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띵 시리즈 9
윤이나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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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봉지에 천 원 내외로 저렴하고, 3분이면 조리할 수 있는 각양각색 다양한 라면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태어난 게 참 다행이야'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각각의 라면을 종류별로 사서 쟁여두고, 고집스레 지키는 라면 스타일이 있다. 나 또한 이 책의 저자처럼 라면 봉지 뒷면에 쓰인 '조리 예' 대로 끓이는 순수한(?) 상태를 고집하는 편이다. 가끔은 계란 한 알쯤 넣기도 하지만 계란을 휘저어 국물 맛이 변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새로운 라면이 나오면 기억해두었다가 꼭 먹어보는 일, 나만의 기준으로 엄선된 라면을 종류별로 떨어지지 않게 쟁여두는 일, 라면을 끓이는 방식에 대해서 정확한 기준과 이론을 가지는 일, 기분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라면을 먹는 일이 보편이 아니라는 것이 나에게는 여전히 의아하지만, 친구들은 도리어 라면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 기이함을 느껴왔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p.14)


내가 처음 라면을 먹었던 게 언제였을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대학생이었던 삼촌은 집에서 라면을 끓이면 라면 몇 가닥을 물에 헹구어 내 앞에 놓아 주었다. 동근 접시 위로 한가닥씩 집어먹기 쉽게 올려주면 어설프게 쥔 포크로 야무지게 라면을 먹었다. 라면 봉지 뜯는 소리, 라면을 반으로 쪼개는 소리, 그리고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라면 냄새. 이 책을 읽으며 라면을 먹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기분좋은 기억들이 많았다. 그 순간 라면이 맛있어서 즐거웠을까, 내 앞에 라면을 놓아주는 삼촌이 더 좋았을까. 그때 삼촌이 어떤 얼굴을 하고 나를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접시 위로 라면 한 가닥씩 놓아주던 손은 선명히 기억 난다.


그러고 보면 아빠에게서는 대체로 ‘짜파게티에 고춧가루를 뿌리면 맛있다’와 비슷한 것을 배워왔던 것 같다. 의미 있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인간은 말과 글도 배워야 하고 도덕과 예의범절도 배워야 하지만, 컵라면 뚜껑을 원뿔 모양으로 접어 앞접시 대용으로 쓰는 법도 배워야 하니까 말이다. 아빠는 후자를 가르쳐주는, 실은 가르쳐준다기보다는 그냥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p.26)


라면과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보니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가족은 대가족에서 분가를 하면서 구로구의 개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 날은 무슨 이유였는지 엄마가 이른 아침부터 외출해서 저녁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엄마는 전날부터 내가 학교에서 돌아온 후,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되고, 그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하는지, 반찬은 무엇을 꺼내 먹어야 하는지 신신당부를 하였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엄마는 이미 없었고, 아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인 라면을 끓여 주고는 서둘러 출근을 했다. 라면을 좋아했던 김태선 어린이는 우리집 표현으로 물을 한강물처럼 부어서 끓인 아빠의 라면을 맛있게 먹다가, 하교 후 먹을 생각으로 반쯤 먹고 뚜껑을 덮어두었다. 그리고 라면 먹을 생각에 신나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라면 뚜껑을 열고 깜짝 놀랐다. 국물을 모두 흡수하고 냄비 한 가득 불어버린 면발들. (그것은 흡사 괴물과 같았...) 먹을 수 없게 변해버린 라면을 보며 '아침에 다 먹고 갈걸' 속이 상했던 어린 내 마음, 내 상처가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 아빠는 불어터진 라면과 시무룩해진 내 얼굴에 깔깔대며 웃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슬픈 에피소드였던 것 같다.

나만큼이나 라면에 진지하고 진심인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도 많겠지. 엄마 심부름으로 샀던 동네 슈퍼의 250원짜리 라면이 지금의 950원이 되기까지의 시간만큼 나 또한 나이를 먹어가며 성장해온 탓에 이 이야기가 이토록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윤이나 작가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이 흔한 라면 한그릇을 먹던 시간과 함께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것은 생각보다 우리 삶에 '라면'이라는 음식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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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 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이승욱 외 옮김 / 반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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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Mnet에서 방영하는 「달리는 사이」라는 방송을 보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외출조차 쉽지 않은데, 아름다운 풍경으로 달리기를 한다니. 답답한 마음에 대리만족이라고 할 요량으로 보게 된 이 방송은 '달리기'라는 것을 통해 현재 자기 자신의 삶의 속도와 방향을 점검하고 서로 마음을 터놓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난 방송에서는 가수 청하가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음악마저 놓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고 말했다, 경쟁 속에서 뒤처질 수 없어 치열하게 살아오다 어느덧 지치고 만 것이다. 선미는 원더걸스 탈퇴 당시 '경계선 인격 장애' 진단을 받아 치료해오고 있음을 고백했다. 청소년 시기부터 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자신을 몰아세우다 결국 멈춰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모습이 낯설지 않다. 왜 우리는 저마다 번아웃을 호소하며 지쳐가고 있을까?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로.


정체성에 대한 이런 이해는 오늘날 이토록 많은 문제가 생겨난 이유를 말해준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일어난 사회변동을 통해 우리가 들여다볼 새로운 거울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예전과 다른 가치와 규범(성공, 경쟁, 유연성, 개인주의, 강요된 자기결정)을 받아들이고 예전과 다른 관계를 형성한다. (p.22)



나는 내가 성숙한 어른이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내 모습이 낯설었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으니까. 우린 청소년 시기부터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공부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스펙을 쌓아왔다.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뿐인데. 갑자기 왜 이러한 문제가 늘어났을까?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의 저자 파울 페르 차에 허는 우리의 정체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회적 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그 의미가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또한 최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종다양한 심리 사회적 징후를 '권위의 부재'로 해석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권위란 도덕 그 자체로, 사회가 구성원들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규범과 가치에서 탄생하는 강력한 힘을 말한다.' (p.23) 이 힘은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규정한다. 사람은 부모, 자녀, 또래, 동료, 이성 등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되기에, 권위는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부장제하에서 우리는 벌을 받거나 지옥에 갈까 봐 두려워하며 아버지의 명령과 제한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했다. 이제는 배제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받은 ‘좋아요’ 수(우리의 거울 이미지)를 통해 정체성을 찾는다. 사회적 통제가 엄청난 압박을 가하며 새로운 형태의 자발적 굴복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수치심과 우울함을 느낀다. 우울증이 이제 신경증의 자리를 대체했다. (p.192)


그렇다고 과거의 가부장제를 다시 복원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권위는 사라지고 통제가 증가하면서 근로자, 부모, 교사는 소외감, 수치심, 우울감, 번아웃을 겪는다. 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나빠지고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온정주의로 유치원이 된 세상. 꼰대로 비치는 게 두려워 권위를 기피하는 사이, 우리는 권위를 인정하고 인정받는 방법을 상실했다. 그리고 어떤 권위로 필적할 수 없는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


Mnet 「달리는 사이」의 러닝 크루들은 누군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때,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울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생겼을 때는 꼭 자신에게 연락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 지지에 힘입어 자신의 아픔들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그 평범한 모습 또한 연대가 아닐까 생각했다. 최근에 출간된 에세이들을 보면 '혼자여도 상관없다. 다소 이기적일지라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자'라는 메시지가 만연하다. 하지만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 책을 리뷰로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지만,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는 꼭 읽어보면 좋을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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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날씨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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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존층 파괴, 녹아 가는 빙산,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지는 도시들…. 생각해 보니 이러한 지구의 위기에 대해 초등학생 때부터 배워왔던 것 같다. 너무 익숙해서 기억하지 못한 걸까. 사실 나에게 '기후 위기'는 최근까지 매우 낯선 이야기였다. 올해 초, 제러미 리프킨의 『글로벌 그린 뉴딜』이 출간되었다. 그 책이 나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인간이 화석연료를 태워 초래한 지구온난화가 지구 생명체를 멸종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지금의 기후 변화에 대응해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그릴 에너지 혁명과 ‘그린 뉴딜 계획’을 소개하며 문제 해결을 촉구했고, 지구온난화 가스 배출에 가장 책임이 있는 ‘4개 주요 부문’이 화석연료 문명에서 분리되어 정책적으로 그린 뉴딜의 신흥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지구는 플라스틱과 비닐 사용을 자제하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돌이키기에는 늦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럼에도 모두가 태연하다는 것이.


전 지구적 위기의 진짜 문제는 무수히 많은 고정된 ‘무관심 편향’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기후, 홍수와 산불, 이주와 자원 부족 등 기후변화에 따르는 재난들 중 상당수는 생생하고 개인적이며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암시하지만, 이들을 다 합쳐 놓으면 영 다르게 느껴진다. 점점 강력해지는 서사라기보다는 추상적이고, 멀고, 고립된 현상으로 보인다. 이는 기후변화가 투표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p.32)


그럼에도 불과 일 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문 대통령의 제안으로 환경부에서는 『글로벌 그린 뉴딜』을 토대로 한국형 그린 뉴딜 정책들을 추진했고, 많은 사람들이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플라스틱과 비닐 사용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지구를 위해 채식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우리가 날씨다』를 통해 개인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활동들을 소개하며, 파도타기처럼 연쇄적인 행동의 변화를 촉구한다. 그는 '가장 강력한 온실가스인 메탄과 이산화질소에 즉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채식 위주의 식사뿐'이라고 주장하며, 방대한 최신 자료들을 제시한다. “나는 우리 모두 식습관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저녁 식사를 제외하고는 동물성 식품을 먹지 말아야 한다. (…) 식습관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지구를 포기해야 한다. 그만큼 단순하고도 어렵다.”


지구를 파괴할 존재는 우리뿐이다. 지구를 구할 존재도 우리뿐이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가장 희망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지만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구의 모든 생명을 완전히 쓸어버릴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완전한 파멸이 닥치면 지구상의 생명을 다시 살려 낼 방법도 찾은 것이다. 우리가 홍수이고 방주이다. (p.230)


얼마 전, 배달의 민족 뉴스레터 <주간 배짱이>에서 요조가 쓴 '저는 채식주의자이고, 고기를 좋아합니다'라는 글을 보았다. 육식 환경이 환경과 기후 변화를 비롯하여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시작한 채식 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철저하게 채식만 고집하기보다는 치팅 데이를 정해 고기를 먹기도 하지만, 매일매일 먹는 끼니라는 것을 통해 조금 더 지구에 이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날씨다』에서도 외식이 많은 저녁을 제외한 아침과 점심에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으면, 이산화탄소 배출을 연간 1.3미터 톤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가 구하고 싶은 것은 지구가 아니다. 지구에 있는 생명이다. 식물의 생명, 동물의 생명, 인간의 생명이다. (…) 우리 모두가 직면한 진짜 선택지는 무엇을 살지, 비행기를 탈지 말지, 아이를 낳을지 말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집단 생존이 환경의 은총에 달려 있는 세계, 이 망가진 세상에서 윤리적인 삶에 헌신할 것인가 여부이다. (p.241)​


나도 책을 홍보하면서 기후 위기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석탄이 주요 에너지원 일 수밖에 없다' 혹은 '그린 뉴딜 정책 산업에 투자를 하면 주식이 오를까'라는 댓글을 보면 마음이 답답하다. 어쩌면 중요한 가치를 보지 못하고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주의가 기후 위기의 가장 큰 주범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묵묵히 변해야 한다. 지금의 탄소 배출량을 유지한다면, 지구의 수명은 길어야 26년, 우리는 지구의 종말을 목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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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책 만드는 법 - 원고가 작품이 될 때까지, 작가의 곁에서 독자의 눈으로 땅콩문고
강윤정 지음 / 유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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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했더라, 정신없이 분주했던 마음과 잔뜩 힘주어 굳어진 어깨의 통증만이 나의 하루를 증명할 뿐. 재택근무로 오랜만에 출근한 월요일, 지난 주말 동안 어떤 책들이 많이 판매되었는지 각 서점의 판매량을 훑어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지난 주에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소개된 단테의 『신곡』이 눈에 띈다.


지난 방송에는 세계문학전집 『신곡』의 역자 박상진 교수님이 출연하여 단테가 상상한 천국과 지옥, 그리고 그가 꿈꾸던 사회를 소개해 주셨다. 나도 관심 있던 작품이라 오랜만에 본방송을 챙겨봤는데, '새해 첫 방송으로 이 작품을 배치한 이유가 있었네' 싶을 만큼 감동이 있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비슷했으리라. 나는 내가 느꼈던 감동을 되새기며 민음사 블로그에 『신곡』을 소개하는 포스팅을 작성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내가 읽은 작품이더라도 꼼꼼하게 다시 공부해보고 작성하기도 하고, 담당자로서 내 의견을 담아 글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읽을 수 있는 공식 계정의 글이다 보니 오류가 없도록 노력한다. 지난주 방송된 영상 중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골라 중요한 메시지를 배치하여 소개했다. 단테의 희망이 담긴 작품의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라며. 그리고 방송 전에 허가를 받아 둔 로고를 활용하여 띠지 제작을 편집부와 미술부에 요청했다. 방송국에서 요청한 로고 사용 방식과 우리 책의 메시지가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배치하여 제작을 한다.


그리고 12월에 진행했던 오디오북 이벤트의 당첨자에게 증정할 도서를 취합하여 송장을 등록하고, 물류부에 발송 요청을 했다. 벌써 점심 시간이 다가오는지 친구가 점심 메뉴를 묻는 카톡을 보내왔다. 얼마 남지 않은 오전 시간에 아직 보지 못한 이메일을 서둘러 확인한다. 12월 전자책과 오디오북의 판매 정산 내역에 오류가 있는지 최종 확인해달라는 관리부 요청에 내역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답신을 보낸다. 그리고 지난주 웹디자이너에게 요청해두었던 『사기열전』의 상세 이미지를 확인하고 온라인 서점에 등록 요청 메일을 보낸다. 이제 점심시간!


오후에는 블로그에 남겨진 독자의 문의 건을 편집부에 확인하고, 『디 에센셜 조지 오웰』을 홍보하기 위해 카드 뉴스 제작을 요청한다. 텍스트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어울리는 이미지를 정리한 후 웹디자이너에게 요청했다. 최근 KBS 북유럽이라는 방송에서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러 셀럽들의 인생 책을 소개하다 보니 민음사의 책이 자주 소개되었다. 혹시 북유럽의 방송 로고도 띠지에 사용할 수 있을지 저작권 확인을 위해 이곳저곳 담당자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전자책 담당 MD의 프로모션 요청 사항을 확인하여 답변을 하고, 전자책 정보를 수정해달라는 편집자의 요청에 따라 서점 MD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곧 출간될 『디 에센셜 버지니아 울프』와 『디 에센셜 다자이 오사무』를 홍보할 자료들을 요청하고, 마케팅 방향들을 고민하다 벌써 10시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다. 망했다. 『한편』은 펴보지도 못해는데. 내일 해야 할 일들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엄청 춥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가운데 습관적으로 느낌표를 찍어 온 사람이 있다면 한번 빼 보기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느낌표를 쓰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한 번 써 보기를 권하고 싶다. 느낌표 하나를 찍고 말고가 과연 큰 차이가 있을까? 그다지 쓸모없는 고민일까? 디테일의 차이가 생각보다 클까? 관습적으로 반복해 오던 데서 벗어나 보자. 편집자로서 판단하고 확신을 키워 가고 또 그것을 의심해 보자." (p.112)


'같은 원고라도 백 명의 편집자가 있다면 백 권의 아주 많이 다른 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p.34)는 말이 와닿는다. 사실 마케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책을 알리더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마케팅을 준비했다면 이런저런 다양한 모양을 시도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 손을 거쳐가는 책들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게 모든 마케터들의 바람이 아닐까. 하루 종일 엄청 바빴는데, 돌아보면 한 게 별로 없는 것만 같은 하루.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하루 종일 정신없이 분주하고 정신없는 수많은 업무 가운데에서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인지하고, 스스로 자신만의 기준과 주관을 세워간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나는 일을 할 때 어떤 기준과 주관을 가지고 최선의 선택들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나중에 후배들에게 우리 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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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유년의 기억,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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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할아버지는 늘 뒷짐을 지고 동네를 쏘다녔다. 저녁 준비를 마친 엄마가 할아버지를 모셔오라고 심부름을 보내면 마실 나간 할아버지를 찾아 동네를 휘저어야 했다. 어떤 날은 장독대 할아버지네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고 계시기도 했고, 어떤 날은 동네 구멍가게에 앉아 화투를 치고 계시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집에 가자고 조르면 동네 어르신들은 군것질거리를 손에 쥐여주며 할아버지를 모시러 온 손녀를 기특해 했다. 어느 집이나 대문을 두드리고 들어서면 반갑게 맞아주던 때였다. "여덟 살까지 자라는 동안 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뱅이가 따로 있다는 걸 알 기회가 없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p.16)

이따끔 동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아카시아와 진달래를 따먹기도 했다. 아카시아는 커다란 나무에 하얀 송이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아카시아 송이를 따기 위해 깡충깡충 뛰어가며 한 움큼씩 뜯어내곤 했다. 내 기억에 아카시아는 달콤한 맛이 났다. 우리 가족은 집에서 가까웠던 인왕산에 약수를 뜨러 자주 올랐다. 봄에는 진달래를, 가을에는 밤과 도토리를 주웠고, 겨울에는 솔잎을 따서 송편을 빚었다. 결코 질리지 않는 놀이 중 하나였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박완서 작가의 자전소설로, 1930년대 개풍 박적골에서 보낸 꿈같은 어린 시절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삶을 그리고 있다. 황해도 개성 인근에 위치한 박적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지만, 손녀딸을 하염없이 안쓰러워하는 할아버지 비호 아래 따뜻하게 자라다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의 현저동에 살게 된다. "나는 서울서 사는 법도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실상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셋방살이의 법도였다. 눈뜨자마자 뒷간이 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변소는 안집 식구들이 다 다녀 나온 다음에 가는 거라고 했다." (p.58)⠀



1940년대 일제 치하의 서울 학교생활과 변소에 가는 일도 주인집 눈치를 봐야 하는 서글픈 서울살이 속에서 점차 세상을 깨달아가고, 한국 전쟁을 통해 순진한 이상주의로 좌익에 가담했다가 결국 의용군으로 끌려간 오빠,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은 숙부, 동네 사람들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온갖 문초를 당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시대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보여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나도 어린 시절 조부모님의 비호 아래 천방지축으로 동네를 누비며 골목대장으로 지내다 학교에 입학할 무렵 분가한 부모님을 따라 개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늘 내 편이던 할아버지를 그리워 했던 날들을 지나, 졸졸 따라다니는 동생 몰래 친구들과 놀러 나가기도 하고, 몰래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댔다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못이겨 울면서 이실직고 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성장은 자신의 미성숙함과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하고 성처받는 과정인 것 같다.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하염없이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서로 만나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이 미덕이 되어 누군가를 만나 안부를 묻고 모두 모여 술 한 잔을 기울이던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박적골의 풍경도, 달큼한 싱아와 아카시아도, 내가 살던 홍제동의 골목길 어르신들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한가득 그릇에 담아 서로 나누어 먹던 그 시절과 시대의 고통에도 서로의 손을 붙잡고 안위를 염려해 주던 때가 그립다. 그리고 박완서 작가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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