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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숨그네>는 퍽이나 힘겨운 작품이다. 300여 페이지가 조금 넘는 소설을 두 달 넘게 읽었으니 말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독자에게 이 작품은 읽기에 벅차고, 공감하기에 버겁고, 쉬 책장을 넘기기에 부담스럽다. 깊고 아름다운 문장, 참혹한 역사의 질곡, 외면하기 힘든 삶의 아픔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중에 책장을 덮지 못하고 주인공의 수용소 생활을 끝까지 함께 한 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작품은 참혹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외면하기 힘들 정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숨그네>에서 혹독한 고통과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놀라운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령 ‘10월 말에 벌써 얼음못이 박힌 진눈깨비가 내렸다.’(p.77)라는 문장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파고드는 혹독한 추위와 고통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가슴 아픈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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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덫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 배고픈 천사가 놓은 가장 고약한 덫은 꿋꿋함이다. 배도 고프고 빵도 있지만 먹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단단히 얼어붙은 땅보다 혹독해지는 것이다. 배고픈 천사는 아침마다 말한다. 저녁을 생각해.(p.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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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을 배고픈 천사와 덫에 비유하는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먹고, 마시고, 편히 쉴 곳이 있다는 것이 한없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쓰레기통이 쓸만한 것들, 먹을 수 있는 것들로 넘쳐나는 우리의 삶이 문득 섬뜩하게 느껴진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풍요로움 속에도 늘 허기를 느끼는 우리는, 헤르타 뮐러 식으로 말하면 안락한 악마가 선사한 덫에 걸린 것일까?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흥미로운 것 하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강제수용소에 전쟁포로로 끌려간 주인공 레오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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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밤 연달아 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하얀 돼지를 타고 구름 속을 달려 집으로 갔다. 그런데 공중에서 내려다보니 이번에는 땅 모양이 달랐다. 가장자리에 바다도 없었다. 한가운데 산도 없고 카르파티아 산맥도 없었다. 납작한 땅에 도시도 마을도 없었다. 벌써 노란 가을 색으로 익은 야생귀리만 지천이었다.
누가 땅을 바꿔놓았지, 내가 물었다.
배고픈 천사가 하늘에서 나를 보고 말했다. 미국.
지벤뷔르겐은 어디 있고, 내가 물었다.
그가 말했다. 미국에.
사람들은 어디 있어, 내가 물었다.
배고픈 천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p.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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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인용한 내용은 놀랍게도 우리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전쟁세대가 겪은 그것과 너무나 닮아있다. 예를 들어 6.25의 비극을 노래한 ‘꿈에 본 내고향’이라는 노래와 얼마나 닮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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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 리/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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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노벨상 수상작가의 글이고, 하나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다.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문학으로 표현했고, 다른 하나는 6.25의 아픔을 구성진 유행가자락으로 노래한다. 하지만 전쟁의 아픔을 체험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매한가지다. 6.25 전쟁이 끝난 후 피난민을 맞이한 폐허가 된 고향의 모습은 루마니아 소년이 꿈에 본 고향과 다를 바 없었을 것. 그리고 폐허가 된 고향땅에는 구원자(혹은 파괴자)였던 미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루마니아 소년이 겪은 전쟁도, 우리의 전쟁세대가 겪은 6.25도 실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닌 ‘그들’의 전쟁이었던 거다.
** 지난 해 여름이었던가? 영등포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헤르타 뮐러는 만났다. 독자 사인회가 있었던 것. 재미있었던 것은 실제로 본 작가의 모습이 책 홍보물에 담긴 저자 사진과 똑같았다는 거다. 무슨 말인고 하니 머리 모양은 물론, 머리띠, 안경, 입은 옷까지 사진 속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 놀랐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작가는 늘 같은 옷차림과 같은 머리 모양만 고집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