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다 보면 번역이라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때가 많은데(가끔 힘들 때는 그런 의미 부여가 위안이 된다), 책의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번역하노라면 한 문장 한 문장 옮기는 것이 나무심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번역가의 목표는 나무만 다옮겨 심는 게 아니고, 전체 숲을 옮기는 것일 테다. 원저자의 토양에서 국내 독자의 토양으로 한 그루 한 그루 옮겨 심은 나무들이 모여숲이 탄생하니까 말이다.  - P105

나 역시 많은 역서를 낸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하면 할수록, AI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 더욱 강한 확신이 생긴다. 그래서 앞의 번역 대결‘ 주최자들처럼 번역하다말고 자진해서 번역기에 대결을 신청해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특히 미술과 수영의 역사를 다룬 인문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그리고 문장마다 저자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에세이를 번역하면서, 언젠가는 AI한테 밥그릇을 뺏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보다는
‘이건 AI가 절대 못 해. 너희가 해선 안 돼‘라는 자신감 비슷한 것이 자리잡았다.  - P113

특히 책을 번역하는 번역가라면 맥락과 상황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읽고 이해한 다음 우리 글로, 그것도 맛깔스러운 표현을 써 가며 옮겨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AI를 크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고 (아직은) 주장하는 바다!
- P122

번역은 번역가의 글쓰기 스타일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직역이든 의역이든 일부러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좋다는 쪽이 있고,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게 좋다는쪽도 있다. 나는 원문 본연의 맛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한국어일 때도 분명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 P124

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가이자 번역가이기도 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인터뷰 에서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꼭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에 아주 신선한 대답을 내놓았다. "귀. 음감이 나쁘면번역을 못 합니다"라고,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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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은 번역 시험을 보듯 원문의 한 문장에 해당하는 우리글한 문장을 옮겨내는 데 집중해서 정확하고 꼼꼼하게 번역했는데, 합격한 번역가들의 결과물은 마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쓴 것처럼 원문과는 조금 달랐다는 점이다. 여기서 원문과 달랐다는 말은 어떻게들으면 굉장히 심각한 상황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 P76

한 단어, 한 구문을 모두 꼼꼼하게 옮겨내야만 출판사에서 점수를 매기듯 비교하고 채점해서 역자를 선택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출판사에서 샘플을 볼 때는 원문과 일대일로 비교하며 채점을 하는 게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된 글만 읽었을 때도 글이 아주자연스럽게 읽히면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를 중점으로 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 P77

하루에 여섯 페이지를 번역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실컷 하고 나니까 겨우 한 장이 끝났을 때의 기분이란… 아마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막함에다 계약이라는 약속이 주는 책임감의 무게가 더해졌던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포기할까?‘, ‘여기서 관둔다고 연락할까?‘ 고백하건대, 처음 2주동안 날마다 이런 고민에 빠져서 이도 저도 아닌 시간만 낭비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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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16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에 여섯 페이지!
보통 전문 번역가들은 하루에 🖐🖐 채우 신다고 ㅎㅎㅎ

모나리자님의 이 책 발 췌문 읽기 넘 ㅎ넘 ㅎ 좋습니다!!

모나리자 2021-10-19 13: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책에도 그렇게 나와요.
규칙적인 일처리가 결과를 내는 거겠죠.^^
 

단기완성‘, 며칠 만에 끝내기‘ 같은 제목의 영어책들이 잘 팔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것이다. 잘하고픈 영어를 빨리 완성해 주고 끝내준다고 유혹하니까.
언어 공부에 완성이나 끝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그런 책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보고 공부한다면 당연히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어느 정도 실력에 이르기까지는 꾸준한 관심과 노력 말고는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뻔한 의견이라 미안하지만, 어쩔 수없다.
- P44

고작 일기나 쓰고 말이다. 이런 내 실력은 통번역대학원번역 시험을 준비하자 바로 바닥을 드러냈다. 한 문장도 제대로 쓸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한영 번역 실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서 나도 놀랐다. 대학원 졸업장도 없는 내가 대학원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 웃프긴 하지만, 8년에 걸친 대학원 입시 이야기(8수는 아님)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해 보려 한다.
- P45

영어를 읽고 해석하는 게 수동적이라면, 쓰는 것은 굉장히 능동적인 언어 활동이다. 읽을 때는 대충 알아도 이해할 수 있지만, 쓸 때는 정확히 아는 것만 쓸 수 있다. 그때 직접 한영 번역을 해 보면서,
내가 읽을 수 있는 단어와 쓸 수 있는 단어의 수준 차이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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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1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전 통독!🖐
사전 읽기 취미! 🖐

모나리자님 이책 흥미 롭네요
밑줄 마구 마구 올려 주세요 ^0^

모나리자 2021-10-15 13:59   좋아요 1 | URL
와~사전 통독, 사전 읽기가 취미시라는 거죠?

그럼 번역가 후보 찜이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스콧님~^^
 

사람들은 통역사나 번역가를 두고 ‘영어로 먹고산다‘, ‘중국어로 밥벌이한다‘ 라고 표현한다. 나도 영어 원서를 읽고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영어 출판 번역가인데, 영어로 먹고살면 참 좋겠지만 그럴만한 돈을 벌지는 못하고 어쨌든 영어라는 언어를 읽고 해석할 줄아는 능력을 바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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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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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은 요독증을 앓고 있던 할머니의 병세가 심해지고 급기야는 죽음을 맞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았던 할머니가 점점 평소의 모습에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화자는 이미 혼자인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이제는 할머니 마음속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예전의 할머니와의 끈끈했던 애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병으로 인해 무력해지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할머니의 이마에 키스하려고 했으나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침착하고도 냉정한 묘사에서 화자의 무너지는 마음을 오히려 더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 인간이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육체적, 심리적으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할머니의 눈빛은 완전히 변했다. 자주 불안해하고 불만이 깃든 그 거친 눈빛은 더 이상 예전의 눈빛이 아닌, 헛소리를 내뱉는 늙은 여자의 침울한 눈빛이었다.’(P41)

 



그런 마음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할머니의 가슴에 묻혀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프랑수아즈는 어머니의 그 차분함에 분노할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총명했던 어머니가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당신을 걱정해서 마음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곧 나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이런 중에도 프랑수와즈의 충실함은 화자의 가족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몇 날 며칠을 잠을 안자면서도 온갖 힘든 일을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는 듯이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인들이 화자의 가족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도 프랑수아는 용납하지 않았기에 질서가 유지되었다. 프랑수아즈의 이 사명감은 콩브레 시절부터 갖고 있던 것이었다.

 



할머니가 아팠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중에는 베르고트도 있었는데, 그의 명성은 높아져 갔지만,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게르망트쪽2 에서는 할머니의 죽음을 비롯하여 베르고트의 병, 마지막에 스완의 병을 언급하면서 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야기는 생각지 않던 알베르틴이 찾아오고 게르망트 공작부인 살롱 만찬회 장면 이야기로 길게 이어진다. 알베르틴은 이전의 솔직하고 착한 모습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조금 성숙한 것일까.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중심을 지키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게르망트 부인을 보기 위해 아침 산책을 하던 아들에게 어머니는 그런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일침을 놓는다. 화자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여인을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실제 프루스트가 동성애자가 되는 계기인가 보다. 한편 게르망트 부인을 사랑했던 그의 마음을 내려놓았는데 오히려 그쪽에서 살롱에 초대하려고 안달을 하거나 교제에 힘쓰려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생루와 샤를뤼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게르망트 부인에게 시들해진 마음은 다시 뜨거워지지 않는다




생루의 도움으로 스테르마리아 부인을 만나려는 기대감으로 가득 부풀어있는데 생각지 않게 알베르틴이 찾아온다. 발베크에서 알베르틴을 향한 초조했던 마음과 달리 그다지 신경쓰지도 않는다.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달리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한껏 스테르마리아 부인에 대한 상상을 하며 만날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건만 급한 일이 생겨 못 온다는 전갈이 오자 절망에 빠지다가 흐느껴 울기까지 한다. 이 부분에서 좀 웃겼다. 그렇게 몽상을 하며 함께 만나는 순간을 기다렸지만, 물거품 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때 생루가 나타난 것은 화자에게 있어 구원이었을 만큼 반가워했다. 화자는 생루와의 우정을 논하며 생루와 생루의 친구들과 식사를 하던 일 동시에르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게르망트 부인의 살롱 만찬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식사 문화, 문학, 그림, 칸트를 언급하기도 했고 화초와 식물학, 역사, 음악, 미술 등으로 이어졌다. 게르망트 공작 부부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왔는데 당시 귀족들의 생활상과 허영심을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게르망트 공작은 부인 외에 많은 정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귀족들의 사치스럽고 문란한 생활을 알 수 있었다. 기 드 모파상의 벨 아미가 떠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공작부인은 남편의 정부를 살롱 만찬에 초대하여 얘기도 나누고 어떤 정부에 대해 남편과 함께 흉을 보거나 하는 부분은 우리의 정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어서 놀라웠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실망은 했지만, 공작 부인이 빅토르 위고의 시를 인용하며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화자에게 반향을 일으킨다. 위고의 시집 가을의 잎을 고향에 기증했던 걸 저주하면서 같은 책을 사오라고 하인에게 시킨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스완이 등장하는데, 이탈리아 여행에 같이 가자는 게르망트 공작의 권유에 스완은 자신은 몇 달 살지 못할 거라는 얘기를 한다. 병을 앓고 있는 스완도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게르망트 공작은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아내와 자신의 몸 걱정을 한다. 그러면서 스완에게는 1607년에 지어진 퐁뇌프 다리만큼이나 오래 버틸 거라는 말을 한다. 또 검정 구두를 신은 게르망트 부인에게 빨간 구두를 신으라고 다그치는 장면도 웃겼다. 자신의 의견이 중요하고 때에 따라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빅토르 위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건 황금만능주의가 파고들어서였을까. 이 게르망트 공작의 살롱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삶과 여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주 언급되고 있는 드레퓌스 사건 얘기를 통해서 반유대주의를 프랑스에서 전 유럽으로 확산시켰고 세계 1, 2차 대전의 집단적인 광기를 예고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고, 어머니에게 고백할 수 없는 사실을 글쓰기로 녹여냈으니, 이 작품은 프루스트에게 있어 삶의 한 양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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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12 19:4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6권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군요. 모나리자님 글보니 생각나면서도 가물가물 하네요 ㅜㅜ
저도 9권 시작해야 하는데 😅 모나리자님 꾸준히 벌써 6권이군요~!!

모나리자 2021-10-13 11:47   좋아요 2 | URL
네, 죽음과 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요.
이 작품은 읽고나서 가물가물해지는 게 정상인 것 같아요.ㅎ
그래야 또 한번 읽겠지요.
새파랑님께선 금세 읽으시니 조금 늦게 시작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ㅎㅎ^^

scott 2021-10-12 20:4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벨 에포크 시절의 마지막 순간,할머니의 죽음으로 비로소 한 세대, 시대가 막을 내렸네요
모나리자님 7권을 향해!!

모나리자 2021-10-13 11:48   좋아요 2 | URL
네, 그토록 사랑했던 할머니의 아픈 과정과 죽음을 보는 것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감사해요~스콧님~
오늘 날씨 엄청 좋네요. 즐건 하루 되세요~^^!!

미미 2021-10-12 20: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시의적절한 프랑수아즈의 감초같은 역할이 항상 빛났던것 같아요~♡ 모나리자님 7권도 화이팅!!😉👩‍🎨🌹🌻

모나리자 2021-10-13 11:49   좋아요 3 | URL
그쵸. 정말 충성스럽고 정감있는 프랑수아즈 인 것 같아요.
격려의 말씀 감사해요~미미님~^^!

바람돌이 2021-10-13 00: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덕분에 잃어버린 시간 안 읽고도 읽은 듯요. ^^

모나리자 2021-10-13 11:50   좋아요 2 | URL
네~감사합니다~바람돌이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10-13 00: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다시 보이기 시작하네요 ^^

모나리자 2021-10-13 11:51   좋아요 2 | URL
네, 힘들게 읽으면서도 조금씩 알게 되고 적응되는 과정이 뿌듯하네요.ㅎ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 되세요~그레이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