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띵 시리즈 9
윤이나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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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봉지에 천 원 내외로 저렴하고, 3분이면 조리할 수 있는 각양각색 다양한 라면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태어난 게 참 다행이야'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각각의 라면을 종류별로 사서 쟁여두고, 고집스레 지키는 라면 스타일이 있다. 나 또한 이 책의 저자처럼 라면 봉지 뒷면에 쓰인 '조리 예' 대로 끓이는 순수한(?) 상태를 고집하는 편이다. 가끔은 계란 한 알쯤 넣기도 하지만 계란을 휘저어 국물 맛이 변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새로운 라면이 나오면 기억해두었다가 꼭 먹어보는 일, 나만의 기준으로 엄선된 라면을 종류별로 떨어지지 않게 쟁여두는 일, 라면을 끓이는 방식에 대해서 정확한 기준과 이론을 가지는 일, 기분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라면을 먹는 일이 보편이 아니라는 것이 나에게는 여전히 의아하지만, 친구들은 도리어 라면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 기이함을 느껴왔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p.14)


내가 처음 라면을 먹었던 게 언제였을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대학생이었던 삼촌은 집에서 라면을 끓이면 라면 몇 가닥을 물에 헹구어 내 앞에 놓아 주었다. 동근 접시 위로 한가닥씩 집어먹기 쉽게 올려주면 어설프게 쥔 포크로 야무지게 라면을 먹었다. 라면 봉지 뜯는 소리, 라면을 반으로 쪼개는 소리, 그리고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라면 냄새. 이 책을 읽으며 라면을 먹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기분좋은 기억들이 많았다. 그 순간 라면이 맛있어서 즐거웠을까, 내 앞에 라면을 놓아주는 삼촌이 더 좋았을까. 그때 삼촌이 어떤 얼굴을 하고 나를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접시 위로 라면 한 가닥씩 놓아주던 손은 선명히 기억 난다.


그러고 보면 아빠에게서는 대체로 ‘짜파게티에 고춧가루를 뿌리면 맛있다’와 비슷한 것을 배워왔던 것 같다. 의미 있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인간은 말과 글도 배워야 하고 도덕과 예의범절도 배워야 하지만, 컵라면 뚜껑을 원뿔 모양으로 접어 앞접시 대용으로 쓰는 법도 배워야 하니까 말이다. 아빠는 후자를 가르쳐주는, 실은 가르쳐준다기보다는 그냥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p.26)


라면과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보니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가족은 대가족에서 분가를 하면서 구로구의 개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 날은 무슨 이유였는지 엄마가 이른 아침부터 외출해서 저녁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엄마는 전날부터 내가 학교에서 돌아온 후,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되고, 그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하는지, 반찬은 무엇을 꺼내 먹어야 하는지 신신당부를 하였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엄마는 이미 없었고, 아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인 라면을 끓여 주고는 서둘러 출근을 했다. 라면을 좋아했던 김태선 어린이는 우리집 표현으로 물을 한강물처럼 부어서 끓인 아빠의 라면을 맛있게 먹다가, 하교 후 먹을 생각으로 반쯤 먹고 뚜껑을 덮어두었다. 그리고 라면 먹을 생각에 신나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라면 뚜껑을 열고 깜짝 놀랐다. 국물을 모두 흡수하고 냄비 한 가득 불어버린 면발들. (그것은 흡사 괴물과 같았...) 먹을 수 없게 변해버린 라면을 보며 '아침에 다 먹고 갈걸' 속이 상했던 어린 내 마음, 내 상처가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 아빠는 불어터진 라면과 시무룩해진 내 얼굴에 깔깔대며 웃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슬픈 에피소드였던 것 같다.

나만큼이나 라면에 진지하고 진심인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도 많겠지. 엄마 심부름으로 샀던 동네 슈퍼의 250원짜리 라면이 지금의 950원이 되기까지의 시간만큼 나 또한 나이를 먹어가며 성장해온 탓에 이 이야기가 이토록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윤이나 작가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이 흔한 라면 한그릇을 먹던 시간과 함께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것은 생각보다 우리 삶에 '라면'이라는 음식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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