고 보면 나로선 캐나다 문학을 처음 접한 책이 된 셈이된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 어느 누구의 캐나다 문학을 접한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탓일게다. 그러니 우리나라 유수한 출판사가 이제사 '바깥의 소설'이라 하여 겨우 알려졌으니 우리나라에선 제3세계 문학일 수 밖엔 없겠만, 이것이 캐나다에선 얼마나 놀라운 사실로 받아 들여질까 새삼 씁슬한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놀랍게도 그 특유의 대륙적 정서가 느껴져 감탄을 하며 읽었더랬다. 정말 작가의 배경 묘사나 심리 묘사, 인생을 관조하는 작가 특유의 필치가 상당히 노련하다는 느낌을 갖게했다. 그것은 마치 이 책의 첫번째 단편인 '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를 읽으면서 톨스토이의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한 나그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를 읽으면서는 마치 체홉의 어느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었다.

특히 이 책의 표제작 '세상 끝의 정원'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주인공 마르타가 캐나다로 이주해 남편과 함께 힘들게 정착해 살면서 아이들 낳고,  아이들은 장성해서 영어를 잘 하지만 자신과 남편은 영어를 끝내 잘 하지 못하는 것에서 끝내 캐나다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하는 삶을, 암이 걸린 늙은 몸뚱이로 자신의 지난  날을 회고하고 인생을 관조내고 있는 것에서 우리나라의 애니깽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가브리엘 루아는 기자겸 소설가였다. 그녀는, 기자로서 밥벌이 및 직업적 구속과 작가가 되려는 야심을 서로 조화롭게 타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녀는 매년 분명히 구분되는 두 가지의 생활 패턴을 반복하려고 노력했단다. 하나는 장소 이동과 모험, 다른 한편으로는 고요히 물러나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작품해설 250p)이 그것이다.

그녀의 글쓰기는, 나이가 많아지고 건강이 쇠약해지고 친구들이 떠나고, 직업적인 걱정이 희미해지고, 그리하여 그의 삶과 존재가 군더더기 없이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나면서 글쓰기는 마침내그 본질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자신의 최후에 대비해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회한도 두려움도 없이 오직 태연함, 관조와 화해와 위안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이제 마침내 일생 동안 경작해 온 자신의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완성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이 늙은 여인은 오직 자신의 붓끝에서 태어나 현재의 삶을,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정당화시켜 줄 단어, 문장, 이야기, 오직 그것에만 기대를 걸고 바로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글쓰는 것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며 우리를 해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말한다.(259p)             

역시 대가다운 면모를 느끼게 하는 글쓰기에 대한 통찰이고 철학이란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 대륙적 정서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것은 캐나다의 그 드넓은 평원과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척박한 그 나라의 환경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끝으로 제3 세계의 문학(프랑스 어)을  유려하게 우리나라 말로 옮기는데 번역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역자인 김화영 교수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그의 번역은 신뢰할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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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5-01-0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가중에서 김화영교수만한 분도 드물지요.

문학평론과 시를 쓰셔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 분이 쓰시는 수필이 참 좋아요.

글이 그림으로 척하니 변신하는 글을 만나는 일이 그리 많지 않기에 하는 말입니다.

stella.K 2005-01-09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화영 교수라면 신뢰하죠. 추천 감사해요.^^

미네르바 2005-01-0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브리엘 루아 작품 <내 생애의 아이들>을 읽고 이 사람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보고 싶었지요. 그 중에 하나가 이 책<세상 끝의 정원>이었는데 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꼭 읽어 보고 싶어 지네요. 저도 김화영 교수의 번역은 무조건 신뢰하지요. 번역가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분이에요.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데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첫번째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는 번역 일도 조금 했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이 책 다음에 읽어보아야겠네요. 저도 추천할게요.^^

stella.K 2005-01-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미네르바님 저는 <내 생애의 아이들>읽을려고 하는데요. 흐흐. 추천 고마워요.^^

로드무비 2005-01-1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뒤늦게 읽었답니다.

마음먹고 쓰신 리뷰군요.

추천은 뒤늦지 않았죠?ㅎㅎ

stella.K 2005-01-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플레져 2005-01-1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아니... 언제 쓰신거야요!!
와... 너무 읽고 싶어요. 도로 달라고 할 수도 없고 ㅋㅋㅋ
스텔라님, 좋은 리뷰여요! 늦게 봤지만, 참 좋았어요.
도서관에서 빌려서라도 읽어볼게요. 당근, 추천!!

stella.K 2005-01-2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플레져님이 일부러 뒷짐지고 있는 줄 알았죠. 리뷰 당선 이벤트 하신다고 해서, 이 작품으로 금주의 리뷰 당선 기대해 봤는데, 추천을 네분에게서나 받았었으니까요. 그런데 역시 안 됐어요. 으~어떻게 하면 리뷰 당선될까요? 그것도 과외 받아야 하나? ㅜ.ㅜ. 암튼 고마워요. 늦게라도 봐주니...^^

바람구두 2005-02-1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스텔라님... 이번 리뷰는 정말 아깝네요. 이 주의 리뷰에 올려도 좋았을 텐데... 다만 한 가지 문장 첫 머리에 주어가 아닌 "그러고 보면, 하지만, 특히, 역시" 등이 반복되는 문장 습관은 주의가 필요할 듯 싶군요. 물론 추천은 하고 갑니다. 흐흐.

stella.K 2005-02-1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예리하시군요. 바람구두님의 예리한 지적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그리 잘 쓴 리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많은 분들이 추천해 주셔서 이 글을 썼던 주에 혹시 당선작 내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답니다. 하지만 역시 안됐죠. 하지만 바람구두님이 잘 썼다고 하시면 정말 잘 쓴거여요. 그죠? 추천 감사해요.^^
 
천안문
샨 사 지음, 성귀수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우선, 문체가 좋다. 중국인인 저자가 프랑스에 가서 7년만에 써낸 프랑스어 소설이란다. 7년 동안 죽어라고 프랑스어 공부하면 이렇게 써낼 수 있는 걸까?

  책 제목이 암시하듯 천안문 사태를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소설이다. 읽고 난 느낌은 참 아련하다. 겉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천안문 사태의 가담자 중 한 사람인 아야메를 체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그녀를 쫒는 장교 자오의 추격이 소설의 중심축이다. 그러나 둘은 쫓고 쫓길 뿐 만나지 않는다. 단지 아야메를 쫓는 자오의 쌍안경을 통해 먼발치에 있는 그녀의 모슴을 줌으로 끌어 당기는 데서 소설은 끝난다.

그리고 병사 하나가 자오의 귀에다 대고 "뭘 보셨습니까?" 할 때 그는 병사를 돌아 보며, "아니, 아무 것도."라고 말하며 이 소설을 끝맺는다.

보통은 드라마 <모래시계>처럼 그런 혁명을 배경으로 했다면 뭔가 진한 감동의 러브 스토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뭐든 평온하고, 충만할 때 인간의 내면은 고여있는 법. 외부에서 요동칠 때 인간은 과격해 진다든지, 더 치열해지고 강한 인간애를 표출해 내는 법이다.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건, 진한 동료애건 간에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참으로 특이하게도 두 남녀 주인공이 옷깃조차 스치질 않는다. 자오는 오직 아야메의 집을 수색할 때 발견한 그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녀의 삶을 추적할 뿐이다. 그녀의 삶을 느끼고 유추해 내는 과정에서 그녀의 행방을 쫓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상부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야메는 중등시절 전학 온 짝 민을 돌봐주다 서로의 우정을 키워간다. 그러나 민은 전학 올 때부터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같은 반 아이들로부터 심지어는 담임 선생에게 까지 달돌림을 받는다. 선생님은 그런 민을 아야메와 짝이 되게 한건 아야메가 공부를 잘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우정이 알려지면서 담임 선생은 둘을 갈라 놓게되고 결국 민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는 강경한 조처를 내린다. 이에 민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어느 학교에서도 자기를 받아주지 않자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결국 아야메는 학교와 사회에 강한 불만과 울분을 쌓아가게 되고 결국 천안문 사태의 가담자로 쫓기는 신세에까지 이른다.

자오는 그런 아야메의 일기를 읽으면서 무조건 그녀를 잡아들이려 하기 보단, 과연 이 여자는 과연 누구인가 궁금즈을 품게된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현 정권에 대한 강한 불만이 증폭되어 터져 나오는 것을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건 그 어느 한 순간에도 인간이 이슈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인간은 역사의 주체다. 하지만 역사학자는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객관적인 측면에서 서술하기에 노력해야겠지만, 작가는 그런 주체인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데 더 주력한다. 그것이 아무리 허구일망정 말이다.

작가 샨사는 참으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다. 그의 문체는 깔끔하고 유려하다. 아마도 자오가 쌍안경을 통해 아야메를 발견하는 것에서 소설을 끝낼 생각을 한 것은 어떤 면에선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 내면을 끊임없는 객관적인 시야로 탐미하려고 했던  보다 열린 결말이란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족을 달자면,  요즘 프랑스에선 아멜리 노통과 샨사가 문단에서 주목을 받는단다. 나 개인적으론 리뷰는 쓰지 않았지만, 이전에 읽은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보다 샨사의 이 작품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솔직히 별 네 개를 주기엔 많고 세 개 주기엔 인색해 보이 작품이 이 작품이다. 세 개 반이라면 딱 좋을텐데 말이다. 그래도 네 개 주는 것이 세 개 주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서 네 개를 준다.

* 리뷰 제목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는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 인용한 말인데, 책장 말미에 나오는 역자의 글도 새겨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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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2-15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인간 내면을 끊임없는 객관적인 시야로 탐미하려고 했던 보다 열린 결말".... 이라는 말... 읽어보지 못한 소설임에도 끄덕끄덕 동조하게 만듭니다.

stella.K 2004-12-1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호! 내가 잉크님의 추천을 봤다니...기뻐요.^^

놀자 2005-01-2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몇일 전에 이 책 읽었는데..^^~

바둑두는 여자도 진짜 재미있게 봐서 샨사의 작품에 관심이가서

천안문도 봤는데 바둑두는 여자보다는 아니지만.

재미있었거든요...^^ 그 뒤로 샨사 팬! 샨사의 최신작도 보고 싶네요.

글구 리뷰 넘 멋져요~! 추천 찍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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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토토 2005-04-2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제 취향이예요. 너무 노골적이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관찰하다니 멋지잖아요.. (음... 첨보는 작가인데 일단 담아둬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