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역사 속 신을 믿은 인간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Credo quia absuradum est

부조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서양고전과 역사책을 읽다보니 라틴어를 종종 접하곤 했다. 실생활에서 죽은 언어가 학문적 언어로 계속 사용된다는 것에 대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라틴어는 언어 그 자체로 왠지 명언처럼 느껴진다. <라틴어 수업> 이 나왔을 때 무척 궁금했고 읽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미룸 속에 시기를 놓쳤다. 그러고나니 어느새 저자의 두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라틴어 수업 두번째 시간인 셈인 <믿는 인간에 대하여> 에서 저자가 던진 새로운 질문, '믿음이 사라져가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는 종교가 없는 나도 지속적으로 되묻곤 했던 질문이었기에 이번 책은 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들었다.

초기 인류는 맹수의 먹이가 될 정도로 약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인류가 어떻게 진화하고 생존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의 답으로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필사의 전략은 '겸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대부분의 동물이 자연환경에 맞춰 스스로 진화해나간 측면이 있다면, 인간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거나 그들과 부딪쳤을 때 자신보다 나은 상대의 기술이나 생각을 '겸손하게' 전해 받는 방법을 통해 진화해왔습니다. 언어에서부터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다양하고 방대합니다. (p. 7)

저자는 본문에 앞서 -이야기를 시작하며-에서 '겸손한 인류로의 회복'으로 새로운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찾을 것임을 은근히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시작부터 앗 하고 멈칫한 순간이었다. 초기 인류의 생존전략은 '겸손'이라기 보다는 '약탈'이 아니었던가? 대부분의 동물처럼 자연환경에 맞추기보다는 자연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훼손한게 아니었나? 자신보다 나은 상대의 기술이나 생각을 '겸손하게' 전해받았다기 보다는 빼앗고 훔쳐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겸손'이라... 종교인인 저자의 기본마인드와 비종교인인 나의 기본개념이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서 조금 걱정스런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제 긴 고민의 흔적이자 나름의 답이며, 그리스도교를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드러난 믿음과 종교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중략) 이같은 이야기가 그저 과거의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는 때라고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신을 믿는 누군가는 신의 존재를 통해 내일의 희망을 찾고 있을 테니까요. (p. 14) 종교가 헛된 희망과 거짓된 기대로 과대 포장된 선물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종교인들이 스스로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불안한 인간 존재에게 신실하고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써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p. 15)

인간존재에 대한 기본마인드가 다를지라도 종교인으로서의 기본마인드가 바람직해 보였다. 종교가 없는 나이지만 종교인의 종교적이지 못한 사건들을 너무 많이 접해서 불신이 가득했었는데 종교와 종교인의 '초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저자의 언어들이 따듯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무척 평화로운 책이었다. 종교라는 것이 원래는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그런 평화랄까...

저는 우리 사회가 언제나 그런 '생각의 어른'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p. 27)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바라는 생각의 어른은 많이 공부하고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공부하거나 소유한 것이 많고 적음을 떠나 진심으로 누군가의 곁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p. 28) 생각의 어른이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존중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p. 29)

이 시대의 어른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사회를 통찰하고 생각의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의 부재를 느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이 '생각의 어른'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사유의 깊이와 마음의 크기로 생각의 어른을 찾아본다면 지금 이미 주위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위를 잘 살펴보라고... 나는 나이가 꽉 찬 어른이지만 '어른이' 정도라고 생각하곤 한다. 책을 무수히 읽어대면서도 그것으로 무엇을 어찌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좋아서 읽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문장을 읽고나니 '생각의 어른'에 대해 숙고해보게 된다. 어른이에서 그저 어른으로라도 성장하고 나면 나아가 '생각의 어른'으로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본다.

우리는 이제 너와 나의 차이를 말하기에 앞서 너와 내가 무엇이 같은지를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고민하고 돌아보며 다른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 가진 힘입니다. (중략) 인간이 그토록 전쟁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이 결국 동일한 신에 대한 믿음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무한 비애가 있습니다. (p. 41)

'차이'에 신경쓰다가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저자의 표현처럼 '허무한 비애'가 가득찬 시간을 너무 오래 보내온 것이 아닐까. 개인화 되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시대에 다시 필요해진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을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바라봐야 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 입니다. (p. 43)' 라는 문장이 이토록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을 보면 나도 '허무한 비애'를 너무 많이 겪어왔던 것일까...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종교에 대한 믿음을 도통 찾을 수 없었으니...

사실 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또 신의 도움이 지상에 미치지 못해도 인간 스스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p. 49)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표현, 어떤 문제든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 그런 생각들 속에 종교란 무조건 적인 구호요청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종교의 본질에 대해 스스로 되묻게 한다.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도 신에게 해달라고 해온 것은 아니었나, 인간이 만든 문제인데 신에게 해결해달라고 조른 것은 아니었나, 도와주지 않는 신에 대해 부조리하다 비판하는 인간이 사실은 그보다 더 부조리한 것이 아니었나?!

그 부조리함 사이에서 그것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살아가는 인간이 저는, 질문하는 인간에게는 분명히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답이 온다는 것을 믿으며, '나는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아니면 법학자 출신의, 최초의 라틴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160?~220?)의 저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언급된 그의 말로 답을 대신해야 할까요?

Credo quia absurdum est 크레도 퀴아 압수르둠 에스트

부조리(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p. 54)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라틴어 경구가 아닐까 싶다. 믿음과 이해는 늘 서로 상충된다고 여겼었기에 나는 여전히 늘 비종교인이었다. 어느땐 종교에서 위안을 받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어떤 종교도 그 내부의 '부조리'를 참을 수 없었기에 나는 어느 종교의 문도 두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종교아 아니어도 나는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인간이었다. 질문하는 인간에게는 분명히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답이 온다는 것은 나또한 믿는 바이기에 저자의 종교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왠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혹은 종교적 가르침을 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행동이 신에게 기쁨을 주는 종교적 실천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자 오만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태오 12,7)'라고 말했던 의미를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공동체가 모른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p. 136) 우리가 신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나와 내가 속한 종교 공동체의 행동이 이웃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p. 137)

이런 자성의 목소리는 내부인이 해주어야 하기에 저자의 문장에 응원의 박수를 보탠다. 자신의 종교적 자유와 종교적 실천이 누군가에겐 고통이자 피해가 된다면 안하는게 옳다. 하지만 안하무인적 (광신적)사람들을 너무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저자에게서 종교수업을 좀 듣고 오면 좋으련만... 아니 저자에게서 법수업만 들어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자기 종교 교리에서 벗어난 세상의 일이나 존재를 부정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나의 믿음에 위반하는 이들은 나의 이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중략) 믿음 안에 존재하는 이런 본능과 한계를 그대로 표출하기보다 그것을 제어하는 내·외적 장치를 통한 사고를 해야 타인과 사회와 오해나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장치가 법과 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 238)' 종교의 기본, 법의 기본 만 깨달아도 사회악적인 행동은 삼가하게 되지 않을까? 저자의 수업을 직접 받을 수 없으니 저자의 책을 읽으며 그 '기본'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인간사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우리는 그 괴로움을 줄이고자 삶의 대소사부터 존재론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두고 기도로 청합니다. 기도를 통해 마음의 고통을 줄일 수는 있지만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부족해서 고통받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저는 그런 신은 믿고 싶지 않습니다. (p. 241)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신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옹졸하고 속 좁은 또 다른 '인간'처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p. 242)

종교가 없는 나조차도 종교적 깨달음을 느끼게 하는 문장이었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라틴어 문구를 옮겨 놓아본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데우스 논 인디제트 노스트리, 세드 노스 인디제무스 데이.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p. 242)

저의 책 <라틴어 수업>에 부정적인 마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미룰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확고한 믿음 대신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돌아볼 수 있는, 그 마음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통의 가치는 무엇이며, 서로 다른 우리가 어떻게 그 차이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를요. (p. 266)

저자의 종교에 대한 믿음과 사회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종교다운 종교 함께사는 사회 이웃을 생각하는 인간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절실하게 그리고 진정성있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때로는 역사이야기로 때로는 저자의 추억어린 에세이로 읽혀지는 이 책은 전체적으론 신실한 믿음이 흐르고 있는 책이었다. 그러니 저자가 자신있게 물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믿음이 사라져가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답했다. 이제 이 책을 읽은 독자가 답할 차례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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