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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거의 스무해 전에 읽은 <이방인>에 대해 남아있는 기억. 쏟아지는 햇빛, 패륜아, 아웃사이더, 뫼르소라는 독특한 이름 정도. 그마저도 희미하다. 그래서일까? 다시 읽은 <이방인>은 무척이나 새로웠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렴풋 알고 지내던 사람의 전혀 새로운 면을 보는 듯하다. <이방인>은 두말할 것 없는 걸작이다.
우선 이 작품은 매우 뛰어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요즘말로 ‘깨알 같은’ 상황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그것을 매우 건조하고 발 빠른 문체로 묘사한다. 특히 1부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가령 살라마노 노인과 개의 이야기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건달이웃 레몽과의 에피소드는 또 어떠한가? 이밖에도 여러 에피소드들은 모두 따로 떼어내어 단편소설로 독립해도 꽤나 훌륭한 작품이 될 이야기들이다. <이방인>은 짧은 소설이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작품에 빼곡하게 들어찬 에피소드라니. 물론 2부에 접어들면, 이 삽화들은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 작품의 숨은 의도를 향해 맹렬히 끓어오른다.
엉뚱하게도 <이방인>을 읽는 동안 탐정소설의 구조가 떠올랐다. 1부를 통해 주인공 뫼르소의 생활에 동참하도록 유도한 뒤, 1부 말미에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2부에서는 뫼르소의 재판과정을 방청객(혹은 배심원)의 한 사람으로 지켜보게 한다. 이는 범인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도서추리물’의 형식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2부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차례로 뫼르소를 변론할 때, 마치 탐정소설을 읽듯 앞선 페이지로 되돌아가 뫼르소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시금 살펴보게 만든다.
다시 읽어봐도 뫼르소는 참으로 흥미로운 캐릭터다. 도서추리의 경향이 엿보인 탓인지 어느 순간 뫼르소가 마치 탐정소설의 주인공처럼 보였는데, 특히 극한의 냉소 캐릭터가 등장하는 챈들러의 소설이 떠올랐다. 바꿔 말하면,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에 줄창 등장하는 필립 말로우의 후예들이나, 하루키류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뫼르소를 큰 형님으로 모실 법하다.
(찾아보니 뫼르소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42년, 필립 말로우는 1939년이다. 챈들러와 카뮈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쏟아지는 햇볕과 건조한 열기가 맹위를 떨치는 알제리와 L.A.는 참으로 닮은 점이 많다.)
새로 출간된 <이방인>의 제목은 ‘이인(異人)’이다. ‘이인’이라는 낯선 제목을 고집한 역자의 의도를 읽어보니, 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지만 ‘백푸로’ 동감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백푸로 설득된 것도 아니거니와, 새이름에 대한 이물감이 크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방인’이었고, 최근까지도 ‘이방인’이었다. 개명한 친구의 새 이름이 선뜻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는 거처럼 새이름은 낯설다.
그럼에도 깔끔하고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찾아온 ‘이방인’은 반갑다. 김화영이 번역한 책세상본과 몇몇 대목을 비교해보니 옛것과 새것의 차이를 알겠다. 좋고 나쁨에 문제가 아니라 새것으로 만나는 뫼르소가 확실히 생동감있다. 뫼르소는 시대를 불문하고 유효한 캐릭터이기에 새옷을 입은 모습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