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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나에겐 병이 있다
작가 김애란이 80년 생이란다. 나 보다 한참 어리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녀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그맘도 30세를 훌쩍 넘긴 나이니. 글쎄, 이 30대란 나잇대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앞에서 세자면 적지 않은 나인데, 뒤에서 세보면 그 나이도 어리다. 사춘기를 어린이도 아닌 것이 어른도 아닌 것이 어찌보면 괴물 같기도 하다고 했다. 30대가 또 좀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내 나이 스물 다섯도 많다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되면 어떻게 하나 막막한 느낌이었는데, 내 나이 30이 되었을 때 뭔가의 강 하나를 건너 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난 그저 강 하나를 건넜을 뿐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확실히 그때도 젊었고, 어른이 되기엔 아직도 어린 나이란 생각을 한다.
나에겐 병이 있다. 젊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병. 특히 다른 분야는 몰라도 문학에서 어떤 젊은 작가가 나름 문단계에서 주목을 받고, 그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난 여간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젊은 패기 하나는 인정해 줄지 몰라도(가능성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실험적인 문장, 뭔지도 모를 현학적인 미사여구에, 안 그래도 느림보 독서인 나는 그런 것들을 붙들고 있을 시간적 여력이 없다. 그리고 어떤 책이든 독서를 꾸준히 해 온 타입이라면, 이책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책. 이건 좀 나랑 안 맞을 것 같은 책을 구분하게 된다. 물론 개중엔 파악이 어려운 책도 있다. 그런 책들은 읽어보기 전엔 뭐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런 내가 김애란만큼은 정말 넘어가기 힘든 난맥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의 명성을 몇 년 전부터 익히 들어왔고, 작가의 첫 장편에 워낙에 반응이 뜨거웠던터라, 그냥 넘기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을 것만 같았다.
작가가 극작을 전공해서일까? 대사의 감칠맛이 있고, 모든 소설가는 처음엔 다 시인이었다는 속설이있듯, 작가 역시도 시 꽤나 읽은 양, 싯적 문장도 나름 돋보인다. 게다가 주인공 아름이 서하와 이메일로 주고 받은 편지는 오래 전에 읽었던 <소피의 세계>를 연상케도 했다. 그런 것으로 봐 작가가 얼마나 가능성이 많은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육체의 물음
이책을 읽으려니 최근 난 본의 아니게 인간의 육체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게 만드는 책을 읽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와 박범신 작가의 <은교>였다.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인간의 육체를 거꾸로 되돌리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과연 무엇인가를 압축된 문장속에 진지하게 묻고 있다. 또한 박범신의 작품은 육체의 소멸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오욕칠정을 과감하면서도 강렬한 문체로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조로증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을 통해, 너무 일찍 노쇄 해버린 인간의 육체가 정신의 발달을 뛰어넘는 한계 상황을 담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면 주인공 한아름이 아직 겪지 않아도 되는 노화 과정에서 걸릴 수 있는 병을 몸소 겪으면서, '육체는 철저하게 독자적이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건강할 땐 몰랐던 육체의 고통이 도대체 내 몸 어디에 숨어서 나를 이토록 처절하게 아프게 만드는가? 그런데 비해 우린 건강할 땐 너무나 그것을 잊고 몸을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작품에 없는 것.
얼마 전, 조경란 작가를 만났던 자리에서 그녀는, 요즘 젊은 작가들의 글쓰기 태도에 대해 부럽다는 말을 남긴 것을 기억한다. 자신은 너무나 힘들고, 때론 고통스럽게 쓸 때가 많은데 요즘 젊은 작가들은 정말 즐기면서 작업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만일 실제로 그런 작가가 있다면 그건 정말 문학을 너무 쉽게 보고 하는 것이고, 그들도 글이란 쓰면 쓸수록, 문학은 알면 알수록 어려운 대상임을 시마다, 때마다 알게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또 조경란 작가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박범신 작가는 그의 한 산문집에서, 요즘 젊은 작가는 모든지 다 잘한다고 했다. 그들의 주특기인 글쓰기는 물론이고, 연애도 잘 하고, 공부도 잘하고, 취미 활동도 잘하고 한마디로 만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매력은 없다고 했다. 그들은 (아직) 진정한 결핍이란 게 뭔지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감한다. 이 작품을 보라. 어디에 결핍이 나타나는가? 어디에 생에 대한 갈망과 처절함이 베어 있나? 놀라웠던 건, 문체의 미학은 어느만치 구축한 것 같지만, 작품 전반은 너무 착함이 흐른다. 17세. 한창 혈기가 방자할 때 죽음을 맞이하게 된 한아름이 과연 소년다운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몸이 조로라고 해서 영혼도 애늙은이 일수는 없다. 마치 자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살다가 죽을 사람처럼 모든 것에 초탈하다. 그것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은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안하던 짓도 하고, 인생의 모험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신을 태워버리기도 한다는데, 그래도 꼭 한번은 자기 생의 모험을 감행하는 뭔가가 있어줘야 하지 않는가? 육체가 그렇다고 해서 정신까지 그렇게 그려버리는 작가가 나는 아쉬웠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주인공에 대한 천착이 부족한 듯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뭘 하고 싶냐는 물음에 계속 모호한 대답으로 일갈하지 않는가?
그나마 서하와 뭔가의 섬씽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또 알고 봤더니 사이버 가상 인물로 밝혀져, 아름은 고사하고 읽는 나도 뭔가 사기당한 느낌이었다. 후에 장씨 할아버지와 뭔가의 모험이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한다는 것이 미라를 설득해 아름과 함께 외출을 해 소주팩에 빨대를 꽂아 빨아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리도 진지한 걸까? 아름이 생애 마지막 외출인데 휘날레 치곤 너무 노회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이 늙었지만 장씨 할아버지는 아름에게 나름 젊은이라면 할 수 있는 뭔가의 미션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야 한다. 그래야 아름이 죽었을 때 섭섭치 않게 이승을 떠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가능성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꼭 있어야만 했던 것
그건 뭐 남의 작품이나 말할 자격이 없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명백히 없는 것이 있다. 그건, 인간의 '오욕칠정'이 없다. 이것을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에 따라 작가의 역량이 인정을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한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같은 육체를 그려도 <은교>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보라. 이것을 얼마나 능숙하게 구사를 하고 있는가? 특히 '은교' 같은 경우는 이것을 끝까지 밀고나가 독자들까지도 벼랑 끝에 서게 만든다. 물론 여기서, 그들은 연륜이 쌓인 대작가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작가의 연륜 무시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무마하기엔 김애란 작가는 충분히 재능있는 작가다. 젊다면 젊은 패기가 보여져야 하는데, 그녀의 세계는 결핍, 간절함을 알기엔 너무 충만한 세계속에서 유유자적 해 보인다.
또 이렇게 말하면, 문학이 이렇게까지 엄숙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냥 가볍게 읽고 넘기는 소설도 소설은 소설이 아니냐고. 물론 취향의 문제일텐데, 물론 난 거기에 반론을 재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사이래로 문학은 이 인간의 오욕칠정의 문제를 가지고 다양한 변주를 하며 두터운 층위를 구축해 왔다. 취향 가지고 말하는 건 너무 문학을 쉽게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순간이 되면, 문학은 무엇이냐, 문학은 어때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참고로, 고 장영희 교수는 자신의 산문집에서 자신을 문학의 길로 이끈 한 은사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정의했다. 문학은 삶의 '교통순경'. 교통순경이 차들이 남의 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기 차선을 따라 반칙없이 잘 가고 있는가를 지키듯이,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문학의 숲을 거닐다' 39p) 또한, 박범신 작가는 자본주의 물결속에서 인간 본질이 무엇이고, 그것으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문학의 길이라고 말한 바있다. 그러므로 문학은 절대로 적당히 취급되거나 만만히 보아야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아직도 젊은 작가들을 신뢰하지 않는 건, 그들은 문체만 좋으면 다 좋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체는 그 작가의 고유의 색깔을 결정짓는 나름 중요한 분야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기능적인 측면이지 전체로 확대해석 해서 보는 건 좋지 않다. 나는 본 작품에서, 아름과 서하가 나는 이메일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좀 지루했는데, 이것은 자칫 신파로 나갈 우려가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 작품이 이토록이나 들끊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읽어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문체가 좋다고 하는가 본데, 문체에 가려 결국 문학의 본질은 체 건드리지도 못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조로는 아름이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경계하지 못한 인간의 성과주의가 조로다. 마케팅에 힘 입은 작품이 독자의 입소문을 타고 번져갔다. 덕분에 나도 낚시에 걸렸지만, 그래서 작가에게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도록 만든 꼴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 4,50대 빠르면 30대에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출판사도 먹고는 살아야겠지. 하지만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다루랬다고, 가능성 있는 작가가 너무 일찍 조로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것과 관련해서 조금 다른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위대한 탄생' 그렇게도 지탄해 마지 않는 건, 이런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이제 스물 갓 넘은 친구들이 노래 하나 잘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성공한 양 해 버리면 그들이 겪을 정체성의 혼란과 자본주의 물결을 거슬러 진정한 가수로 설 수 있을지, 겉포장의 화려함이 번데기의 과정을 겪지 않은 나비로 착각하지는 않는지 한심해 보였다. 요는 그만큼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치명적일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성숙의 문제
그래. 조경란 작가의 말대로 요즘 젊은 작가가 글을 즐기며 쓴다면, 그들은 절대로 혼자 외롭게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즐길거 다 즐겨가면서 작업할 것이다. 과연 그래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내가 볼 때 주목 받은 작가의 첫 장편이란 호들갑은 맞지 않아 보인다. 이건 중편 이상 나올 것이 없으며, 필요하면 단편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에필로그 이후 더 나올 이야기는 없어 보이는데 뭔지 모를 에필로그가 또 붙는다. 어쩌란 말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적어도 난 30대 말이 되고, 40이 넘어보니 비로소 사람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친구와 만나 1시간만 그 얘기를 들으면 그걸 글로 옮겨보고 싶어진다. 아, 이 친구의 얘기를 글로 옮길 수만 있다면...! 그는 그냥 수다를 떤 것이겠지만, 그 안에 인생의 역경과 희노애락과 얼마나 자기 본위적인가가 들려 그것을 글로 써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그 이전엔 사람말이 잘 안 들렸다. 내 아집이 강하고, 생각이 많아서. 지금이라면 쓸수 있을 것도 같다. 그만큼 글을 쓴다는 건 마라톤인 것 같다.
작가들에겐 30대의 문학이 다르고, 40대 문학이 다르고, 50, 60대 문학이 다르다고 한다. 난, 김애란 작가가 세상 평가에 휘둘리지 말로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 나로선 처음 대하는 그녀의 작품이지만, 난 이 정도의 느낌 밖에는 가질 수 없었다. 나에겐 좀 더 지켜봤으면 하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