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함께 호오포노포노
요시모토 바나나.타이라 아이린 지음, 김난주 옮김 / 판미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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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는 한 인터뷰에서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하나 둘 터득해 가는 과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자신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대표작 「키친」의 주인공 미카게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를 잃지만, 자신의 슬픔을 어찌하지 못하고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져있고, 그의 남자 친구 유이치는 살해된 어머니의 죽음 앞에 세상과 멀어지려 한다. 『안녕, 시모키타자와』의 요시에와 엄마는 알지 못하는 어떤 여자와 숲속에서 동반 자살해버린 아빠의 죽음으로 인하여, 『새들』에서는 각자의 엄마를 자살로 잃은 두 주인공이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묻고 찾아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시모토 바나나를 치유의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오포노포노'는 하와이 말로 '잘못을 고친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불균형을 바로잡아 원래의 완벽한 균형을 되찾는, 하와이에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제해결법이죠. 주된 실천법은, 우리에게 쌓인 기억을 소거, 즉 '정화'하는 것이죠. (p.22)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호오포노포노는 내면에 쌓인 기억을 ‘정화’하여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마음의 훈련이다. '호오포노포노'에 관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이 출간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쩌면 이것이 작가 내면과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을 떠올려보면, 자신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신비한 힘과 기운을 느끼며 부서진 삶의 균형을 맞춰나가는데 과거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사우스 포인트의 연인』와 에세이 『꿈꾸는 하와이』를 발표했던 작가는 이 무렵 하와이에서 호오포노포노를 접하지 않았을까.


힘들고 괴로워도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고,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노이즈를 줄여서 최대한 자기의 본디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것. 그건 자기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를 좋게 하려는 본능의 작용이 그렇기에 필요한 일이에요. 지구나 우주, 환경, 세계, 그런 것들을 위해, 가령 한 사람이 참되 자기로 돌아가면, 주위에도 선한 영향을 미치죠. 그런 모든 것을 책임감 있게 행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163)

 


나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 나 자신을 잘 몰랐다. 나는 순간순간의 기분에 민감한 사람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감정 표현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편한 감정을 스스로 회피하는 편에 가까웠다. 되도록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회피해왔던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고여있던 감정들을 속수무책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것 같았고, 그제서야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난 오늘 무엇이 즐거웠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건 무엇이지?


호오포노포노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내면아이인 '우니히피리'를 돌보고, 또 대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최근 주변 사람들로부터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일기를 쓰거나 명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결국 같은 노력이 아닐까, 우리가 외면해 온 내면이 결국 우리 삶의 균형을 깨트리게 되고 우리는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며 균형을 잡아가려고 노력하는 과정들. 그리고 이 과정을 지나면 우리는 조금 더 어른이 되겠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진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삶의 고통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 이 짧은 리뷰로 호오포노포노를 자세히 소개할 수 없기에 자신의 삶에 균형이 깨어져 혼란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요시모토 바나나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위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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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2021 13호 - Vol 13 :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뉴필로소퍼 NewPhilosopher 13
뉴필로소퍼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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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 신화'의 시시포스 왕은 살았을 때 신들을 속이고 배반한 대가로, 죽어서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 바위에는 제우스의 마법이 걸려 있어 결코 꼭대기까지 올릴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위는 늘 시시포스의 손에서 빠져나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신들은 자신의 운명을 앞질러 생각하려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헛된 노동의 반복에 대한 비유가 만들어졌다.


이 고단한 삶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주 생각한다. 내가 '고단하다'라고 느끼는 순간들을 돌아보면, 대부분 권태로운 순간들이었다. 그날의 일과가, 내가 해야 할 일이,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주지만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공간들을 발견하게 된다. 때때로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1년 후의 나는, 5년 후의 나는, 10년 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를 지치게 하는 생각은 이 지점에 있다. 지금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함. 1년 후에도, 5년 후에도 나는 오늘처럼 출근을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가겠지. 아마 그래서 이 주제가 단 번에 눈에 띄었을 것이다. 계간지 NewPhilosopher의 이번 주제,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인간의 이성과 세상의 불합리한 침묵이 대립할 때' 부조리가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올바른 해답은 아니지만 이 공허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앞에 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제1의 방안은 '자살'이라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데에는 다양한 상황과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자신이 처한 고통을 견뎌낼 삶의 이유와 가치를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NewPhilosopher에서 이야기하는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목표'란 달성해야 할 무언가를 뜻했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 그럴듯한 직업을 갖는 것,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목표, purpose는 '무엇을 실천하거나 창조하는 이유, 혹은 어떤 대상의 존재 이유'를 뜻한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작업을 하며 사는데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부조리하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 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시지프 신화』 중에서

카뮈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항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은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밀어 올리는 모든 바위는 결국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우리는 부조리하다. 하지만 이런 부조리를 깨달아야 확실히 행복해질 수 있고, 무의미한 실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무언가로 목표를 재설정할 수 있다." (p.52)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이유를 고민하면서도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막연하게 삶의 목적을 '행복'에 두고 갈급한 마음을 채우기에 급급할지도 모른다. 원래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라는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는가에 집중한다면 훨씬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결국 모든 철학적 문제는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인지 모른다. 코로나19로 오랜 시간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고,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많아지면서 무기력해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자기반성이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욕망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특징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리라는 확신 없이 길을 떠나는 것, 답을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탐색하는 것, 길을 잃으면서도 계속 여행하는 것, 지식과 생각의 틀을 습득하고 넓히고 시험하는 것, 개인의 해방에 이르는 것. 이러한 것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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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그래픽 노블) 비룡소 그래픽노블
로이스 로리 지음, P. 크레이그 러셀 그림,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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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의 조너스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불합리함을 모두 해결한 완전한 세계일지 모른다. 한 해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50명, 50명의 아이들은 모두 보육원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다, 아이들을 충분히 잘 돌볼 수 있는 가정에 보내진다. 아이들은 매년 같은 교육을 받으며 동일한 상태로 성장하다 열두 살이 되면, 봉사 활동을 통해 자신의 성향과 개성에 맞는 활동들을 체험하고 원로들은 아이들을 면밀히 관찰하며 열다섯 살이 될 때 각자에게 꼭 맞는 직업을 부여해 준다. 사회 구성원 간의 소모적인 갈등을 없애기 위해 모두가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며, 불평등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평화롭고 효율적인 사회. 가난을 걱정할 필요도, 노후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안전하게 보장해 주는 사회인 것이다. 그곳에서 조너스는 기억전달자로 선택되어 모두에게 잊혀진 과거의 기억들을 가지게 된다.


요즘에는 모두가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행복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인생처럼,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소 이기적이더라도 괜찮다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인간관계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최대한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들을 하라고 충고한다. 어쩌면 그렇게 나의 마음과 감정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나를 불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로부터 차단한다면 평화롭다고 여겨질지 모른다. 조너선이 살고 있는 세계처럼.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식으로 꽤 잘 돌아가는 것 같지 않으세요? 우리 마을 말이에요. 다른 방식으로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 기억을 받아들이기 전까진. 왜 이 기억을 기억 전달자님이 가장 좋아하시는지 알겠어요. 그렇지만 그 기억 전체에서 오는 느낌에 적당한 단어는 알 수 없었어요. 방 안에 아주 강하게 퍼져 있던 느낌 말이에요."

"사랑이야."

"음, 저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게 그다지 실용적이지는 않다는 걸 알겠어요. 노인들이 계속 같은 장소에 있다면 지금처럼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 이 기억처럼 사는 게 더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제 말은 그렇게 느꼈다는 뜻이에요. 물론 사랑이란 살아가는 데 더 위험한 방식일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아직 사랑이 있었으면 해요." (p.121)


조너선처럼 우리에게 잊힌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왜 삶의 이유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헤매는지 깨닫게 된다. 내 어릴 적만 해도 사람들은 서로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 아랫집 새댁이 요즘 입덧이 심하다고 걱정을 하고, 옆집 아저씨가 어젯밤에 외박을 했다며 혀를 차기도 하며, 저녁 반찬으로 무엇을 먹을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스갯소리로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그 시절에 불편함에 불편함은 지금보다 많았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고생스럽고,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불편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대끼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위로받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매일이 모여 삶을 이룬다.


조너선이 살고 있는 세계는 '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며 평화롭고 안전하다. 하지만 그들은 다름의 차이와 선택의 기쁨, 그리고 안전하지 않지만 서로 부대끼며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더욱 사람답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알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하여 멈춰버린 일상은 안전하지만 함께여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경험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이 전처럼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함께 생동하던 때를.


수년 전 소설로 읽었고 영화로도 보았지만, 그래픽노블로 출간되면서 다시 읽은 『기억 전달자』는 여전히 나에게 진짜 가치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사실 영화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래픽노블은 완성도가 높은 편. 영화보다는 소설 혹은 그래픽노블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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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를 향하여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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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지, 탐정 소설이란 게 대개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어! 살인에서 시작을 한다고. 하지만 살인은 그 결말일세. 이야기는 살인 사건이 있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네. 이 모든 정황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가는 거야. 그리고 정해진 시각이 되었을 때 정점으로 치닫는 거지. 0시라고 해 두세. 그렇지, 모든 것이 0시를 향해 모여드는 거야……."


평소에 범죄 스릴러 덕후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추리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실제 범죄 사건이 일어난 경우, 피해자를 중심으로 범인을 추리해 가다 보면 가해자의 자라온 환경과 기질, 그리고 그가 지닌 삶의 태도가 피해자와 만나 여러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극단적인 감정이 폭발하게 되고 종국에는 '살인'이라는 결말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추리 소설은 독자의 흥미를 끌어야 하는 이유 탓에 극적인 범인의 트릭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삶이 배치되어 있다고 느껴진달까. 그런데 얼마 전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정세랑 작가가 출연하여 나가서 크리스티의 《0시를 향하여》를 언급했고, 평소 내 독서 취향이 무슨 소용. 아니 정세랑 작가가 '인간의 본질을 뚫어보는 작품'이라고 추천한다면 당장! 읽어야지...


스타크 헤드 벼랑 끝에 위치한 저택에서 트레실리안 부인이 살해당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 저택에는 굉장히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트레실리안 부인의 조카 네빌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부인 케이와 저택에 묵고 있었는데, 네빌이 이혼한 전 부인 오드리도 초대하여 함께 있던 탓에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무척 껄끄러웠던 것이다. 트레실리안 부인의 재산을 상속받게 될 네빌과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부인을 불쾌해했던 케이, 그리고 이혼한 전 부인 오드리와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좋아한 토마스, 그리고 부인을 곁에서 늘 보살펴온 메리가 용의선상에 오르고 배틀 총경은 이들을 한 명씩 관찰하며 인터뷰를 시작한다. 0시를 향하여.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 또는 살인 사건에 바탕을 둔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가 살인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두 틀린 겁니다. 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합니다. 살인은 수많은 다른 정황들이, 주어진 시각에 주어진 지점에서 한데 합쳐지면서 그 정점에 달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지구상의 여기저기에 있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여들어 살인 사건에 연루됩니다. 여기 로이드 씨는 말레이에서 왔지요. 맥휘터 씨는 한때 자신이 자살을 시도했던 장소를 다시 방문하려는 생각으로 이곳을 찾았습니다. 살인은 그 자체로는 이야기의 종결입니다. 그것은 ‘0시’이지요.”


추리 소설을 스포일러하는 것은 범죄이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아가서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내가 느낀 흥미를 표현하겠다. 아가서 크리스티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탐정으로 포와르와 마플이 있는데, 범죄와 연루된 많은 정보들이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던 시대에 여성 작가가 '미스 마플'이라는 여성 탐정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검색해보니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있고. 마플 탐정님을 만나볼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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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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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 녹지 않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태우지 않는 한 영원히 녹지 않는 눈 결정체는 알 수 없는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켰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사람들은 눈송이가 스며들 일이 없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우주복 같은 옷을 입었고, 야외 외출과 환기는 절대 금지 사항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괴설이 내리기 시작한 후 언제 어느 곳에든 하얗고 반짝이는 방부제 가루, 가짜 눈이 있었다. 땅에 묻거나 태워야만 하는 눈을 처리하기 위한 매립지로 백영시가 선택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났다.


눈을 소각해 없애는 작업장 '센터'가 지어졌고 폐허처럼 변해버린 도시 백영시로 밤낮없이 눈이 실려왔다. 모루는 그곳에서 매일매일 도착하는 무수한 눈을 태우고, 태우고, 또 태웠다. 그렇게 녹지 않는 눈이 내린 지 7년째 되던 해, 이모가 사라졌다.⠀


차갑지 않은 눈이라니. 이게 정말 눈이 맞을까? 눈송이는 높은 기온과, 내 체온에도 녹지 않았다. 6월 중순, 초여름이었고, 등교 직전 뉴스에서 본 기온은 27도를 웃돌았다. 결정체의 모양이 일반적인 눈송이와는 달리 불규칙적이었다. 그리고 훨씬 밝게 반짝였다. 꼭 진짜 눈을 흉내 내어 만든 모형처럼. 그런데 곧 눈송이를 받치고 있던 손바닥 주위로 불그스름한 반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가려움이 밀려들었다. (p.17)


설 연휴 동안 『스노볼 드라이브』 원고를 읽으며, 언젠가 이 소설처럼 녹지 않는 눈이 정말로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피부에 닿으면 발진이 일어나는 눈,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눈,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일상을 잃게 하는 재앙. 불과 2019년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디스토피아의 세계라고 생각했을 이야기가 마냥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또한 인류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으로 일상을 잃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루는 실종된 이모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센터에 남는다. 고된 작업, 건조함에 부르트는 살, 매일 눈 속에서 마주해야 하는 사체들. 그럼에도 이모가 다른 사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까 봐 모루는 온갖 쓰레기가 모여드는 센터를 떠날 수 없었다. 기숙사에서 일어나 셔틀버스를 타고 작업장에 도착해서 눈을 퍼담고 퍼나르는 일상, 당장의 생존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과거의 평범했던 일상들은 모두 잊혀진다. 그러던 어느 날 모루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이월이 센터에 취직한다.⠀


이 눈은 언제까지 내릴까. 멈추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이 망할 눈이 그친다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전의 일상이 어땠더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나는 이제 돌아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데. (p.74)


마스크를 쓰지 않고 바람을 쐬고 한가롭게 거닐던 거리들,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모여 맥주잔을 부딪히던 일상, 카페에서 오랜 시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휴가를 맞춰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던 시간들이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당연한 일상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날이 올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 그래도 요즘은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곤 한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야?


지루하기만 했던 학교, 포도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평범한 하루, 들뜬 마음이 가득하던 졸업식 풍경 같은 것. 흰 눈에 뒤덮인 세상, 온몸을 가리는 똑같은 방역복을 입고 다녀야 하는 무채색의 현재 속에서 모루는 이월을 보며 모두 각자의 색깔을 가졌던 과거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남쪽에는 아직 포도를 재배하는 곳이 있대."


잊고 있던 예전의 빛깔들이 흑백의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까지 물들여 줄 수 있을까. 흰 눈과는 다른 색의 세상이 오기는 할까. 지금 우리에게도 다른 세상이 오기는 할까?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모루와 이월이 내딛는 걸음은 코로나로 지친 우리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준다. 아무도 길을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이모도, 우리의 일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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