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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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얼어붙은 사춘기, 끝내 맞이하는 성장과 치유

창비에서 진행한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받았다.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표지가 어떤 옷을 입게 될지도 모른채 가제본의 형태로 된 책을 읽는 것은 늘 색다른 기분을 기분을 느끼게 되곤 한다. 좀더 호기심어려진달까... 그래서 좀더 몰입이 된달까... 여하튼, 주어진 키워드로는 청소년문학이라는 것만 알고 첫장을 펼쳤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p. 7)

소설의 제목이 <호수의 일>이라고 했을때 이 '호수'가 어떤 대명사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었다. 첫장을 펼치자마자 이 호수는 익히 알고 있는 명사적 그 호수라는 것을 알았다. ~의 라고 할때 의미는 ~에 속한다는 것이므로 '호수의 일' 이란 호수가 하는 일 혹은 호수가 해야하는 일 정도로 이해될 것이다. 파도가 높은 바다도 아니고 쉼없이 흐르는 강물도 아닌 한곳에 가만히 고여있는 호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가만히 있는 호수가... 일을... 하나???

일은 둘째치고 얼어붙은 호수는 과연 안전한가? 깊이가 얼마인지도 모를 호수가 얼어붙은 것이 바다보다 강물보다 과연 안전....할까???

어떤 기억은 바로 어제의 감정조차 아득하고, 또 어떤 기억은 유치원 때의 일이 지금처럼 또렷하다. 기억은 블록처럼 시간의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게 아니다. 여러 색깔의 물감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모든 색을 집어삼킨 어둠 같기도 하다. (p. 8) 다 털어놓을 생각은 없다. 물을 비워 버린 호수는 호수가 아닐 것이다. (p. 9)

어두운 기억에 대한 상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호정은 상담의사에게 속내를 다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 어두운 기억은 얼어버렸을 뿐 잊혀진게 아니라서 온몸을 꽁꽁 얼려대곤 했다. 그렇게 바들바들 떨면서도 호정은 켜켜이 기억을 얼리고 있었나보다. 혹여 녹을까 혹여 증발될까 속으로만 꽁꽁

호수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나는 무언가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침묵. (p. 15)

여덟살이 된 동생 진주의 생일날 가족은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썰매를 타러 갔다. 아홉살 차이가 나는 동생에 대해 호정이 품고 있는 감정은 따듯하지만 썰매를 같이 타줄 만큼은 아니었다. 열일곱살 호정은 음악도 틀지 않은 헤드셋을 낌으로써 대화를 차단하곤 했다. 그렇다고 바깥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헤드셋을 끼지 않은 사람보다 더 열심히 귀기울이고 있었다. 침묵이든 소음이든.

아빠가 물었다. "왜, 자전거 타고 싶어? " (중략) 그 순간 자전거를 탈 마음이 깨끗이 사라졌다. (p. 38)

그러니까 행복한 가정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벌였고, 그때마다 진주를 앞세웠다. 진주가 기다려, 진주가 언니 없으면 안 된대. (p. 40)

엄마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중략) 걱정스러운 눈빛, 불안한 눈빛, 우리 애가 사춘기를 힘들게 지나네, 하는 눈빛. 사춘기라는 말이 없었다면 어쩔뻔하셨나요? (p. 61)

호정이가 왜 부모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해 화목하려 애쓰고 있어 보였고 호정만 겉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집 밖에서의 나는 다르다. 쌀쌀맞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성격이 좋은 애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이랑도 잘 어울린다. 편한 친구라고도 한다. 롤링 페이퍼 같은 걸 하면 그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나였고, 엄마가 모르는 나였다. 나는 엄마한테 그런 나를 알려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없게 됐다. (p. 62)'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안에서의 모습이 다르곤 하다. 하지만 그것 무의식적인 경우일 때가 많다. 하지만 호정은 의식적으로 집안에서 자신을 집밖에서와 다르게 연출하고 있었다. 그 반항과 삐딱함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뭔가 큰 상처가 있었겠거니 예상하면서도 좀... 너무하다 싶었다. 그러던 중 '강은기'가 전학을 왔다. 호정은 그 아이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그리고 은기도 자꾸 호정을 바라보곤 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알아 버린 애들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p. 131)

호정이 어렸을 때 아빠의 사업실패로 할머니댁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다정했고 삼촌고모도 호정을 예뻐했다. 하지만 아빠의 사업실패가 집안 전체를 흔들고 난 이후 가족들은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서로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어린 호정에게 티를 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정은 알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것을 자신이 처한 입장이 변했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습니다. 같은 건 아니다. 수학 공식처럼 숫자를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논술처럼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됐다. 그냥 뭔가 싫어졌고, 학원도 하나씩 끊게 되었다. 성적도 떨어졌다. 사람은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제 마음의 일을 어째서 자신이 모를까. 그건 제 안에만 담긴 거라서 남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인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면 끝내 아무도 모를 일인데. (p. 146)

호정의 집안에서의 모습에 대한 원인은 콕 집어 말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해하기 어려우니 공감하기 어려웠다. 사춘기의 시절이 너무 옛날일이라서 그런가... 자꾸 호정이 아니라 호정의 부모마음이 되어 호정을 바라보게 되곤 했다. 청소년 문학을 읽으며 이런 적은 없었는데...

아빠는 기어이 할 말은 한다. 기어이가 되기 전에도 참고 있다는 티를 낼 만큼 낸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말리곤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와 마음이 다른 건 아니다. 나중에 자기들끼리 그러겠지. 애 요즘 예민한데 건들지 마. 도대체 언제까지 눈치를 봐야 해? 모르겠어, 나도 애가 왜 저러는지. 사춘기가 늦게 왔나 봐. (p. 147)

저렇게 착한 부모들에게 호정은 대체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는 것일까... 편견이겠지만 의붓딸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찢어지게 고생을 했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는데 가족들은 모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온 것 같은데 호정인 대체 왜...

그때 은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 걸음, 나도 은기 손을 마주 잡았다. 몇 걸음 가다가 은기가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걸었다.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소리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손을 잡고 있었고,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손이란 참 힘이 세구나. 그저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온 마음이 전해지는 구나. 따스해지는구나. 또 그만 눈물이 솟았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왜, 대체. (p. 160)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지만 호정은 알았다. 은기가 자신과 비슷한 어둠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그래서 좋았다. 아마 은기도 그랬을 것이다.

알 것 같았다. 아니, 알았다. 정말로. 왜 아는지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알았다. 그러니까 이제 은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궁금해하지도 않기로 했다.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카카오톡이든 벌써 나온 주민등록증이든 수원이든. 은기는 잘 우는 애니까. 울 준비가 되었을 때 은기가 말해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믿고 있다. 은기는 그랬을 것이다. 그때는, 그 밤에는. (p. 163)

그렇게 서툴지만 설레어 하며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호정과 은기는 마주잡고 있는 손의 온기만으로도 그 누구에게서보다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이였다. 절친 나래와 지후 와는 또다른 감정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째서 모르면 좋았을 것을 그냥 덮어 두지 못할까.

정말로 치명적인 것은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이름 모를 바이러스나 천박한 호기심 같은 것들은. (p. 210)

은기는 모나진 않았지만 불투명한 아이였다. 따듯한 아이였지만 닫혀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은기가 모르는 사이에 호정이가 덫에 걸려서. 은기의 전학배경이 알려진 순간 은기는 사라졌고 호정은 도망쳤다. 스스로들에게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거는 애들, 평소보다 다정한 투로 말을 걸면서 평소와 다름없다는 듯이 구는 애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그 애들이 싫었다. 나는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은 것이었다. 내게 어떻게 그래? 내가? 나만? 괜찮지 않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괜찮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나는 괜찮아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대체 내가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괜찮아. 아무일 없었어. 그건 내가 스스로에게 내내 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다들 저리 가. 날 좀 내버려 두라고. (p. 226)

호정은 이제 가족들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조차 나쁜 아이로 굴었다. 일부러.

꼬이고 꼬인 마음을 절대 풀어내지 않으리라 꽁꽁 움켜쥐고서 온몸에 가시를 솟구쳐 올렸다. '고작 그런 나(p. 231)' 라면서 '이런 몰골(p. 231)' 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일곱 살 때의 일을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건 결코 아니다. 곰국이 들었던 대접 바닥을 긁는 숟가락 소리 같은 걸 대체 누가 기억한단 말인가. 엄마가 홧김에 엉덩이 몇 대 때린 일을 일일이 기억하는 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엄마가 무슨 아동 학대를 하듯 때린 것도 아닌데. 아빠가 잡아 먹을 듯이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삼촌이, 고모가 나를 괴롭힌 것도 아닌데. 할머니가 나를 굶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인간인지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나를, 내가. (p. 246)

읽을수록 호정의 우울감에 공감보다는 솔직히 지쳐가는 마음이었다. 대체 왜 저럴까... 왜...

은기와의 관계와 호정이의 상처에 대해 알게 되었어도 지친 마음은 이해로 넘어가지지 않았다. 그 정도의 일에 뭘 그렇게까지...

하지만 나도 모르지 않는다. 우울에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싶었고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다. 그동안 읽었던 청소년 문학에서의 성장과 치유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이 작품엔 왜이리 마음이 복잡해지고 꼰대같은 마음이 드는 것인지...

변한건 내가 아니라 시대였다. 그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닌 것들이 있곤 하다. 굶지만 않아도 좋겠다 싶은 시절이 밥과 김치만 있는 것이 못참겠는 시절이 될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밥그릇 하나에서 김치로 다른 반찬들로 고기로 그 가짓수를 늘려가면서 그 전의 밥상에 대한 고마움은 이해할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밥에 고기반찬이 당연한 세대가 아니라서 결국 어쩔 수 없는 심정이 되고마는 것이다. 호정이가 아니라 호정의 부모 마음이 되버린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호정이처럼 성장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없고 호정이의 부모처럼 잘못을 뒤돌아봐야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게 참... 씁쓸했다.

하지만 또한 나는 알고 있다. 같은 상처에도 깊이와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누구에겐 상처가 되지 않는 일이 누구에겐 상처가 될수도 있다는 것을... 과거엔 상처인줄도 모르고 지났던 일들이 지금은 커다란 상처로 반드시 치료하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호정이의 마음에 좀더 다가가보려 한다. 호정이의 마음이 녹고 잔물결이 일면 반가워할수 있도록 호숫가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지켜보려 한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지만,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호수와 같아. (p. 350)

호정이가 호수가 아니라 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기를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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