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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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는 뉴스를 통해 신생아 유기 사건을 목격하곤 한다. 탯줄이 달린 채로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 영아 유기 치사죄로 처벌받게 되는 엄마. 우리나라는 여전히 미혼녀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더구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고, 출산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같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거듭 망설이게 되며 유기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낙태죄'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태아'를 생명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태아 또한 생명이라면, 낙태를 하는 것은 살인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당시 '생명'의 관점에서 낙태를 법적으로 허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데 만약 내가 준비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더구나 내가 학생이라면? 드라마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혼모들은 그럼에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삶을 견디며 아이를 키워낸다. 그것이 모성애라고 말하는 것이다.


"10월 초, 여러 번 P.와 섹스했다. 정치학과 학생이었는데, 여름 방학 동안 만났고 그를 보러 보르도에 가기도 했다. 오기노식 피임법에 따르면 위험한 시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 배 속에 '그것이 생길 수 있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과 쾌락을 누리며, 내 육체가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사건』 중에서



지난해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있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그에 따른 후속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기존의 형법인 모자보건법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의 부담을 여성에게만 지우는 사회 풍조 때문에 지금의 낙태죄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의 시기를 결정할 자유를 침해하고, 안전한 수술을 받지 못해 건강권 역시 침해된다. 



- “법이 바뀐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병원을 가도 ‘수술은 불법’이라며 안 해준다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어떤 사이트에서 미프진을 판다는데 이 사이트는 믿을 만할까요. 약물만으로도 정말 낙태가 가능할까요.”

- “약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사흘 동안 드세요. 처음 약을 먹으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할 거고, 마지막 약을 먹으면 진짜 아플 거예요. 하혈이 시작되면서 소변을 볼 때 덩어리 형태의 아기집이 떨어져나올 겁니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은 프랑스에서 낙태가 불법이던 시대에 제도가 보호하지 않는 ‘임신’과 ‘중절’이 신분 추락, 학업 실패 따위를 명백하게 암시하는 기호임을 깨닫고, 목숨을 저당 잡힌 채 뜨개질바늘을, 불법 시술사의 탐침관을 자신의 성기 속으로 밀어 넣었던 과거의 경험을 고백한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고백이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경우, 불법 약물인 유산 유도약 ‘미프진’을 온라인 상에서 익명의 판매상을 찾는다.


"임신중절이 나쁘기 때문에 금지되었는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나쁜지를 규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법에 비추어 판단했고, 법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 『사건』 중에서


이 작품을 읽고 나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고 유기한 뉴스 속 여성들이 떠오른다. 어떤 대안도 없이 홀로 보내야 했을 10개월의 시간, 차디찬 화장실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두려움과 고통 속에 홀로 치러야 했던 출산의 시간들은 그 누구도, 어디서도 얘기하지 않는다. 이 과정을 왜 홀로 겪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나눈 사랑과 쾌락에 비해, 여성이 책임져야 할 몫은 너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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