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미학 오디세이> 라는 책을 읽었었다. '오디세이' 가 그리스 고전에서 나온 말인줄도 모르던 때 읽었기에 하물며 '미학 오디세이'라니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먹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기에 개인적으로 꼽는 인생책중의 하나다. 철학과 미학은 그 불분명함으로 인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이후로 한참동안 그 연결고리를 다시 접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얼마전부터에서야 고전이니 미술사니 하는 책들을 읽으면서도 때론 깨우침을 얻고 때론 그 자체에 감탄하면서도 미학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역사는 역사로서 배우고 그림은 그림으로써 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저 감상수준이었다. 물론 그러한 감상 자체만으로도 좋았지만 남겨진 질문들에 대해 무심히 덮어두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러한 잊혀진 질문들을 생각나게 했다. 그 질문들이 미학적일 수 있다는 오래전의 미학적 느낌을 그 연결고리를 되살려 주는 듯 했다.
저자는 미술을 비롯해 음악과 문학 그리고 영화를 넘나들며 질문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쓰여진 '미학 에세이'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아름답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끼기에 스스로 이해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저자가 언급하는 작품들을 몰라도 충분히 본문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참고자료는 충분했지만 나는 그 자료들에 대해 2차적 감상을 하기보다는 저자의 문장 그 자체에서 1차적 감상을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니까 저자는 다양한 예술작품들에 대해 미학적 사고를 했다면 나는 저자의 문장들에 대해 미학적 사고를 해봤다고나 할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듯한 현대 추상회화도 최소한 '이것도 예술인가?', '이런 작품을 그런 비싼 값에 팔아도 되는가?' 하는 판단을 하게 한다. (p. 17)> 어느 미술관련 책에서 벽에다 바나나 하나를 떡하니 붙여놓고는 코미디 라는 작품명을 붙인 것을 봤을 때 추상미술에 대해 몹시 난감한 마음이 들었더랬다. 화장실 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고 한 것은 미술사적으로 그래 의의가 있었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벽에 붙은 저 바나나 하나는 무어란 말인가... 하지만 그 바나나는 결국 나를 생각하게 한 셈이었다. 적어도 '저자는 왜?' 라는. <예술은 사유하게 한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까지 예술의 일부이다. (p. 18)> 그랬구나... 예술은 보기에 아름답거나 창의적으로 만들거나 거창한 상징을 가진 그 무언가만이 아니라 '사유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었구나... 내가 벽에 붙은 그 바나나 하나가 대체 왜 웃기는 코미디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의 연결성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려나... 그렇다면 나는 어떤 연결고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나? 나? 인간?? 사회???
<이름이든 사회적 호칭이든 기본적인 역할은 같다. '내가 여기 있다'고 그어놓은 실존의 마지노선이다. (p. 22)>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문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은 일단 이름이라는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불려지는 호칭이라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실존의 증거가 이름이라고 보면 저자가 말하는 '인간 증발' 방법에 대해 이름을 지우는 것에 대해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살아있으되 이름이 없다는 것에 대한 실존은 무엇으로 증거할까... 결국 그 이름없는 사람이 살아있음을 알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다. 이름이 없어져도 실존은 결국 타자에 의해서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데카르트는 '나'의 실존에 대해 '나의 생각' 에 초점을 두었고 이러한 생각이 근대적 철학을 일으켜 세웠다. '나' 와 '사회적 나' 는 참 따로 떼어생각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면 사회에서는 개인을 어떻게 보는가?
<인간을 기름처럼 퍼다 쓴 (p. 35)> 기업이 나라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과연 '나' 로서의 '개인'이 존재했었나? 하지만 그러한 '개인'들은 <낮은 보상을 수용하면서까지 보상 범위를 넓히고자 했다. (p. 42)> 자신들과 같은 피해를 당했을때 자신들보다 더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활로를 열어준 것으로 이미 희생당한 몸을 마지막까지 밑거름으로 썼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이 꺼끌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는 예술에 대해서도 매끄러운 것만 밝혀 온 것은 아닐까?
<매끄러움은 우리의 감각에서 흠, 상처, 끊김, 더러움, 고통을 제거해 부정성의 영역으로 넘기고, 매끄러운 자신은 어느새 '긍정적인 즐거움' 뿐인 긍정성의 영역이 된다. (p. 47)> 하지만 사회는 결코 매끄럽지 않다. 아무리 보지 않으려 해도 우리는 안다. <약자의 실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차별이, 여러 상이한 관계뜰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들 차별에서 국적, 인종, 피부색, 계급 같은 차이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p. 64) 작위적으로 그어진 경계에 의해 그때그때, 역사적으로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일시적인 지위들이다. 거역할 수 없이 자연적으로 주어졌거나 숙명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동일자와 타자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인공적 경계다. (p. 65)> 이 경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언어'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타자의 언어가 고통당하지 않게 하려면, 나의 언어에 '함몰되거나 통합'되도록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 나의 언어와 동등한 언어로 배려해야 한다. (p. 69) 약자의 언어를 억압하는 것은 육신을 구속하는 일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언어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p. 70)> 하다못해 재가 지금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언어'에 의해서 가능하다. 태어나자마자 언어부터 학습하는 것처럼 예술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게모르게 학습한 것들이 혹시 우리가 껄끄러운 예술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린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땅을 일구는 사람들의 소박함, 곡식을 준 땅에 가지는 경건함, 하루 일을 끝낸 농부의 평온함 같은 것을 느끼도록 학습되었지, 가난에 찌든 농부의 절망을 읽어내도록 학습되지는 않았다. (p. 87)> 우리가 자주 본 그림들에서 놓친것은 평화로운 농촌 풍경에서 보이지 않는 농부의 표정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아 왔던가?
<나치즘, 인종주의 ,파시즘 등은 언제라도 세상을 다시 한번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늘 우리를 깨어 있게 하는 눈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존재의 불안은 그 깨어 있음, 각성의 대가다. (p. 105)>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가 예술인가 보다. 예술과 이러한 각성의 연결고리가 아마도 미학이 아닐까. 우리가 가장 많이 보고 가장 자주 보는 것은 아마도 나의 혹은 누군가의 '얼굴'일 것이다.
<인간이 자기 초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다양할 테지만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건, 초상이 인간의 자기 만족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p. 110)>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대변한다. 얼굴을 가린다면? <"가면은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만들'기 때문. 얼굴을 가렸을 때 무엇도 함께 가려질 수 있는지 꿰뚫어보는 대목이다. (p. 117) 가면으로 얼굴을 가릴 때조차 인간에게 얼굴은 중요하다. 가면으로 가려서라도 인간은 얼굴을 지키려 한다. (p. 118) 얼굴이 세계에 대해 자기 존재의 개별성을 주장할 수 있는 마지막 근거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p. 119)>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이상 가리고 다닌지 거의 이년이 다 되어 간다. 이 마스크는 우리의 무엇을 가렸을까? 시대는 변했다. 가면이 인간의 무엇도 함께 가렸었다면 코로나는 얼굴을 가림으로써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대한 의미가 변한 시대에서 예술또한 삶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재료가 가진 범속한 물성을 부정해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물성을 창조하고, 사회 일반의 통념과 관습을 부정해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다. 예술은 부정하기를 통해 대상에 미학적 균열ㅇ르 내고 그 균열에서 전에는 상상치 못했던 예술성을 창조한다. 삶으로 돌아가보자. 인간에게 삶과 예술은 구별되지 않는다. (p. 133)> 특히나 예술가들에서 삶은 예술과 더더욱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되어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에 어느 정도 감정 이입은 할 수 있어야 한다. (p. 147)> 나는 그래서 작가의 감정이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소설은 그렇게 가식적 문체로만 글을 쓰는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는다. 독자는 읽으면 느낄 수 있다. 이 글 속에 작가가 들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작가의 삶과 내 삶이 연결되는지 아닌지.
그러한 공감은 특출난 예술가들에 의해 더 많이 더 넓게 이루어지곤 한다. <'특출한 사람들이 지닌 위대한 재능은(...)독창적이고 중요한 유추를 통해 누구도 이전에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포착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재능은 어느 시대에서나 매우 드물다. (p. 161)> 하지만 이러한 특출함도 인류가 존재했을 때 얘기다. 언제부턴가 인류종말 지구종말 같은 디스토피아적 작품이 왕왕 등장하곤 한다. <종말의 상상력은 예술은 영원할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참혹한 의문을 제기한다. 예술품을 보고 즐길 인간이 없는 상황에서 예술품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p. 169)> 예술의 존재는 인간의 존재와 함께 일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예술이 아무리 위대하다할지라도 결국 인간이 있고난 후 가 아닐까.
<예술가는 별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소설가나 화가나 연주자는 공식 문서에 기재되는 직업의 하아고, 그것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이 됐다. 당연히 예술가의 삶도 보통 생활인의 삶과 다르지 않다. (p. 188)> 직업이라함은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인데 보통 예술가의 삶은 배고픔의 대명사이곤 하다. 예술가가 만들어낸 작품의 고고함 뒤엔 노동자로서의 예술가의 고달픈 손과 배고픈 배가 있기 마련이다. 예술가가 별스럽다 함은 작품의 위대성을 보는 것이고 예술가가 흔한 직업이라 함은 예술작품도 특별할게 없어 보이게 한다. 우리는 그중 어떤 것을 먼저 보고 있는 것일까?
<작품은 예술에 속하지만, 그 예술에 이르는 과정은 삶에 속한다. 작품과 삶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p. 229) 푸코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p. 233)> 작품과 삶 사이의 균형잡기는 예술가와 비예술가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데 필요하다. 예술가만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도 예술작품이 될 때 서로 소통하게 된다. <작가 자신의 실존에 밀착되어 있을수록 작품은 상투성과는 멀어진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곁에 서서 나지막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방식으로 들려주는 느낌을 받는다. (p. 238)>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은 결국 이런 것이다. 나와 멀지 않은 것 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란 점에서 추상미술에 대한 도전에 새로운 힘이 생기는 듯 하다.
<추상회화는 해석과 번역이 둘 다 본질적으로 어렵다. (p. 242) 관람객이 어떤 작품을 보며 느끼는 깊이는 작품의 깊이가 아니라, 많은 경우 그 작품이 촉발한 관람객의 사유의 깊이다. (p. 243) 인간의 일임에도 사유란 쉽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아다니며 즐겁기를 바라지, 사유로 골치가 아프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예술에서 원하는 것이 사유 없이 그저 즐겁기만 한 것일까. (p. 246)> 뼈아픈 문장이었다. 나는 아마도 예술에서 즐겁기만 바라왔던 것인가 보다. 어려운 것은 피하고만 싶었다. 내가 굳이 예술에서까지 이런 고민을? 하며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은 외면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추상회회를 읽어낼 수 없다. 우리는 그 대신 자신을,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언어를 읽어내고 사유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일을 즐긴다. 예술이 촉발하는 사유의 고통은, 그 예술의 이해되지 않는 아름다움처럼 때때로 충분히 즐길 만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무해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p. 247)> 예술의 가치를 '인간의 사유'라는 측면에서 새삼 깨닫게 한 책이었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미학적 가치가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실용적 가치로 변모하는 시대에 예술에 대해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갖고 있을까? 나는 아마도 '과함'은 '사치'로만 여겼던 것 같다. 나에게 과한 상징은 (예를 들어 처음에 말한 그 바나나 작품 같은) 예술가들이 부린 사치로 받아들여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치도 따지고 보면 나를 '사유'하게 만들었다. 예술의 가치가 깊이있는 사유를 끌어냄으로써 더욱 유의미해질 수 있다는 것, 그 과정이 조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무해한 고통'이라는 것 에서 앞으로는 예술에 대한 거리감을 좀더 좁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작품과 사회상을 동시에 엮여낼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며 책을 읽는동안 오랜만에 미학적 사고로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