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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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실시간 검색어 1위에는 '부산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새벽 시간 부산 덕천동의 한 지하상가에서 남녀가 다투는 영상이 인터넷에 확산된 것이다. 영상 속 남녀는 서로 발길질을 하며 싸우다 남성이 여성을 일방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남성은 주먹으로 여성을 계속 때려 쓰러뜨린 뒤 휴대전화로 여성의 얼굴 부위를 수차례 때렸고 의식을 잃은 여성을 두고 자리를 떠났다. 당시 CCTV로 현장을 목격한 상가관리인이 경찰 신고 후 여자를 찾아갔으나, 피해 여성은 신고를 취소해달라는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나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폭행 영상이 유포되자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는데, 경찰이 지목한 수사대상은 CCTV 유포 대상자였다. 전문가들은 데이트 폭력의 끝은 살인이라고 말한다. 2011년부터 2018년까지 284명이 데이트폭력에 희생됐다. 매년 36명, 열흘에 1명꼴로 여성이 살해당했다.

"한주의 연인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그의 주문 하나를 듣지 못한 날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사과하는 아주머니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대신 밥을 먹는 내내 식탁 밑으로 한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한주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면 발을 밟았다. 그 식당에 오자고 한 건 한주였기 때문이다." (p.104)



『줄리아나 도쿄』의 한주는 데이트폭력 생존자이다. 지적이고 다정했던 연인은 한주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자책했다. 결국 심각한 폭행으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한주는 그 후유증으로 외국어증후군을 얻고 더이상 한국말을 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게 된다. 이제 그녀가 말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일본어뿐.


“나의 친구 한주의 생일을 축하해. 눈의 요정이 너를 지켜줄 거야.”

한주에게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은 계속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함께 일하는 동료 유키노가 한주를 돕는다. 두 사람은 “돈을 합쳐 안전과 공간”을 마련하기로 하고 동거인 사이가 된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그들은 서로가 사랑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임을 알아본다. 

한주는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에 제일 먼저 없어지는 건 소리'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녀가 공부했던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여성 노동자들은 온몸을 던져 말하려 했다.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작업복을 벗어버리고서.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녀들은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만다. 겨우 낸 목소리가 또다른 폭력으로 사라졌다는 뜻이다. (94)​


상처받은 경험은 그 사람을 그 시간 속에 고여있게 만든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 시간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극심한 상처와 고통의 기억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에게도 다시 시간이 흘러갈 수 있을까?


2018년, 부천 데이트폭력 사건의 생존자는 한 달간 자신의 집에 감금된 채 연인이었던 가해자에게 학대를 당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머리채를 잡고 안방 침대 옆으로 끌고 가 주먹으로 몸 전체를 때렸다''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이 오는 동안 죽도록 맞을 것이고, 네 머리에 칼을 꽂을 것이라고 말하며 맥주잔으로 정수리를 내리쳤다'고 한다. 3번의 시도 끝에 탈출한 피해자는 이미 복강에 염증이 가득했고 장기가 파열돼 출혈이 심했다. 2번의 큰 수술과 폭행 후유증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의 형량은 징역 4년, 그는 30세에 사회로 돌아온다.


『줄리아나 도쿄』는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나아가게 만드는 힘은 '연대'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부산 지하상가에서 폭력을 당한 여성은 왜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을까. 이 사건에서 처벌받아야 할 사람이 CCTV유포자인가? 고여있는 누군가의 시간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연대해야 한다. 당신이 틀리지 않았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생존자의 책임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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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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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만약 이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몹시 망설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수없이 행복했고 어떤 순간은 끝없이 절망하기도 했다. 또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에 뿌듯한 날이 있었고, 바보처럼 서툰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대체 이 인생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의문을 품은 날도 많았다. 누군가 '당신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나요?'라고 묻는다면, 기준은 모르겠지만 자신 있게 '성공적이었어'라고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_p.6



이 책을 읽게 된 건, 홍보 문구 한 줄 때문이었다. '소설가 김연수, 최은영, 줄리언 반스, 이언 매큐언, 닉 혼비, 영화평론가 이동진, 배우 톰 행크스가 자신의 인생 소설로 꼽은 작품'이라는 것. 그런데 줄거리로 말하자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한 평생 영문학 교수로 학문을 연구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가 지닌 학문에 대한 열정과 연구가 존경받을만한 대단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었고, 한 평생 교수로 대학에 일했지만 정교수조차 되지 못했다. 아내는 신경증으로 한평생 그를 몰아세웠고, 그는 날마다 낡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는 엄마의 그늘 아래 시들어갔고, 집을 탈출하고 싶어 임신한 결혼이었지만 곧 과부가 되어 하루하루 술로 삶을 유지할 뿐이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금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_p.250


나는 한동안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러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래 인생은 의미가 없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이 무척 싫었다. 왜 의미가 없어? 그렇게 열심히 고단하게 하루를 살아가는데, 의미가 없으면 어떡해? 그리고 수 년이 지나 스토너를 통해 그 답을 찾은 것만 같다. 고만고만하게 실패하고, 평범하게 절망하고, 느껴보지 못했던 환희와 몰입을 경험했다가 끝내는 포기하고 많은 많은 것들. 결국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한 평생을 성실하고 고단하게 살아냈고, 죽음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내가 믿고 싶었던 것은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스스로 설정한 '의미'있음은,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 모든 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말일지 모른다. 스토너의 삶은,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지극히 평범하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무엇 하나 이룬 것 없고, 대단하게 행복했던 것도 특별하게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이 가치가 없었을까? 어쩌면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인생에는 원래 의미가 없다'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에 가치가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도 그렇다. 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경쟁하며 상처받기도 했고,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다 후회할만한 선택들도 많이 했다. 나의 직장도, 나의 가족도, 나의 하루하루도. 고만고만하게 실패하고 평범하게 절망한다. 그래도,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어. 아마 시간을 되돌려 다시 살게 된다고 해도 나는 지금과 같은 선택들을 하며 살 것 같다. 그래, 나쁘지 않네.



내가 느낀 감동을 단 몇 줄의 리뷰로 설명할 길이 없지만, 당신도 꼭 스토너를 만나보기 원한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이 질문에 응답한 삶을 살았던 스토너, 그렇다면 스토너가 세월을 건너 뛰어 당신에게 걸고 있는 목소리를 꼭 들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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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생각 - 광고인 박웅현과 디자이너 오영식의 창작에 관한 대화
박웅현.오영식 지음, 김신 정리 / 세미콜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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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독서'를 거의 하지 못했다. 나에게 독서는 취미이고 노는 행위인데,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은 독서가 아니라 '공부'랄까.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처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새로운 도서의 SNS 마케팅을 기획할 때마다 브랜딩은 늘 고민이 되기 때문에 관련 도서를 몇 권 구입했다.​


책 한 권을 만드는 일 또한 보다 좋은 작품을 구성하고 만들어내기 위한 협업 과정을 거치기에 꼭 마케터만이 아니라 편집자, 디자이너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브랜드가 추구해야 할 방향과 전략을 공유하고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과 전략을 지녀야 할까? '민음사'라는 브랜드는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어떠한 가치를 공유해야 할까.


"커뮤니케이션을 오래 해온 회사들은 그 이름이 소리글자가 되고 맙니다. 카카오는 소리글자입니다. 카카오라는 이름을 듣고 카카오 열매를 연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거예요. 사성을 들으면서 하늘의 별 세 개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거고요. 이런 이름들은 소리글자로서 그 의미를 갖거든요. 전문가들이 하는 건 '그 이름에 어떤 좋은 연상 효과를 줄 것이냐?'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어떤 기업의 이름을 듣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만들어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거지요." (p.59)



신입 사원 때는 거의 매일, 타사(온라인 서점)의 동향을 살폈다. 처음에는 항상 너무나 바빴던 선배가 '다른 서점은 어떤 책이 잘 팔리고, 어떤 프로모션을 하는지 확인해보고 알려달라'는 요청에 시작했는데, 꾸준히 살펴보니 최근에는 어떤 책들이 주목받고, 누군가의 추천 책이나 미디어 소개된 책들을 놓치지 않고 파악할 수 있어서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배에게 제안해보기도 하고, 프로모션을 시도해보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후배가 생겼을 때도 똑같이 요구했다. 물론 나도 타사의 동향을 파악하고 싶기도 했지만, 나처럼 후배가 도서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길 바랐다. 아마 내 선배도 그런 마음으로 나에게 미션을 주었던 게 아니었을까.​


콘텐츠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고,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싶으면 먼저 자기를 주목해야 되는 거예요. 스티브 잡스가 "창의력이란 내가 잘하는 것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창의력이란, 남이 잘하는 걸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것으로, 내가 잘 아는 한국의 풍토 속에서 「기생충」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게 창의력의 핵심이거든요. 그래서 자기를 볼 줄 아는 힘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63)


누군가는 끊임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생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고민이 많았다. 일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일상과 업무에 경계가 없다는 것에 대해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나와 같은 길을 먼저 걸었던 선배들의 경험과 조언이었다. 그리고 이 책도 마찬가지. 크리에이티브 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일을 해온 박웅현, 오영식이라는 사람이 '일'을 하면서 어떤 고민들을 하고 어떤 해결책들을 찾아왔는지, 현업에서 치열하게 겪어온 경험과 깨달음은 앞으로 그 길을 걸어갈 후배들에게는 큰 힘이 될 수밖에 없다.


​영어의 'beauty'는 높은 품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국의 아름다움은 '아름'과 '다움'이 합쳐진 말인데, 아름은 '한 아름'할 때의 아름으로 그 크기가 사람 팔의 길이에 따라 다 다르다는 거예요. 결국 아름답다는 것은 '자기다움에 이른 상태', 결국 보편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상대적이라는 뜻이지요. (p.64)​



누군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자신이 '잘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라고' 말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같다면 가장 좋겠지만. 우리 회사는 무엇을 잘할까,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을까?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스스로 본질적인 것들을 항상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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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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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여론 조사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데 가장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 대하여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조사한 결과, 70대 이상을 제외한 모든 세대에서 '부모 등 배경이나 외부 압력'이 성공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답했다. 더욱 눈에 띄는 점은 '본인의 노력이나 능력'이 가장 낮은 응답율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때는 나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그 만큼의 결과가 돌아올거라 믿었다. 하지만 내가 수고하여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누군가는 노력에 비해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는, '성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씁쓸한 결과가 도출되었을까.​


그 할머니들은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 끝으로 간신히 생에 매달려 있었다. 언젠가 전부 무너져내릴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개수대에 물이 샌다, 가스레인지 후드 필터를 갈아야 한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 허겁지겁 올라가서 손을 봐줬고 내가 여기 있다는 말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 거대한 집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나에게 각별했다는 것을, 어떤 면에서 내 딴에는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본문 중에서

렉셀시오르 아파트에서 26년간 관리인으로 일한 폴은 입주민들의 개인적인 부탁까지 기꺼이 마음쓰며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밀리니엄 이후 그의 가치를 알아주던 입주자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세대가 교체되고, '비용 절감'만 외치는 새로운 입주자대표에 의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여 착취와 갑질을 당한다. 폴은 한평생 성실하고 진실되게 삶을 살았음에도 자신에게 닥친 여러 불행과 입주자대표에 대한 증오를 이기지 못하고 작은 사건에 의해 교도소에 수감된다. 뜻하지 않게 추락해버린 평범한 사람의 삶,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기도 하고, '절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인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렉셀시오르가 잘 돌아가게끔 책임지라고 뽑아놓은 사람이 바로 나잖아요? 두고 봐요, 당장 오늘부터 당신이 근무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한푼의 예산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내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겁니다.” 그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굴욕스럽고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날 내가 서툴고 투박하게 내뱉은 반박은 나에게 약간의 존엄성도 돌려주지 못했다. ─ 본문 중에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기꺼이 도움을 주고 관용을 베풀던 렉셀시오르의 공동체는 세대가 바뀌면서 변해간다. 비용 절감과 수익 극대화를 외치는 현재 사회의 축소판처럼, 렉셀시오르는 보수 공사를 맡은 외주업체 직원이 추락하여 사망했어도 그로인해 배상하고 책임질 일이 없다면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건실하게 노동하는 사람들을 노예로 취급하는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의 잣대로 보면 도박에 빠진 목회자, 살인미수자, 사람 목숨을 돈으로 책정하는 냉정한 손해사정인이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정직하고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낸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처벌이 확정된 다음부터 아버지는 여태껏 여기서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설교들을 준비했다. 교회의 한계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네 인생의 우여곡절을 너그러이 끌어안는 설교들을. 그는 삶이라는 시궁창 속에 바로 우리의 자리가 있음을, 낙엽송이나 맥貘이나 우리와 같은 감방을 나눠 쓰기는 마찬가지임을, 비록 우리의 본능은 정반대를 속삭일지라도 우리 모두 미래를 불안해하고 신들의 호의를 믿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말했다.


가족 사이의 갈등,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예기치 못한 사고, 착취당하는 노동,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은 아마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묻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의 답을 찾는 것은 스스로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제목이 그 답을 찾는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 참고로 2019년 공쿠르상 수상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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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민한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유은정 지음 / 성안당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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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밤잠을 못이루는 날들이 많았다.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고, 억울한 감정을 밤새도록 되짚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예민하게 굴었던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도 평소 나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검열한다. 내가 실수한 게 있었던가, 그 때 이렇게 행동했어야 했나, 쓸데없이 마음을 터놓았나. 내가 그랬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있니? 뭐하는 사람이야?”, “결혼한다고 하던데, 신혼집은 어디야? 요즘은 30평대 아파트에서 시작하는 사람이 많더라고.” 이런 말이 불편한 이유는 단순한 근황 토크가 아니라 자아정체성의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안다. 상대가 궁금해 하는 것이 단순한 나의 근황인지, 자신의 우위를 점검하기 위함인지를. 의도를 가지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면 그야말로 자아정체감은 박살나고, 자존감은 심한 훼손을 입는다. (p.64)


“내가 솔직해서 그래.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라며 선을 넘는 감정 착취자를 향하여, 내가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세워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책의 저자는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 번째, 침범당한 내 감정의 영역을 회복하겠다는 ‘단호함’. 두 번째, 내 기준과 너의 기준은 다르다는 ‘냉정함’. 마지막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는 사람이 정말 내 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겠다는 ‘유연한 결단력’이다. 쉽게 말하면, "네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게 아니고, 너희가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인정과 누군가의 악의적인 말 한 마디에 휘청이지 않고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


사실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주고, 냉정한 개인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더이상 새롭지 않다. 여전히 이러한 에세이나 심리학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자리잡고 있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수많은 지침들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수많은 책들과 수많은 지침들로 인해 우리는 이 전보다 더 '자신다운 삶'을 살고 있는걸까?


외국의 한 철학 교수가 투명한 마요네즈 병을 교탁에 올려두고, 병 안에 골프공을 가득 넣은 뒤 "이 병이 꽉 찬 것으로 보입니까?"라고 물었다. 잠시 후 교수는 골프공으로 가득 찬 마요네즈 병에 작은 조약돌을 채워 넣고 "어때요? 이 병이 가득 찬 것으로 보이나요?"라고 물었다. 학생들은 이번에도 '병이 가득 채워졌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는 웃으며 마요네즈 병에 고운 모래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이번에야말로 병이 가득 찼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교수는 마요네즈 병에 커피를 흘려 넣은 후에야 비로소 뚜껑을 닫았다.


"저는 이 마요네즈 병이 여러분의 인생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모든 인생에는 우선순위가 있지요. 제가 가장 먼저 병에 넣은 골프공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뜻합니다. 가족, 자녀, 친구, 건강, 열정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것들이 사라지고 이것만 남는다고 해도 여러분의 인생은 여전히 꽉 차 있을 겁니다. 다음에 넣은 조약돌은 인생의 걸림돌을 뜻합니다. 직업, 집, 차, 대출 같은 것이죠. 모래는 그 외 모든 것, 작은 문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병에 모래부터 넣었다면 조약돌이나 골프공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p.250)


당신의 골프공은 무엇인가? 다른 것들이 사라지고 이것만 남는다고 해도 여전히 꽉 차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잠시 직업이 없고, 남들처럼 집이나 차가 없어도 나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 나는 스스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골프공은 '사랑'이다.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모든 관계에서의 '진심'같은 것.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불현듯 최근 나를 화나게 했던 것들이 괜찮게 느껴졌다.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지만, 난 늘 남들보다 더 마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돌려받고 싶은 기대를 더 버리면 되겠다. 그러면 속상하지 않고 더 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상처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진짜 마음을 많이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니까. 지난 날들, 잠시 내가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는지 잊었을 뿐이다. 당신의 골프공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당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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