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수업 - 나를 알아가는 공부
향선 지음 / 피그말리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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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의 기초를 쉽게 알려주는 책이에요. 기초를 넘어서는 내용은 좀 어렵기도 한데 전체적으론 유익한 책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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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수업 - 나를 알아가는 공부
향선 지음 / 피그말리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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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명리학은, 결국 나를 알아가는 학문입니다.

새로운 해가 되면 한 해에 대한 희망을 무료운세 풀이로 점쳐 보고는 한다. 올 한해는 내게 어떤 일이 생기려나 큰 어려움은 없을까 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는 등의 조언을 해마다 비슷비슷한 문장들로 위안 삼아보고는 한다. 그러다 더 궁금해졌을 때 맞거나말거나 구체적 조언을 듣고 싶은 마음에 철학관이나 점집을 찾아가게 되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사주풀이를 하러 가본 적이 있었는데 철학관의 설명을 듣다보니 사주풀이에 어떤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명리학에 관심이 생겼다. 그 뒤로 명리학 공부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엄두가 안나서 기초를 다룬 책 같아보이면 가끔 들춰보게 된다.

운이란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돈벼락이나 날벼락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노력해 오고 준비한 일이 드디어 '그때' 결실을 맺고, 그동안 소홀했던 일을 '그때'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남보다 잘사는 사람은 재수가 좋아 그런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그럴 만한 사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 무턱대고 내 행운도 갖고 간 재수 없는 놈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그들이 사는 법을 냉정하게 들여다 보고, 배울 점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봅니다. 이 책은 그러자고 썼습니다. (중략) 여러분의 고민 선배로서, 여러분 만의 사는 법을 만들어 나가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주를 처음 공부하시는 분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했으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저와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p. 4~5 -서문 中-)

저자의 이력을 보니 국문학을 전공하고 국어교사를 하다가 명리학을 공부한 후 명리 상담과 수업을 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책의 문장들은 쉽고 매끄럽게 읽혔다. 내 사주를 풀어본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풀어보는 일이다. 그래서 저자는 명리학을 나를 알아가는 학문이라고 하면서 사주명리학을 공부함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위로하고 사랑할 수도 있게 될거라 말한다. 나도 잘 모르겠는 나를 내가 타고난 여덟 글자의 의미를 통해 새로이 알게되는 것은 은근 잘 들어맞는 것 같고 나름 재미있기도 하다.

사주는 우리가 태어난 연월일시를 오행적 기호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상품 정보가 입력된 물건 바코드 같은 거죠. 그러니 그 자체로는 길흉화복을 논할 수 없습니다. 국화꽃은 좋고 장미꽃은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주에서 주목하는 것은 자연의 기운을 받은 내가 왜 이런 성격과 적성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왜 이런 진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하는 원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출생한 때에 해와 달과 지구가 어떻게 움직였고 이로 인해 바람과 물의 양이 얼마나 달라졌느냐와 같은 음양오행적 특성으로 판가름이 난다고 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런 기운을 한순간에 흡수하는 것이고, 그 기운에 따라 각자의 기질이 결정되니, 이것을 연구하다 보면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추정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지요. (p. 12)

명리학의 기초를 설명하는 저자의 설명을 읽다보니 사주풀이가 굉장히 범신론적인 개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자연은 늘 같아 보이고 반복되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항상 새롭고 변칙이 생겨나곤 한다. 자연의 순리는 법칙이 되기도 하지만 그 법칙이 항상 규칙적이진 않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는 그 자체로 납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의 삶을 자연의 흐름과 접목시켜 생각하는 학문이 명리학이라고 보면 사주풀이는 때론 과학적이고 때론 운명적이면서도 때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무엇이 될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나와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분에게 유용한 방법론이 되었으면 합니다. (p. 18)' 라는 저자의 말처럼 방법론적 측면에서 사주의 이해는 꽤 흥미로운 것임은 분명하다.

저자는 '이 책부터 공부하셔서 명리학의 윤곽을 잡으신 후, 명리학의 개론서를 한두 권 더 읽을 실 것을 권합니다. 블로그나 각종 영상물을 통해서 도움을 받으실 수도 있는데, 체계적이지는 않지요. 선생님을 정해서 수업을 듣는 것이 아무래도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p. 16)' 라고 말하는데 나는 공부까지 갈 것은 아니라서 이 책에서 바라는 점은 '명리학의 윤곽'이었다. 따라서 책의 앞부분에서 천간과 지지 그리고 육신에 대한 설명과 오행과 육신에 있는 음양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 윤곽이 좀 보이는 듯도 했다.

하지만 명리학에 대한 기초가 너무 없어서인지 월별 특성 까지는 쉽고 재미있었는데 책의 중간을 넘어가면서 사주풀이의 해석이 계절과 시공간으로 확장되면서부터는 그 용어부터 낯설고 어려웠다. 그러나 내가 타고난 여덟글자가 단순히 그 글자적 의미를 넘어서 하루의 때와 월별의 흐름과 사계절의 특성까지 서로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미친다는 것 정도는 느껴져서 명리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나를 알고 상대를 아는 방법론적으로 정말 큰 의미가 있겠구나 하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구어체로 설명해주는 이 책이 좀더 정리된 표나 자료를 명확히 보여주었다면 좋았겠다 싶은 아쉬움도 있지만 그건 아마 너무 쉽게 배우려는 내 욕심일 것이다. 모든 배움에는 다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고 학교수업도 한번 듣고 따라가지 못하면 복습이나 예습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저자가 알려주는 '명리수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공부가 좀더 필요할 것 같은데... 좀더 쉽고 자세한 기초책은 없나 찾아봐야 겠다. ^^;;;;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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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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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얼어붙은 사춘기, 끝내 맞이하는 성장과 치유

창비에서 진행한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받았다.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표지가 어떤 옷을 입게 될지도 모른채 가제본의 형태로 된 책을 읽는 것은 늘 색다른 기분을 기분을 느끼게 되곤 한다. 좀더 호기심어려진달까... 그래서 좀더 몰입이 된달까... 여하튼, 주어진 키워드로는 청소년문학이라는 것만 알고 첫장을 펼쳤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p. 7)

소설의 제목이 <호수의 일>이라고 했을때 이 '호수'가 어떤 대명사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었다. 첫장을 펼치자마자 이 호수는 익히 알고 있는 명사적 그 호수라는 것을 알았다. ~의 라고 할때 의미는 ~에 속한다는 것이므로 '호수의 일' 이란 호수가 하는 일 혹은 호수가 해야하는 일 정도로 이해될 것이다. 파도가 높은 바다도 아니고 쉼없이 흐르는 강물도 아닌 한곳에 가만히 고여있는 호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가만히 있는 호수가... 일을... 하나???

일은 둘째치고 얼어붙은 호수는 과연 안전한가? 깊이가 얼마인지도 모를 호수가 얼어붙은 것이 바다보다 강물보다 과연 안전....할까???

어떤 기억은 바로 어제의 감정조차 아득하고, 또 어떤 기억은 유치원 때의 일이 지금처럼 또렷하다. 기억은 블록처럼 시간의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게 아니다. 여러 색깔의 물감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모든 색을 집어삼킨 어둠 같기도 하다. (p. 8) 다 털어놓을 생각은 없다. 물을 비워 버린 호수는 호수가 아닐 것이다. (p. 9)

어두운 기억에 대한 상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호정은 상담의사에게 속내를 다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 어두운 기억은 얼어버렸을 뿐 잊혀진게 아니라서 온몸을 꽁꽁 얼려대곤 했다. 그렇게 바들바들 떨면서도 호정은 켜켜이 기억을 얼리고 있었나보다. 혹여 녹을까 혹여 증발될까 속으로만 꽁꽁

호수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나는 무언가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침묵. (p. 15)

여덟살이 된 동생 진주의 생일날 가족은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썰매를 타러 갔다. 아홉살 차이가 나는 동생에 대해 호정이 품고 있는 감정은 따듯하지만 썰매를 같이 타줄 만큼은 아니었다. 열일곱살 호정은 음악도 틀지 않은 헤드셋을 낌으로써 대화를 차단하곤 했다. 그렇다고 바깥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헤드셋을 끼지 않은 사람보다 더 열심히 귀기울이고 있었다. 침묵이든 소음이든.

아빠가 물었다. "왜, 자전거 타고 싶어? " (중략) 그 순간 자전거를 탈 마음이 깨끗이 사라졌다. (p. 38)

그러니까 행복한 가정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벌였고, 그때마다 진주를 앞세웠다. 진주가 기다려, 진주가 언니 없으면 안 된대. (p. 40)

엄마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중략) 걱정스러운 눈빛, 불안한 눈빛, 우리 애가 사춘기를 힘들게 지나네, 하는 눈빛. 사춘기라는 말이 없었다면 어쩔뻔하셨나요? (p. 61)

호정이가 왜 부모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해 화목하려 애쓰고 있어 보였고 호정만 겉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집 밖에서의 나는 다르다. 쌀쌀맞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성격이 좋은 애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이랑도 잘 어울린다. 편한 친구라고도 한다. 롤링 페이퍼 같은 걸 하면 그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나였고, 엄마가 모르는 나였다. 나는 엄마한테 그런 나를 알려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없게 됐다. (p. 62)'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안에서의 모습이 다르곤 하다. 하지만 그것 무의식적인 경우일 때가 많다. 하지만 호정은 의식적으로 집안에서 자신을 집밖에서와 다르게 연출하고 있었다. 그 반항과 삐딱함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뭔가 큰 상처가 있었겠거니 예상하면서도 좀... 너무하다 싶었다. 그러던 중 '강은기'가 전학을 왔다. 호정은 그 아이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그리고 은기도 자꾸 호정을 바라보곤 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알아 버린 애들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p. 131)

호정이 어렸을 때 아빠의 사업실패로 할머니댁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다정했고 삼촌고모도 호정을 예뻐했다. 하지만 아빠의 사업실패가 집안 전체를 흔들고 난 이후 가족들은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서로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어린 호정에게 티를 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정은 알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것을 자신이 처한 입장이 변했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습니다. 같은 건 아니다. 수학 공식처럼 숫자를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논술처럼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됐다. 그냥 뭔가 싫어졌고, 학원도 하나씩 끊게 되었다. 성적도 떨어졌다. 사람은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제 마음의 일을 어째서 자신이 모를까. 그건 제 안에만 담긴 거라서 남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인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면 끝내 아무도 모를 일인데. (p. 146)

호정의 집안에서의 모습에 대한 원인은 콕 집어 말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해하기 어려우니 공감하기 어려웠다. 사춘기의 시절이 너무 옛날일이라서 그런가... 자꾸 호정이 아니라 호정의 부모마음이 되어 호정을 바라보게 되곤 했다. 청소년 문학을 읽으며 이런 적은 없었는데...

아빠는 기어이 할 말은 한다. 기어이가 되기 전에도 참고 있다는 티를 낼 만큼 낸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말리곤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와 마음이 다른 건 아니다. 나중에 자기들끼리 그러겠지. 애 요즘 예민한데 건들지 마. 도대체 언제까지 눈치를 봐야 해? 모르겠어, 나도 애가 왜 저러는지. 사춘기가 늦게 왔나 봐. (p. 147)

저렇게 착한 부모들에게 호정은 대체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는 것일까... 편견이겠지만 의붓딸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찢어지게 고생을 했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는데 가족들은 모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온 것 같은데 호정인 대체 왜...

그때 은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 걸음, 나도 은기 손을 마주 잡았다. 몇 걸음 가다가 은기가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걸었다.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소리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손을 잡고 있었고,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손이란 참 힘이 세구나. 그저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온 마음이 전해지는 구나. 따스해지는구나. 또 그만 눈물이 솟았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왜, 대체. (p. 160)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지만 호정은 알았다. 은기가 자신과 비슷한 어둠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그래서 좋았다. 아마 은기도 그랬을 것이다.

알 것 같았다. 아니, 알았다. 정말로. 왜 아는지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알았다. 그러니까 이제 은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궁금해하지도 않기로 했다.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카카오톡이든 벌써 나온 주민등록증이든 수원이든. 은기는 잘 우는 애니까. 울 준비가 되었을 때 은기가 말해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믿고 있다. 은기는 그랬을 것이다. 그때는, 그 밤에는. (p. 163)

그렇게 서툴지만 설레어 하며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호정과 은기는 마주잡고 있는 손의 온기만으로도 그 누구에게서보다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이였다. 절친 나래와 지후 와는 또다른 감정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째서 모르면 좋았을 것을 그냥 덮어 두지 못할까.

정말로 치명적인 것은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이름 모를 바이러스나 천박한 호기심 같은 것들은. (p. 210)

은기는 모나진 않았지만 불투명한 아이였다. 따듯한 아이였지만 닫혀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은기가 모르는 사이에 호정이가 덫에 걸려서. 은기의 전학배경이 알려진 순간 은기는 사라졌고 호정은 도망쳤다. 스스로들에게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거는 애들, 평소보다 다정한 투로 말을 걸면서 평소와 다름없다는 듯이 구는 애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그 애들이 싫었다. 나는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은 것이었다. 내게 어떻게 그래? 내가? 나만? 괜찮지 않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괜찮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나는 괜찮아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대체 내가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괜찮아. 아무일 없었어. 그건 내가 스스로에게 내내 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다들 저리 가. 날 좀 내버려 두라고. (p. 226)

호정은 이제 가족들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조차 나쁜 아이로 굴었다. 일부러.

꼬이고 꼬인 마음을 절대 풀어내지 않으리라 꽁꽁 움켜쥐고서 온몸에 가시를 솟구쳐 올렸다. '고작 그런 나(p. 231)' 라면서 '이런 몰골(p. 231)' 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일곱 살 때의 일을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건 결코 아니다. 곰국이 들었던 대접 바닥을 긁는 숟가락 소리 같은 걸 대체 누가 기억한단 말인가. 엄마가 홧김에 엉덩이 몇 대 때린 일을 일일이 기억하는 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엄마가 무슨 아동 학대를 하듯 때린 것도 아닌데. 아빠가 잡아 먹을 듯이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삼촌이, 고모가 나를 괴롭힌 것도 아닌데. 할머니가 나를 굶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인간인지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나를, 내가. (p. 246)

읽을수록 호정의 우울감에 공감보다는 솔직히 지쳐가는 마음이었다. 대체 왜 저럴까... 왜...

은기와의 관계와 호정이의 상처에 대해 알게 되었어도 지친 마음은 이해로 넘어가지지 않았다. 그 정도의 일에 뭘 그렇게까지...

하지만 나도 모르지 않는다. 우울에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싶었고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다. 그동안 읽었던 청소년 문학에서의 성장과 치유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이 작품엔 왜이리 마음이 복잡해지고 꼰대같은 마음이 드는 것인지...

변한건 내가 아니라 시대였다. 그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닌 것들이 있곤 하다. 굶지만 않아도 좋겠다 싶은 시절이 밥과 김치만 있는 것이 못참겠는 시절이 될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밥그릇 하나에서 김치로 다른 반찬들로 고기로 그 가짓수를 늘려가면서 그 전의 밥상에 대한 고마움은 이해할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밥에 고기반찬이 당연한 세대가 아니라서 결국 어쩔 수 없는 심정이 되고마는 것이다. 호정이가 아니라 호정의 부모 마음이 되버린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호정이처럼 성장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없고 호정이의 부모처럼 잘못을 뒤돌아봐야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게 참... 씁쓸했다.

하지만 또한 나는 알고 있다. 같은 상처에도 깊이와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누구에겐 상처가 되지 않는 일이 누구에겐 상처가 될수도 있다는 것을... 과거엔 상처인줄도 모르고 지났던 일들이 지금은 커다란 상처로 반드시 치료하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호정이의 마음에 좀더 다가가보려 한다. 호정이의 마음이 녹고 잔물결이 일면 반가워할수 있도록 호숫가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지켜보려 한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지만,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호수와 같아. (p. 350)

호정이가 호수가 아니라 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기를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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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를 먹어 줄게 - 고민 상담부 나의 괴물님 YA! 1
명소정 지음 / 이지북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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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십 대, 너만을 위한 감성 판타지

"지우고 싶은 기억들, 내가 다 먹어 줄게"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모인 기숙학교가 있다. 아무리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라 해도 사람이 모이면 관계가 생기기 마련이고 관계가 생기면 갈등도 생기기 마련이다. 성적, 연애, 진로, 가족, 친구... 그런 고민거리들을 괴로운 기억들을 누군가 사라지게 해준다면?

"나는 화괴야. 이야기를 먹고 사는 괴물이지. 먹은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잊힌다는 게 흠이지만" (p. 16)

이세월이라는 소녀가 있다. 관계에 서툰 세월이는 갑자기 그만둔 사서선생님을 대신해 이용자가 적은 도서관 관리를 맡게 됐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자꾸 책이 사라져서 고민중이었는데 그 원인인 대상을 만나게 된다. 괴물의 모습에서 점차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눈앞에 서있는 그녀석을. 임혜성.

"나는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만 이야기를 먹을 수 있어. 내가 설마 책만 먹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겠어? 세상에는 자신의 나쁜 기억을 잊어버리길 원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책을 먹지 않을 테니 기억을 지우려 하는 사람들을 찾아달라 이거지?"

"찾아줄 필요 없이,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우리한테 오게 하면 되지" (p. 17, 18, 19 일부발췌)

전교1등 모범생인줄로만 알았던 임혜성이 화괴였다니. 하지만 세월이는 그닥 놀라지도 않았고 달아나지도 않았고 그저 도서관 책을 더이상 먹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탄생하게 된 '고민 상담부' 실상은 '나의 괴물님'

사람의 기억을 지운다는 게 그리 좋기만 한 일은 아니지만, 만약 그런 게 필요한 학생이 있다면 화괴는 이 학교에서 학생들과 공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괴물이 인간과 함께 살았던 옛이야기 속 세상처럼. 화괴가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인간의 이야기가 화괴에게 도움이 되는 그 시절처럼. 적어도 그 당시의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p. 28)

시작은 쉬웠다. 사람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세월이는 다른이의 고민에 대해 그 깊이에 대해 미리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고민을 상담하러 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월이도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나는 그때 함부로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p. 44)' 는 것을.

갑작스레 들이닥쳐 화괴를 알아보고 부적을 던지며 세월이를 보호하려는 소원의 등장으로 고민상담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사람의 일은 사람끼리 해결해야 해. 괴물의 힘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네가 근본적으로 착각하고 있는게 있는데, 사람의 이야기를 먹는 건 그 사람 허락만 받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

"그럼 누구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기억의 또다른 주인들이지. 이야기는 혼자서 만들 수있는게 아니야. 물론 종종 예외도 있지만, 보통은 둘 이상의 사람이 만났을 때 만들어지는 게 이야기라고. 그런데 다른 등장인물은 신경 쓰지도 않고 한 명의 기억을 갑자기 지워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p. 97)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조금 알고 나면 다들 한가득 고민거리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질풍노도의 시기 청소년들은 그 속이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세월이는 소원과 혜성이 함께하는 고민상담부를 운영하며 다른 이들의 고민을 들음으로써 그리고 그 해결과정을 지켜봄으로써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되짚어보게 된다. 누구보다 평온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쓰라린 아픔을 주는 그 이야기를...

학생들은 어떤 고민거리를 안고 상담부를 찾아왔을까?

퇴마사 소원과 화괴 혜성 그리고 무감한 세월이는 그들에게 어떤 해결방안을 내놓을까?

무엇보다 세월이의 감정변화는 그동안 괴로웠던 세월이만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게 할까?

단순하게 고민을 먹고 기억을 먹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이 소설은 십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대학생인 저자의 풋풋함이 그대로 담겨있는 소설이기도 했다. 십대의 고민을 이십대 초반의 사고방식으로 풀어나가면서 감성적 판타지를 표방한 이 작품이 누군가에겐 훌륭한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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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이상하든
김희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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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상하게 살아도 괜찮을까?

어제가 괴로워도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꿈꾸는,

쉼 없이 생동하는 삶의 이야기

이상하다는게 무엇인지 갈수록 낯설어지는 시대가 요즘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이상한게 너무 많아져서 도대체 이상하지 않은 게 무엇인지 골라낼 수 없어진 것 같은 세상이랄까. 정상이냐 비정이냐하고는 또 다른 문제다. 이상하다 이상하지 않다라는 것은. 하지만 어찌보면 비슷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상하다 이상하지 않다라는 것은. 그러나 이상하면 또 어떻단 말인가? 이상하면 안되나? 괜찮다괜찮다 다 괜찮다고. 이상해도 안이상해도 다 괜찮다고. 그런 세상이다. 요즘은.

창문 모양을 한 햇빛 그림자가 발끝에 닿았다. 늦은 아침이면 내 방에 소리 없이 스며드는 하얀 그림자. 직사각형 모양의 그것은 계절과 시간에 다라 길어졌다가 짧아졌다. 마름모꼴로 비틀어지기도 하고 막대 모양으로 가늘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조금씩 멀어지다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언제나 나타남은 은근하고 사라짐은 고요했다. 나는 저 햇빛 그림자의 허락 없는 방문을 좋아했다. (p. 9)

아무 의미 없이 읽었던 첫 문장도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읽으면 그 느낌이 새롭다는 게 참 신기할때가 있다. 이 작품의 첫 문장도 그러했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소설을 다 읽고 주인공의 마음을 공감하고 난 후 다시 읽으니 특별하게 다가왔다.

세상 공평하게 내리쬐는 햇빛도 창문 크기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세상 환하고 밝은 햇빛도 빛이 아니라 하얀 그림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 은근하고 고요하며 규칙적인, 딱 창문만큼의 환함만으로도 감사한 그런 사람이.

나는 그날 이후 내가 정한 어떤 질서 안에서만 안정과 안도를 느꼈다. 정해진 테두리를 벗어나면 뭔가 께름칙하고 불안해졌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 라는 강박적 사고와 불길한 암시가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정해진 테두리라니? 무슨 운명처럼 거기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만다. 그것은 내 이름이기 전에, 한없이 그리워지는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했다. 타인에게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 누군가를 떠올려야 해서일까. 이제 내 이름은 가혹한 무엇이 된 것만 같았다. (p. 10)

정해진. 강박증에 시달리는 정해진은 사소한 것이라도 정해진 테두리를 벗어나면 불안을 느낀다.

그날 그 사고 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맞이한 스무살 인생은 여전히 정해진 것 없는 삶이었다. 음악을 만들고 편의점 알바를 하고 스스로 정해놓은 강박들을 꼼꼼이 지키며 보내는 지금의 이 시간들이 무엇이 될지 아무것도 알수 없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집집의 담장 너머로 봄이 피어났다. 4월의 시작이었다. 거짓말로 시작하는 달이지만 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거짓말 같은 짓을 종종 벌일 뿐이다. 그게 봄이 가진 반전이고 의외성이었다. 봄의 흔하디흔한 장난인 것이다. (p. 15)

4월은 삭막한 겨울을 완전히 끝낸 그 찬란함으로 더더욱 잔인하게 되새겨지는 달이다. 왜 4월엔 유독 그런 상반되는 수식어들이 많을까...

분명한건 우리 모두에게 잊혀지기 힘들 4월의 그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해진이 일하는 '불면증'이라는 간판을 단 편의점 사장아저씨도 그 바다에서 개인잠수사로 봉사했던 그 시간들로 인해 지금도 여전히 불면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바다 밑 죽음이 사장에게 불면증을 남겼다면 보도 위 죽음은 나에게 강박증을 남겼다. 그러니까 사장과 나는 그 처참한 봄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p. 83)' 그러나 봄의 흔하디흔한 장난?!이 시작된다.

"그럼 당신이 제 이름 좀 지어줄래요?"

"네? 제가요? 제가 왜..."

"당신이 저의 첫 번째 타인이자 나를 인식한 객체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제 이름은 그쪽이 불러줄 테니까 누구보다 당신이 부르기 편해야 하잖아요?" (p. 88)

해진은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주변의 이웃들을 알게 된다.

특이한 자신의 조건을 맞춰 알바채용을 해준 사장님부터, 한국에 여행을 왔는데 급작스런 공황발작으로 비행기를 타지 못해 7년째 한국에 머물고 있는 영국 청년 마크, 4살때 부모님을 잠시 잃어버렸다가 동네 우체통 번호를 기억하고 있는 덕에 부모님을 되찾은 추억으로 인해 편지를 쓰는 것으로 우체통을 지키고자 하는 8살 김다름, 편의점 파라솔에서 카프리 맥주와 담배를 즐기는 팔순 넘은 독신녀 꽃순이 할매, 편의점 코앞에 있는 오피스텔에 살면서 배달을 시키고 백개가 넘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들어야만 이명이 들리지 않는다는 게으른 극작가 백수진, 그리고 갑자기 뛰어든 배우지망생 친구 안승리.

하긴, 좌절에 지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는가. 생각해보면 "그 나이는 모두 그럴 나이야" 라는 말처럼 부당하고 폭력적인 건 없었다. 왜 모든 실패와 좌절은 우리 차지가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실패란 녀석은 젊음과 청춘을 너무 호구로 보는 게 문제였다. (p. 155)

해진의 엄마는 만두가게를 하고 해진의 아빠는 초밥가게를 한다. 팔다가 남은 것들을 집으로 가져오는데 해진의 두 언니들은 쳐다보지도 않기에 늘 막내 해진이 그나마라도 먹어치우곤 했다. 그러다 승리가 비어있던 방에 비밀스레 살게되면서 그 만두와 초밥들을 걸신들린 듯 먹게 되는데 만초라는 별명을 가졌던 해진에게 승리는 여러모로 기막힌 친구였다. 하지만 진짜 만초는 해진 앞에 갑자기 나타난 시커면 그림자같은 존재였다. 해진은 그에게 김만초 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나는 모든 관계까 두렵기만 했다. 나와 맺어진 인연 하나하나가 나중에는 모두 슬픔이 되고 상실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다른 누군가의 슬픔이 되고 상실이 될 거라는 절망에 이르자 모든 관계까 유예된 비극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애초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실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p. 201)

해진에겐 그랬다. 삶이 곧 상실로 가는 길이었기에 모든 시간들이 상처가 될지도 몰라서 움츠러 들었다. 맨홀을 밟지 않고 세수할땐 수를 세어가며 씻고 계단을 밝을땐 가장자리만 디디며 아침저녁으로 인형에게 인사해야하는 루틴들이 그저 지나쳐왔던길도 느낌이 이상하면 몇번이고 되돌아 왔다갔다하며 안심이 될때까지 돌고돌아야 하는 강박들이 해진을 지탱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삶을 알게 되고 보게 되면서 해진은 조금씩 조였던 마음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다 생각하게 됐어요. 나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내 시작은 어디였을까..."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보니 그는 자기에게도 죽음이란 게 있다면 그건 어떤 형태이고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고 했다. 옅어지고 희미해지는 것을 내버려두면 그게 자기한테는 정말 죽음이 되긴 하는 건지. 그리고 자기와 같은 물성을 가진 존재는 이 세상에 자기 하나뿐인건지, 혹시 자기가 사는 세상이 따로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의문은 또 다른 의문으로 번져갔다고 했다. (p. 253)

그림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김만초씨는 해진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해진이 그에겐 첫 사람이었고 해진에겐 그가 첫 이상한 존재였다. 하지만 '달라도 이상하지는 않게'(p. 254)' 살아가고 싶다는 만초씨의 꿈을 들으며 해진도 조금씩 나아진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야, 근데 넌 어렸을 때 몇살쯤이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어?"

"어, 어른? 글쎄, 한 스물넷? 대학졸업하면?"

"나는 스물. 진짜 한심하게도 난 그나이가 되면 자동으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p. 268)

어른이 되는 나이는 몇살일까? 그런 나이가 있기는 할까? 스무살이 되는 자정이 되면 주민증을 내세우며 호프집문을 열고 들어가겠다는 계획으로 어른이 되는 것일까? 나도 어렸을 땐 그랬다. 나이만 먹으면 어른이 되는 건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란 것을 정작 어른이 되고나서야 알았다.

예상했던 대로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아니, 내가 아닌 내 옆에 서 있는 그를 향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저건 뭐지?' 였다. 엄마와 아빠의 찌푸려진 미간이 보였고, 계속해서 눈을 비벼대는 승리가 보였다. 작은언니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와 만초씨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데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엄마가 물었다. "저 희멀건 놈은 누구냐?" 이번엔 아빠가 말했다. "희멀겋긴? 내 눈엔 뭔가 환해졌다 어두워져다 하는구만" 큰언니 눈에는 아예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큰언니가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더니 "뭐가 있어?"라고 묻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작은언니가 왜 그러냐는 투로 끼어들었다. "못난이 옆에 먹구름 같은 사람이 서 있는데?" 이번엔 승리 차례였다. "네, 제 눈에도 보여요. 잘생긴 남자 그림자 같아요. 아주 까만" 나는 일단 두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개할게, 내 친구 김만초씨야" (p. 282, 283 일부 발췌)

해진은 그림자 김만초씨 덕분에 시간의 그림자 속에서 햇빛의 그림자 속에서 한발짝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마도 이제 해진은 창문만큼의 햇빛이 아니라 온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햇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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