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의 아름다움 - 원자폭탄에서 비트코인까지 세상을 바꾼 절대 공식
양자학파 지음, 김지혜 옮김, 강미경 감수 / 미디어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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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모든 출발점인 공식, 그 아름다움을 인문학으로 산책하다

"문명은 수학을 낳고 수학은 문명을 움직인다"

저자에 이름을 올린 단체?는 자연과학분야에 중점을 둔 중국의 교육플랫폼이라고 한다. '작게는 아원자세계의 전자에서 크게는 성운의 운행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23가지 공식'을 다룬 이 책은 인류의 문명에서 큰 획을 그은 공식을 통해 그러한 공식들이 어떻게 얼마나 자연과 사회의 역사를 탐구하고 변화를 추동했는지 설명한다.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이론편과 응용편.

이론편은 수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굵직한 공식들이 소개되고 응용편에서는 그 공식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해서 폭넓게 조망한다.

시작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익숙한 자연수와 덧셈에 대해서다. 수의 포함단위에서 최소단위라 할 수 있는 자연수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자연수는 그저 기본값이었고 자연수를 포함한 정수 그다음 유리수 그다음 실수 그다음 복소수 이렇게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서의 다른 수집합 정의들만 배웠던 것 같은데 자연수의 정의는 신선했다. '우리는 자연수계를 정의할 수 있다. 자연수계 N에서 원소가 공리1~5를 모두 만족할 때 그 원소를 '자연수'라고 한다. (p. 22)' 페아노공리 라고 불리는 이 공리들을 보며 수학은 규칙과 정의의 학문이라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그러니까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of기초' 라고나 할까.

기존에 이미 배워알고있다고 여긴 공식들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알게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예를들어,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우주가 평평한지 판단하는데 이용된다는 것(피타고라스 정리가 성립하지 않으면 우주는 평평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p. 45)이나, 제논의 역설에 대해 제논은 미분만 했을 뿐 적분은 하지 않았(p. 71) 기 때문에 제논의 (거북이와 아킬레우스의 경주)역설이 일면 타당해보일 수 도 있었다는 것 등등

수학자들의 업적을 읽다보면 그렇게 골치아프고 실생활에 그닥 유용해보이지 않는 규칙에 대해 왜 그리 골몰하나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다. 하지만 페르마의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페르마의 추측은 인류 수학계에 큰 공을 세웠다. 다수의 학자들이 페르마의 추측을 연구할 때 수많은 새로운 수학 이론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p. 61)' 즉 누군가에게는 그 공식 자체가 의문이 되고 성과가 될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는 그 공식이 도출되기 까지 그리고 도출되고 나서 응용되는 활용도가 굉장히 의미있다는 것이다. 공식 자체로는 무용해 보일 수 있으나 그 공식이 기초가 되어 세워지는 건물은 인류문명의 금자탑이 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공식들은 어려웠고 다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공식의 기호들을 읽을 수 조차 없다해도 큰 상관 없었다. 나는 그 공식들을 이해하고 이용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그런게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저렇게까지 이용될 수 있구나 하며 감탄하면 그뿐. 예를들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공식(p. 113)' 이라는 오일러공식에 대해 나는 저 공식이 왜 아름답다는 거지?하며 의문이 생기지만 '수학의 5대상수를 융합' 했기에 수학자들은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말한다는 것에 아하 하며 고개끄덕이면 되는 것이다.

예전부터 E=mc² 이라는 아인슈타인공식이 왠지 멋있어보였었는데 이 공식이 '고전역학에서 서로 독립된 질량 보존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결합해 '질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되었다. 따라서 질량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질량이며 시간은 공간이고 공간은 시간이 되는 것이다. (p. 213)' 을 읽고나니 진짜 대단한 법칙이구나 싶어서 새삼 또멋져보이기도 했다.

다른 수학책을 읽었을 때 '베이즈의 법칙' 에 대해 그 주관적 확률이 왜 그토록 칭송되고 활용되는지 '베이즈의 정리'을 다룬 책한권을 다 읽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베이즈의 논문은 인류가 가장 최신의 정보로 갱신될 것이라는 뻔한 견해를 내놓았다. 처음 어떤 것에 대한 신념이 자리 잡은 후에 우리는 새롭고 향상된 신념을 얻게 된다. 쉽게 말해 경험이 이론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p. 381)' 는 일종의 '역확률' 문제로 '경험'의 확률로 읽고나니 '베이즈의 확률'계산법이 조금 이해가 된 것은 개인적으로 뜻밖의 수확이었다.

저자의 '이 '쓸데없어 보이는' 공식이야말로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인류의 보물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눈앞에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p. 430)' 라는 말에 동의한다. 이 책을 읽고나면 책속에 나오는 공식들이 그 탄생과 발전에 있어 인류문명발전에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한 티비프로그램에서 김상욱교수의 '공식선물'을 본 적이 있다. 김교수는 자신만의 특별한 선물에 대해 소개하고 해당 프로그램에서 진행자에게 공식을 적은 메모를 선물해주었다. 세상의 수많은 공식중에서 나에게 어울리는 공식이 무엇일까 그때 처음 생각해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선물을 받는다면 어떤 공식이 적힌 메모를 받고 싶을지 골라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며 기왕이면 정말 '아름다운 공식'이었으면 좋겠다싶다. 그러면 이 책속의 23가지 공식에서 골라봐야 하려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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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자를 쓴 여자 새소설 9
권정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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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연약한 외피가 깨졌을 때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실재와 허구, 현실과 비현실, 그 경계를 뒤흔드는 미스터리 심리 환상극

'검은 모자를 쓴 여인' 이라고 검색하면 키스 반 동겐 이라는 화가의 그림이 검색되지만, 책의 제목을 봤을 때 떠올랐던 그림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이었다. 찾아보니 '검은 모자를 쓴 잔느' 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모딜리아니 특유의 그 텅 빈 듯한 눈과 커다란 검은 모자가 묘한 느낌이라서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내겐 이 소설도 키스 반 동겐 이라는 화가의 그림보다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더 가까운 분위기로 읽혔다. 실재와 허구, 현실과 비현실, 그 경계를 뒤흔드는 미스터리 적인 분위기가.

지금도 민은 그날 보았던 검은 모자를 똑똑히 기억한다. 낯선 존재를 감싸고 있던 외피의 특징 중에서 유달리 검은색 모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모자의 검은 후광이 한 존재의 전체를 압도해버릴 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p. 7)

새벽 2시 잠이 오지 않아 베란다에 나갔던 민이 자신의 집을 쳐다보고 있는 '검은 모자'를 발견한 이후 그녀의 심리는 현실과 망상을 넘나들기 시작한다.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의 아이를 허무하게 잃었던 3년전 그날 이후 민의 외양은 평온을 찾은 듯 보였으나 심리는 급격한 곡선으로 출렁대고 있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우울증으로 인해 매번 약을 지어 먹고, 약으로 나약해지지 않기 위해 애써 받은 걸 쓰레기통에 처박는 삶.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삼십대였다. (p. 28)' 행복했던 그 평온이 깨진 것은 검은 모자의 등장 그 이전 집근처 약수터에서 세살 밖에 안된 어린 은수가 죽던 그날부터였다.

"누군가 있었다고! 분명 누군가 근처에 숨어서 아이를 해친 거야!" (p. 48)

민의 호소는 어느 곳에도 통하지 않았다. 다들 그저 사고라고 했다. 남편까지도.

시간이 흐르면서 민은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눈이 많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세상에, 아기잖아"

"어라, 고양이도 있네? 같이 버린 건가..."

신생아는 아니었다. 은수 또래로 보이는 아이였다. 누군가 아이를 낳아 기르다 이곳에 버린 것 같았다. (p. 58, 59 中)

집근처 교회앞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한다. 바구니속에 검정 고양이와 함께 들어있는 아이를 부부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렵게 입양을 했고 그렇게 3년이 흘렀다. 그렇게 새로운 가족이 다정다감하게 살기만 하면 좋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민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그 이유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고양이도 동수도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부 사이에 끼어 들어온 타자였다. 상처를 덮기 위해 급조된 환경이었다. 지금의 평화는 봄이면 무너진 축대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나곤 하는 개나리처럼 어딘지 위태로워 보였다. 축대가 무너지는 순간 노란 꽃들은 언제든 비명을 지르며 뭉개질 것이다. (p. 70)

민은 무지라는 개를 입양하여 큰 위안을 얻었던 터였다. 거기에 갑작스레 두 식구가 더 늘어났다. 동수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검은 고양이 까망이는 언제부턴가 민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혼란 속에서 힘들어하던 민에게 남편은 여행을 권하고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지 파리에서 민은 갑작스런 친정엄마의 부고를 듣는다. 동수를 돌보러 잠시 와 계시던 친정엄마가 화재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제 더는 약해지지 말아야 했다. 우연히 가족의 일원으로 틈입해 들어온 동수와 민의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상쩍은 일들에 대하여, 충분히 증거를 모으고 범인을 찾아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시간이 다소 걸린다고 해도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p. 125)

민은 친구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편집교정 일을 하고 있었다. 친구가 부탁한 원고중에 '아하스 페르츠'를 탐구한 논문 수준의 글이 있었다. 친구는 그 방대한 원고를 한권의 책으로 축약하는 작업을 민에게 맡겼다. 민은 그 원고를 읽어나가며 '아하스 페르츠'가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고 지혜로운 존재임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아하스 페르츠' 라는 이름도 예수에 대한 세가지 시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기에 이 부분을 읽으며 호기심이 일었다.) 민의 의지와 생각의 흐름은 읽다보면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보였다. 아이를 잃은 젊은 엄마가 겪은 갑작스런 친정엄마의 죽음, 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고 거부하고 싶은 현실들이었다.

"그날 나는 너를 시험코자 하였다."

"나는 네 마음속에 자리한 심문관, 너는 내 존재를 익히 알고 있다. 나를 꺼낸 것도 너고, 내 질문과 너의 대답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란 걸 너는 잘 알고 있어" (p. 138)

민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예수의 세가시 시험에 빗대어 분석하기도 한다.

민의 집 근처에는 사이비교회라고 소문한 빈 교회와 치매할아버지가 홀로 운영하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다. 약수터와 교회와 가게 그리고 민의 집, 그녀에게 세상은 이만큼의 범위로 좁혀져 있었다.

"글쎄, 난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중요한 건 그 순간에 내가 거기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했을 뿐이니까.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민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해해요, 할아버지" (p. 143)

민의 추리는 점점 더 급격해지고 그녀의 심리는 점점 더 급박해진다. 오직 자신의 아이였던 '은수' 생각에 그 석연치 않은 죽음에 모든 초점을 맞추다 보니 믿을 수 있는 것들은 점점 더 줄어들어가고 의지할 사람들은 점점 더 사라져간다. 그리고 어느순간 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 검은 모자를 쓰게 되는데...

읽는 내내 <누런 벽지> 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필경사 바틀비> 라는 제목의 창비에서 나온 단편집 안에 속해 있던 작품으로 샬롯 퍼킨스 길먼 이라는 여성 작가의 단편 소설이다. <필경사 바틀비> 단편집을 읽으며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작품이 <누런 벽지> 였다. 한 여성의 심리적 분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작품이었는데 벽지에 대한 묘사가 벽지를 보며 말하는 화자의 심리가 절묘하게 공감이 되어서 나조차 잠시 내자아가 분열된건가 하는 기분이 들었었다. 옛날 흔한 벽지의 기하학적인 문양을 보며 이런저런 스토리를 상상하는 것이 이토록 심리묘사와 잘 어울리다니 싶어서... 여하튼, <검은 모자> 가 그 <누런 벽지> 같은 것이었다. 차츰차츰 화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잠식해가는...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우리는 여전히 제 꼬리의 기원을 찾아, 제 꼬리를 물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진실과 정의, 시대와 역사, 슬픔과 기쁨, 잠깐 스치는 인연들, 나아가 우리 삶이 이럴 것이다. (p. 263)' 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꼬리를 물기 위해 맴을 돌듯 사는 삶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직선형이든 나선형이든 어찌됐든 어디로든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는 삶이 더 보편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위해서는 다만 가끔은 멈춰 서서 내가 내 꼬리를 물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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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 개정판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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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아버지야말로 그런 존재지"

-이승우 장편 소설 <한낮의 시선>

표지를 꾸민 산뜻하면서도 묘하게 외로운 느낌의 그림은 어떻게 보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생각나게 하는 그림이었다. 쨍한 빛의 채도로 보아 한낮은 분명한데 해가 보이지 않으니 시각은 추정할 수 없는, 그러니까 한낮일 수도 있고 백야일수도 있는 이 '쨍함'과 [한낮의 우울]이라는 책을 생각나게 하는 소설의 제목은 기묘한 우울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느낌은 첫문장부터 전해오는 듯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 하지만 내게는 도리어 죽기 위해 모인다는 생각이 든다" 말테는 수기의 첫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가난하고 병약한 외돌토리인 데다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유난히 민감한 이 젊은이는 도착한 지 3주밖에 되지 않은 낯선 도시의 공기에서 불안과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p. 7)

[말테의 수기]라는 소설의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한낮의 시선>은 말테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스물아홉 한명재 라는 청년의 독백이다. [말테의 수기]라는 소설을 읽은 적은 없지만 <한낮의 시선>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작품의 인용들로 미루어보건대 <한낮의 시선>은 [말테의 수기]를 오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검색해보니 [말테의 수기]라는 작품은 <<삶의 본질을 냉철하게 바라본 릴케의 유일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 작가 지망생인 스물여덟 살의 덴마크 청년 말테는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 오지만, 오히려 곳곳에 가득한 죽음과 불안의 냄새를 맡는다. 지독한 가난과 소외, 죽음마저 규격화된 도시의 비정함. 그는 예민한 감성으로 대도시의 허상을 기록하는 한편, 자신의 내면으로 점점 깊이 침잠해 들어가 실존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는 철저한 고독을 깨달아 간다.>> 라고 소개되는데, <한낮의 시선>의 줄거리와 흐름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감성적인 시로 유명한 릴케의 소설인만큼 문장도 남다를 것 같은데, <한낮의 시선> 또한 줄거리 자체보다는 문득문득 여운을 주는 문장이 좋았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릴케의 감성이 스며든 소설이 아닐까 싶다.

당신이 우울할 때 세상은 빛을 잃는다. 당신 내부의 우울이 세상 외부의 빛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p. 9)

어둠은 늘 자기 속에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다. 어둠이 어두운 것은 그 안에 담고 있는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열려 있는 것 같지 않았다. (p. 11)

청년은 휴전선에서 가까운 인구3만의 작은 도시에 한밤중에 도착했다. 폐결핵 판정을 받고 황당해하면서도 어머니가 마련해준 거처에서 요양하다가 갑작스럽게 향한 곳이었다. 그 이유또한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각성이었다.

정작 필요로 할 때는 필요한 줄 모르니까 원하지 않고, 어찌어찌하여 원치 않았던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깨닫느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산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p. 30)

어머니가 소유한 부동산 중 한 곳이었던 전원주택은 요양하기 좋은 곳이었다. 자연속에 고즈넉히 위치해 있었고 가까운 숲길도 산책하기 좋았으며 도심으로 나가기에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청년이 불편해진 이유는 요양중에 찾아온 '불안' 때문이었다. 비슷한 꿈에 시달리며 불면증을 겪기도 했고 산책길에서 환영 비슷한 것도 보게 된 이후 청년은 깨달았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접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문 앞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할 수만 있다면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정신을 멍멍하게 했다. (p. 55)' 그러니까 청년은 그 '문'이 있는 곳을 찾아간 거였다.

어머니는 결핍감을 느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제공해주었다. 어머니는 따뜻했고 의젓했다. (중략) 어머니는 나에게 울타리였고 동시에 울타리 안의 정원이었다. 나는 양친의 보호를 받는 어떤 아이보다 더 만족스럽게 지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존재를 상기시킬 만한 어떤 언행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필요를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 없이도 책임 있는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데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도대체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단 말인가. (p. 69)

청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존재감은 없었다. 하지만 스물아홉이 되도록 단 한번도 그 '부재감'을 느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핵판정으로 혼자서 오랜 시간 딱히 할일 없이 지내면서 너무나 편안한 조건에서 너무나 급작스레 느껴진 불안감은 그 부재감을 무시하려 애썼고 무시하는 만큼 점점 더 크게 청년을 잠식해 들어왔다. '아늑한 집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쉬운 일이었다. 어려운 것은 어머니의 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p. 74)' 결국 청년은 어머니의 집을 처음으로 나오는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꼭 열어봐야 할 문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

"한명재는 몰라도 한길숙은 모르지 않을걸. 모를 수가 없을걸. 아니, 한길숙을 모르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 그 말을 하는데 가슴이 뜨거우지면서 코끝에 싸한 기가 맴돌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눈물을 억누르기 위해 더 소리 질렀다. "한길숙이 내 어머니란 말이야. 내 어머니라고! 나는 한명재고 내 어머니는 한길숙이란 말이야!" (p. 134)

청년은 악몽속에서 아버지의 비석에 쓰여진 이름을 읽곤 했다. 읽었는데 읽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도통 알수가 없었다. 꿈에서 그랬던 이름을 외딴 지역 작은 도시의 신문에서 자치단체장 선거유세에서 읽었을 때 청년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스스로를 빠뜨린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침전되어 갔다.

사랑의 있고 없음과 상관없이 추구하는 자가 아들이다. 아버지가 왜 나를 찾아왔느냐고 묻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아버지는 왜 나를 사랑하느냐, 혹은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다'가 아들에게 속한 동사가 아님을 아버지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찾는 자, 찾도록 운명 지어진 자가 아들이다. (p. 178)'

일반적인 부자관계에는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는 위 문장에 때로는 절묘하게 맞아들어간다는 걸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보아왔던 것 같다. 하다못해 고구려 신화속 유리왕도 자신의 아버지를 찾도록 운명지어진 자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증표를 남겨놓은 아버지와 아무런 증거조차 남기지 않는 아버지를 찾는 과정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 나를 왜 찾아왔느냐는 확인 작업은 사랑하다 라는 동사가 아들에게도 속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후자의 경우 찾도록 운명지어진 아들은 무엇도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찾을 운명은 아들의 운명일뿐 찾아질 운명은 아버지의 운명이 아니었기에.

대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떤 것들은 알게 된 후에도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한다. (p. 151)

두렵고 불안한 '있음'보다 두렵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없음'이 더 두렵고 더 불안했을 것이다. (p. 190)

긍정하기 위해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조금밖에 필요하지 않은 정당화의 논리가 부정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 안전하니까. (p. 193)

벗어나려면 빛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야 하고, 맞서려면 어둠을 털어내며 빛이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p. 202)

그래서 한명재는 어둠을 향해 걸어갔을까 빛을 향해 걸어갔을까. 어느 쪽으로 향해갔던 한낮의 시선에서 벗어났을까... 어머니의 집을 나오고 아버지의 문을 열고 난 후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청년은 휴전선 근처의 작은 소도시를 벗어나며 '막 떠오른 신생의 태양이 연한 빛을 지상에 퍼뜨리기 시작(p. 213)' 하는 것을 보았다.

서른을 앞둔 청년의 성장통 같은 이 소설은 '한낮의 시선'에 시달리던 청년이 자신의 내면을 헤매는 작품으로,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내용에 푹 빠져들기 보다는 내눈에 반짝이는 문장을 발견할 때가 더 좋았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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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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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신을 믿은 인간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Credo quia absuradum est

부조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서양고전과 역사책을 읽다보니 라틴어를 종종 접하곤 했다. 실생활에서 죽은 언어가 학문적 언어로 계속 사용된다는 것에 대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라틴어는 언어 그 자체로 왠지 명언처럼 느껴진다. <라틴어 수업> 이 나왔을 때 무척 궁금했고 읽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미룸 속에 시기를 놓쳤다. 그러고나니 어느새 저자의 두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라틴어 수업 두번째 시간인 셈인 <믿는 인간에 대하여> 에서 저자가 던진 새로운 질문, '믿음이 사라져가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는 종교가 없는 나도 지속적으로 되묻곤 했던 질문이었기에 이번 책은 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들었다.

초기 인류는 맹수의 먹이가 될 정도로 약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인류가 어떻게 진화하고 생존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의 답으로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필사의 전략은 '겸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대부분의 동물이 자연환경에 맞춰 스스로 진화해나간 측면이 있다면, 인간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거나 그들과 부딪쳤을 때 자신보다 나은 상대의 기술이나 생각을 '겸손하게' 전해 받는 방법을 통해 진화해왔습니다. 언어에서부터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다양하고 방대합니다. (p. 7)

저자는 본문에 앞서 -이야기를 시작하며-에서 '겸손한 인류로의 회복'으로 새로운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찾을 것임을 은근히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시작부터 앗 하고 멈칫한 순간이었다. 초기 인류의 생존전략은 '겸손'이라기 보다는 '약탈'이 아니었던가? 대부분의 동물처럼 자연환경에 맞추기보다는 자연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훼손한게 아니었나? 자신보다 나은 상대의 기술이나 생각을 '겸손하게' 전해받았다기 보다는 빼앗고 훔쳐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겸손'이라... 종교인인 저자의 기본마인드와 비종교인인 나의 기본개념이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서 조금 걱정스런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제 긴 고민의 흔적이자 나름의 답이며, 그리스도교를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드러난 믿음과 종교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중략) 이같은 이야기가 그저 과거의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는 때라고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신을 믿는 누군가는 신의 존재를 통해 내일의 희망을 찾고 있을 테니까요. (p. 14) 종교가 헛된 희망과 거짓된 기대로 과대 포장된 선물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종교인들이 스스로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불안한 인간 존재에게 신실하고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써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p. 15)

인간존재에 대한 기본마인드가 다를지라도 종교인으로서의 기본마인드가 바람직해 보였다. 종교가 없는 나이지만 종교인의 종교적이지 못한 사건들을 너무 많이 접해서 불신이 가득했었는데 종교와 종교인의 '초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저자의 언어들이 따듯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무척 평화로운 책이었다. 종교라는 것이 원래는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그런 평화랄까...

저는 우리 사회가 언제나 그런 '생각의 어른'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p. 27)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바라는 생각의 어른은 많이 공부하고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공부하거나 소유한 것이 많고 적음을 떠나 진심으로 누군가의 곁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p. 28) 생각의 어른이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존중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p. 29)

이 시대의 어른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사회를 통찰하고 생각의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의 부재를 느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이 '생각의 어른'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사유의 깊이와 마음의 크기로 생각의 어른을 찾아본다면 지금 이미 주위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위를 잘 살펴보라고... 나는 나이가 꽉 찬 어른이지만 '어른이' 정도라고 생각하곤 한다. 책을 무수히 읽어대면서도 그것으로 무엇을 어찌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좋아서 읽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문장을 읽고나니 '생각의 어른'에 대해 숙고해보게 된다. 어른이에서 그저 어른으로라도 성장하고 나면 나아가 '생각의 어른'으로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본다.

우리는 이제 너와 나의 차이를 말하기에 앞서 너와 내가 무엇이 같은지를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고민하고 돌아보며 다른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 가진 힘입니다. (중략) 인간이 그토록 전쟁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이 결국 동일한 신에 대한 믿음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무한 비애가 있습니다. (p. 41)

'차이'에 신경쓰다가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저자의 표현처럼 '허무한 비애'가 가득찬 시간을 너무 오래 보내온 것이 아닐까. 개인화 되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시대에 다시 필요해진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을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바라봐야 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 입니다. (p. 43)' 라는 문장이 이토록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을 보면 나도 '허무한 비애'를 너무 많이 겪어왔던 것일까...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종교에 대한 믿음을 도통 찾을 수 없었으니...

사실 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또 신의 도움이 지상에 미치지 못해도 인간 스스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p. 49)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표현, 어떤 문제든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 그런 생각들 속에 종교란 무조건 적인 구호요청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종교의 본질에 대해 스스로 되묻게 한다.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도 신에게 해달라고 해온 것은 아니었나, 인간이 만든 문제인데 신에게 해결해달라고 조른 것은 아니었나, 도와주지 않는 신에 대해 부조리하다 비판하는 인간이 사실은 그보다 더 부조리한 것이 아니었나?!

그 부조리함 사이에서 그것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살아가는 인간이 저는, 질문하는 인간에게는 분명히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답이 온다는 것을 믿으며, '나는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아니면 법학자 출신의, 최초의 라틴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160?~220?)의 저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언급된 그의 말로 답을 대신해야 할까요?

Credo quia absurdum est 크레도 퀴아 압수르둠 에스트

부조리(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p. 54)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라틴어 경구가 아닐까 싶다. 믿음과 이해는 늘 서로 상충된다고 여겼었기에 나는 여전히 늘 비종교인이었다. 어느땐 종교에서 위안을 받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어떤 종교도 그 내부의 '부조리'를 참을 수 없었기에 나는 어느 종교의 문도 두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종교아 아니어도 나는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인간이었다. 질문하는 인간에게는 분명히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답이 온다는 것은 나또한 믿는 바이기에 저자의 종교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왠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혹은 종교적 가르침을 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행동이 신에게 기쁨을 주는 종교적 실천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자 오만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태오 12,7)'라고 말했던 의미를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공동체가 모른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p. 136) 우리가 신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나와 내가 속한 종교 공동체의 행동이 이웃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p. 137)

이런 자성의 목소리는 내부인이 해주어야 하기에 저자의 문장에 응원의 박수를 보탠다. 자신의 종교적 자유와 종교적 실천이 누군가에겐 고통이자 피해가 된다면 안하는게 옳다. 하지만 안하무인적 (광신적)사람들을 너무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저자에게서 종교수업을 좀 듣고 오면 좋으련만... 아니 저자에게서 법수업만 들어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자기 종교 교리에서 벗어난 세상의 일이나 존재를 부정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나의 믿음에 위반하는 이들은 나의 이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중략) 믿음 안에 존재하는 이런 본능과 한계를 그대로 표출하기보다 그것을 제어하는 내·외적 장치를 통한 사고를 해야 타인과 사회와 오해나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장치가 법과 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 238)' 종교의 기본, 법의 기본 만 깨달아도 사회악적인 행동은 삼가하게 되지 않을까? 저자의 수업을 직접 받을 수 없으니 저자의 책을 읽으며 그 '기본'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인간사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우리는 그 괴로움을 줄이고자 삶의 대소사부터 존재론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두고 기도로 청합니다. 기도를 통해 마음의 고통을 줄일 수는 있지만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부족해서 고통받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저는 그런 신은 믿고 싶지 않습니다. (p. 241)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신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옹졸하고 속 좁은 또 다른 '인간'처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p. 242)

종교가 없는 나조차도 종교적 깨달음을 느끼게 하는 문장이었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라틴어 문구를 옮겨 놓아본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데우스 논 인디제트 노스트리, 세드 노스 인디제무스 데이.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p. 242)

저의 책 <라틴어 수업>에 부정적인 마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미룰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확고한 믿음 대신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돌아볼 수 있는, 그 마음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통의 가치는 무엇이며, 서로 다른 우리가 어떻게 그 차이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를요. (p. 266)

저자의 종교에 대한 믿음과 사회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종교다운 종교 함께사는 사회 이웃을 생각하는 인간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절실하게 그리고 진정성있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때로는 역사이야기로 때로는 저자의 추억어린 에세이로 읽혀지는 이 책은 전체적으론 신실한 믿음이 흐르고 있는 책이었다. 그러니 저자가 자신있게 물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믿음이 사라져가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답했다. 이제 이 책을 읽은 독자가 답할 차례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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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패션의 권력학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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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하는 대상을 따라하기는 19세기 영국의 중산계급을 거쳐 노동계급으로, 마침내는 제국의 식민지로 전파되었다. (중략) 판타지와 악몽이 결합된 소비의 시간이 흐른다.

뒷표지 내용 中

영문학을 전공했고 가르치고 있는 저자는 범죄, 남성섹슈얼리티, 소비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불온하거나 저속하다는 이유로 배제된 소설장르를 재평하하고 비평적 관심의 바깥에 머물던 문학지형을 탐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범죄소설의 계보학> <남성섹슈얼리티의 위계> 이후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패션의 권력학>을 냄으로써 3부작 프로젝트를 완결한 셈이라고.

앞선 두 책에선 어떤 소설들을 바탕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책의 경우 19세기 영국에서 댄디문학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이 댄디즘은 유미주의로 연결되기도 하고 문학비평의 새 지평을 열기도 하면서 과도기적 장르로서의 불꽃을 화려하게 피워올렸고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미학적 소비'에 대해선 여전히 시사하는바가 컸다.

영국의 중간계급에게 산업혁명은 위기나 불안이 아닌 도전과 기회로 다가왔다. 산업혁명과 함께 기존의 경제적·계급적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p. 9) 중간계급은 새로 획득한 경제적 지위에 걸맞은 사회적 존경을 욕망했다. 이들의 인정욕구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경로를 통해 분출되었다. 하나가 도덕적·윤리적 우월성에 대한 승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품격을 갖춘 소비의 과시였다. (p. 10) 중간계급에게 소설은 '거의 모든 종류'를 포괄하는 '지식의 매개체'와 '정보체계'가 되었다. 중간계급의 소설사용법에는 소설에 나오는 대로 귀족계급을 따라하기도 있었다. 중간계급이 귀족 따라하기 매뉴얼로 선택한 소설장르는 실버포크 소설이었다. (p. 14)

땅을 기반으로 세습되는 귀족의 부와 명예는 산업혁명이후 자본을 성장한 세력에게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은 가진것이라곤 노동력 하나뿐인 이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명예혁명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절대왕권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따지고 보면 이 혁명들은 혁명이라고 볼 수 없었다. 뒤집어진게 없었다. 땅을 소유한 귀족들은 여전히 부유했고 명예는 더욱 탄탄해진 것 같은 영국사회에서 귀족계층에 대한 선망은 높아져만 갔다. 당대엔 비하적 의미로 붙인 표현이 하나의 사조가 되는 경우가 많듯이 실버포크 소설이라는 표현또한 시작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막대한 부에 문화적 소양까지 물려받은 최상류계급을 가리키는 실버포크, 이 질시의 표현이 선망이 된 것은 전적으로 중간계급 독자 덕분이었다.

19세기 내내 영국의 귀족계급은 치솟아 오르는 중간계끕의 기세에 위축됐다. 경제적 지위는 하락했고, 정치권력도 중간계급에게 상당부분을 나눠주어야 했다. 계급적 좌절감은 특히 젊은 세대의 귀족들에게 크게 다가왔다. (p. 16) 젋은 귀족남성들은 문화자본을 과시하는 세련되고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해 중간계급 남성과의 구별짓기를 시도했다. 세상은 이를 댄디로, 이들이 전시한 스타일과 태도, 가치관을 댄디즘으로 불렀다. 댄디는 중간계급의 가치관인 근면성과 실용성, 생산성을 거부하고 장식성과 무용성, 비생산성에 집착했다. 댄디는 나른하고 권태로운 포즈로 중간계급이 기획했던 노동의 존중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맞서려 한 것이다. (p. 17)

이른바 졸부들이 득실대기 시작했을때 젊은 귀족들은 이제 '부'에서의 우월함은 잃은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자신들만의 우월성, 차별성에 대한 욕망을 무엇으로 표출할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이 댄디즘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자수성가한 촌티나는 졸부들과 다르게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쓸모없는 것들에 금화를 뿌리며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동시에 세련되고 독특한 패션으로 문화적 소양만큼은 '세습'되는 것임을 보여주려 했다. 어떻게 보면 우스울 수 있는 이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식의 댄디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하지만 의외로 이 댄디들에 대한 선망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과열되어 실버포크 소설은 중간계급에게 소비지침서이자 문화지침서가 되어갔다.

여전히 영국사회에서는 귀족계급의 문화적 품격과 고급스러운 소비가, 경제적으로 급부상하기는 했지만 천박한 부르주아들을 견제하는 중요한 계급적 장치로 작동했다. 문화적 역량을 갖추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여러 세대에 걸친 문화자본의 축적과 상속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넘치는 인정욕구에 비해 인내심이 부족했던 중간계급은 귀족계급의 소비패턴을 따라하는 쪽을 택했다. 모아놓은 돈으로 빠르게 승부를 걸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p. 28)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실버포크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어도어 훅(1788~1841) 의 초상이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혈통적 특권은 없었으나 타고난 수완으로 인맥을 쌓아 조지4세의 측근이 된 그는 '목표에 도달한, 궁정광대라는 호칭보다 더 나은 직함을 지니지 못한, 속물근성의 완성자'로 불린다고 한다. 채무자감옥에서 쓴 소설로 데뷔한 그는 지속적으로 실버포크 소설을 써냈고 큰 인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아무도 그의 작품을 읽지 않는다. 시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반영하는가에 따라 문학의 수명이 정해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행과 통찰은 분명 다를 것이므로.

'초창기 실버포크 소설에는 당대 귀족계급의 삶에 대한 묘사와 함께 이들 계급에 대한 비판과 사회개혁의 메시지도 함께 담겨 있었다. (p. 55)' 그러나 사람들이 열광했던 부분은 '메시지'가 아니었다. 귀족들의 생활방식과 패션양식과 소비패턴이었다. 당연히 이후 실버포크 소설은 점점 더 대중들이 원하는 내용을 구체화하게 된다. '문화자본을 이용한 승부는, 귀족계급에게 남은 유일한 전략이었다. (p. 86)' 따라잡힐 것 같은 위기감은 점점더 극단적인 댄디즘을 추구하게 된다.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댄디의 '반항'은 더욱 격렬해졌고, 세기말의 흐름 속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1891년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p. 112)' 오스카 와일드(1854~1900)도 귀족계층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속에서 그가 추구하는 무위와 권태와 사치의 모습은 댄디 그 자체였다. 아마도 그가 추구한 '유미주의'는 댄디들에 대한 선망이자 댄디가 되고싶은 욕망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댄디가 거부한 것은 중간계급 노동윤리만은 아니었다. 댄디즘은 중간계급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루는 남성은 생산을 담당하고 여성은 장식과 소비를 담당한다는 젠더적 구획의 담장을 허물어버렸다. 댄디가 전시하는 자기치장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욕망은 여성으로 성별화되기 때문이다. 댄디즘에 포함된 강한 연극성은 명백한 젠더위반으로 인식되었다. (p. 122) 댄디즘은 19세기 내내 동성애와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세기말로 갈수록 댄디의 젠더위반은 극단적인 색채를 띠었고, 1895년 와일드의 재판은 댄디즘과 남성동성애 사이의 연관성을 극대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중의 뇌리 속에는 여성적인 댄디와 남성동성애자는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되었다. (p. 126)

오스카 와일드, 그가 살았던 시대는 딱 댄디즘의 시대였다. 그의 사망이후 20세기가 막을 내렸을때 댄디주의는 이미 끝나있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었을때 명확히 이해되지 않던 오스카 와일드의 사고방식이 이 책을 읽으며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와일드의 삶은 댄디즘 자체였고 그의 말로 또한 댄디즘와 말로와 다르지 않았다. 동성연애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박탈당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영국 국적은 1998년에야 회복되었다.(p. 115)' 와일드의 동상은 커다란 바위위에 여전히 나른하게 누워있다.

남성인물에 집중하는 실버포크 소설과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실버포크 소설은 모두, 귀족계급의 비생산적이고 소비적인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귀족들의 삶을 따라하는 지침서로 기능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양자에 내려진 평가의 가혹함은 동일하거나 유사하지 않다. 실버포크 소설이 사치와 허영을 조장한다는 비난은 주로 여성의 삶을 다룬 실버포크 소설을 향했다. (p. 137)

'실버포크 소설은 여성에 대한 젠더적 편견을 수용하고 확장함으로써 당대의 젠더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강화했다. (p. 136)' 중간계급 남성이 자신들을 화려하게 치장할때 집안의 여자들은 소박하고 순종적이며 무엇보다 순결하게 무성의 존재로 있어야 했다. 그래야 화려하고 방탕한 귀족여인들과 차별적 우월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다. 미혼여성들에게 실버포크 소설이 끼친 영향력은 그 소비패턴이 중적적이었다. '실버포크 소설은 여성을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무기로 결혼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존재로 재현하고, 결혼상대자를 확보했는지 여부로 여성의 성공과 실패를 판정함으로써 젠더적 편견을 옹호하고 재생산했다. (p. 153)' 댄디즘의 여성성이 남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거나말거나 여하튼 여성의 입장에서는, 무성적 아내나 결혼시장에서 팔리는 처녀나 젠더적 편견은 그저 확고해질 뿐이었다.

실버포크 소설을 향한 또 다른 공격지점은 실버포크 소설이 사회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고사시킨다는 데 있었다. (p. 164) 1840년대는 가난의 문제와 '빈곤의 문화'가 압도적으로 부각된 시기였다. 소비와 과시로 요약되는 귀족계급의 생활양식은 더 이상 찬탄과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분쇄해야 할 시대착오적인 악습으로 규정되었다. 실버포크 소설의 몰락은 이제 예정된 수순이었다. (p. 173)

실버포크 소설의 몰락을 견인한 대표 문인이 칼라일 이었다. '칼라일이 제시하는 영웅은 댄디의 여성성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주체이며, 그가 주창한 영웅주의는 당대의 젠더이데올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p. 177) 강고하게 형성된 반댄디즘 대오는 댄디의 스펙터클을 경탄과 부러움의 대상에서 경멸과 혐오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렸다. 댄디를 둘러싸던 광채는 사라졌고, 댄디는 무대 바깥으로 밀려났다. 세기말에 이르러 중간계급의 실용주의를 거부하고 우아함과 쾌락, 포즈의 예술을 선포한 유미주의가 나타나기까지, 한때 댄디즘을 환하게 비추던 조명은 꺼진 채로 남아 있었다. (p. 180)'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속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는 굉장히 모순적인 느낌이었다. 와일드가 살던 시대가 그러했다. 유미주의는 댄디즘의 마지막 발악이 아니었을까.

칼라일의 분노와 한탄과는 다르게, 디킨스의 연민과도 다르게, 새커리는 댄디를 조롱하고 실버포크 소설을 낙후시켰다. (p. 185) 새커리가 칼라일과 달랐던 것은 비판의 어조와 타격방식만은 아니었다. 그의 공격은 칼라일과는 겨누는 지점이 달랐다. 칼라일의 공세가 귀족계급에 집중됐다면, 새커리의 타격지점은 중간계급-귀족계급을 흠모하고 모방하는-이었다. 새커리는 그들을 '속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비판했다. (p. 191)

'<두 도시 이야기>에서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의 시간이 '최고의 시절이면서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고 썼다. 그가 사용한 표현은 19세기 초반의 영국으로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있다. 영국의 19세기 전반부는 변혁과 저항, 갈등과 충돌, 협상화 화해, 영광과 수치가 함께하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시절 모든 이들이 몰두하던 사회적 의제는 빠르게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한때 빛나던 존재들은 다음 순간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p. 190)' 실버포크 소설이 유행하던 시대라고 해서 그 문학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디킨스와 칼라일과 새커리를 들자면 그중에서도 실버포크 소설의 대척지점에 칼라일과 새커리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디킨스의 연민이 가장 좋다. 그때 빛나던 그의 소설은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귀족계급 따라하기와 실버포크 소설에 대한 열광은 갑작스럽게 솟아난 현상이 아니다. 영국은 귀족숭배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국가였다. (p. 193) 귀족적 소비에 대한 동경과 선망, 그리고 따라하기가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다. 짐작과는 달리, 품격 있는 소비에 대한 수요는 오히러 더 커져갔다. 중간계급이 빠져나간 따라하기 대열의 빈자리를 노동계급이 빠르게, 넘치도록 채워나갔기 때문이다. 해외식민지의 '신민들'도 제국의 소비를 욕망하며 따라하기 물결에 합류했다. 중간계급이 실버포크 소설을 탐독하며 모방욕구를 구체화했다면, 노동자들과 식민지 원주민들에게는 박람회가 실버포크 소설이 하던 역할을 대신했다. 이들은 박람회장에 진열된 상품의 스펙터클을 통과하며 구입해야 할 목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p. 220)

''굶주린 1840년대'를 지나며 그토록 우려했던 노동자혁명은 발생하지 않았다. (p. 220)' 어쩌면 이것이 여전히 귀속숭배가 남아있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혁명이 일어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문화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영국도 그리고 미국도 권력층에 대한 시민혁명은 노동자혁명은 없었다. 그리고 이들 나라에선 상위계층에 대한 선망의식이 따라하기가 너무나 뚜렷하고 또렷하게 지속되고 있어 보인다. 평등해졌다고 하는 시대에 평등하기를 거부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는 '세기말의 체게바라 '산업'은 저항과 투쟁의 신화마저 패션으로 소비되는 풍경을 내려오는 막 위에 그려 넣었다. (p. 229)' 며 여전히 '판타지와 악몽이 결합된 소비의 시간 (p. 229)' 이 흐르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소비의 수준은 계층을 나누고 패션의 권력은 여전히 통하는 사회에서 댄디즘이 아닌 또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하기'는 영원하고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는 욕망도 지속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19세기 영국사회에 국한된 내용이었지만 '소비'와 '문학'을 연결한 분석은 무척 신선하고 흥미진진했다. 앞으로도 저자의 새로운 문학비평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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