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사건들 - 현재의 소설 : 메모, 일기 그리고 사진
롤랑 바르트 지음, 임희근 옮김, 박상우 해설 / 포토넷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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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소설은 아닌 것 같은데 흔히 생각하는 감성적인 에세이도 아닌 애매한 글이 꽤 낯설었다나중에 알았는데 롤랑 바르트가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하면서 쓴 것이며, ‘스냅사진을 찍듯 보고 경험한 일의 장면을 묘사했다는 걸 알았다그리고 일본 여행을 하고 하이쿠를 접하고 그것을 글쓰기에 적용하여 짧은 메모나 일기 형식을 빌려 쓴 전형적인 사진적인 글이며롤랑 바르트가 쓴 하이쿠이기도 하다고맨 끝에 나오는 <파리의 저녁들>은 카페나 길에서 본 풍경과 생각들을 적고 있다일기처럼 보이지만 일기형식을 빌려 쓴 일종의 새로운 소설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의 유명세에 대한 호기심과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끌려 읽었으니 그럴 수밖에다시 읽어보니 하이쿠적인 느낌을 엿볼 수 있었고 스냅사진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스냅사진은 연속적인 장면이 아니다여기서 저기서 시선을 끄는 장면을 찍는 것이니까확실히 정지된 느낌보다는 새로운 낯선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을 구경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이쿠를 떠올리게 하는 짧은 문장을 소개해 보겠다.

 

 


마라케시의 시장첩첩이 쌓인 박하 풀 더미 속에 보이는

시골 장미 꽃송이들.’(122P)

 


 

 하이쿠에 필수적인 계절을 엿볼 수 있는 장미 꽃송이들을 보면 여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시장에 모인 사람들의 와글와글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1968년과 1969년 모로코그중에서도 탕헤르와 라바트또 그 나라 남부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간결하게 쓰고 모아서 엮은 것이라 한다그렇다고 해서 모로코의 국민이나 문화사회문제에 관한 롤랑 바르트의 성찰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짧아서 금세 읽을 수 있다그런데 내용은 그다지 서정적이지 않다좀 거칠다고 할까초현실문명 비판환상동성애의 성적 시선 등 지극히 사적인 시선과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표현하고 있다하지만 양념처럼 글 속에 유머도 들어있고 생각할 여지를 주기도 한다그냥 묵독보다는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이 내용이나 정황을 이해하기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여기서 간간이 언급되는 책이나 작가는악의 꽃라캉팡세』 프루스트 등이다마르셀 프루스트는 롤랑 바르트가 좋아하는 작가였다고 한다그가 쓴 작품이 기억의 소설이었다면 자신의 글은 현재의 소설이라고 불렀다기존 에세이의 여운과 감동을 바라고 이 책을 읽는 건 좀 곤란하겠다프랑스 지성인의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스냅사진을 찍는 기법으로 연결되지 않는 단편의 조각들그것들을 쫓아가는 시선의 여행그런 분위기를 맛보고 싶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면 좋겠다이런 형태의 글쓰기도 있구나낯선 글쓰기 형식에서 어떤 영감을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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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9 2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롤랑바르트 SNS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응축된 문장으로 대 스타가 되었을것 같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학자네요 메모-쪽지-일기 속에 드러난 단상들이,,,일본의 하이쿠 시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일본의 예술을 아주 마니 숭배 하고 있답니다 ^ㅅ^

모나리자 2021-09-10 09:50   좋아요 2 | URL
그쵸.ㅎ
프랑스인이 일본 예술을 숭배하듯이 일본인들도 모네와 수련을 엄청 사랑하더군요.
빈센트 반 고흐도 일본의 우키요를 접하고 좋아했다는 걸 책에서 본 것 같아요.
3년전 도쿄 여행에서 모네 수련 전시회가 있었는데 귀국 다음날부터 예정이어서 아쉬웠던 기억입니다.
오늘도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요~스콧님.^*^!

새파랑 2021-09-10 06: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개해주신 문장은 완전 서정적 느낌이 드는데 거칠다고 하니 궁금하네요. 현재의 소설이라니~!!

모나리자 2021-09-10 09:54   좋아요 2 | URL
네.. 저 하이쿠 같은 글 말고는 대체적으로 그래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여행지에서 낯선 풍경을 떠올릴 때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나 이상 행동을 하거나 하는 그런 사람들이 눈에 빨리 들어오는 것처럼 그런 맥락의 글 같아요.
정말 스냅사진 처럼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아무런 감정없이 포착했다고 할까요.
나중에 기회되시면 한번 읽어보세요. 새파랑님은 금세 앉은 자리에서 읽으실듯! ㅎㅎ
 
결국엔, 그림 - 그림으로 나 다움을 찾고 성장하는 법 좋은 습관 시리즈 12
정진호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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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습관연구소의 열두 번째 책,결국엔, 그림』은 그림을 그리며 1인 기업을 운영하는 정진호 작가의 이야기다. 저자는 인터넷 기업 야후와 SK커뮤니케이션즈에서 16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중 현재는 대기업,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그림 수업과 강연, 워크숍을 진행하며 활동하고 있다. 7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17권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했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 그림으로 1인 기업을 운영하고, 거기에 번역까지 하고 계시다니 놀라웠다. 보통 예술 분야는 타고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모지스 할머니 등 최근엔 그림 그리는 김두엽 할머니의 이야기까지 상기시키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중 하나이며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임을 알면 좋겠다는 저자의 말이 독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것 같다. 한마디로 좋아하고 즐기다 보면 그것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또 출판사의 핵심 테마인 습관을 그림 그리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 을 알려주는 책이다.

 



 총 스무 개 꼭지 중 앞부분 열 개의 이야기는 저자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부터 시작하여 초보자를 위한 그림 도구 선택, 그림 그리는 습관 만들기 등 셀프 개인전을 여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뒷부분 열 개의 이야기는 그림을 취미로 그리다가 1인 기업을 운영하게 된 과정의 이야기가 상세하게 들어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일로 1인 기업이라니? 하는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겠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명화나 풍경화 등의 전통적인 그림이 아니라 일러스트나 비쥬얼씽킹 등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나들며 엽서, 굿즈 등으로 확장하여 책을 쓰고 강연 활동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중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다.

 



많은 책을 통해서 좋아하는 것을 10년 정도 계속하면 뭐든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저자는 해외 출장을 갔다가 공항에서 대기하던 중 한 외국인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그 후 그림 그리기 기초를 배울까 하고 홍대 근처를 돌아다녔지만, 정형화된 그림이나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학을 결심한다. 너무도 유명해서 누구나 알고 있는 김충원의 그림책 스케치 쉽게 하기: 일러스트 드로잉을 구입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희망과 기대감으로 울렁울렁했을까. 그 마음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누구나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여행길에 마주치는 화가들이 마치 요술을 부리듯 선이 연결되고 선명한 그림으로 나타나는 걸 부러운 듯 보던 기억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우선 저자가 알려주는 대로 그려보자. 어렸을 때는 달력 종이든 벽에든 마당이든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기며 놓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림 그리기를 멈추게 된다고 한다. 그게 자신의 그림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그릴 수 있는 작은 그림, 만만한 그림,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림을 작은 종이(A5용지-A4용지의 절반 크기)에 그리기 시작하라고 한다. 작은 성취감을 느껴야 그림 그리는 습관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그림을 보고 그리기, 사진 보고 그리기, 실물 보고 그리기의 단계가 있다. 또 그리는 도구도 펜이나 색연필 그리는 방법, 수채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까지 유용한 노하우를 알려준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10가지 그리기에 도전하기를 연습한다면 그림 실력도 일취월장할 것 같다.

 



 

100100개 그림 그리기

 


 작은 성공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 그 성취감으로 큰 성공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특히 이 꼭지 이야기가 좋았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이를 닦는 일은 그냥 아무런 저항도 없이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공부나 운동 등에 활용하려고 하면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아마도 의도적인 습관을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 관건인지도 모르겠다. 2019년 온라인에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에 성공했다고 한다. 매일 무엇을 규칙적으로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그림은 아니지만 나도 지난 4월 마지막 날부터 시작해서 100일 포스팅에 성공했고 그 과정에 다시 매일 원서 읽기 100일 포스팅을 도전하고 있어서 정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루 빼먹는다고 해서 큰일 나는 건 아니고,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작은 일이지만, 확고한 습관으로 다져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가다 보면 신기하게 100일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100일 기도 경험은 없지만) 스스로를 격려하게 된다. 그림 그리기로 성과를 보고 싶다면 이 방법을 활용하면 무척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쓰기 운동 등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그림 그리기와 미니멀 라이프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책상이나 공간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쌓이고 엄두가 안 나는 순간이 온다. 미니멀 라이프에 공감하고 실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언젠가를 벼르고 있는 내게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어서 인용해 보겠다.

 



우리는 완벽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잡동사니를 슬기롭게 정리하고 삶을 즐기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매일의 삶 속에서 여유를 만들어 내고 나머지 시간에 나만의 예술, 그림 그리기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미니멀 라이프는 진짜 원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192P)

 



 지당한 얘기다. 다 알면서도 습관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쌓이면 무얼 찾기도 힘들다. 여기서 또 시간 낭비가 발생한다. 이제 하루 5분이라도 정리 습관을 들여야겠다.

 




 이밖에도 예술가의 시간 관리도 좋았다. 흔히 가장 중요한 것부터 처리하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저자는 데이비드 앨런의 쏟아지는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법이라는 책을 예로 들면서 GTD(Getting Things Done)를 언급하고 있다. GTD의 핵심은 급한 일부터 해내고 나서 빨리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낫다는 내용이다. 좀 더 소개하면 GTD는 수집 분류 검토 실행의 네 단계가 있는데, 이것으로 시간 관리 습관을 만드는데 노트와 펜만 있으면 가능하다. 좀 더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서는 컬쳐드 코드사에서 제작한 띵즈(Things) 등을 추천하고 있다. 결국, 시간 관리의 핵심은 집중력을 높여 양적인 시간을 늘려서 나 자신을 위한 시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확보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림을 매일 그리면 벌어지는 일

 



 매일 무언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 이야기다. 작가님의 아들 이야기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그리다가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작품을 하나씩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구독자가 몇백 명 수준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몇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결과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림책 관련 출간제안과 교육 사이트 클래스 개설 논의도 이어졌다. 저자는 이 과정 이야기를 자세히 얘기하면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를 대하는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돈을 벌려는 성급한 마음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꾸준하게 기록으로 남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는 순수함과 소박한 목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얘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림이든 공부든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빨리 결과를 내려고 조바심하기보다는 현재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 자체로 반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그림.ㅎㅎ 어설프지만...  그림에 관한 책이라 그림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뭔 줄은 아시겠죠?? ㅋㅋㅋ



 책을 읽는 것도 그렇지만 그림 그리는 일도 마음이 복잡할 때 힐링이 되고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꼭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사람, 그림에 관심 있는데 실력이 없다는 핑계로 주저하는 사람, 그림을 시작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에게 유익한 팁이 가득 들어있다. 그밖에 좋아하는 일로 어떻게 습관을 만들고, 작은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비결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편하게 술술 읽히는 강의 같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의욕이 샘 솟을 것이다.

 

 




***이 리뷰는 좋은습관연구소 대표님이 보내주신 책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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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12 17: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매일 무언가를 한다는건 부지런하면서도 강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거 같아요. 모나리자님은 아이디처럼 그림도 잘그리시는군요 😄

모나리자 2021-08-13 08:51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규칙적으로 매일 한다는 건 의지가 필요한 것 같아요.
동글동글한 그림이라 비교적 쉬워서요.ㅎㅎ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짧았기에 더욱 빛나는 일본문학 컬렉션 1
히구치 이치요 외 지음, 안영신 외 옮김 / 작가와비평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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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짧았기에 더욱 빛나는에는 짧은 생을 살았던 천재 작가 여섯 명의 작품이 2편씩 열두 편이 들어있다히구치 이치요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지이 모토지로나카지마 아쓰시다자이 오사무미야자와 겐지 이렇게 여섯 명의 작가다너무도 유명한 천재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다자이 오사무의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었다가지이 모토지로는 지난 4월 벚꽃나무 아래로 처음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역시 그때 읽은 <레몬>과 처음 접하게 된 <모순과 같은 진실>을 만났다나카지마 아쓰시는 왠지 낯익다 싶었는데 2016년에 읽었던 산월기의 작가여서 반가웠다그리고 히구치 이치요와 미야자와 겐지는 작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작품으로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당 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두 작품 읽기가 끝나면 바로 작가와 작품 소개가 이어진다보통은 책의 맨 뒤에 놓이기 마련인 해설 부분이 작품을 읽음과 동시에 확인해 볼 수 있는 점이 괜찮은 구성으로 보인다특히 작품에 대한 소개는 일본 문학을 가까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특히 단편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작가의 체험이나 시대적 상황을 곁들이고 있어서 작품의 이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작가와 작품 소개를 먼저 읽고 나서 해당 작품 읽기를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섣달 그믐히구치 이치요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부모를 잃고 외삼촌의 집에서 살다가 야마무라 집안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있는 미네는 다쳐서 아픈 외삼촌 문병을 갔다가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된다그리고 2엔을 주인댁에 부탁해서 빌려달라는 외삼촌의 말을 대뜸 수락하고 만다하지만 어렵게 꺼낸 이야기를 인색하기 그지없는 사모님은 들은 적 없다고 시치미를 뚝 뗀다약속한 돈을 받으러 심부름 온 외사촌 동생 산노스케가 찾아오자 마음은 더욱 바빠지고... 급기야는 돈을 훔치게 된다나중에 사실을 자백하기로 하고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누구였을까생각지 못한 곳에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 ‘서랍 속에 있는 것도 빌려가겠습니다.’(P33)라는 말이 적힌 종이쪽지 덕분에 미네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을까이 작품을 읽고 히구치 이치요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어졌다.

 



<엔화 5천엔의 모델 히구치 이치요>

 



 <우리 아이>도 좋았다경어체로 쓴 이 이야기는 마치 자신의 지난 일을 담담하게 고백을 하는 것처럼 들려서 몰입하며 읽었다지기 싫어하는 자신의 성격고집이 센 성격의 화자는 과묵한 남편 때문에 힘들어한다바깥일도 알고 싶은데 남편은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하기만 해서 자꾸 의심을 하게 되고 사이가 멀어졌다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난다친정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이가 너무 건강하게 태어나서 그러지 못했다그리고 반전처럼 아이가 너무 예뻐서 행복한 마음이 되고... 그동안 자신의 잘못을 떠올리며 반성하게 된다아이가 자신을 지켜 수호신이라는 말을 접하고 미소가 번졌다결혼 생활을 하며 아이를 키워 본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그런 경험도 없이 짧은 생을 살다간 작가가 여성의 결혼 생활 모습을 이토록 자연스럽고 실감 나게 묘사할 수 있었다니그래서 더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다.

 

 



 전에 어른들로부터 어린아이는 3년 동안 평생의 효도를 다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또 아이는 부부의 끈을 연결해준다는 말도지금은 너무 출산율이 떨어져서 세계 각국이 걱정을 하고 있다시대는 변하여 삶은 나아졌지만행복감을 느끼는 횟수는 줄었다고 한다너무 큰 것에 행복을 걸기 때문이 아닐까우리 아이들 유아기가 생각났다그야말로 교과서처럼 거의 하루 종일 잠자며 달덩이 같은 미소로 지친 일상 녹여주었던 그때사르르 녹는 어린아이의 웃음을 함께 나누며 행복감을 맛보는 가정이 늘었으면 좋겠다.

 



 

밀감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요코스카에서 출발하는 상행 열차를 탄 화자의 눈에 비친 풍경이 묘사된다삼등칸 표를 쥐고 있는 열 서너 살의 여자아이가 이등칸 좌석에 타는데 영락없이 시골뜨기로 보인다피로에 권태를 뒤집어 쓴 화자는 신문 읽을 기운조차 없어 온통 뒤틀린 심사를 하고 있는 상황에 여자아이를 보는 눈이 곱지가 않다손은 동상에 걸리고 얼굴을 터서 빨갛게 달아올라 있고 꼬질꼬질한 모습에 볼품없는 생김새를 보니 더욱 짜증을 부채질한다꾸벅꾸벅 졸다가 놀라 깨어보니 자기 옆에 와서 차창 문을 열려고 몸부림치는 게 아닌가터널 속을 통과하려는 시점에 왜 창문을 열려고 하는지 알 수 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그 아이가 문을 열지 못하기를 바라며 냉정하게 지켜보는 거였다둘은 서로 말이 없는 채 상대방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 빠져있다열차는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여자아이는 창밖을 향해 밀감 대여섯 개를 던지는데... 그제야 화자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아마도 남의집살이를 떠나며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밀감을 던지며 배웅 나온 동생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이었음을그리고 화자는 뭔지 모를 쾌활한 감정이 용솟음치는 걸 느낀다그리고 이제 그 여자아이가 새롭게 보인다정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뭉클한 감동이었다여기 실린 다른 단편에 비해 아주 짧은 이야기인데 이토록 멋진 반전과 감동을 주다니더구니 잿빛의 우울한 색깔에서 노란 밀감의 시각적인 대비의 조화로움이 곁들여져서 더욱 강렬한 감동을 주었다전에 읽었던 <라쇼몽>, <지옥변>, <덤불 속>과 다른 따뜻함과 뭉클한 감동을 주어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레몬-가지이 모토지로

 


 다시 읽어도 좋았다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살고 있던 화자가 어느 날혼자 돌아다니다가 과일 가게에서 좋아하는 레몬을 사 들고 마루젠에 들어가 책 구경을 하다가 미술책이 있는 책장 위에 레몬을 올려놓고 나온다곧 그 폭탄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하는 기발한 상상을 하며아마도 폐가 좋지 않아서 평생 고생을 했으니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미시마 유키오는 <레몬>을 일본 최고의 단편소설로 꼽으며 레몬 하나가 독자의 눈앞으로 던져진 듯한 선명한 감각적인 인상을 주며 끝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한다새콤하고 산뜻한 레몬의 향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모순과 같은 진실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는 말이 있다하지만 항상 힘이 센 아이에게 맞는 쪽이라면(?) 그런 말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초등학생과 덩치 큰 중학생이 싸우는 것을 보고 3년 전 자전거 타는 사람과 부딪혀서 얻어맞고 울고 들어온 동생을 떠올린다자기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왜 그렇게 똑같은지아마도 자신의 그 나약함을 동생에게서 발견하게 되니 더 화가 난 것이 아닐까싸움에 진 나약한 아이의 모습은 화자에게 그대로 전해져 울컥하게 만든다졌지만 완전히 사내인 척‘ 보이고 싶은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리고 싶지 않은 동생의 모습에 더욱 짠하고 화가 나지만동생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느껴져 마음이 뭉클해진다어린 시절 동심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젖게 하는 이야기다나쓰메 소세키의 전집을 읽고 그에게 심취했었다는 것만으로도 친근감이 느껴지는 작가가 되었다.

 

 



행복 - 나카지마 아쓰시

 


 팔라우가 작품의 배경이고 섬에 사는 가여운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주인은 이 섬 최고의 부자 루바크다부자인 권력자의 시종이지만 그런 풍족함의 혜택은 받지는 못하고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했다상어에게 물려 발가락을 세 개나 잃었지만다리 전체를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아무리 가혹하게 대해도 보고 듣고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으니다행이라고 여기며 살았다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꾼다꿈속에서는 그가 장로가 되어있고 온갖 호화로운 음식이 넘치고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기이하게도 현실의 고통이 줄어들었고혈색도 좋아지고 생기있는 젊은 몸이 되었다이와 마찬가지로 주인도 꿈을 꾸고 있었는데 거꾸로 하인이 되어 비참한 생활하는 모습이었다상어에게 물려 발가락 세 개도 없어지고 공교롭게도 주인은 자신이 부리는 하인이었다현실의 그는 비참할 정도 쇠약해졌다그를 혼내려고 불렀는데 변화된 하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정중한 말투를 보면서 압도된다.

 

 



 오래전에 감동적으로 읽었던 산월기를 통해서 중국 고전을 소재로 한 <이릉>, <산월기>,<제자>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 <호랑이 사냥>, <순사가 있는 풍경등 여러 작품이 만나면서 식민지 치하에 놓여 있던 조선에 그의 생각을 잘 알게 되었다여기에 나오는 두 편의 작품은 색다른 느낌이었지만, <행복>에서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계질서가 역전될 수 있다는 작가의 가치관과 이념이 잘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나카지만 아쓰시는 일본에서 제2의 아쿠타가와로 불린다고 한다.

 



 

앵두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이나사양과는 다른 느낌의 다자이 오사무를 알 수 있었다단편이어서 그랬을까아니 가정의 풍경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늘 유쾌한 듯 집에서 농담을 하고 독자를 의식한 듯 독자를 향해 귀여운(?) 푸념을 하는 등 이리저리 둘러 말하더니 결국이 얘기는 부부싸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고백한다화자는 였다가 아빠로남편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아이들과 아내에 대한 상대적 입장의 다양한 역할의 힘듦을 묘사하고 싶은 듯했다아내의 눈물의 골짜기란 말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게 된다. 막내의 발육이 더뎌서 힘들고따져보면 나만 잘못한 게 아닌 것 같고자기도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모든 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 ‘잘못한 증거를 조용히 수집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는 이 부부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져 와서 웃음 짓게 했다작가의 삶이 약물 중독과 자살 미수로 반복되었던 삶이 작품에 투영되지 않았을까.

 

 



산다는 건 힘든 일이다여기저기 쇠사슬로 뒤얽혀 있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피가 터진다.’(169P)

 

 



 

 작가가 경험했던 고뇌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런 문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마냥 행복하기만 한 삶은 없을 테니까이야기 시작부터 자식보다 부모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싶다는 말로 시작하더니 마무리도 역시 이 문장을 반복한다아무리 부모인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싶어도 자식에게 쏠리는 관심과 애정은 막을 수 없지 않나결국숨겨져 있는 화자의 마음에서 자식에 대한 진한 애정이 전해진다우리는 삶은 이렇게 크게 다르지 않고 소박한 것에서 위안과 행복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에 공감하게 된다.

 



 

 이 외에 시인이며 동화작가교사종교가였던 미야자와 겐지의 두 작품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작가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쏙독새의 별>과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동화 <바람의 아이 마타사부로>이다읽을 독자를 위해 여기서 리뷰를 마치겠다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천재 작가들의 빛나는 작품을 엮은 책이다가난과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어떤 사연인지 헤어진 자식을 몰래 만나러 온 아버지 등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도짧은 이야기에서 긴 여운을 느껴보고 싶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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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7-05 0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히구치 이치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가지이 모토지로, 나카지마 아쓰시, 다자이 오사무, 미야자와 겐지 ] 요렇게 모아 놓은 작가들의 명 단편들만 모아 놓았다니 이책 모나리자님에게 땡투 날려야 겠는데요(아! 그런데 번역자가 여러명 ㅜ.ㅜ)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들 모두 가슴 속 서늘한 얼음장 같은걸 안고 사는 여자들의 삶이 넘넘 안타까웠요. 이치요 작품집 추천합니다.
아쿠타가와는 천재 소리가 나올정도로 구성전개가 모더니즘 적이고(‘밀감‘ 일본 교과서 수록)
다자이 오사무는 개인적으로 아껴서(그의 인생은 전혀 이해 불가이지만) 전집(원서로) 갖고 있습니다.
단편 ‘앵두‘는 일본 교과서에도 수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요즘 도통 일본 문고본 집어들지 못했는데 (이런 슬럼프때는 히가시노를 집어들었지만 이것마저도 ㅎㅎ)
일본 근현대 문학 단편은 읽어보고 싶어졌네요

모나리자 2021-07-05 14:52   좋아요 1 | URL
네.. 천재 작가군들이 후덜덜 하죠.ㅋ
번역자가 3명이더라구요. 혼자 해도 됐을 텐데.ㅋㅋ
히구치 작품 처음 만났는데 정말 좋았어요.
아쿠타가와는 정말 천재! 밀감이 아주 짧은 이야기인데.. 역시 교과서에 나오는 군요.
놀랍고도 멋진 정보력! 스콧님.^^
와,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원서로 갖고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슬럼프 전혀 없으실 것 같은뎅.ㅎ
읽은지 오래되었다면 다시 붙잡아도 좋겠지요.
오늘도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해요.^^!!

scott 2021-08-06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이달의 당선 축!!
8월 무더위 건강 잘 챙기세요 ^ㅅ^

모나리자 2021-08-06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찜통 더위가 싹 사라지는 것 같아요! 기쁜 소식 감사합니다~스콧님~ 건강 잘 챙기시고 주말도 행복하게~^_^!!

새파랑 2021-08-06 16: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당선 완전 축하드려요~!!

모나리자 2021-08-06 18:03   좋아요 1 | URL
완전!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주말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08-06 1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모나리자 2021-08-06 18: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그레이스님~^^

초딩 2021-08-06 17: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모나리자 2021-08-06 18:04   좋아요 0 | URL
축하 말씀 감사합니다~초딩님~^^

이하라 2021-08-06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더위가 사라지는 것만큼의 기쁨.. 이달을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모나리자 2021-08-06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의 말씀 감사합니다~이하라님~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주말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다시, 시로 읽는 세상 - 서른 편의 시로 읽는 삶과 문학 이야기
김용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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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를 읽자는 주제로 원고에 한 편의 글을 썼다. 그리고 시 읽기 실천으로 시집을 들춰보던 중 이벤트에서 반가운 책을 만났다. 블로그 이웃님(예스블로그)의 신간이다. 작년 가을쯤 책을 내셨던 것 같은데 몇 달 만에 다시 신간이라니 놀라웠다. 나의 20대 시절엔 칼릴 지브란의 시집을 끼고 살았고, 오랫동안 시와 멀어졌다가 다시 함민복, 장석남, 문태준, 김선우, 허수경 시인 등 바쇼의 하이쿠, 작년 11월에는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만났다. 시에서 완전히 멀어지진 않으려고 나름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띄엄띄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아이가 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읽어보라고 권해 준 덕분에 시를 즐겼던 예전의 추억과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시를 많이 들려주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적어도 한 계절에 1권의 시집을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책에 인용되는 시들은 모두 30편이다. 이 중 상당 부분의 시는 20여 전 전에 한차례 선보였던 원고이며 여기에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서 썼다고 한다. 다시, 시로 읽는 세상이라는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다시(多時), ‘많은 시를 통해서 세상을 읽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를 통해서 세상을 읽고 시인의 삶까지 엿볼 수 있는 시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인과 시들이 나와서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프롤로그에서는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 에 대한 가이드가 나와 있다. 전에 어떤 글에서 시에 대한 평가는 읽는 사람의 몫이라는 말을 본 적 있다. 저자도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으며 무수히 많은 모범 답안이 존재할 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산문과 시의 비교를 말하는 문장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산문 쓰기는 불을 때서 밥을 짓는 것에 비유되고, 시 쓰기는 발효시켜 술을 빚는 것에 비유된다.”


 

 중국 청나라의 시인인 오교(吳喬)의 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산문은 밥이고 시는 술이 되는 셈이다. 같은 재료인 쌀이 발효되어 술이 된 것이 함축의 미를 지닌 시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 시의 특성을 알게 되면 산문과 달리 음미하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 본문으로 넘어가 보자. 1편의 시에는 저자의 에피소드와 함께 시 해설이 곁들여져 있다. 맨 처음에 나오는 시는 김소월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이다. 소개된 시들 중에는 가요로 불린 시들도 꽤 있어서 정겹다. 시는 노래고 노래는 시도 되니까. 국어시간에 배웠던 김소월의 시는 특히 전통적 민요조라거나 정한(情恨)을 노래했다는 특징을 암기해서 시험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시대적인 상황이 시에 반영된 것이기에 무조건 민족의 정서를 한()으로 특징 지우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매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리뷰로 소개할 시는 그동안 알고 있던 친숙한 시 외에 예전에도 아주 난해하게 생각되었던 시인의 시와 이번에 알게 된 시를 소개하려고 한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고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엇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 <거울>

 



 고교시절 국어책에 나왔던 이상의 <오감도>가 생각난다. 띄어쓰기 무시는 물론 비슷한 말을 반복해 놓은 듯한 시를 보며 어안이 벙벙하던 기억이다. 이렇게 글쓰기의 규칙에서 벗어난 시를 읽어내려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유추하는 것이 일차적인 독법이라고 한다. 기존의 문법 규칙을 벗어나는 새로운 형식은 절망을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문학적 기교라고 했다. 과연 해설을 따라 시를 반복해서 읽어보니 난해하게 보였던 시가 환해진다. 거울을 매개로 한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는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심상을 시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난해한 시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천재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왠지 매력적인 시로 다가와 <오감도> 읽기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자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시인의 이 시는 제목은 알고 있었는데 처음 접했다. 제목 느낌으로는 서정시인가 했었다. 어떤 이는 이 시를 접하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시인이 된 이도 있었다.(어떤 리뷰에서 접했다) 영화 상영 전에 어김없이 볼 수 있었던 애국가를 들으면서도 이런 시가 나오는구나, 감탄했다. 일렬, 이열, 삼렬 하는 군대용어를 등장시켜 독재 정권의 억압을 드러내어 후련하고도 씁쓸한 웃음을 웃게 한다. 시인의 관찰력과 통찰이란 참 대단하다. 시의 매력이란 그런 것 같다. 처음 접할 때 아주 난해한 시도 있지만 한두 번 읽다 보면 의미를 알 수 있는 시가 있다. 문학 중에 가장 효율적인 장르가 시가 아닐까. 아주 짧은 문장 속에 핵심을 숨겨놓는다. 독자는 시와 행간에서 그것을 읽어내며 의미가 환해지면서 희열을 느낀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도 좋았다. 인간의 감정을 소재로 이렇게 시를 쓸 수 있구나.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처음엔 어려운 듯 느껴졌는데 몇 번 반복해서 읽어보니 그림이 그려진다. 시장에서 귤을 팔고 있는 할머니에게서 귤을 사면서 싸게 샀다고 기뻐하는 사람, 누군가 얼어 죽었는데 무관심했던 사람들. 어느 한쪽이 기뻐하면 다른 한쪽은 슬플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시라고 할까. 한마디로 더불어 살자는 호소가 짙게 느껴지는 시였다. 그리고 나도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에게서 야채를 사면서 그런 적이 있었던가... 떠올려 보았다.

 



 오랜만에 국어시간으로 돌아간 듯 시를 읽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난 국어를 좋아했다) 김용찬 저자는 현재 순천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 가사, 조선의 마음을 담은 노래, 18세기의 시조문학과 예술사적 위상, 교주 병와가곡집, 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등 다수 있다. 저자는 시의 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시 해설서를 읽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시는 왠지 어렵다는 생각에 멀어졌던 독자들에게는 일독을 권하고 싶다. 어떻게 시를 읽을 것인가, 한 편의 시에 삶과 역사가 깃들어 있는 배경을 잘 풀이해주고 있어서 산문에서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시와 친해지고 싶은 독자들에게 유용한 시 독법 가이드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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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08 21: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호승˝ 시인 시를 가끔 보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슬픔이 기쁨에게>도 좋네요. 모나리자님 리뷰보니 시에도 관심이 생길거 같아요^^

모나리자 2021-06-09 10:19   좋아요 2 | URL
네.. 시를 너무 띄엄띄엄 읽어서 이제부터 좀 열심히 읽으려구요.ㅎ
인간의 감정으로도 이렇게 좋은 시가 나오네요.^^

붕붕툐툐 2021-06-08 21: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국어 시간에 배웠던 시 총출동이네용!! 저도 다 좋아는 시라 반가웠어요~

모나리자 2021-06-09 10:20   좋아요 3 | URL
그쵸. 정말 반가웠어요. 역시 익숙한 시가 편하긴 해요.
전에 읽었던 허수경 시인의 시는 좀 어렵더라구요.ㅎ
현대시는 좀 어려워요. 자주 읽어야 갭을 없앨 텐데..^^

그레이스 2021-06-08 2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황지우 시 좋아해요~

모나리자 2021-06-09 10:21   좋아요 3 | URL
네.. 그러시군요.
유머에 재치에 후련함, 대담함까지.. 재미있는 시였어요.^^
 
나와 디탄
사철생 지음, 박지민 옮김 / 율리시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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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 소개를 처음 보았을 때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함께 읽었던 내게는 한쪽 다리가 있다(주대관, 송방기 공저)가 떠올랐다. 세상에... 한쪽 다리가 있다니, 읽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 마음이 내려앉았던 기억이다. , , 그림에 재능이 있던 대만 어린이 주대관이 소아암으로 겨우 아홉 살의 짧은 생을 살았던 이야기다. 다리 한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도 아직 한쪽 다리가 있다며 오히려 부모님을 위로하는 씩씩한 아이였다. 그것이 더 마음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그리고 처음 만나는 이 작가 사철생은 20세에 하반신 마비로 평생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던 중국의 국민작가라는 책 소개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한창 앞날에 대한 꿈으로 부풀 나이에 닥친 불행을 어떻게 헤쳐나갔을까, 궁금한 마음에 만나게 되었다.

 



책 표지는 따뜻한 동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휠체어를 탄 주인공의 모습은 애잔함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현대 산문으로 꼽힌다는 <나와 디탄>을 비롯하여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대에서 7년 동안 가혹한 노동을 하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기까지 이야기가 들어있는 <스물한 살, 그해> 등 여러 편의 산문이 들어있다. 다리를 못 쓰게 된 초기에 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돌아가신 후엔 어머니 등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몇 편의 이야기 조각이 맞춰지면서 그의 삶의 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중 몇 편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나와 디탄

 

이 책을 다 읽고 밖에 나갔다. 땅을 딛고 걷고 뛰다가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화자의 심정을 느껴보려고 했다. 그가 휠체어를 타게 된 날들이 길어지면서 다리의 감각을 떠올리려고 상상하는 부분이 있었다. 발을 땅에 딛는 느낌은 어떨까, 돌을 발로 차는 느낌은 어떨까, 등등... 그가 그랬듯이 땅을 딛고 뛰지 못하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삶이란 옛날의 기억을 조금씩 잊어버리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이생에서는 불구로 살 테니까 다음 생애에는 칼 루이스처럼 튼튼한 몸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두 다리가 마비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그는 황량한 디탄 공원으로 찾아간다. 몇 년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왜 태어났을까 생각하다가 마침내 깨닫게 된다. 한번 태어난 생명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그런 깨달음을 얻고 15년 동안 찾아갔던 디탄 공원은 그를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희망이었다. 거기서 만난 중년 부부, 아픈 어린아이, 노래 부르는 청년, 달리기 하는 친구 등 공원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늘 죽음을 생각하던 그가 비로소 살아보기로 마음먹으면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약간의 명성도 얻는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끊이지 않는다. 그가 죽지 않았던 건 살아갈 용기를 찾도록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며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친구들 덕분이었다고 한다. 따뜻한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픔만 함께 나누다가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회상하는 부분은 정말 안타까웠다. 그 넓은 디탄 공원에서 행여 아들이 잘못된 생각을 할까 봐 찾아 헤매다가 불안하고 초조하셨을 어머니의 마음을 뒤늦게야 헤아린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지난날에 대한 뒤늦은 후회와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그리고 산문이라고 해서 술술 읽히는 가벼운 문장들은 아니다. 한창 꿈과 열정으로 피어오를 시기인 스무 살에 닥친 불행으로 인해 일찍 철이 든 때문이었을까. 철학적인 사색이 담긴 물음은 묵직하게 다가오면서도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우리는 왜 남의 불행한 모습 속에서 위안과 행복을 찾는 존재인지 참 아이러니할 때가 있다.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참 많은 것을 갖고 있다는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잘 챙기고, ’지금행복한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의 한때는 지나가면 그뿐이다. 돌이킬 수도 없고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작가에게 디탄 공원은 무엇이었을까. 온통 죽음을 생각하러 갔다가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깨닫는다. 그래서 살았고 15년 동안 디탄 공원에 대한 헌사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처럼, 그때 디탄에서 보낸 시간에 가끔 의문이 든다. 나는 디탄에 있었나? 아니면 디탄이 내 안에 있었나? 지금 나는 허공에 그어진 경계선을 본다. 그리움을 안고 그 선을 넘어 들어가면, 넘기만 하면 깨끗하고 순수한 기운이 훅하고 들어올 것 같다.

나는 이제 디탄에 없다. 디탄이 내 안에 있다.(P249)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자신 안에서 강렬한 삶의 의욕을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다른 이름은 욕망이며 욕망을 갖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살기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열정을 다해 살았던 그가 남긴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장 아래에서의 단상

 

 담장에 대한 사색은 어릴 때 놀았던 추억의 골목에 가서 돌아본 이야기. 국수 삶는 솥에 축구공을 떨어뜨린 이야기 등 어린 시절 유치원에 대한 추억과 마음속의 담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진다.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다가 맛있는 것에 넘어간 어린 화자를 데리고 멀리 돌아온 어머니의 작전을 늦게 눈치챈 어린 화자는 높고 높은 담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성통곡을 한다. 그랬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아침마다 잠결에 유치원에 들어가기 싫은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는 장면에서 웃음이 났지만, 웃고 넘길 수 없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큰 아이가 다섯 살 때 미술학원에 학원에 안 가겠다고 엄청 떼를 쓴 적이 있었다. 작은 아이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피부과에 가려고 함께 나왔는데. 결국 학원에 가지 않았고... 나한테 혼나고 그 하루는 엉망이 되었다. 아이가 가고 싶지 않다면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런 걸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학원 하루 빠지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럼 우리 셋이서 맛있는 거 먹으며 재미있게 놀자, 했어도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어른이든 아이든 인생의 어느 한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인데,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되었다.

 



 담장에 대한 추억은 물리적인 모습에서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담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바다, , 사막까지 찾아 떠나지만 우리는 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담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그 속에서 두려움을 쌓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고 말이다.

 



 사실 비밀 자체가 이미 담이다. 뱃가죽과 눈꺼풀도 모두 담이고, 거짓 미소와 거짓 눈물도 담이다. 다만 이런 담은 너무 약하고 피곤한 게 맘에 들지 않아 좀 더 내구성을 더해 보완을 강화하려고 한다. 설령 이런 마음의 벽은 쉽게 허물 수 있다고 해도, 산과 물 모두가 담이고, 하늘과 땅도 담이고, 시간과 공간도 모두 다 담이다. 시간과 공간도 담이고, 운명은 무한한 속박이고, 신의 비밀은 끝없이 이어지는 담이다. 정말로 이 비밀의 담까지 다 없애려 한다면, 어쩌면 오래 꿈꿨던 이상을 실현하게 된 것 같겠지만 기다려보라. 재미를 잃어버린 세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잠만 자고, 잠꼬대조차 할 말이 없는, 의욕이라고는 사라진 곳이 될지도 모른다.(P103)

 



 여기서 장벽이라는 의미도 된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도 벽이 있으며 인간관계, 세상일에 벽이 없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닐까. 그런 벽이 거침없이 허물어진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고 성취하는 것을 잃어버린다면 재미없는 세상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화자도 오랫동안 담을 바라보며 죽음을 주거나 아니면 걸을 수 있는 다리를 달라고 기도를 했지만, 어느 날 노인이 부는 피리 소리에 이끌렸다가 장애라는 벽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담과 나눈 대화는 글쓰기로 이어졌고 그를 살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글을 쓰기 위해 살아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글을 썼다는 말이다.

 



기억과 인상

 

 이 이야기는 유년 시절의 기억부터 둘째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등 가족이 문화혁명이라는 역사의 굴레에서 받은 고통을 그의 기억과 인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알고 싶어도 어머니의 침묵 때문에 명쾌하지 않았다. 때로는 궁금해도 당당하게 큰 소리로 물어볼 수 없는 아픔과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시대적 아픔에 맞물린 어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기구했던 삶을 반추한다. 그리고 그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초등학교 시절 듣던 종소리, 어린 시절에 자주 찾았던 절 마당, 자주 꿈에 나타나는 어머니 모습, 어머니와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자귀나무와 해당나무의 추억으로 이어진다. 그 그리움은 아픔과 후회가 뒤범벅된 채 오랫동안 괴롭혔다. 어쩌면 인간은 살아오면서 경험한 기억과 추억으로 앞날을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을 더욱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답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휠체어에 앉은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그럼에도 자신이 자비 속에 있음을 깨닫고 무엇이든 써야겠다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다는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 있어 글쓰기의 영도는 삶의 시작점이라고 하였다. 글쓰기는 결국 찾아가는 과정이고, 영혼의 가장 처음을 바라보는 행위라고. 최근 다른 책에서도 인용된 책이라 관심 목록에 올려 두었는데 또 접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누구나 자신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면서도 종종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에 부딪힐 때가 있다. 인간이란 누구도 선택의 자유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도 한다. 살아가면서 힘듦도 부침도 겪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고난 없는 평탄한 삶을 바라지 않는가. 작가 사철생은 20세에 맞이한 시련을 처음에는 견딜 수 없었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힘을 얻고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아픔도 있었고 후회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겨내며 살아냈다. 그는 이런 나도 살았는데 당신은 어떠냐고 묻는 듯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 힘내라고 얘기해 주는 듯하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큰 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작가의 인생 앞에선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서 글을 썼고 그 결과 현 위의 인생이 영화화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진 작가가 되었고,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 청소년 필독도서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많은 독자가 이 작품으로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용기와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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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05 22: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롤랑 바르트의 다른 책 몇 페이지 읽고 놀라서 덮어놨는데,
글쓰기가 ‘찾아가는 과정‘이고, 영혼의 가장 처음을 바라보는 행위라..왠지 뭉클해요!!

모나리자 2021-06-05 22:28   좋아요 5 | URL
저도 최근 다른 책에서 자꾸 언급되는 바람에 읽고 싶어지더라구요.
영도라는 단어는 영상과 영하를 가르는 기점이고 왼쪽, 오른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균형점이기에 기준점이자 시작점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작가의 해석도 멋지요~^^

새파랑 2021-06-05 23: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봐도 뭔가 뭉클하고 인생에 대한 교훈이 느껴지네요 ㅜㅜ

모나리자 2021-06-07 10:51   좋아요 2 | URL
네.. 정말 뭉클한 감동이었어요. 건강했던 사람이 장애를 입게 되어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글쓰기를 하며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았을 것 같아요.
새 한주도 즐거운 시간 되세요. 새파랑님.^^

그레이스 2021-06-06 08:1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것처럼 디탄공원에서의 그 시간에 가끔 의문을 품는다는 작가의 말에 공명합니다
꼭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모나리자 2021-06-07 10:53   좋아요 3 | URL
네. 15년 동안이나 찾았던 공원이고 그러면서 마음도 강해지고 성장하지 않았나 싶어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새 한주도 화이팅 하세요~^^

scott 2021-06-06 0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현 위의 인생≫ 작가였군요!
[비밀 자체가 이미 담이다. 뱃가죽과 눈꺼풀도 모두 담이고, 거짓 미소와 거짓 눈물도 담이다.마음의 벽은 쉽게 허물 수 있다고 해도, 산과 물 모두가 담이고, 하늘과 땅도 담이고, 시간과 공간도 모두 다 담이다. 시간과 공간도 담이고, 운명은 무한한 속박이고, 신의 비밀은 끝없이 이어지는 담이다]
우와 사철생 작가의 인생 철학에 탐복 합니다.

모나리자 2021-06-07 10:55   좋아요 3 | URL
그쵸? 어디든 담이 존재한다는 철학적 통찰 멋졌어요.
나중에 영화도 챙겨 봐야겠어요.
새 한주도 즐겁게 화이팅 하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