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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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불문하고 아무리 재미있게 재구성됐다 하더라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면서 들춰보고 싶지 않은 역사의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정묘년과 병자년의 호란은

어떻게 풀어가든 기어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분노, 참담, 열패 등등 정신건강에 해로운 후유증만 남기다 보니

이성적인 책읽기가 쉽지 않은 소재입니다.

 

두 호란을 전후로 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신에 대한 소개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눈길이 끌렸던 것은 단 한 줄의 카피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 때문이었습니다.

간결하지만 선명하고, 직설적이지만 공감할 수 있는 카피였습니다.

그저 자탄과 자괴밖에 없던 호란의 이야기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그래봐야 나쁜 왕은 실제로 죽지 않았으니...’라는 선입견도 있었지만,

김훈의 남한산성이래 처음으로 호란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 ● ●

 

정묘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가며 아내와 딸을 잃은 이신은

우여곡절 끝에 청 황제의 칙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반정 당시 광해의 내금위장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아버지의 칼을 손에 넣은 이신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내와 딸을 찾는 한편,

나라와 백성을 환란 속으로 밀어 넣었던 이들을 향한 복수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주변 상황이 급변합니다.

이신은 명백한 역모의 기운과 함께 자신의 뒤를 쫓는 세력을 감지합니다.

급기야 이신은 역모 세력에게 납치당하기에 이르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는 자는 물론 역모 세력의 몸통을 확인합니다.

겨우 사선을 벗어난 이신은 살인사건의 열쇠를 지닌 병조관원을 찾던 중

극적으로 아내와 만나게 되지만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비격진천뢰를 앞세운 역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역모세력은 물론 이신의 측근들까지 같은 혐의로 모두 잡혀 들어갑니다.

이제 이신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 나쁜 왕을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칼을 든 채 임금 앞에 나타난 이신은 칼끝을 겨눈 채 말합니다.

너는 임금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백성이 죽고 능멸당할 때 너는 무엇을 했느냐?”

 

● ●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신80년대에 쓰였다면 아마 출판이 금지됐거나 됐더라도 이내 금서가 됐을 거라는...

이신속의 절대 권력은 부패와 탐욕 덩어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정통성을 얻지 못한 트라우마에 휩싸인 채 비굴한 삶을 택했고,

반정공신들은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야차 같은 짓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 살길을 위해서라면 수십만의 백성의 목숨도 하찮게 여겼으며,

심지어 그런 세상을 뒤집겠다고 나선 역모세력조차 여전히 사대부 기질 운운하며

양반의 목숨과 정절은 백성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문제는...

400년 전 조선의 절대 권력의 야비하고 탐욕스런 추태를 읽으면서,

청나라로 끌려간 수십만의 백성들의 참혹한 운명을 읽으면서,

그리고,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청의 칙사로 살아 돌아온 이신의 삶을 읽으면서,

역사는 반복된다, 라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정말 이신 같은 존재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 운명의 밤에 아버지의 칼로 역사에 남을 단 한 번의 합을 휘둘렀더라면, 하는

그런 공상을 해보게 됐습니다.

 

쓰다 보니...

역사평론도 아니고 명색이 서평인데, 감상적인 이야기를 너무 앞세웠습니다.

그 역시 필요한 이야기겠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으면 예의가 아니겠죠.

 

이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주인공 이신과 그 아내 선화 외에

여러 인물들을 화자로 내세워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배려한 점이었습니다.

스스로 오랑캐의 첩이 됐던 정이,

공신의 처였으나 환향녀로 돌아온 홍원범의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죽여야 할 나쁜 임금, 뼛속까지 사대부인 홍원범, 역모를 주도한 양반세력 등에게도

작가는 변명 내지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있습니다.

이신의 눈을 통해 보고 느낀 대리감상이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음으로써

안타까움이든 분노든 그 어떤 감정이든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형식 덕분에 감정적인 책읽기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이신은 역모를 소재로 환란의 시대를 그려낸 역사소설이면서

치밀하게 조작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정치 스릴러이고,

동시에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린 멜로물입니다.

분노의 게이지가 높아질 만하면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로 넘어갔다가,

또 적당한 지점에서 이신의 애틋한 감정을 건드리는 멜로선을 탑니다.

한 편의 작품을 읽었지만, 이런저런 다양한 느낌이 남아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미덕은 동시에 아쉬움의 이유가 되기도 했는데,

비유하자면 너무 넓은 숲을 꾸미려다가 중요한 나무 몇 그루를 놓친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김홍진의 죽음에서 촉발된 스릴러의 뼈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고,

아내와 딸을 그리는 이신의 꿈과 독백은 조금 과하게, 동어반복적으로 묘사됐습니다.

역모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와

평범하고 소박한 삶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애틋한 멜로가

거대한 서사 속에서 치밀함과 균형감을 유지하지 못한 점은

이신에서 가장 크게 아쉬움을 느낀 부분이었습니다.

 

인조와 서인세력의 무능을, 전쟁의 후유증을 신랄하게 전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의도보다

이신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래서인지 과욕일지 모르지만, 볼륨을 좀더 키워서

2~3권 정도의 분량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과거형으로만 묘사됐던 동몽선습 분서 사건 등 칙사로서 이신의 역할이라든가,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유병기와의 우정이나 갈등,

역모를 꾸민 세력의 대의와 그에 대처하는 임금의 자세 등

좀더 디테일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했던 대목들이 많았던 탓입니다.

 

픽션이니까 가능한 캐릭터였지만 이신은 얼마든지 실존 가능했던 개연성 있는 캐릭터입니다.

들춰보고 싶지 않은 역사의 장면일수록 또다른 이신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높을 것이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역사가 남긴 교훈을 되새길 수 있다면 무척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400년이 지나도 별 달리 변한 것이 없는 절대 권력과 위정자들에게

이신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은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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