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만나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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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 따르면 마르케스는 마지막 몇 년 동안 기억 상실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의 사후 10주기인 2024년 3월 6일(마르케스의 생일)에 전 세계 동시 출간된 유고작 『8월에 만나요』에 서문은 두 아들이 아버지를 회상하며 글을 남겼다. 기억 상실로 평소처럼 정확하게 글을 쓰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창작을 이어가려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예술가의 완벽주의와 정신적 능력이 소실되어가는 과정에 남겨진 마지막 소설에 대해서 말이다. 죽기 전 마르케스는 이 소설에 대해 "이 책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없애 버려야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대한 작가들이 그렇듯 그 또한 마지막 작품의 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10년이 지난 지금 출간되었다. 마르케스의 다른 작품처럼 완벽하고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끝내 기억력 상실로 불완전하더라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어 기쁠 따름이다.


“그녀는 매년 8월 16일 같은 시간에 같은 택시로, 그리고 같은 꽃 장수에게 꽃을 사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똑같은 공동묘지의 이글거리는 햇빛 아래서 어머니의 무덤에 신선한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놓기 위해 이 여행을 반복하고 있었다.” -p.19



『8월에 만나요』의 아나 막달레나 바흐는 매년 어머니의 기일인 8월 16일에 섬을 방문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카리브해의 섬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이후 8월이 되면 어머니를 기리며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올려두기 위해 여행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의식이 끝나면 다음 날 여객선을 타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아나는 그 시간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일 년에 한 번, 자신답게 자유로운 여자가 되어 그간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그 해의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청바지와 지난 몇 년 동안 가지고 다니던 비치백 대신, 그녀는 아마 천 투피스를 입고 금빛 샌들을 신고, 가방을 꾸리면서 정장 한 벌과 하이힐, 그리고 모조 에메랄드 장신구를 넣었다. 그러자 다른 여자, 즉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된 느낌이 되었다." _p.56


이 소설을 읽고 누군가는 도덕의 잣대로 옳으냐를 말할 수도 있고, 마르케스의 작품을 들어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삶에는 규칙과 의식이 필요하고, 아나와 남편에게도 규칙이 노력이 존재한다. 아나의 행동은 무언가의 불만족이나 억압에서 분출된 돌발 행동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해내지 못하더라도 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순간을 꿈꾸기도 한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행동을 하는 나, 기대하지 않았던 삶의 낭만적인 순간, 때로는 나를 이루는 규정과 책임을 모두 벗어나 고작 나로 살아가는 시간을. 그리고 마르케스는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오롯이 자신이 되는 자유로운 순간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제야 비로소 달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육 년 전에 자기가 여행했던 바로 그 열정을 가지고 여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여행 이유가 자기와 같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슬픈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삶의 기적은 죽은 어머니의 삶을 계속하는 것이었음을 불현듯 깨닫자, 기분이 아주 좋았다." _p.130



마르케스가 이 소설을 쓸 당시 치매를 앓았으나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말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 마술적 리얼리즘, 여성 인물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애정과 사랑은 조금도 잃지 않았다고 느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무덤가에 자신이 둔 꽃이 아닌 새로운 꽃이 놓여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 섬을 찾았던 어머니 또한 자신과 같은 이유로 섬을 찾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관을 꺼내 열었을 때, 아나는 자신과 같은 나이의 똑같이 생긴 얼굴이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머니가 자기를 쳐다보고, 딸에 대한 사랑으로 운다고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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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 한계 시간
율리 체 지음, 남정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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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인 '잠수 한계 시간'은 Nullzeit, 즉 무감압 잠수 한계 시간을 뜻한다. 이는 수면 위로 바로 돌아가더라도 건강에 해를 입지 않으면서 특정한 수심에서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물속의 높은 압력 때문에 질소가 몸속에 저장된다. 마치 탄산수 병안에 든 탄산과 비슷하다고 상상할 수 있는데, 뚜껑이 닫힌 채 압력을 받는 동안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병을 너무 빨리 열면 폭발하듯 무감압 잠수 한계 시간을 넘기고 빨리 물 밖에 나온다면 이와 비슷한 일이 몸에도 일어나게 된다. 욜리 체는 이 소설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스페인 라호라에서 잠수를 배우기 위해 찾아 온 욜라와 테오와 스벤이 경험하게 되는 '잠수'와 흔히 사회적 관계에서 떠난다는 의미로 '잠수탄다'라고 말하는 도피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떠나, 나 혼자만 괜찮으면 된다는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그 사람들 삶에 개입하고, 혹은 그저 좋은 의도에서 충고하는 일을 막았다. 나는 그 후로 내가 ‘전쟁터’라고 부르는 독일과 더 이상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때, 나의 세계관은 ‘개입하지 않음’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스벤은 자신을 길들이고, 평가하려는 독일의(혹은 세상의) 평가로부터 벗어나고자 가족과 친구들 모두 인연을 끊고 스페인의 작은 섬에서 잠수 강사로 살아간다. 그는 스스로 어디에도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워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살아간다. 2011년 11월 12일, 욜라와 테오라는 한 쌍의 커플이 두 주 동안 스벤에게 잠수를 배우며 휴가를 보내겠다고 찾아온다. 그리고 오직 자신들만을 전담하며 다른 고객은 받지 않고 스물네 시간 돌봐 주는 것을 전제로 스벤에게 1만 4천 유로라는 거금을 제시한다. 귀족 가문 출신의 여배우 욜라와 지적이고 점잖아 보이는 작가 테오는 누구에게나 부러움의 대상이 될만한 커플로 보이지만,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 


스벤은 오랜만에 잠수하는 이들을 위해 기초부터 다시 가르쳤다. 수신호를 설명해 주고, 압력계를 읽고, 위급 상황에서 서로 공기를 공급해 주는 법을 연습했다. 이후 수심 8미터까지 내려가 균형을 잡고 호흡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테오가 호흡기를 움켜쥐더니 바닥을 박차고 수면 위로 올라가 버렸다. 잠수 중 호버링을 할 때 욜라가 테오 뒤로 손을 뻗어 밸브를 잠군 탓에 테오는 호흡기에서 공기를 공급받지 못했던 것이다. 더 깊은 곳이었다면 최악의 경우 목숨도 잃을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욜라는 웃었다. 욜라는 테오가 보는 앞에서 스벤을 유혹하고 테오의 성 불능과 창작 불능을 비난하며 상처를 주고, 테오는 사람들 앞에서 욜라의 비참한 상황을 떠벌리며 모욕을 주면서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욜라와 테오가 어떤 게임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데, 나는 그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 규칙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지금도 그 어떤 해명을 찾을 수 없다니 기이한 일이다. 해명이란 우리가 지나가는 시간을 참고 견뎌 낸 데 대해 마땅히 얻게 되는 대가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겐 해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해명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쳐 버릴 것이다."



『잠수 한계 시간』은 스벤의 일인칭 서술과 욜라의 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함께 하루 일과를 보냈음에도 이들의 진술은 엇갈린다. 이렇게 이중 관점을 동시에 제시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스벤과 욜라,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스벤이 자신의 생일을 기념해 수심 100미터 난파선에 잠수하기로 하고, 욜라의 부탁으로 이들과 동행한다. 스벤은 잠수를 마무리하고 순수 산소와 바텀 가스를 번갈아 호흡하며 조금씩 수면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테오가 물에 빠져 점점 가라앉았다. 우선 스벤은 계류 밧줄을 풀고 테오를 붙잡았다. 테오는 의식이 없었고 이삼 분이 지나면 호흡 정지에 이를 테지만, 지금 수면으로 올라간다면 몸속의 질소가 기포로 변하며 죽을 수도 있다. 개입하지 않음. 스벤은 그저 개입하지 않고 테오가 말없이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외면한다 해도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의 망설임 끝에 테오는 자신의 호흡기를 테오에게 밀어 넣었다. 구조된 테오는 곧장 치료를 위해 독일로 돌아갔다. 스벤은 이들의 짐을 정리하며 욜라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만약 테오가 죽었더라면 그 살인자는 스벤일 수 밖에 없는 기록이 남겨져있었다.


"살인이 시도되었던 그날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날의 아주 특정한 순간이 생각났다. 그리고 갑자기 고마운 감정이 흘러넘쳤다. 갑자기 그 순간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여겨졌다. 나는 망설였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테오를 심연으로 가라앉게 두지 않았고, 그의 생명을 구했다. 그 결정에 대한 고마움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왜 내가 십사 년 동안 ‘개입하지 않다’라는 개념을 그토록 매력적이라 여겼는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추한 개념이었다."



잠수하지 말 것, 다른 이들을 외면하지 말 것, 사회적 변화를 위해 개입하기를 주저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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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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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닮아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다시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우리나라의 6·25 전쟁 같은 국공 내전이 일어나면서 중국 본토와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장기간 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폭압적인 군부 독재를 자행했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처형했다. 오랜 시간 권위주의 통치와 가부장제 유교적 가치관이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여성에 대해 차별적이고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엄혹한 사회였다. 흔히 한국인에게는 '한(恨)'의 정서가 깔려 있다고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침략과 약탈, 전쟁, 가난, 억압으로 점철된 세월을 감내해야 했기에 마음속에 울분이 쌓인 것이다. 타이완도 마찬가지다. 억압의 역사 속 『귀신들의 땅』에 등장하는 천 씨 집안 인물들만 들여다보아도 울분이 맺히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구하고 박복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귀신들의 땅, 오로지 고통과 상처만 존재했던 그곳의 이야기이다.



타이완의 음력 7월은 귀월(鬼月), 즉 귀신들의 달이다. 그중에서도 귀문(鬼門)이 활짝 열리는 7월 15일, 중원절은 음기가 세고 귀신들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날. 중원절이 되면 타이완의 각 가정에서는 제사상을 차려 떠도는 혼령을 위로하고 지전을 태우며 귀신들을 달랜다. 이 무더운 중원절의 한낮, 타이완 중부의 외딴 시골 마을 용징(永靖)에 톈홍이 돌아온다. 천 씨 집안의 일곱째이자 막내아들이다. 그는 성인이 되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쫓기듯 독일로 떠났다. 그러나 독일에서 만난 T를 죽인 뒤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있던 그는 출소 후 중원절에 다시 돌아왔다. 그에게는 아들을 낳기 위해 태어난 다섯 명의 딸과 드디어 그 아래로 태어난 형이 있었다.


네가 빨리 가 버리기를 바랐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다. 네가 1초만 더 머물렀다가는 사태의 진상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물탱크 안에서의 일 말이다. 나의 참모습, 네 엄마의 참모습, 우리가 너에게 했던 모든 일들. 우리는 너를 지켜 주지 못했다. 한 번도 지켜주지 못했지. 가장 잔혹한 사람은 경찰도 아니고 네 중학교 담임 선생도 아니다, 바로 우리였다. _p.194


『귀신들의 땅』은 각 인물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하나씩 조각을 맞추다 보면 결국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누가 누굴 죽였고, 그 죽음의 사연 뒤에 숨은 진짜 의미가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이 특별한 재미이다. 톈홍은 왜 T를 죽였을까? 넷째는 왜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것일까? 다섯째는 왜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일까?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태어난 다섯 자매의 삶과 갖가지 구실로 사람들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광경을 목격하며 자라 온 사람들이 겪는 비극과 고통은 중원절의 재회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모호해진다.



너무 재미있는 소설이기에 꼭 읽어보셨으면 해서 스포일러 대신 이 소설과 연관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실제 작가 천쓰홍은 소설 속 톈홍과 흡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톈홍보다 더 많은 아홉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고, 타이완 정부가 갖가지 구실로 사람들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광경을 목격해왔다. 이후 독일로 거주지를 옮겨서 생활한 것도 흡사하여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모두 빼앗긴 후 아버지는 옆집의 왕 씨와 사업을 도모하고, 그는 일본에서 과자 만드는 기술을 배워 크게 돈을 번다. 후에 이 왕 씨의 아들은 톈홍의 넷째 누나와 결혼을 하여 용징에서 가장 큰 저택인 백악관에 거주하게 되는데 이 과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찹쌀 선과'이다. 찹쌀 선과는 대만의 왕왕 그룹과 크라운이 협력 개발하여 만든 과자로 실제 왕왕 그룹은 이 과자로 큰 부를 얻었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거나 추방되어 의지할데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이 없는 것이 바로 '집이 없는' 상태였다. 뿌리가 잘려 나가는 단절이자 영원한 이별이었다. 돌아갈 본향이 없어졌다. 집이 없다. _p.340



작가는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진실을 모두 알게 된 충격과 슬픔이 몰려온다. 그래서 3부의 제목을 이렇게 지었나 보다.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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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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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재밌어서 마지막까지 책을 놓을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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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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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뉴욕 독립미술관 협회전에 출품된 작품의 제목은 ‘샘’(Fountain) 이었다. ‘남성용 소변기 모양의 조형물엔 리처드 머트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작품은 소변기 모양으로 만든 조형물이 아니라 작가가 상점에서 직접 변기를 구매해 원래 쓰임새대로의 모습에서 90도로 방향을 돌려놓고 서명만 남겼다고 밝혔다. 당시 이 작품은 “이게 어째서 예술이냐"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변기 하나도 과연 미술로 봐야 할지에 대하여 큰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샘》은 전시회 기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잭슨 폴락, 앤디 워홀, 백남 준 등 파격적인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에는, '이것이 예술인가?'라는 논란이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일까?


《6월 16일 새벽 4시, 그랜드 캐니언의 아름다운 절벽에서 프러포즈한 커플을 찾습니다.》 SNS에 올라온 사진 속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반쯤 굽혀 앉은 남자가 있었다.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의 어깨에서부터 뒤로 드리워진 베일이 바람에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유일한 조명은 달빛이었다.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고 처음에는 아름답다며 찬사를 보냈지만 곧 사진 속 두 사람이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 알려지자 비난이 쏟아졌다. 젊은 남녀의 아름다운 프러포즈 장면과 생의 마지막이 사진으로 남게 된 것은 사실 사진 찍는 개 '로버트'였다.그 후 시체 두 구가 발견되면서 실종 수사는 종결되었고, 사진 속 여자의 아버지 빌트만 회장은 딸의 마지막 사진을 찍은 로버트를 위해 미술 재단을 만든다. 바로 [로버트 재단]


안이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에 선정될 만큼 유망했지만, 몇 달 전 미술 학원을 폐업하고 생계를 위해 음식 배달 라이더의 삶을 산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예술도 미뤄야 했다. 이때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자신을 로버트 재단의 한국 담당자인 최 부장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로버트'가 직접 안이지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여 재단에서 그녀의 작품 활동을 후원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지난 7년간 로버트 재단의 창작 프로그램을 거친 작가는 모두 스무 명이었고, 왕복 항공권을 비롯한 숙소와 생활비, 재료비 일체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하며, 소각할 작품은 로버트 재단에서 선택한다는 조건이 담겨있었다.

작가가 무엇을 그리든 그중 하나가 소각용으로 정해지면 작가는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질 테고, 로버트 미술관 소각식의 주요 연료는 바로 작가의 마음이라는 것을. _p.263


『불타는 작품』에는 몇 가지 예술 작품의 조건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1) 기억에 남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로버트가 촬영한 <캐니언의 프러포즈>는 새벽 4시에 달빛을 받아 촬영된 사진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한 커플의 마지막을 개가 찍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2) 화제성이 있어야 한다. 작가의 작품 중 하나를 눈 앞에서 불태워야 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불타는 작품이 아니라, 소멸되어 버린 작품과 작가의 마음을 사랑했다. 3) 메시지가 이어져야 한다.

시한부가 아닌 것은 <R의 똥>이 아니라고. 거기서 불타기로 되어 있었던 걸 빼돌렸다면 그건 더 이상 진짜가 아니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_p.341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꼭 화제가 되어야만 좋은 작품일까? 누군가가 알아주어야만 좋은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거꾸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품도 뛰어난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뛰어난 작품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변기가 예술이 되고, 깡통 속 대변이 작품으로 인정받고, 벽에 붙은 바나나에 열광하는 현대 미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렇지 않을까? 예술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새로운 주제의 소설이라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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