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나무 아래 - 시체가 묻혀 있다
가지이 모토지로 지음, 이현욱 외 옮김 / 위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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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인스타에서 먼저 접하고 벚꽃 무리를 닮은 분홍빛 화사한 표지에 사로잡혔다. 처음 만나게 된 작가 가지이 모토지로가 31세에 요절한 천재작가라고 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작가 소개를 읽고 나서 맨 뒤의 작가 연보를 읽었다. 형이 빌려온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읽고 나쓰메 소세키에 빠져서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카지노 소세키라고 서명하기도 했다는 얘기를 접하고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좋아했다니. 요즘 긴 글만 계속해서 읽다가 만난 단편은 짧은 호흡으로 쉬면서 생각할 수 있는 틈이 있어 읽기에 좋았다.

 


 가지이 모토지로가 실제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은 7년 정도이며, 거의 병상에서 구상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온천 여관에 요양하러 가서 쓴 이야기가 많고, 아픈 사람, 불안을 안고 사는 우울한 사람, 피로에 지친 고단한 사람 등이 많이 나온다. 그렇게 병으로 시달리는 중에도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 열정에 숙연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고통스런 삶 속에도 희미하지만, 유머도 느껴졌다. 그랬기에 그 힘으로 버텨냈겠지. 열두 편의 단편 소설이 들어있는데 이 중 인상적인 작품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태평스러운 환자


 폐병으로 고생하는 요시다가 주인공이다. 열이 오르고 심한 기침으로 고생하면서도 단순한 독감이라 여기고 의사를 만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의사를 찾아갈 무렵에는 꼼짝도 못 할 만큼 쇠약해졌다. 잠을 제대로 못 이루게 되면서 불안감에 휩싸여 온갖 생각이 부유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시다의 방에 고양이가 들어온다. 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 등장한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몇 번이고 쫓아내어도 자꾸만 들어와서 아픈 요시다의 신경을 건드린다. 이 고양이도 나름 자기주장이 강한 녀석 같다. 전에는 요시다의 베개 쪽으로 찾아들었는데 이번에는 이불에서 잠들려고 한다. 아무리 못 오게 막아도 대담하게 베개 위로 올라와 이불 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기분 좋게 잠 잘 수 있는 것이 소원인 요시다는 이제 고양이와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고양이 때문에 어머니를 깨울 수도 없고 이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쓴다.



 다행인지, 조금 견딜 수 있게 되었을 때 힘들었던 2주간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그 병으로 죽었다든가 병을 치료하려고 별별 방법을 쓰다가 죽어간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울해진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폐병을 낫기 위해 인간의 뇌수 구이를 먹었다며 어머니가 요시다에게 그것을 권하자 심기가 불편해진다. 또 언젠가는 누군가 목매어 죽은 밧줄을 그냥 속는 셈치고먹어 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고, 병원에서 만난 간병인은 주전자에 생쥐를 넣고 다린 것을 아주 조금씩 나눠 마시다 보면 한 마리를 채 다 먹기도 전에낫는다는 끔찍한 말을 듣는다. 정작 자기 자신은 태평한 환자이건만 주위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처방전을 내리는 것이다. 병에 걸려 마음이 약해진 사람들에게 무엇이 좋다는 말엔 귀가 솔깃하기 마련이지만 는 그렇지 않다. 결국 병이란 살아있는 동안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말로 매듭짓는다.

 


병이란 결코 학교의 행군처럼 견딜 수 없는 약한 사람을 행군에서 제외시켜주지 않는다. 마지막 죽음의 골로 갈 때까지는 어떤 호걸이든 겁쟁이든 모두 같은 줄에 서서 마지못해 질질 끌려가는 것이다.’(P41)

 


어느 벼랑 위에서 느낀 감정

 


 화자는 어느 무더운 여름 저녁 한 카페에서 두 청년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 얘기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다. 벼랑 위에서 다른 사람의 창문을 바라보는 이야기다. 창문을 통해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린아이와 밥을 먹고 있는 남자를 보며 눈물을 흘릴 뻔했던 기억,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장면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보였다. 어떤 때는 음흉한 욕망으로 비밀스럽게 다른 사람을 훔쳐보려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그 감정은 전혀 다른 감정으로 바뀐다.

 


그것은 인간의 기쁨이나 슬픔을 초월한 어떤 엄숙한 감정이었다. 그가 생각하던 인생의 무상함이라는 감정을 넘어선 어떤 의지력이 느껴지는 무상함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풍습을 떠올렸다. 죽은 자를 눕히는 석관의 표면에 음탕한 장난을 치는 사람의 모습이나 암양과 성교를 하는 목양신의 모습을 새기던 그리스인의 풍습을…….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른다. 병원 창문 안 사람들은 벼랑 아래 창문을. 벼랑 아래 창문 안 사람들은 병원 창문을. 그리고 벼랑 위에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도…….’(P110)



 두 청년 이시다와 이쿠시마는 비밀스럽게 타인을 엿보는 행위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이들의 창문 바라보는 행위는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에서 위안을 찾고,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다는 인식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지는 않은지.

 


겨울 파리

 


 아픈 몸을 요양하기 위해 온천 여관에서 지내면서 겨울 동안 방에서 함께 살았던 파리들을 관찰한 이야기다. 바깥으로 절대 나가지 않고 병자인 를 흉내 내는 것 같다고 한다. 여름의 파리는 씩씩하지만, 겨울의 파리는 움직임이 느리다. 하지만 말라죽기 직전인 파리들이 햇빛 속에서 교미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면서 이 무슨 살고자 하는 의지란 말인가!‘ 라며 탄식을 한다. 그저 자연스러운 파리들의 생존 본능을 깨닫고 화자도 힘을 얻는 듯하다.

 


 한번은 우체국에 나갔다가 지쳐서 승합차를 얻어 탔는데, 여관으로 돌아갈 길이 멀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어두워지는 산속에 내리게 된다. 아픈 몸을 산골짜기에 스스로 내치게 된 셈이다. 첩첩산중에 쥐죽은 듯한 고요와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걷고 또 걷는다. 자신이 내버려두고 온 우울한 방이 생각나고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한다. 이 산속을 벗어나려면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괴롭고도 절망적인 풍경인가. 나는 나의 운명 그대로인 길 안을 걷고 있다. 이것은 내 마음 그대로의 모습이고, 여기에서 나는 햇빛 속에서 느끼는 어떤 기만도 느끼지 않는다. 내 신경은 어두운 전방을 향해 뻗어 있고, 지금은 나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형벌 같은 어둠, 살을 에는 듯한 혹한, 그 속에서 내 피로는 즐거운 긴장감과 새로운 전율을 느낄 수 있다. 걸어라, 걸어라,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걸어라.

나는 잔혹할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걸어라. 걸어라. 걷다가 죽어버려라.(P132)

 


 극한의 추위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산속을 걷는다는 건 얼마나 오싹한 일인지. 그럼에도 차가운 공기 속을 가르며 걷는 화자에게서 어떤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집에 돌아온 는 상한 몸으로 며칠을 앓아누워 있다가 문득 파리가 한 마리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후련한 마음이기보다는 오히려 파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버린 것을 알고 우울해진다. 귀찮은 존재였지만 무언가 움직이는 생물과의 동거에서 무언지 모를 살아있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레몬


 교토가 배경인 이 이야기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덩어리를 안고 있는 화자가 온종일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아다닌다. 초라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에 강하게 끌렸는데, 큰길보다는 지저분하고 친숙한 뒷골목이 좋았다. 병색이 짙은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고 깨끗한 여관방에서 한 달 정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화자가 보였다. 레몬을 좋아하던 는 과일가게에서 레몬을 샀다.

 


나는 오랜 시간 거리를 걸었다. 계속해서 내 마음을 짓누르던 불길한 덩어리가 레몬을 손에 쥔 순간부터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것 같아서 나는 거리 위에서 굉장히 행복했다. 그렇게도 집요했던 우울함이 이런 과일 하나로 풀리다니. 때로는 확실하지 않은 어떤 것이 역설적으로 사실인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가사의한가.’(P147)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이더라도 무언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는 마루젠(서점)에 가서 화집을 탑처럼 쌓고 그 위에 레몬을 올려놓고 나온다. 마치 폭탄을 설치하고 나온 악당이 된 것처럼 기이한 상상을 하면서. 역자 후기의 해설에 의하면 <레몬>의 무대인 마루젠 교토는 1907년 산조에 문을 열어 1940년 가와라마치로 자리를 옮겨 영업하다가 2005년 폐점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고 교토 시민들은 이 서점 예술 서적 코너에 레몬을 놓아두는 이벤트를 벌여 화제가 되었다는 얘기가 들어있다. 이 작품의 단편들을 통해서 작가가 고통 속에서도 마냥 주저앉지 않는 맑고 깨끗한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기이한 상상력과 짧은 일탈도 때로는 삶의 의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벚꽃나무 아래


 봄이 왔다. 겨우내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여린 싹이 나오고 아름답게 활짝 핀 꽃을 보면 경탄해 마지않는다. 그게 보통 건강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 화자는 너무 아름답게 핀 벚꽃을 보고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생각해 보니 나무 아래 시체가 묻혀 있기 때문이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다가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면 싱싱하게 피어오른 아름다운 꽃도 너무 낯설게 보이지 않을까. ‘는 아픈데 주위의 모든 것은 건강하고 빛나 보인다. 그래서 더욱 정이 가지 않는다. 뭔가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위안거리를 찾아야 한다. 아래의 문장이 이것을 증명해 준다.

 


이 골짜기에서 나를 즐겁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휘파람새와 박새도 하얀 햇빛을 새파랗게 물들이는 나무의 새싹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몽롱한 이미지에 불과하지, 나에게는 슬프고도 잔인한 사건이 필요해. 그런 균형이 있어야 비로소 내 이미지가 명확해지거든. 내 마음은 악귀처럼 우울하게 메말라 있어. 내 마음속 우울함이 완성될 때만 내 마음은 온화해지지.’(P200)

 


 아픈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다 보면 누구든지 악귀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저 벚꽃이 원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시체를 파먹고 살아서 그렇게 예쁜 꽃을 피우는 거라고 상상하면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아닐까. 내 동생이 예쁘지만 내가 좀 더 예뻤으면 좋겠다는 시가 떠올랐다. 조금 삐딱한 시샘이라도 해서 화자가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눈감아 주고 싶다. 사물을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고유의 미를 발견해 냈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 이전에 작가 자신이 고통스러운 삶을 이겨내는 방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화자의 기이한 상상력에 충분히 공감하고 미소짓게 한다.

 


아프고 고단하고 지친 삶 이야기를 읽으며 건강한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새삼 느꼈다. 이제 벚꽃은 다 지고 말았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누구나 피로감이 역력해 보인다. 몸은 건강하지만, 마음이 복잡한 오늘을 살고 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남긴 이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우리가 가진 소박한 일상이 한층 더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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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15 08: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랑 내용이 완전 끌리네요^^

모나리자 2021-04-15 10:26   좋아요 1 | URL
그쵸.ㅎ
병상에 있던 시간이 많았다는데 이렇게 작품으로 남겼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글쓰기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을 받지 않았을가 싶기도 해요.

문장들이 명징하고 생명력이 느껴져서 좋았어요.^^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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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을 읽었던 여운과 기대감으로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태양을 상징하는 듯 빨간색 표지와 해의 모습이 비친 창문을 연상하는 디자인이 잘 어울린다. 인공지능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본 적은 있지만, 소설로는 처음 만났다.

 


 작품의 내용은 가까운 미래에 AF(Artificial Friend)라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아이들의 친구로 생산되어 팔려나가고 인간과 로봇이 함께 살아가는 환경에서 빚어내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는 클라라다. 로사와 클라라는 매장에서 매니저의 지휘를 받으며 인간 친구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태양광을 받아야 몸에 자양분을 받아서 활동할 수 있다. 자리에 따라 빛의 양이 달라지니 그것 때문에 다른 에이에프 친구들과 옥신각신하기도 한다. 소년 에이에프 렉스와 단짝 친구인 로사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로사와 클라라는 이 매장에서 대표로 여길 만큼 중요한 존재다. 이들은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중 단연 클라라가 월등하다.

 


 어느 날 클라라가 창가에 서 있는데, 불편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바로 14세 반 나이가 된 조시다. 사람들의 나이도 추정하고 슬픔, 기쁨 등 감정을 읽어낼 줄 하는데, 다정하게 웃는 조시의 얼굴에서 한 조각 외로움도 읽어낸다. 인간의 감정을 읽을 줄 아는 에이에프라니. 이 부분에서 몇 해 전 읽었던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에서 접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과 공생을 말하는 부분에서 인공지능에 대해  ‘제대로 ’ 배워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아직 까지는 우리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잘하는 것이 더 많다고 했다인공지능의 한계는 바로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문제를 풀려고 하기 때문에 어이없는 실수를 한다고 했다. 반면 인간은 사람이나 물건환경을 이해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고등한 영역이 있기에 인공지능을 좋은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에 안도했었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사람과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감정 읽기 능력공감 능력이 필요하다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그런 날이 올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졌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렇게 인간의 감정을 읽기 위해 노력하고 인간의 아이와 친구가 된 클라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꼭 찾아오겠다던 조시와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드디어 클라라는 조시의 집으로 왔다. 새로운 환경은 왠지 조금 불편해 보인다. 늘 깔끔하게 정리된 매장과 달랐다. 더구나 가정부 멜라니아는 클라라를 대놓고 싫어한다. 같은 동료인 에이에프들끼리 있다가 인간의 가정에서 어떻게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궁금했다. 조시의 이웃집 친구 릭과 그의 어머니, 조시의 언니 샐을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조시의 어머니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매장에만 있던 클라라는 새 환경에서 제법 당당한 모습이다. 교류 모임 때문에 조시의 집으로 몰려든 손님들 속에서 짖궂은 친구들의 장난에 시달리다가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B3 에이에프로 살 걸 그랬다는 조시의 푸념을 듣기도 한다. 그때 클라라의 마음은 어땠을까. 감정을 느낄 줄 아는 클라라지만 내색할 수도 없다. 모건 폭포에 조시의 어머니와 함께 바깥나들이를 하다가 죽은 언니 샐의 이야기를 했다가 혼나기도 하고, 조시 흉내를 내달라는 어머니의 요구를 들어주는 등 지금은 아프지만 조시가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얘기하며 돌아왔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조시와 어머니는 클라라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면서 클라라를 힘들게 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지만, 자신의 감정은 표현하지 않아도, 아니 표현할 수 없어서 편리한 존재가 인공지능 로봇일까. 사람들 사이에서는 감정이 상하면 관계가 틀어질 텐데 클라라와 조시 사이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그저 조시를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조시에게 좋은 친구가 되면 바랄 것이 없었다. 여기서 남아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가 오버랩 되었다. 달링턴 가의 위대한 집사35년을 살면서 나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복종하며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했던 스티븐스 말이다. 사람과 로봇이라는 성격만 다를 뿐이다. 스티븐스는 나중에 일에 파묻혀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회한을 품지만 클라라는 끝까지 희망을 이야기는 부분이 대조적이었다.

 


 클라라의 희망과 달리 조시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가고 어머니 등 주변 사람들은 체념하기에 이른다. 이제 조시는 어떻게 될까.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는다면 멕베인 씨의 헛간에서 조시를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 아닐까. 꺼져가는 생명 조시를 살려 릭과 연결시켜 달라고 클라라는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영혼의 기도를 들어주듯이 어두운 밤 갑자기 태양이 떠오르며 눈부신 빛을 발산하는데... 이 장면은 그야말로 환타지였다.

 


 어느 정도 사람의 감정을 읽으며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인간과 동일한 속마음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이 탄생하는 날도 올까. 왠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첨단 과학 변화의 과도기를 지나는 상황에 로봇이 가정의 구성원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또 사람의 빈자리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성을 보면. 그래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작품은 사람과 인공지능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사람이 채워주지 못하는 따뜻한 정을 로봇이 채워줄 수도 있다는 희망. 그래도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

 

본문 번역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자주 나온다)

등급이 높은 양복이나 등급이 높은 드레스이런 문장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그것을 고급의 양복이나 고급의 드레스또는 고품격의 양복이나 고품격의 드레스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같은 의미인데, ‘등급이 높다는 표현은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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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11 17: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이 지적하신 ‘등급이 높은 양복; 등급이 높은 드레스‘ 부분 원문에서 찾아 봤는데
*suit we could tell she was high-ranking
*mr. vance was wearing a high-rank suit with a buttoned-up white shirt and blue tie.
*~both dressed in high-rank office clothes.
등급이 높은 양복이 아니라 ‘상류층 옷차림‘ 상류층들이 셔츠를 입을때 단추끝까지 채우고 블루 타이를 매는(전문직에 종사하는 상류층 옷차림-영국,미국도 격식차릴때 단추 전부 채움) 이부분 해석을 등급이 높은 양복이라고 해석했네요.
‘등급이 높은 드레스‘ 부분도 고위직종에 근무하는 옷차림으로 해석해야하지만(고품격은 영어에서 High- class를 지칭함)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에게 계층 계급 구분보다 등급별로 구분지어 해석 한것 같습니다.

*모나리자님 굉장히 예리 하쉼 ^ㅎ^


모나리자 2021-04-11 23:17   좋아요 2 | URL
역시 스콧님은 친절한 해결사!!ㅎㅎ 감사해요.^^

문학 작품의 문자에는 좀 어색한 해석이었던 것 같아요. 직역으로 번역한 것 같죠.
전 아무래도 먼저 읽었던 <남아있는 나날>이 더 좋은 작품으로 남았네요.
워낙 AI 가 나오는 소설을 선호하지 않다보니..ㅎㅎ

아쉽게 주말이 다 지나갔네요. 새로운 한 주도 화이팅 하세요~^^

미미 2021-04-11 17: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저는 오늘 시작함요!(ㅋ.ㅋ) 언제 본격적으로 소설에 나온 로봇형태가 가정마다 보급될진 모르겠지만 저는 이미 시킬일이 많음.ㅋㅋㅋㅋㅋ

모나리자 2021-04-11 23:20   좋아요 2 | URL
네, 즐독 시간 되세요~

그러게요. 시킬만한 일이 있을까요. ㅎ 그런 면에서는 급 땡기는데요.
음... 저라면 청소하고 밥 해주는 우렁이 각시 노릇을 완벽하게 해 주는 로봇이 있다면 얼른 살 텐데요. ㅎㅎ 그런 거라면 얼른 나왔음 좋겠네요.^^

새파랑 2021-04-11 19: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미래사회는 등급이라는게 나눠져 있어서 그렇게 표현한걸로 이해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ㅎㅎ (조시 남자친구도 그렇고 조시 아버지도 그렇고 뮌가 다른 계층 느낌이 있어서?)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로봇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도 사람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노력은 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모나리자 2021-04-11 23:24   좋아요 2 | URL
ㅎㅎ 네 옷에 대한 얘기마다 저렇게 ‘등급이 높은‘ 이라고 써 있더라구요. 영 어색했어요.

그쵸. 어쩌면 요즘 현대인의 고립의 상황을 볼 때 클라라가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려는 노력과 탐구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이런 클라라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서로 외롭지 않게 보듬어 주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 신속한 질주가 끝난 후 그들 두 사람은 그 장면을 완성하려는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멀리 떨어진 모래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즐거움이 아니라 어떤 서글픔이밀려왔다. 부분적으로는 사물이 완결되었기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멀리 보이는 광경이 바라보는 사람보다 백만 년은 더 오래지속될 것이고(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완전히 휴식에 잠든 땅을바라보는 하늘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했기 때문이다.
- P33

 얼마 뒤에 램지는 결혼했던 것이다. 그 후 이러저러한 일들 탓에 그들의 우정에서 달콤한 과육이 사라졌다. 누구 잘못이었는지 모르지만, 얼마 후에는 그저 반복이 새로움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반복될 뿐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말없이 모래 언덕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는 램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결코 줄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저기 토탄층에서 입술에 선명한 붉은색을 띤 채 백 년 동안 누워 있는 젊은이의 몸처럼 예리하고 생생하게, 그의 우정은 만 너머 모래 언덕들 사이에 누워 있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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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3 - 새 잡이 사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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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리즈 중 3권은 580여 쪽이나 되는 분량이다.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져서 기대감으로 읽다 보니 어느새 3권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목매다는 저택의 수수께끼에 대한 기사가 점점 표면으로 떠오르고, 가사하라 메이의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편지글이 띄엄띄엄 배달된다.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고 고양이가 없어지고 어느 날 갑자기 구미코가 사라지면서 미궁에 빠졌던 이야기가 결국은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고양이가 돌아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좋은 징조일까.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는 걸까. 구미코의 오빠 이름과 같은 와타야 노보루다. 가노 마르타와 가노 크레타는 이 무대에서 좀 비켜난 듯하다. 그리고 신주쿠 빌딩가에서 만난 적 있는 익명의 여인을 다시 만나고 사건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오카다는, 무참하게 살해된 남편을 떠나보내고, 여섯 살 때부터 말을 잃은 아들 시나몬과 함께 사는 넛메그라는 여인과 연결이 되었다. 얼굴에 새겨진 푸른 멍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과 연결된 상황이 구미코를 찾는데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일까. 그리고 맨 처음에 오카다를 잘 안다면서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여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왜 그런 전화를 했을까. 이 전화는 구미코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궁금증을 안고 읽어나갔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연속이었다. ‘얼굴 없는 남자’, 208호실, 잃어버린 야구방망이 등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면서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하나하나 풀리면서 모자이크 조각이 맞추어져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여기엔 권력에 대한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려 했던 악마 같은 인간이 있었다. 하지만 악의 종말은 언젠가 끝을 보기 마련이다. 다 읽고 나서 앞서 쓴 리뷰를 읽어보았다. 역시나 인용했던 문장은 예사로 넘길 얘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환기하고자 인용해 본다.

 


아주 먼 어느 곳에 천박한 섬이 있어요 이름은 없습니다 이름을 붙일 만한 섬이 아니죠 아주 천박하게 생긴 천박한 섬입니다 거기에는 천박한 모양의 야자나무가 있죠 그리고 그 야자나무는 천박한 냄새가 나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또 거기에는 천박한 원숭이가 살고 있어서 그 천박한 냄새 나는 야자 열매를 즐겨 먹어요 그리고 천박한 똥을 싸죠 그 똥이 땅에 떨어져 토양도 천박해지고 그 토양에서 자라는 야자나무를 더욱 천박하게 하죠 그런 순환입니다 .”-2(P69)

 


오카다는 처음부터 뭔가 알고 있었나 보다. 살짝 예상은 했지만... 

다시 이 문장을 보니 소름이 돋는다.

 


그렇다면 뭔가를 분명하게 알 때까지 자기 눈으로 보는 훈련을 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 시간을 들이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 무언가에 넉넉히 시간을 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복수거든 .”-2(P352)

 


 삼촌이 조언해 준 이 말을 흘려듣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구미코와 이혼하라는 처가 식구들의 종용에도 굴하지 않고, 직접 구미코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지 않고는 응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버텼기에 진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아무런 의심없이 그들의 말을 곧이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진실은 묻히고 말았겠지. 여기에 더불어 작가는 마미야 중위의 입을 빌려 일본인이 만주에서 행한 일을 고발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감추고 싶은 부분을 말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란 작가로서의 참다운 본분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엔 하루키의 어떤 작품을 읽을까 벌써 부터 고민이다.

 


당신은 암흑 속에서 내 모습을 놓친 채, 그대로 앞을 지나가 버리고 말았어요. 언제나 그런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내게 큰 힘을 주기도 했어요. 적어도 내게 꿈을 꿀수 있는 힘은 남아 있었던 것이죠. 꿈을 꾸는 것은 오빠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아무튼 당신이 전력을 다해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어요. 언젠가는 당신이 나를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꼭 껴안아 내 더러움을 떨어내고, 나를 이곳에서 영원히 구해 내 줄지도 모른다고요. 저주를 풀고, 진정한 나를 봉인해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해 줄지도 모른다고요. 그래서 나는 그 출구 없는 싸늘한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꽃을 어떻게든 피울 수 있었던 거예요. 또 나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거예요.(P571~572)

 

 1년 반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구미코를 캄캄한 208호실에서 만난 후, 오카다는 구미코의 편지를 받는다. 어쩌면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지도 모른다. 결국 오카다는 구미코의 실종의 의미가 구조 요청이었음을 깨달은 것 같다. 어떻게 이걸 알게 됐을까. 기꺼이 우물 안 밑바닥에서 사유한 덕분이었을까. 아마도 구미코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 후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만난다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토록 찾던 고양이도 돌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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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23 00: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완독 하셨네요 즐거우셨을꺼 같아요^^ 3권이 좀 두꺼워 보이던데 역시 ㅋ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도 나왔던데 사야되나 고민중입니다ㅎㅎ
(하루키는 보면 언제나 반갑습니다~)

모나리자 2021-03-23 14:37   좋아요 1 | URL
네, 완독 뿌듯하네요.ㅎ
꽤 두꺼웠는데 그래도 재미가 있어서 수월하게 읽었어요.
새로 나온 책이 마음에 들면 언제나 고민 되죠.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scott 2021-03-23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완독 추카!!

새로 번역된 태엽이 훨씬 좋더군요.
표지도 ^,^

모나리자 2021-03-23 14:36   좋아요 1 | URL
넵! 감사해요!ㅎ

새로 번역된 책이 또 있군요?
점점 좋아져야겠죠.^^
 
태엽 감는 새 연대기 2 - 예언하는 새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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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고양이는 이제 안중에 없는 일이 되었고, 오카다가 마미야 중위를 만나던 날, 구미코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출근하던 차림으로 나간 채였다. 아내가 없는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구미코가 없다는 걸 실감한다. 회사에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만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구미코의 등과 향수 냄새가 자꾸만 떠오른다. 이럴 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내가 사라졌는데도 너무 침착해 보이는 오카다가 오히려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때 가노 마르타가 고양이 일로 전화를 했다면서 고양이 일 말고 도울 일이 있겠느냐고 묻는 등, 이름 첫 글자가 인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올 거라는 말을 한다. 또 근일 중에 반달이 며칠 동안 떠 있을 거라는 묘한 말을 하며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게 전부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는다. 답답한 마음에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구미코의 옷을 맡긴 것이 떠올라서 세탁소에 갔는데... 세탁소 주인은 이미 부인이 찾아갔다는 말을 한다.

 


 사건이 생기고 시간이 흐르게 되면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가사하라 메이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소녀 뭔가 모자란 듯 보여도 절대 그렇지 않다. 은근히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해서 오카다를 놀라게 한다. 오래 함께 살았다고 해서 마음속 깊은 곳까지는 알기 어려운 걸까. 오카다는 구미코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는 걸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가노 마르타로부터 구미코의 일로 와타야 노보루와 셋이 만나자는 전화를 받는다. 원래 껄끄러운 사이였던 와타야 노보루를 대면하고 구미코의 얘기를 일방적으로 들으며 오카다는 분노하고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이렇게 와타야 노보루에게 쏘아붙인다.

 


아주 먼 어느 곳에, 천박한 섬이 있어요. 이름은 없습니다. 이름을 붙일 만한 섬이 아니죠. 아주 천박하게 생긴 천박한 섬입니다. 거기에는 천박한 모양의 야자나무가 있죠. 그리고 그 야자나무는 천박한 냄새가 나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또 거기에는 천박한 원숭이가 살고 있어서, 그 천박한 냄새 나는 야자 열매를 즐겨 먹어요. 그리고 천박한 똥을 싸죠. 그 똥이 땅에 떨어져 토양도 천박해지고, 그 토양에서 자라는 야자나무를 더욱 천박하게 하죠. 그런 순환입니다.”(P69)

 


 왠지 선문답 같은 독설이다. 구미코의 오빠인 와타야 노보루를 향해 이렇게 퍼부으면서 속이 좀 후련해졌을까. 그리고 가노 마르타의 예언 같은 말이 들어맞기라도 하듯 오카다는 난데없이 우물에 들어갔다가 며칠 만에 구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가노 크레타는 알몸으로 나타나 오카다를 놀라게 한다. 오카다는 왠지 여자들로 둘러싸인 형국이다. 의도하지 않게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휘둘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노 마르타, 가노 크레타, 가사하라 메이에게서 오카다는 헤어나지 못한다.

 



 왜 오카다는 우물 속에 들어 갔을까. 마미야 중위의 우물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하기 위해서였을까. 또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기묘한 체험을 하면서 지난날의 구미코에 대한 고찰이 시작된다. 특히 가사하라 메이가 가끔 툭 뱉어내는 이야기가 놀라웠다. 속에 어른이 들어있는 아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소멸되지 않고 나이를 먹지도 않고, 이 세상에서 계속 건강하게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래도 인간은 여전히,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이것저것 생각할까요? 우리는 많든 적든, 여러 가지를 계속 생각하잖아요.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논리학이나, 그리고 종교도 있고, 문학도 있고, 그런 유의 복잡한 유의 사고와 관념은, 만약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 지구상에 안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P181)

 


 함께 크레타 섬에 가자는 가노 크레타의 제안을 받고 여행 준비를 하다가 심경의 변화가 온다. 오랜만에 찾아온 삼촌의 얘기를 듣다가. 예상치 않은 곳에서 힌트를 찾게 되는 것이 신기하다.



그렇다면, 뭔가를 분명하게 알 때까지, 자기 눈으로 보는 훈련을 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 시간을 들이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 무언가에 넉넉히 시간을 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복수거든.”(P352)

 



나는 도망칠 수 없고, 도망쳐서도 안 된다. 그것이 내가 얻은 결론이었다. 가령 어디로 간들, 그것은 반드시 나를 쫓아올 것이다. 어디까지나.’(P372)

 


 그 여자에게 들었던, ‘당신에게는 치명적인 사각지대가 있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무언가 놓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수수께끼에 싸여있던 전화 속 여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예전에 상실의 시대(현재는 노르웨이 숲)를 읽은 후,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가까이하지 않았었다. 왠지 너무 리얼하고 자극적인 관계 묘사가 별로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작품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어보니 이야기 속에서 통찰력 깊은 문장들을 만나고 그냥 보편적인 것을 태연하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도 하루키가 가진 힘이 아닌가, 그래서 세계적인 작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하나씩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 같다. 여기서 우물이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내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래로 가야 할 때는 가장 깊은 우물을 찾아 그 바닥으로 내려가면 돼.(본문 )


 

구미코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끝부분에 오니 더욱 재밌고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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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14 2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3권 남으셨네요 ㅎ 하루키 소설 읽다보면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상깊은 문장이 나와서 좋더라구요. 동감합니다^^

모나리자 2021-03-15 13:16   좋아요 1 | URL
네..ㅎ 3권은 엄청 두껍네요!
그래도 재밌어서 다행이에요. 시리즈물 오랜만에 읽는데
이렇게 읽어나가게 되네요.
새로운 한주도 즐거운 시간 되세요~새파랑님.^^

scott 2021-03-14 20: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하드보일 원더 랜드 다시 읽고 있는데
문장이 살아 움직여요.
감각적인 묘사가 시각 청각 후각을 자극하는,,
이책이 수십년전에 썼는데 지금 읽어도 전혀 오랜전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네요.^.^


모나리자 2021-03-15 13:17   좋아요 2 | URL
사이를 두고 여러 번 읽으시는군요.ㅎ
올바른 책읽기 하시네요. 스콧님.^^

새로운 한 주도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