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이상하든
김희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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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상하게 살아도 괜찮을까?

어제가 괴로워도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꿈꾸는,

쉼 없이 생동하는 삶의 이야기

이상하다는게 무엇인지 갈수록 낯설어지는 시대가 요즘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이상한게 너무 많아져서 도대체 이상하지 않은 게 무엇인지 골라낼 수 없어진 것 같은 세상이랄까. 정상이냐 비정이냐하고는 또 다른 문제다. 이상하다 이상하지 않다라는 것은. 하지만 어찌보면 비슷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상하다 이상하지 않다라는 것은. 그러나 이상하면 또 어떻단 말인가? 이상하면 안되나? 괜찮다괜찮다 다 괜찮다고. 이상해도 안이상해도 다 괜찮다고. 그런 세상이다. 요즘은.

창문 모양을 한 햇빛 그림자가 발끝에 닿았다. 늦은 아침이면 내 방에 소리 없이 스며드는 하얀 그림자. 직사각형 모양의 그것은 계절과 시간에 다라 길어졌다가 짧아졌다. 마름모꼴로 비틀어지기도 하고 막대 모양으로 가늘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조금씩 멀어지다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언제나 나타남은 은근하고 사라짐은 고요했다. 나는 저 햇빛 그림자의 허락 없는 방문을 좋아했다. (p. 9)

아무 의미 없이 읽었던 첫 문장도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읽으면 그 느낌이 새롭다는 게 참 신기할때가 있다. 이 작품의 첫 문장도 그러했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소설을 다 읽고 주인공의 마음을 공감하고 난 후 다시 읽으니 특별하게 다가왔다.

세상 공평하게 내리쬐는 햇빛도 창문 크기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세상 환하고 밝은 햇빛도 빛이 아니라 하얀 그림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 은근하고 고요하며 규칙적인, 딱 창문만큼의 환함만으로도 감사한 그런 사람이.

나는 그날 이후 내가 정한 어떤 질서 안에서만 안정과 안도를 느꼈다. 정해진 테두리를 벗어나면 뭔가 께름칙하고 불안해졌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 라는 강박적 사고와 불길한 암시가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정해진 테두리라니? 무슨 운명처럼 거기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만다. 그것은 내 이름이기 전에, 한없이 그리워지는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했다. 타인에게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 누군가를 떠올려야 해서일까. 이제 내 이름은 가혹한 무엇이 된 것만 같았다. (p. 10)

정해진. 강박증에 시달리는 정해진은 사소한 것이라도 정해진 테두리를 벗어나면 불안을 느낀다.

그날 그 사고 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맞이한 스무살 인생은 여전히 정해진 것 없는 삶이었다. 음악을 만들고 편의점 알바를 하고 스스로 정해놓은 강박들을 꼼꼼이 지키며 보내는 지금의 이 시간들이 무엇이 될지 아무것도 알수 없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집집의 담장 너머로 봄이 피어났다. 4월의 시작이었다. 거짓말로 시작하는 달이지만 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거짓말 같은 짓을 종종 벌일 뿐이다. 그게 봄이 가진 반전이고 의외성이었다. 봄의 흔하디흔한 장난인 것이다. (p. 15)

4월은 삭막한 겨울을 완전히 끝낸 그 찬란함으로 더더욱 잔인하게 되새겨지는 달이다. 왜 4월엔 유독 그런 상반되는 수식어들이 많을까...

분명한건 우리 모두에게 잊혀지기 힘들 4월의 그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해진이 일하는 '불면증'이라는 간판을 단 편의점 사장아저씨도 그 바다에서 개인잠수사로 봉사했던 그 시간들로 인해 지금도 여전히 불면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바다 밑 죽음이 사장에게 불면증을 남겼다면 보도 위 죽음은 나에게 강박증을 남겼다. 그러니까 사장과 나는 그 처참한 봄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p. 83)' 그러나 봄의 흔하디흔한 장난?!이 시작된다.

"그럼 당신이 제 이름 좀 지어줄래요?"

"네? 제가요? 제가 왜..."

"당신이 저의 첫 번째 타인이자 나를 인식한 객체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제 이름은 그쪽이 불러줄 테니까 누구보다 당신이 부르기 편해야 하잖아요?" (p. 88)

해진은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주변의 이웃들을 알게 된다.

특이한 자신의 조건을 맞춰 알바채용을 해준 사장님부터, 한국에 여행을 왔는데 급작스런 공황발작으로 비행기를 타지 못해 7년째 한국에 머물고 있는 영국 청년 마크, 4살때 부모님을 잠시 잃어버렸다가 동네 우체통 번호를 기억하고 있는 덕에 부모님을 되찾은 추억으로 인해 편지를 쓰는 것으로 우체통을 지키고자 하는 8살 김다름, 편의점 파라솔에서 카프리 맥주와 담배를 즐기는 팔순 넘은 독신녀 꽃순이 할매, 편의점 코앞에 있는 오피스텔에 살면서 배달을 시키고 백개가 넘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들어야만 이명이 들리지 않는다는 게으른 극작가 백수진, 그리고 갑자기 뛰어든 배우지망생 친구 안승리.

하긴, 좌절에 지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는가. 생각해보면 "그 나이는 모두 그럴 나이야" 라는 말처럼 부당하고 폭력적인 건 없었다. 왜 모든 실패와 좌절은 우리 차지가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실패란 녀석은 젊음과 청춘을 너무 호구로 보는 게 문제였다. (p. 155)

해진의 엄마는 만두가게를 하고 해진의 아빠는 초밥가게를 한다. 팔다가 남은 것들을 집으로 가져오는데 해진의 두 언니들은 쳐다보지도 않기에 늘 막내 해진이 그나마라도 먹어치우곤 했다. 그러다 승리가 비어있던 방에 비밀스레 살게되면서 그 만두와 초밥들을 걸신들린 듯 먹게 되는데 만초라는 별명을 가졌던 해진에게 승리는 여러모로 기막힌 친구였다. 하지만 진짜 만초는 해진 앞에 갑자기 나타난 시커면 그림자같은 존재였다. 해진은 그에게 김만초 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나는 모든 관계까 두렵기만 했다. 나와 맺어진 인연 하나하나가 나중에는 모두 슬픔이 되고 상실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다른 누군가의 슬픔이 되고 상실이 될 거라는 절망에 이르자 모든 관계까 유예된 비극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애초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실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p. 201)

해진에겐 그랬다. 삶이 곧 상실로 가는 길이었기에 모든 시간들이 상처가 될지도 몰라서 움츠러 들었다. 맨홀을 밟지 않고 세수할땐 수를 세어가며 씻고 계단을 밝을땐 가장자리만 디디며 아침저녁으로 인형에게 인사해야하는 루틴들이 그저 지나쳐왔던길도 느낌이 이상하면 몇번이고 되돌아 왔다갔다하며 안심이 될때까지 돌고돌아야 하는 강박들이 해진을 지탱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삶을 알게 되고 보게 되면서 해진은 조금씩 조였던 마음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다 생각하게 됐어요. 나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내 시작은 어디였을까..."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보니 그는 자기에게도 죽음이란 게 있다면 그건 어떤 형태이고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고 했다. 옅어지고 희미해지는 것을 내버려두면 그게 자기한테는 정말 죽음이 되긴 하는 건지. 그리고 자기와 같은 물성을 가진 존재는 이 세상에 자기 하나뿐인건지, 혹시 자기가 사는 세상이 따로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의문은 또 다른 의문으로 번져갔다고 했다. (p. 253)

그림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김만초씨는 해진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해진이 그에겐 첫 사람이었고 해진에겐 그가 첫 이상한 존재였다. 하지만 '달라도 이상하지는 않게'(p. 254)' 살아가고 싶다는 만초씨의 꿈을 들으며 해진도 조금씩 나아진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야, 근데 넌 어렸을 때 몇살쯤이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어?"

"어, 어른? 글쎄, 한 스물넷? 대학졸업하면?"

"나는 스물. 진짜 한심하게도 난 그나이가 되면 자동으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p. 268)

어른이 되는 나이는 몇살일까? 그런 나이가 있기는 할까? 스무살이 되는 자정이 되면 주민증을 내세우며 호프집문을 열고 들어가겠다는 계획으로 어른이 되는 것일까? 나도 어렸을 땐 그랬다. 나이만 먹으면 어른이 되는 건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란 것을 정작 어른이 되고나서야 알았다.

예상했던 대로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아니, 내가 아닌 내 옆에 서 있는 그를 향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저건 뭐지?' 였다. 엄마와 아빠의 찌푸려진 미간이 보였고, 계속해서 눈을 비벼대는 승리가 보였다. 작은언니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와 만초씨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데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엄마가 물었다. "저 희멀건 놈은 누구냐?" 이번엔 아빠가 말했다. "희멀겋긴? 내 눈엔 뭔가 환해졌다 어두워져다 하는구만" 큰언니 눈에는 아예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큰언니가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더니 "뭐가 있어?"라고 묻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작은언니가 왜 그러냐는 투로 끼어들었다. "못난이 옆에 먹구름 같은 사람이 서 있는데?" 이번엔 승리 차례였다. "네, 제 눈에도 보여요. 잘생긴 남자 그림자 같아요. 아주 까만" 나는 일단 두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개할게, 내 친구 김만초씨야" (p. 282, 283 일부 발췌)

해진은 그림자 김만초씨 덕분에 시간의 그림자 속에서 햇빛의 그림자 속에서 한발짝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마도 이제 해진은 창문만큼의 햇빛이 아니라 온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햇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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