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너리 푸드 : 오늘도 초록 띵 시리즈 3
한은형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좋아하는 채소는 대충 호박, 양파, 버섯 정도이다. 그것도 늙은 호박보다는 애호박을 좋아하고, 아삭한 감이 사라질 만큼 볶아낸 양파나 버섯을 좋아한다. (표고버섯처럼 향이 강한 버섯도 먹지 못한다.) 특히나 내가 제일 먹기 어려워하는 채소는 식감이 '아삭'한 채소인데, 대표적으로 콩나물이다. 다른 채소들은 푹 익히면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데, 콩나물이나 숙주는 푹푹 익혀도 어느 정도 사각한 식감이 남아있다. 같은 이유로 샐러드처럼 생 야채를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삭함이 싫다는 것은 뭐, 채소가 다 싫다는 거지.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채소가 먹고 싶다. 그것도 아삭한 채소!


그린 빈스, 가지, 양파, 주키니 호박, 피망, 양송이, 영콘이 넘치도록 들어간 그린 카레를 받아들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먹어보지 않아도 이 야채들이 얼마나 아삭거릴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라타투이 같은 일부러 야채를 뭉근하게 해서 먹는 음식이 아니고서야 오래 익힌 야채는 정말이지 끔찍한데, 적절하게 익힌 야채에서는 천상의 맛이 난다고 믿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야채를 '적절'하게 익혔다는 것은 20% 정도 덜 익힌 거다. (p.62)


몇 년 전, 베트남의 달랏이라는 곳에 갔다. 달랏은 베트남 남부의 도시로 고도가 높아 평균 기온이 20도 정도 된다. 무척 쾌적한 날씨로 채소나 과일이 풍성하게 자란다고 하는데,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 아보카도와 아티초크를 먹었다. 국내에서도 아보카도를 먹은 적은 있지만, 조금 물큰하고 느끼하다(물기 많은 버터..?)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맛본 아보카도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그때 묵었던 호텔에서 조식으로 아보카도를 제공했는데, 아침마다 두세 개는 거뜬히 먹고도 빵에 발라 먹었다. 아직도 그 아보카도가 그리워 달랏을 가고 싶다. 한국에서 파는 아보카도.. 이 맛이 아니라고!


나는 아보카도를 그냥 먹는다. 순수하게 아보카도인 채로. 그게 가장 좋다. 칼질은 최소화하고 어떤 양념도 하지 않고 먹는다. 마치 흰죽을 한 숟가락 떠먹고 쌀의 순수한 맛에 감격하기라도 하듯이 반으로 가른 아보카도를 티스푼으로 파 먹으면서 완전무결한 초록을 느낀다.(p.46)


또 하나는 아티초크인데, 태어나서 이렇게 솔방울(?)처럼 생긴 채소는 처음 봤다. 이름도 아티초크라니. 특히 아티초크 차가 약간 달큼하면서 텁텁한 맛이 나지 않아 좋아했다. 달랏을 떠나는 날, 가방 한가득 아티초크 차를 사서 떠났는데 여행지 내내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 잔씩 타주면서 맛보게 했었다. 지금 검색해보니 생 아티초크는 국내에서 구할 수 없고, 분말 형태만 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먹어보고 싶었고 궁금했던 음식은 돌마데스 Dolmades였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몇몇 블로그에서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포도잎이라고 하니 와인에 절인 맛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가 먹어보고 싶은 음식! 그렇다면 그리스에 가봐야 하나.


'Dolmades'라는데, 돌마데스가 뭔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캔을 땄더니 퇴색한 올리브잎 같은 색의 잎사귀에 무언가가 돌돌 말려 있었다. 포도잎 쌈밥이었다. 입술에, 포도잎의 잎맥이 느껴졌다. 잎맥이 꼭 지문같아서, 포도잎이 사람 손바닥 같다고 생각하며 입에 넣었다. 포토잎 쌈밥을 깨물자 안에 있던 쌀과 향신료와 올리브 오일과 레몬즙 같은 게 터지면서 포도잎과 섞였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씹으면서 그것들이 뒤섞이며 불러일으키는 효과에 집중했다. (p.50)


로메인이나 루콜라, 아삭한 양상추를 차가운 물에 씻어낸 후 먹는 싱싱함, 그 맛이 그리워진다. 나 분명 아삭한 채소 싫어하는데. 나도.. #오늘은초록 샐러드 먹을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열다섯 살 정대는 동호와 함께 시위대의 행진 도중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죽게 되고, 정대의 누나 정미 역시 행방불명된다.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동호는 죄책감에 상무관에 남아 시신을 관리하다 죽음을 맞게 되고,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며 노조활동을 하다 상무관에 합류한 선주는 경찰에 연행된 후 끔찍한 고문으로 하혈이 멈추지 않았고 모두를 피해 숨어살게 되었다. 상무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대학생 김진수는 연행된 후 모나미 볼펜 고문, 성기 고문 등을 받으며 끔찍한 수감생활을 했고, 출소 후 트라우마로 자살하고 만다. 이들을 파괴한 잔인성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소년이 온다』 중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주의 군경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며 많은 이들은 의문을 가졌다. 나치는 순수 아리안 혈통 백인 주류와 다르다는 이유로 유대인, 성소수자, 정신질환 병력자 등 총 60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했던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나 이상성격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이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한나 아렌트는 전쟁 재판을 참관하며 연구한 끝에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말했다.


한강 작가는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도 어린 그들까지 거리로 이끌었던 강렬한 힘은 '깨끗한 양심' 하나였다고, 그래서 『소년이 온다』를 통해 잔혹하고 처참했던 당시의 순간들보다 그 깨끗함에 집중해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따뜻했던 봄날의 오월을 지나 그 여름을 건너가지 못했던, 그 깨끗한 양심을 나는 '인간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다는 생각, 어쩌면 도청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생 동안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낙관에 몸을 실었'(p.113)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했다. 동호처럼 내 친구가 눈앞에서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면,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누군가의 폭력에 죽어간다면 나는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 또한 마지막까지 상무관에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계엄군을 향해 총을 쏘지 못했을 것이고, 숨죽이고 숨어있었다고 하더라도 끝내 외면했다는 치욕을 떨쳐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강 작가는 이 작품을 쓰면서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끝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나 또한 그랬다. 왜 그토록 무고한 자들을 위해 잔혹했고, 왜 죽을 것을 알았으면서도 나서야 했을까. 이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소년이 온다』 중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가 지닌 인간성은 무엇이기에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양심을 지켰을까.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인간다운 것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내가 믿고 있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인간의 한쪽 면만을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선택이 아닐까? 권력에 복종한 것도,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도.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고 있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의 엄마 오늘의 젊은 작가 25
강진아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 4학년, 학교에서 첫 수련회를 가던 날이 기억난다. 수련회는 공식적인 첫 외박이었고,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놀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설레있었다. 떠나기 전날, 아빠는 든든하게 용돈을 챙겨주었고, 엄마와 마트를 돌며 좋아하는 과자와 젤리를 가득 구입했다. 그리고 새벽부터 분주하게 김밥을 싸서 가방에 담으며 잊은 물건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주셨다.


몇 주 전부터 설레며 기대했던 마음과 달리, 나는 학교로 발걸음을 떼자마자 울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스스로 꽤 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학교를 향해 걸어갔지만, 엄마는 내가 학교에 다다르는 길목까지 지켜보며 한 번씩 돌아보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나는 문을 나서며 '이게 엄마와 마지막 순간이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마지막이면 어쩌지. 문득 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출발하는 좌석 버스 안에서도 전혀 신나지 않았다.

"폐암 말기입니다. 외과에서 말 안 했나요? 뼈 전이가 심해서 방사선 치료를 먼저 하시는 게 좋습니다." (p.73)


『오늘의 엄마』는 3년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애인을 잃은 정아에게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이 날아든다. 아직 연인의 죽음조차 이겨내지 못한 정아는 이제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엄마와 마주해야 한다. 똑부러지고 야무진 언니 정미와 세상일에 늦되고 어색한 정아, 엄마가 곧 곁에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내 생일을 잊고 언니와 비교하며 자신을 걱정하는 엄마의 말에 서운하기만 하다.

생일은 기억도 못 하면서 절은 왜 하라는 거야? 갑자기 억울해진 정아는 분명한 적의를 담아 엄마를 쏘아보며 방으로 올라와 버렸다. 자신의 유치한 행동에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솟구치는 서러움을 어쩌지 못하겠다. 엄마가 자신만 미워한다, 라는 이상한 논리까지 가져다가 한참을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다 보니 놀랍게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깼다. 도우미 아줌마의 부축을 받고 엄마가 들어오고 있다.

"고마워요, 아가 자나 보네요." (p.141)

며칠 전, 엄마는 '어린이날'이니까 피자를 사주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매번 그랬다. 나는 피자를 싫어하는데 매번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어느 날은 카레를 한 솥 가득 만들고는 '네가 좋아하는 카레 만들었어'라고 말한다. 나는 카레를 싫어하는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자꾸만 잊어버리는 게 서운하기만 하다.

"엄마는 어떻게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도 모를 수 있어?" 참, 그런데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개나 알더라.

오늘에야 정아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 엄마 배 속에서 그 불편한 마음을 어찌어찌 전달받아 현재의 자신이 된 것이다. 원래 그런 줄 알았던 자신의 취향에 근거가 있음을 알게 되자, 엄마에게 자신을 하나라도 더 묻고 싶다. 왜 특정한 시간, 4시 44분이나 11시 11분에 급격히 즐거워지는 것인지, 왜 까만색을 좋아하는 것인지, 엄마라면 '그냥'인 줄 알았던 것들의 이유를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다. (p.133)

나는 외출할 때 '누구'를 만나는지, '몇 시'에 들어오는지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뭐 별 특별한 것도 없지만,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고하고 통제되는 느낌이 싫었다. '난 그냥 친구를 만나고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 갈 거야!'

어느 늦은 저녁,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 먹을건데 언제쯤 들어와?", "엄마 태백산이야!"

"말도 없이, 갑자기?" 나는 엄마를 닮았다.

『오늘의 엄마』의 정아처럼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엄마가 없는 순간이 절대 없을 것처럼 살아간다. 사소한 것에 서운해서 너무나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엄마는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다. 정아는 귀를 열고 엄마의 대답을 기다린다. 머뭇거리며 뜸을 들이던 엄마가 천천히 입을 연다.

“엄마요.” (p.135)

나도 엄마가 보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때때로 우리는 뉴스를 통해 신생아 유기 사건을 목격하곤 한다. 탯줄이 달린 채로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 영아 유기 치사죄로 처벌받게 되는 엄마. 우리나라는 여전히 미혼녀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더구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고, 출산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같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거듭 망설이게 되며 유기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낙태죄'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태아'를 생명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태아 또한 생명이라면, 낙태를 하는 것은 살인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당시 '생명'의 관점에서 낙태를 법적으로 허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데 만약 내가 준비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더구나 내가 학생이라면? 드라마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혼모들은 그럼에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삶을 견디며 아이를 키워낸다. 그것이 모성애라고 말하는 것이다.


"10월 초, 여러 번 P.와 섹스했다. 정치학과 학생이었는데, 여름 방학 동안 만났고 그를 보러 보르도에 가기도 했다. 오기노식 피임법에 따르면 위험한 시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 배 속에 '그것이 생길 수 있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과 쾌락을 누리며, 내 육체가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사건』 중에서



지난해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있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그에 따른 후속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기존의 형법인 모자보건법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의 부담을 여성에게만 지우는 사회 풍조 때문에 지금의 낙태죄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의 시기를 결정할 자유를 침해하고, 안전한 수술을 받지 못해 건강권 역시 침해된다. 



- “법이 바뀐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병원을 가도 ‘수술은 불법’이라며 안 해준다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어떤 사이트에서 미프진을 판다는데 이 사이트는 믿을 만할까요. 약물만으로도 정말 낙태가 가능할까요.”

- “약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사흘 동안 드세요. 처음 약을 먹으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할 거고, 마지막 약을 먹으면 진짜 아플 거예요. 하혈이 시작되면서 소변을 볼 때 덩어리 형태의 아기집이 떨어져나올 겁니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은 프랑스에서 낙태가 불법이던 시대에 제도가 보호하지 않는 ‘임신’과 ‘중절’이 신분 추락, 학업 실패 따위를 명백하게 암시하는 기호임을 깨닫고, 목숨을 저당 잡힌 채 뜨개질바늘을, 불법 시술사의 탐침관을 자신의 성기 속으로 밀어 넣었던 과거의 경험을 고백한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고백이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경우, 불법 약물인 유산 유도약 ‘미프진’을 온라인 상에서 익명의 판매상을 찾는다.


"임신중절이 나쁘기 때문에 금지되었는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나쁜지를 규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법에 비추어 판단했고, 법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 『사건』 중에서


이 작품을 읽고 나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고 유기한 뉴스 속 여성들이 떠오른다. 어떤 대안도 없이 홀로 보내야 했을 10개월의 시간, 차디찬 화장실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두려움과 고통 속에 홀로 치러야 했던 출산의 시간들은 그 누구도, 어디서도 얘기하지 않는다. 이 과정을 왜 홀로 겪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나눈 사랑과 쾌락에 비해, 여성이 책임져야 할 몫은 너무도 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1
이수정 외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성범죄 사건의 용의자 중 다수가 10대 청소년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내 성교육 체계 전반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교내 모든 성 관련 교육은 2015년 교육부가 개발·보급한 '성교육 표준안'을 바탕에 두고 있는데, 이 표준안에는 성범죄에 관해 여학생에게 '피해자 되지 않는 방법'을 주로 가르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성폭력에 대처하는 능력과 바람직한 방법으로 거절하는 법, 중·고등학교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 법과 수용하기 어려운 성적 요구에 대해 상대방을 이해시키면서 효과적으로 거절할 방법을 가르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왜 범죄를 피해자가 조심해야 하는 걸가?


"강간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를 주목하는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절제를 못하는 가해자의 욕망이 문제지, 피해자가 어떻게 생겼느냐, 피해자가 어떤 특성을 가졌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p.355)


작년 4월,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방송이 네이버 오디오 클립을 통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방송을 들었다. 개인적으로 범죄 문제나 범죄 심리에 관심이 있어서 듣기 시작했지만, 첫 회 방송에서 이수정 교수가 설명한 '이 방송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듣고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범죄 영화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프로그램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그러나 범죄 영화에 숱하게 등장하지만 대부분 피해자로 소비되다 마는 여성이나 아이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프로그램이라면 의향이 있다." 그래서 이 방송은 영화 속재미를 위해 가미된 선정적이거나 가해자의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영화들을 지적하며, 현실의 사회 문제를 표면 위로 끄집어낸다.


최근 다시 방송을 들어보면서 인상에 남았던 것은 미성년자의 범죄와 소년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최근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소년법의 개정 혹은 폐지를 원하는 목소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나 또한 어른 못지않은 잔혹한 범죄로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그에 대한 처벌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방송을 들으며 어른들이 너무 쉽게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성교육 체계도 갖추지 못해 '피해자에게 범죄를 조심하라'라는 것밖에 가르치지 못했고, 디지털 환경에 맞는 법 조항조차 개정하지 못했다. 학교 밖 아이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교육부,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이들을 보호하지 않고 아동 학대(방임) 하는 부모. 이들을 보호할 사회적 체계를 갖추고, 새로운 법 조항을 만들고, 보호 시설을 세우는 것은 보다 어려운 일이다. 소년법을 개정해서 투표권도 없는 애들을 교도소 보내버리면 편하니까.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버닝 썬 동영상 유포자가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이 여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아 우리는 이와 비슷한 수많은 사건들이 처벌조차 받지 않는 것을 보았다.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아내를 살해한 것은 감형 사유가 되고, 평생 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것은 계획범죄로 인식된다. (최근에는 조금 바뀌었다지만) 수많은 아동 성범죄는 알려지지조차 못했고, 성범죄 재판 과정에서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을 따진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와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지금, 이 책은 우리가 어떠한 사회 구조 속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바꾸어 나가야 할지 이야기해준다. 끊임없이 회자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보시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