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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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불문하고 아무리 재미있게 재구성됐다 하더라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면서 들춰보고 싶지 않은 역사의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정묘년과 병자년의 호란은

어떻게 풀어가든 기어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분노, 참담, 열패 등등 정신건강에 해로운 후유증만 남기다 보니

이성적인 책읽기가 쉽지 않은 소재입니다.

 

두 호란을 전후로 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신에 대한 소개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눈길이 끌렸던 것은 단 한 줄의 카피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 때문이었습니다.

간결하지만 선명하고, 직설적이지만 공감할 수 있는 카피였습니다.

그저 자탄과 자괴밖에 없던 호란의 이야기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그래봐야 나쁜 왕은 실제로 죽지 않았으니...’라는 선입견도 있었지만,

김훈의 남한산성이래 처음으로 호란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 ● ●

 

정묘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가며 아내와 딸을 잃은 이신은

우여곡절 끝에 청 황제의 칙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반정 당시 광해의 내금위장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아버지의 칼을 손에 넣은 이신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내와 딸을 찾는 한편,

나라와 백성을 환란 속으로 밀어 넣었던 이들을 향한 복수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주변 상황이 급변합니다.

이신은 명백한 역모의 기운과 함께 자신의 뒤를 쫓는 세력을 감지합니다.

급기야 이신은 역모 세력에게 납치당하기에 이르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는 자는 물론 역모 세력의 몸통을 확인합니다.

겨우 사선을 벗어난 이신은 살인사건의 열쇠를 지닌 병조관원을 찾던 중

극적으로 아내와 만나게 되지만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비격진천뢰를 앞세운 역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역모세력은 물론 이신의 측근들까지 같은 혐의로 모두 잡혀 들어갑니다.

이제 이신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 나쁜 왕을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칼을 든 채 임금 앞에 나타난 이신은 칼끝을 겨눈 채 말합니다.

너는 임금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백성이 죽고 능멸당할 때 너는 무엇을 했느냐?”

 

● ●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신80년대에 쓰였다면 아마 출판이 금지됐거나 됐더라도 이내 금서가 됐을 거라는...

이신속의 절대 권력은 부패와 탐욕 덩어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정통성을 얻지 못한 트라우마에 휩싸인 채 비굴한 삶을 택했고,

반정공신들은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야차 같은 짓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 살길을 위해서라면 수십만의 백성의 목숨도 하찮게 여겼으며,

심지어 그런 세상을 뒤집겠다고 나선 역모세력조차 여전히 사대부 기질 운운하며

양반의 목숨과 정절은 백성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문제는...

400년 전 조선의 절대 권력의 야비하고 탐욕스런 추태를 읽으면서,

청나라로 끌려간 수십만의 백성들의 참혹한 운명을 읽으면서,

그리고,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청의 칙사로 살아 돌아온 이신의 삶을 읽으면서,

역사는 반복된다, 라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정말 이신 같은 존재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 운명의 밤에 아버지의 칼로 역사에 남을 단 한 번의 합을 휘둘렀더라면, 하는

그런 공상을 해보게 됐습니다.

 

쓰다 보니...

역사평론도 아니고 명색이 서평인데, 감상적인 이야기를 너무 앞세웠습니다.

그 역시 필요한 이야기겠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으면 예의가 아니겠죠.

 

이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주인공 이신과 그 아내 선화 외에

여러 인물들을 화자로 내세워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배려한 점이었습니다.

스스로 오랑캐의 첩이 됐던 정이,

공신의 처였으나 환향녀로 돌아온 홍원범의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죽여야 할 나쁜 임금, 뼛속까지 사대부인 홍원범, 역모를 주도한 양반세력 등에게도

작가는 변명 내지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있습니다.

이신의 눈을 통해 보고 느낀 대리감상이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음으로써

안타까움이든 분노든 그 어떤 감정이든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형식 덕분에 감정적인 책읽기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이신은 역모를 소재로 환란의 시대를 그려낸 역사소설이면서

치밀하게 조작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정치 스릴러이고,

동시에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린 멜로물입니다.

분노의 게이지가 높아질 만하면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로 넘어갔다가,

또 적당한 지점에서 이신의 애틋한 감정을 건드리는 멜로선을 탑니다.

한 편의 작품을 읽었지만, 이런저런 다양한 느낌이 남아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미덕은 동시에 아쉬움의 이유가 되기도 했는데,

비유하자면 너무 넓은 숲을 꾸미려다가 중요한 나무 몇 그루를 놓친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김홍진의 죽음에서 촉발된 스릴러의 뼈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고,

아내와 딸을 그리는 이신의 꿈과 독백은 조금 과하게, 동어반복적으로 묘사됐습니다.

역모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와

평범하고 소박한 삶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애틋한 멜로가

거대한 서사 속에서 치밀함과 균형감을 유지하지 못한 점은

이신에서 가장 크게 아쉬움을 느낀 부분이었습니다.

 

인조와 서인세력의 무능을, 전쟁의 후유증을 신랄하게 전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의도보다

이신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래서인지 과욕일지 모르지만, 볼륨을 좀더 키워서

2~3권 정도의 분량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과거형으로만 묘사됐던 동몽선습 분서 사건 등 칙사로서 이신의 역할이라든가,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유병기와의 우정이나 갈등,

역모를 꾸민 세력의 대의와 그에 대처하는 임금의 자세 등

좀더 디테일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했던 대목들이 많았던 탓입니다.

 

픽션이니까 가능한 캐릭터였지만 이신은 얼마든지 실존 가능했던 개연성 있는 캐릭터입니다.

들춰보고 싶지 않은 역사의 장면일수록 또다른 이신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높을 것이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역사가 남긴 교훈을 되새길 수 있다면 무척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400년이 지나도 별 달리 변한 것이 없는 절대 권력과 위정자들에게

이신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은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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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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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잔인한 연쇄살인마나 참혹하게 난도질당한 시신이 튀어나오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은 1984년 은평구 D동의 한 다가구 주택의 평범한 서민들일 뿐이며,

사건이라고 해봐야 당시에는 다반사였던 연탄가스 중독사가 전부입니다.

이런 평이한 배경 속에서 가족 같았던 이웃들이 숨겨온 어두운 진실라는 홍보 카피가

작품 속에 얼마나,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까, 약간의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한편의 뛰어난 한국 미스터리 작품을 만났다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은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었습니다.

 

● ●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여대생들의 롤모델 1위로 꼽히는 현수빈은

유년기행이라는 칼럼을 통해 7살 무렵에 겪은 80년대의 소소한 일상을 연재합니다.

칼럼이 연재되던 중 수빈은 기대하지 않았던, 또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립니다.

우선 다가구 주택에 함께 살던 이웃 중 몇 사람의 연락을 받게 됐고,

이어, 당시 D동에 근무했고 지금은 퇴직한 한 경찰의 방문을 통해

다가구 주택에서 일어났던 연탄가스 중독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소개에 소개를 거쳐 다가구 주택에 살던 대부분의 이웃들과 만나게 된 수빈은

자신이 기억하는 예쁘고, 소중한 7살의 기억 속에

실은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상처들이 숨어있었으며,

그것은 29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혀 아물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과일행상을 하며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던 우돌네 식구들,

자신을 예뻐해주던 건넌방 세 언니들,

그리고 젊고 아름다웠던 신혼부부와 문간방 대학생 등

7살의 수빈과 함께 했던 모든 이웃들이 지금껏 감추거나 숨겨왔던 진실들이

수빈의 탐문과정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 ● ●

 

굳이 장르를 갖다 붙인다면 일상 미스터리정도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러기엔 왠지 작품과 작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밝혀지는 진실의 규모나 충격은 일상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고,

수많은 캐릭터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직조한 필력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또는 지금은 이해되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인간관계와 사건들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공감하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는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사실감을 잘 부여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벌어진 사건은 단순했고,

인물들 간의 관계는 대부분 빗나간 탐욕, 시기와 질투, 사랑과 증오 등

가장 원초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4년이었기에 단순함과 원초성은 좀더 거칠고 날것 같은 모양새를 가질 수 있었고,

그에 대처하는 다가구 주택 이웃들의 자세 역시 요즘처럼 세련되진 않지만

훨씬 더 생생하고 본능에 가까운 느낌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좀 뜬금없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읽는 동안 여러 번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다가구 주택의 이웃들이긴 하지만,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들 속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이야기라는 점,

그래서,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이 놀라움 뿐 아니라 서늘함까지 전해줬다는 점,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착잡함을 지울 수 없었다는 점 등

어딘가 닮은꼴이라는 뉘앙스를 짙게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괜히 스케일만 크고, 눈에 힘만 잔뜩 들어간 채

정작 중요한 서사를 놓친 대작들에 비하면 훨씬 더 쫀쫀하고 알찬 미스터리입니다.

간혹 눈에 띄었던 작위적인 전개 주로 수빈의 탐문이 의외로 쉽게 풀려나가는 지점에서

목격되곤 했던 가 옥의 티처럼 느껴져 별 다섯 개까지는 어려웠지만,

네 개 반은 충분히 받을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소소한 배경 속에서 이처럼 큰 서사를 뽑아낸 작가의 이력이 궁금했는데,

띠지를 보니 대형 신인의 첫 장편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과 한국추리작가협회 황금펜상을 수상한 단편들도 소개됐는데,

가능하면 다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송시우 작가의 두 번째 장편을 기대하고 싶어집니다.

더불어 이 작품이 대형 신인의 성공적인 데뷔작이라는 평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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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두 남자가 수상하다
손선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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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딘가 블랙 코미디다운 느낌을 담은 제목과 표지가 주는 선입견(?) 때문에

자칫 유쾌 발랄하고 쉽게 읽히는 가벼운 이야기로 예단할 독자들이 적잖을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수준 높은 국내 장르물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이웃집~’은 그 가운데 가장 독특한 색깔을 지닌 작품이었습니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코지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쾌함과 긴장감을 쉴 새 없이 교차시킨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입니다.

 

● ● ●

 

초라한 현실 속에서도 캔디처럼 씩씩한 일러스트레이터 장수정은

그녀의 옆방에 사는 수상한 두 남자, 손선영-오현리와 벽간 소음을 통해 인연을 맺습니다.

악연으로 시작됐지만, 고양이 연쇄피살 사건을 계기로 운명적인(!) 인연으로 발전합니다.

함께 살묘범(殺猫犯)을 뒤쫓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독극물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고,

일련의 고양이 연쇄살해가 살인을 위한 예행연습일 수도 있다는 추론에 다다른 세 사람은

용인경찰서 장하나 경사의 도움을 받기에 이릅니다.

 

한편, 장기이식 수술에 있어 권위를 자랑하는 잠실희망병원에는

17살 아들 지유에게 이식할 심장을 기다리는 정상우-양영자 부부와

어머니에게 이식할 심장을 기다리는 박성호 등 두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가족사는 불행과 상처로 가득했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상태입니다.

하지만, 나날이 꺼져가는 가족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였고,

불법적인 장기매매는 물론 이식의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타인에게 직접 위해를 가할 생각까지 하기에 이릅니다.

 

물증 없이 추론만으로 살묘범을 쫓던 장수정과 손선영 일행은

우려했던 독극물 살인이 실제로 벌어진 현장에서 송파서 백용준 형사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민간인 신분으로 수사에 참여하게 된 장수정과 손선영은

사건의 이면에 숨어있던 충격적인 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 ● ●

 

언뜻 줄거리만 보면 한없이 무겁고 음울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식을 기다리는 두 가족의 초조함과 극단적인 선택,

그리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대목은 당연히 그런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28살의 좌충우돌 일러스트레이터 장수정과

10년 연상의 배 나온 추리소설가 손선영, 아버지 연배인 오현리의 에피소드는

로맨틱한 소동극을 연상시킬 정도로 럭비공처럼 통통 튀어다닙니다.

 

코지 미스터리 쪽으로는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싸움 하는 연인 같기도 하고,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파트너 같기도 한

장수정과 손선영의 위태위태하면서도 쿵짝이 잘 맞는 콤비플레이를 읽다 보면

시리즈물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오현리, 장하나, 백용준 등 두 사람을 지원사격하는 조연들 역시

뚜렷한 개성과 적절한 분량의 역할을 통해 이야기를 탄탄히 떠받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몰입감과 긴장감을 살리는 결정적 역할은 사건의 몫입니다.

작가는 2011년을 뒤흔든 구제역 사건과 음지에서 자행되는 불법적인 장기매매라는,

어찌 보면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테마를 한 이야기 속에 잘 엮어 넣었습니다.

특히 범행도구인 치명적인 독극물을 두 테마의 연결끈으로 설정한 덕분에 사실감은 물론

지금 현재도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현실적인 공포심도 살려냈습니다.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은 작품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는

방대한 영역에 걸친 꼼꼼한 자료조사, 또는 풍부한 직,간접 경험들의 흔적입니다.

장수정을 당황하게 만드는 손선영-오현리의 현란하고 빈틈없는 말빨은 말할 것도 없고,

사건 관련 데이터, 다양한 캐릭터들의 인구사회학적 묘사를 세세히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집필에 임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앞서 언급한 이 작품의 장점에 대해서 대체로 동감하겠지만,

아쉽게 느꼈던 부분은 조금씩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코지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의 접점입니다.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 새 민간인 신분의 세 남녀가 경찰 수사에 합류한 상황이 됐는데,

오현리의 마당발로 인연이 닿은 용인경찰서 장하나 경사가 연결고리 역할을 맡긴 했지만,

약간 얼렁뚱땅 넘어간 듯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좀 편하게 풀린 느낌이랄까,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할 때 조금은 덜커덕, 하는 느낌이 들었던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손선영과 장수정이 사건의 진실을 추론하는 과정이

어찌 보면 너무 쉬워 보일 정도로 큰 장애 없이 술술 풀려나간 점입니다.

물론 동물병원장 이은경의 조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줬지만,

치명적 독극물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이나, 구제역과의 연관성,

그리고 치명적 독극물을 이용한 살인범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추론하는 과정은

두 주인공이 별 고생 없이 작가가 안내한 대로 따라간 느낌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처음부터 용의자 또는 범행동기와 수법을 드러내고 갈 경우,

대부분의 독자들은 뭔가 뒤집어지는엔딩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거의 정공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딱 기대한 만큼의 엔딩을 만났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봉인된 추리 대담에서 작가가 명확한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하나쯤 빵 터지는 게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탓에 느낀 아쉬움이었습니다.

 

작가가 직업은 물론 이름까지 본인과 같은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는 일이 쉽지 않았겠지만,

손선영은 미드 캐슬에서 미모의 여형사를 돕는 추리소설가 나단 필리온을 연상시킬 만큼

여러 가지 매력을 발산하는데 성공한 캐릭터였습니다.

(물론 비주얼이나 성격은 좀 많이 다르지만요.^^)

손선영-장수정 콤비를 주인공으로 한 후속작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현실만 잘 극복하여 묘사된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시리즈의 탄생도 기대해 볼만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용인서의 장하나 경사와 송파서의 백용준 형사가 이들의 지원군이 됐으니,

어쩌면 그런 약점은 차기작부터는 염려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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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두 개의 시체, 두 명의 살인자
정해연 지음 / 사막여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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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반나절 만에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이 무척 높은 작품입니다.

두 개의 시체, 두 명의 살인자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한 명의 살인자는 초반에 밝혀지고,

나머지 역시 달리 눈 돌릴 필요 없이 몇 손가락 안에서 고르면 될 정도로 심플한 구조지만,

이 작품은 누가 살인자?’라는 것보다는 ?’ 또는 어떻게?’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진범 찾기 미스터리와는 차별화된 재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 외양은 형사 대 범인이라는 진범 찾기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메인 스토리는 두 명의 살인자 간의 두뇌게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두 살인자는 스타일은 달라도 그 뿌리는 비슷한 사이코패스로 설정됐는데,

A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B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BA의 계획을 깨달은 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추격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이코패스의 살인 행각 지켜보기이상의 어떤 느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재도, 엔딩도 단순히 보여주기를 넘어서지 못했고,

결국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에는 불쾌한 느낌마저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블의 경우, 단순히 사이코패스의 잔혹한 연쇄살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사이코패스의 본질에 관해 좀더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고,

더 나아가 그것을 이용한 완전범죄의 추구까지 다루고 있어서

독특한 소재의 장르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마지막 역시 진실은 무엇이고, 누가 범인인가?’라는 도식적 결론 대신

잔혹하고도 오픈된 엔딩을 택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다만, 문장이나 구성, 캐릭터 설정 등에서 아직은 내공이 부족해 보이는

아마추어적 인상을 자주 받았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 아쉬운 점을 꼽아보자면,

우선 조금은 안이해 보이는 구성 때문에 곳곳에서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반복돼온 우연이 결국 미리 짜여진 계획으로 밝혀지는 설정은 좋았지만,

누가 봐도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금세 파악할 수 있게 이야기가 구성돼있다 보니

나중에 미리 짜여진 계획으로 밝혀진 지점에서 충격이나 반전의 느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캐릭터 설정에서도 작가가 너무 쉽고 편하게 간 느낌을 받곤 했는데,

가령, 강남에 살면서 세련된 헤어와 의상은 물론 클래식을 즐겨듣는 사이코패스의 설정은

클리셰 중에서도 클리셰다 보니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 숱하게 사람을 죽여 온 화려한 이력의 사이코패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에서 발견한 시신을 놓고 놀람이나 충격 대신 살인범에 대한 존경심을 떠올리는 것은

미드 덱스터의 주인공이 아닌 다음에야 솔직히 오버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실제 덱스터에 이런 장면이 있지요)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꽤나 똑똑하고 철저한 사이코패스로 설정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스터리 독자라도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상황만으로 상대방을 용의자로 몰아가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반전으로 진실이 드러나긴 하지만)

좀더 꼼꼼한 구성과 디테일한 설정으로 무장했다면

훨씬 더 높은 질감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느 분의 서평을 보니 정해연 작가의 전공이 로맨스 쪽이었다고 하는데

더블의 주인공들을 등장시킨 후속작 몇 년 후의 이야기라든가, 비기닝도 괜찮고,

다른 소재의 이야기도 괜찮으니 장르물 쪽에서 필력을 발휘한다면

아마 많은 독자들의 기대를 모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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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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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 그리고 사도세자는 역사 속 인물 가운데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가장 많이 조명된 인물들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손자가 (할아버지 손에 죽은) 아버지의 뜻을 잇는, 어찌 보면 비극이면서도 막장에 가까운 이야기이고, 동시에 극성(劇性) 강한 소재이다 보니 여러 장르를 통해 오늘날까지 복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린의 실질적 주인공은 이산 정조대왕이겠지만, 1권에서는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의 동 시대를 다룬 무수한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위해 작가는 몇몇 픽션의 인물을 탄생시켰는데, 아무래도 낯익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낯선 인물들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세자 이선의 위기를 지켜내는 강직한 무관 황율과 그의 여인 개울, 난폭한 살인기계 광백과 그가 길러내는 살수들, 광백의 살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질을 지닌 갑수 등이 그들입니다. 일부는 1권에서 운명을 다하기도 하고, 일부는 이후의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맡을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들을 이야기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자연스럽게 끌고 오는 작가의 필력이 돋보입니다.

 

흥미로운 인물 묘사 외에도 역린은 쉽고 빠르게 읽히는 문장이라는 매력이 있는데, 때론 현학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때론 중의적이거나 화두를 닮은 언변으로 정치인들의 내밀한 대화를 표현하지만 결코 난해하거나 지나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당대의 어지러운 정치판과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노회한 정객들의 진면목을 설명하는데 있어 더없이 적절한 문장들입니다.

 

30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한나절도 안 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자체의 매력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적절한 조합 덕분이었습니다. ‘역린이 몇 권까지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과 픽션의 조합을 통해 이전의 작품들과 차별화된 영정조 시대를 다룬다면 오랜만에 의미 있고 재미있는 대하소설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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