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Mass Market Paperback, International Edition)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Random House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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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마키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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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하체 비율 꽤 좋고 군살하나 없는 구리빛 몸이 작가의 뒷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2009 [2007]) 표지 위 남성이 정말 무라카미 하루키일까 순간 궁금했다. 하지만 서문을 읽으며 그런 의심이 이내 부끄러워졌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2016[2015])를 읽었던지라 알고는 있었지만, 하루키는 직업정신의 연장에서 프로페셔널하게, 진지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히" 달려왔으니까. 그 진정성이 신체화된, 구리빛 몸을 의심한다는 것은 하루키의 정신성을 부러워한 나머지 의심으로써 폄훼하려는 불순한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하루키가 2005년에 쓰기 시작하여 2006년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이 단행본을 3분의 1쯤 읽다 말고, 충동적으로 밖으로 나왔다. 러닝화의 줄을 팽팽히 당겨 묶고는, 청량한 가을 하늘 아래서 1시간 가량 뛰었다.  풀코스 30~35?km쯤에서인가 진행차량에 실려 청소된 후, 정형외과 신세를 졌던 막가파인 나로서는, 하루키가 페이지 곳곳에서 암시하는 '러너runner'들만의 연대감을 말한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달리면서 하루키의 문장을 몸으로 곱씹었다. 하루키는 이렇게 적었다.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대체로 오랜 시간, 달려본 경험이 없는 이라고. 하루키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친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36)고 말한다.  나에게도 달리기는 비어있는 상태로의 리셋이자 교감의 행위이다. 나의 날숨이 초록생명의 들숨이 된다는 개체 차원 이상의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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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를 읽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루키에게 달리기는 육체성과 정신성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통합적 의례이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두뇌 노동이다. 그러나 한 권의 정리된 책을 완성하는 일은 오히려 육체노동에 가깝다…(중략) … 소설가는 '이야기'라고 하는 의상을 몸에 감싼 채 온몸으로 사고하고, 그 작업은 작가에 대해서 육체능력을 남김없이 쓸 것 - 대부분의 경우 혹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125) 친구에게 아래의 문장을 꼭 들려주고 싶은데, (하루키 자신의 근육은)  "전형적인 '장거리형' 근육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중랙) …그런 근육의 특성은 그대로 내 정신적인 특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의 특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반대로 정신의 특성이 육체의 형성에도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육체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며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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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직업적 소설가로서의 연장인 자신의 육체성을 집요한 장인 정신으로 가다듬는다. 뛰어난 재능을 단거리 레이스에 몰아서 소진하고 요절하는 일부 예술과와 달리, 재능을 고루 안배하며 오래 가기 위한 정신의 근력을 기르는 데 마라톤(심지어는 100km 울트라런까지!)를 활용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집요하며, 천성적으로 남이 시키는 일은 중간만 하고 자신의 마음이 가는 일에 끝장 몰입하는 그에게 딱 맞는 선택이다. 물론 '물만 먹어도 찌는 체질'로서 몸무게와 건강 관리를 도모한다는 보다 현실적 유용성도 있는 달리기이지만.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를 읽으면서, 비록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기 꺼리는 성향이여도  자신을 궁금해하는 독자에게 솔직하면서도 안전하게 문을 열어두는 전략을 취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결국 달리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 글 쓰는 행위, 소설가로서의 직업 정신, 나아가 그만의 방식으로 불특정 다수의 독자와 교감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하루키처럼 말할 특정한 무엇이 없는 이들은 무엇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것인가? 나만의 컨텐츠는 무엇인가?라는 실용적 질문이 엉뚱하게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갑자기 나에게 화두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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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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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인이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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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관찰주의자 - 눈으로 차이를 만든다
에이미 E. 허먼 지음, 문희경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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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Intelligence 우아한 관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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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의원 같은 프로파일러도, 추리소설 작가도 아닌 그저  "Criminal Mind" 등 범죄물 미드 팬일뿐인데 책임감까지 느꼈다. <우아한 관찰주의자 (원제: Visible Intelligence)>를 꼭 읽어야ʳ다는.  "지각의 기술 The Art of Perception"을 강의하는 에이미 E. 허먼 (Amy E. Herman) 이 썼다. 370여쪽의 두꺼운 이 책의 1/5쯤을 읽을 때쯤에서야 작가가 아들을 키우는 엄마라는 사실을 알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법학박사학위를 가진 전직 변호사로서 미술사를 좋아하다 보니 "지각의 기술"이라는 독특한 강의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실제 강연 동영상을 보면 성공한 프로페셔널로서의 자신감이 말과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는 저돌적이라할만큼 일의 추진력을 갖춘 듯 하다. 강의를 구상하자  NYPD(뉴욕 시 경찰국)에 전화를 걸어 경찰들을 박물관에 초대해 강연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지각의 기술" 강연을 FBI, Google. 의대생, 미국 팬터곤,  네이비씰, 포천 500대 기업 등을 대상으로 14년 이상 계속 확장해오다니 참 대단한 여성이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때문에 끊임없이 집중력을 방해받는 산만한 시대에 예리한 지각력(perception)은 IQ만큼이나 떨어지기 쉽다. 관찰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즉 뇌를 충분히 써주지 않으면 퇴화한다. 에이미 허먼은 굳었던 정신근육을 훈련시키고 지각력을 높이는 ("sharpen perception") 데 미술작품을 데이터로 활용한다. 덕분에 독자는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 르네 마그리트, 주세페 아르침볼도, 히에로니무스 보스 등 많은 유명 화가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 미술작품을 활용한 다양한 지각 훈련 연습문제가 등장하기에 독자는 독자는, 그녀를 강연을 직접 듣지 않았다하더라도 지각력 높이는 기술을 익히게 된다.


아래 사진은 에이미 허먼이 모든 강연마다 강연 도입부에 청중에게 질문을 던지며 활용하는 사진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몇 분을 노려보아도 내겐 네 발 달린 동물이 이 그림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저자가 이 사진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든지 등의 지각 오류에 취약한 지각 필터를 지녔다는 것이다. 극복을 위해서는 치열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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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어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객관적 관찰과 기술"을 연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 속 여성을 묘사하라는 주문을 받는다면, 많은 응답자가 '대리석 탁자'를 들먹인다고 하지만, 검증된 바가 아니다. 틀리면 뭐 어떠냐고? 만약 이 사진이 범죄 현장의 단서를 담고 있는 증거라면 사소한 묘사의 실수가 어떤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지 책임질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잘못된 관찰과 묘사로 병원이나 법원에서 의사소통에 혼동이 벌어진다면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2014년 6월, 미군 특수부대 병사들이 오인 폭격으로 미군과 아프가니스탄 동맹군 다섯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원인은 잘못된 소통이라고 한다. 이처럼 정확한 관찰과 날카로운 지각은 단순히 개인적 능력이라기보다는 사회 내 의사소통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무척 중요한 자질이다. 발달시킬 필요가 분명하고, 발달 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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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관찰주의자>라는 잘 번역된 책으로서 에이미 하먼을 만나봐도 좋겠지만 유투브에 널려 있는 그녀의 강연을 통해서, 사람들이 질문받고 반응하는 방식, 그녀가 주장을 미술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식도 배워볼만 하다. (내가 가진 편견으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YES or NO보다는 회색지대의 두리뭉실한 대답이나 반응으로서 상대의 비호의적 태도를 유보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우아한 관찰주의자>를 읽고 나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치밀히 관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상대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이롭다는 생각을 하게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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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 - 거짓 선동과 모략을 일삼는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에게 보내는 레드카드
마이클 만 & 톰 톨스 지음, 정태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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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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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 (원제: The Madhouse Effect: How Climate Change Denial Is Threatening Our Planet, Destroying Our Politics, and Driving Us Crazy)>와 <사라진 권력, 살아날 권력 (원제: Power in the 21st Century: Conversations with John Hall )>의 저자 이름이 공교롭게도 똑같다. 마이클 만 (Michael Mann ).  <사라진 권력, 살아날 권력>의 9장에서도  21세기에는 "자본주의가 가진 예기치 못한 환경 파괴성의 위기(39)"에 필연적으로 처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이처럼 두 권 모두 환경 재앙의 심각성을 경고하기에 동일 저자인가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첫번째 마이클 만은 '하키스틱 곡선'으로 세계적 기후과학자 반열에 오른 대기과학과 교수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이고 두번째 마이클 만은 사회학자이다.
 
독자는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의 영어판 표지 그림에서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시사만평가 톨 토스 (Tom Toles 1951~   http://www.gocomics.com/tomtoles ) 의 작품이다. 서문에서 톨 토스와 마이클만은 직업적으로는 교차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시사 만평가'와 과학자가 이례적으로 함께 작업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었다고 집필 이유를 밝힌다. 명명백백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는데도 진실을 은폐하려는 집단은 기부변화에 관한 공론의 장에서 왜곡, 부인,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기후게이트(Climategate)란 사건명을 붙여 기후변화를 허구로 몰아붙인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전략에 말려든(?) 대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일단 확실해 보이는 사건 (príma fàcie cáse)인 기후변화와 지구촌이 직면한 환경 위협을 의심하기도 한다.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의 주장은 명료하다.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근거는 굳건하니 이를 과학적 논쟁의 대상 삼으며 시비 거는 집단들에 휘둘리지 말자. 지구를 보호하는 단체를 옹호하고, 스스로 탄소 줄이기 운동에 동참하자'가 주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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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략)  우리가 방종한 탄소중독 탓에 이 소중한 지구를 치명적인 불균형 상태에 던져버린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하고 지극히 무책임한 범죄행위가 될 것이다." (214)

*

하지만, 총 195개 국가가 서명한 파리 기후변화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보란듯이 탈퇴를 선언했다. 대 놓고 인류를 상대로 범죄행위를 한 것이다. 이렇듯 기후 변화를 부정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세력들은 다음의 핑계를 댄다. 1)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지 않는다 2)상승했다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3)인류가 초래한 영향력은 미미하며 4) 우리에게 좋을 것이며 5)행동하려면 비싸다 6) 돈이 덜 드는 해법이 있을 것이다. (106) 혹은 '에너지 빈곤 energy porverty'이라는 개념을 끌어와 화석연료를 제한하면 결국 고통받는 이들은 에너지에 대한 접근이 부족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속지 말자. 이들은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잇권을 챙기고 기득권을 지킨다. 망가지는 것은 지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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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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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천공의 벌

 

5월 미세먼지가 극심하던 때, 어쩌자고 만보걷기를 매일 했는지 부작용이 이만저만 아니다. 아프다. 특히 두통. 머릿 속이 미세먼지 곤죽이 되어가는 흉칙한 이미지가 자꾸 떠오르면서 도통 책에 집중이 안 된다. 가볍게 소설을 읽자 하는 마음으로 집어든 책들. <체르노빌의 목소리>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대표작인지라 대략 어떤 내용인지 알았지만, 함께 집어 든 <천공의 벌> 역시 마찬가지로 원전 재앙을 경고하는 소설인줄 꿈에도 몰랐다. "천공의 별"로 제목을 잘못 기억한 이후로 계속 "별"을 소재로 한 SF소설로 착각했으니 말이다.

*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집어든 책의 조합이 참 묘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천공의 벌>. 가뜩이나 요즘 미세먼지과 유독물질의 대한 강의를 들으러 다니거나 책을 읽으며 보이지 않는 위험에 잔뜩 주늑들었고, 동시에 분노하고 있는 판인데……. 우연의 일치인지 이 책들이 동시에 "핵, 핵, 핵"하며 내 안에서 울려대니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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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체르노빌의 목소리>.

공포소설도 아닌데, 책을 읽다가 엄습하는 공포감에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펴 들었을 정도였다. 이야기가 논픽션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고통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절하여 그리고 지금은 구경꾼인 나나 또 다른 어떤 독자가 더이상 구경꾼이 아닌 희생자 당사자가 될 지 모른다는 실존적 두려움 때문이었다. 최근 한국을 찾은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그 질문을 자주 하더라. 당신은 어떻게 이런 고통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었냐고. 힘들지 않았냐고. 작가는 담담히 답하더라.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위험이 큰 직업군이 있다고.

*

목소리를 채집하는 작업이야 많이들 한다.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을테고 깊을수록 칭찬받을 터이다. 특히 1986년 4월 26일의 사건처럼 두고두고 인류사에 영향을 미치는 대재앙에 대한 기억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기억하는 이의 처지와 관점과 경험에 따라 조각들만 모이기 때문에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많을수록 좋겠지. 문제는 이 고통스러운 작업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얼마나 잘 하는가인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놀랍다! 대화에서 자신의 존재감이나 목소리를 지우고 상대를 부각시키는 기술은 쉬워보여도 어려울터인데 관찰자로서 그녀는 투명인간처럼 지워지고 사람들의 목소리만 남았다. 체르노빌 이후 일상화된 죽음과 불신, 사랑과 생명의 정의가 다시 세워지고, 사회적 관계가 재조정되는 현실, 은폐와 헌신. 집단주의의 폐해, 동시에 그 집단주의에서 가능했던 신화와 등장했던 영웅들. 우리는 바이오로봇(bio robot)이라고 부르지만 그 한명한명 영웅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400여 페이지에 담았다.

 

*

고위 공무원, 말단 직원, 영웅 훈장은 탔지만 방사능에 온몸을 태우고 사라진 소방관의 부인,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들, 역사학자와 문맹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진작가, 환경운동가. 다양한 사람들의 자신의 이야기를 작가에게 들려주었다. 혹자는 자신들의 고통을 팔아 먹는 잡범취급하며 그녀에게 욕을 퍼부었고, 혹자는 "당신은 나를 관찰하고 있잖아요."하면서 조용히 비난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곧 자신들의 생명이 사그러지더라도 기록은 남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녀가 이 집합적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목소리를 모아주었고, 그들이 남겼던 쪽지, 일기, 기록들을 넘겼다. 작가는 오랜 세월 이를 삭히고 곰삭혀서 핵발전소의 공포를 전세계 독자에게 전한다. 1986년의 사건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진행형이며 앞으로 필시 진행될 재앙으로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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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데, 난 이제서야 처음 읽어본다. 1985년에 나온 작품인가본다. 이제야 읽는다. "별"이 아니라 "벌"이었다. 최신 전투 헬기 빅 B의 B를 따온 닉넴 같았다. 일본의 고속 증식 원형로에 빅 B를 추락시키겠다는 위협과 함께 "천공의 벌"이라는 범인은 일본 전역의 원전을 폐기하라는 요구를 한다. 한국판 번역본이 670여페이지인데, 한 자리에서 술술 다 읽을 수 있을만큼 재미있는 이 소설은 읽다보면 안다. 작가가 일본 핵발전소 현황 및 방사능 폐해에 대해 상당히 깊게 공부하고 쓴 작품임을. 군데 군데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심어 놓았다.

*

 백화점 에어컨이 꺼지자 쇼핑하다가 더워진 아줌마가 원전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는 부분은 어쩌면 이 책의 하이라이트 아닌 하이라이트일지 모르겠다. 폭탄 터지거나 사람 목숨 왔다갔다 하는 긴장의 장면은 아니지만, <천공의 벌>을 읽는 대다수 독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타겟으로 삼는 자들이 바로 "침묵하고 모른 척하는, 당장 내 눈앞의 재앙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모르는 척 하는 침묵하는 대중"인 것을.

에어컨 꺼져서 더워진 아줌마는 "아무튼 (원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라는 이미지는 있었지만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안심하고 있었다. 가나가와 현에는 원전이 없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을뿐이다. 실은 전국의 비등수형 원자력 발전소의 연료가 요코스카 시 구리하마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돼 연료를 실은 적재 차량이 선도 차와 경비 차의 호위를 받으며 심야에 은밀하게 운반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송차량이 도시를 통과하는 도중에 한신 대지진급 지진과 맞닥뜨릴 경우, 연료 용기가 파손돼 지진 재해와 방사능 피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복합 재해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는 소문이 돈다는 사실도 그녀는 아는 바 없었다. (pp. 254-255)"

*

이 소설 이후,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 발전소들은 터졌고 한국에서는 잦은 지진이 발생했다. 북유럽의 단단한 지반과는 달리 한국의 무른 지반에 방사능 폐기물을 저장할 안전한 공간이 없음을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계속된다. <천공의 벌>이 경고한 이후, 일본 고속 증식 원형로 몬주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후쿠시마 핵 발전소들이 터졌어도 우리는 계속 뇌까린다. "위험할 것 같은데, 당장 나랑은 상관 없지 않아?"

*

절 대 그 렇 지 않 다. 나뿐 아니라 후대손손 상관이 아주 크게 있는데, 당장 사건이 터지지 않았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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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 - 정신분석학부터 사회학까지 다양한 학문으로 바라본 성
이인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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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

정신분석학부터 사회학까지 다양한 학문으로 바라본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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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의 <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은 그 방대한 참고도서를 쌓아놓기만 해도 "얕지 않을" 듯하다. '정신분석학부터 사회학까지 다양한 학문으로 바라본 성'이라는 부제에 부합하는 참고문헌 목록은 "다양성"의 향연이다.  본문에서 소개한 지그문트 프로이드, 조르주 바타유, 미셸 푸코 등 8인의 학자 대표작은 물론이거니와 김형경의 <사람, 장소, 환대>(2015)이라는 최신 인류학서에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1925)까지 250여권의 참고서문헌을 나열하기에 무지한 독자인 나는 살짝 주눅부터 들고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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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블러거 (http://blog.ohmynews.com/specialin/)이자  "다중지성의 정원" 등에서 인문학 강의를 해온 저자 이인은 (다른 작가들이 ̄불리 다가가지 못했던) "성性을 맛깔나게 요리하고자 오랫동안 갈고 닦은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중략)… 사랑을 잘 알고 잘 나누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우리는 좀 더 진실하고 건강한 어른이 될 필요가 있지요. "(pp. 9 -10)라며 성을 요리한 인문요리사로서의 목적을 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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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의 "갈고 닦은 칼"이란 이인 작가의 독서력, 공부내공을 비유한 표현일텐데 실로 그는 밖으로 끌어내는 젊음의 유혹을 이기고 참 진득하게도 책을 후벼판 듯 하다. "뜨거운 / 생의 배꼽 위에서/ 복상사/ 하는 것만이 / 내 꿈의/ 전부"라는 김언희의 시(詩)를 위시하여 문학, 인지과학, 여성학, 사회학, 진화심리학, 철학, 생물학, 행동경제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사유한다. 살짝 아쉬운 점은 서구의 지성사에 주로 기대다 보니, 동양 (동/서양 이분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권에서 성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함구한다.  참고 문헌에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이 기재되어 있지만 본문의 인용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만 못찾았나.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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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트를 여러 장 채울 정도로 열심히 메모하며 읽었는데, 워낙 방대한 이론과 학자들이 소개되는지라 그 방대함을 꿰뚫는 한 줄을 기억하지 못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 줄을 못찾으니, "21세기의 지성인이라면 이 정도의 성 지식은 있어야 한다"라는 출판사 측의 홍보 문구 앞에서 다시금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 한 줄을 시원하게 뽑아내지 못한데 대한 변명을 하자면, 2장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이나 4장 베티 도슨의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개인의 성해방을 주장하는 내용이라면 7장 제프리 밀러의 <연애>나 8장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종 species'으로서의 인간의 성에 접근하는 등 챕터마다 관점과 초점의 차이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초보 독자의 얕은 시각에서 <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의 핵심을 뽑아보자면, 인간의 다양성과 본연의 자유를 인정하라는 탈억압의 시선이었다. 이인 작가를 대면해보지도 그의 다른 글을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글로 유추했을 때) 그는  권위에 저항적이고 다양성의 무지개를 존중하는 자유인같다.  "우리 몸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두 등급으로 나뉘지 않으며, 우리 몸 구석구석까지 정상의 무지개" (p. 221)라는 진화 생물학자 조안 러프가든 (Joan Roughgarden)주장을 빌어온 것도 그의 지향성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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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미셸 푸코를 빌어와 성이 어떻게 억압의 도구로 기능하게되었고 그 작동 방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언급한다. 담론으로서의 성과 행위로서의 성 모두 음지에서 이뤄질 때 이것이 오히려 지배를 용이하게 해준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저자는 "미국은 밤이면 온갖 환락이 밀물처럼 들어차지만 낮에는 몸의 쾌락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종교 문화가 개펄처럼 드러나는 사회" (p.232) 라고 그 성의 은폐와 위선을 비꼬는데 그렇다면 그가 본 2017년의 한국 사회는 어떠할까? 복상사를 갈구해도 복상사 하기 어려운 위선사회일까? 획일적인 정상성을 서로 강요하고 서로 감시하고 침묵하는 사회일까? 정작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해 이인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나열된 많은 외국 학자들의 이론과 사례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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