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성범죄 사건의 용의자 중 다수가 10대 청소년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내 성교육 체계 전반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교내 모든 성 관련 교육은 2015년 교육부가 개발·보급한 '성교육 표준안'을 바탕에 두고 있는데, 이 표준안에는 성범죄에 관해 여학생에게 '피해자 되지 않는 방법'을 주로 가르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성폭력에 대처하는 능력과 바람직한 방법으로 거절하는 법, 중·고등학교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 법과 수용하기 어려운 성적 요구에 대해 상대방을 이해시키면서 효과적으로 거절할 방법을 가르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왜 범죄를 피해자가 조심해야 하는 걸가?
"강간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를 주목하는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절제를 못하는 가해자의 욕망이 문제지, 피해자가 어떻게 생겼느냐, 피해자가 어떤 특성을 가졌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p.355)
작년 4월,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방송이 네이버 오디오 클립을 통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방송을 들었다. 개인적으로 범죄 문제나 범죄 심리에 관심이 있어서 듣기 시작했지만, 첫 회 방송에서 이수정 교수가 설명한 '이 방송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듣고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범죄 영화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프로그램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그러나 범죄 영화에 숱하게 등장하지만 대부분 피해자로 소비되다 마는 여성이나 아이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프로그램이라면 의향이 있다." 그래서 이 방송은 영화 속재미를 위해 가미된 선정적이거나 가해자의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영화들을 지적하며, 현실의 사회 문제를 표면 위로 끄집어낸다.
최근 다시 방송을 들어보면서 인상에 남았던 것은 미성년자의 범죄와 소년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최근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소년법의 개정 혹은 폐지를 원하는 목소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나 또한 어른 못지않은 잔혹한 범죄로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그에 대한 처벌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방송을 들으며 어른들이 너무 쉽게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성교육 체계도 갖추지 못해 '피해자에게 범죄를 조심하라'라는 것밖에 가르치지 못했고, 디지털 환경에 맞는 법 조항조차 개정하지 못했다. 학교 밖 아이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교육부,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이들을 보호하지 않고 아동 학대(방임) 하는 부모. 이들을 보호할 사회적 체계를 갖추고, 새로운 법 조항을 만들고, 보호 시설을 세우는 것은 보다 어려운 일이다. 소년법을 개정해서 투표권도 없는 애들을 교도소 보내버리면 편하니까.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버닝 썬 동영상 유포자가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이 여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아 우리는 이와 비슷한 수많은 사건들이 처벌조차 받지 않는 것을 보았다.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아내를 살해한 것은 감형 사유가 되고, 평생 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것은 계획범죄로 인식된다. (최근에는 조금 바뀌었다지만) 수많은 아동 성범죄는 알려지지조차 못했고, 성범죄 재판 과정에서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을 따진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와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지금, 이 책은 우리가 어떠한 사회 구조 속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바꾸어 나가야 할지 이야기해준다. 끊임없이 회자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