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평점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여대생들의 롤모델 1위로 꼽히는 현수빈은 유년기행이라는 칼럼을 통해 7살 무렵에 겪은 80년대의 소소한 일상을 연재합니다. 칼럼이 연재되던 중 수빈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립니다. 우선 다가구 주택에 함께 살던 이웃 중 몇 사람의 연락을 받게 됐고, 이어 지금은 퇴직한 한 경찰의 방문을 통해 다가구 주택에서 일어났던 연탄가스 중독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소개에 소개를 거쳐 다가구 주택에 살던 대부분의 이웃들과 만난 수빈은 자신이 기억하는 예쁘고 소중한 7살의 기억 속에 실은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상처들이 숨어있었으며, 그것은 29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혀 아물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과일행상을 하며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던 우돌네 식구들, 자신을 예뻐해 주던 건넌방 세 언니들, 그리고 젊고 아름다웠던 신혼부부와 문간방 대학생 등 7살의 수빈과 함께 했던 모든 이웃들이 지금껏 감추거나 숨겨왔던 진실들이 수빈의 ‘탐문’ 과정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능력 있는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잔인한 연쇄살인마나 참혹하게 난도질당한 시신이 튀어나오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은 1984년 은평구 D동의 한 다가구 주택에 살던 평범한 서민들일 뿐이며, 사건이라고 해봐야 당시에는 다반사였던 연탄가스 중독사가 전부입니다. 이런 평이한 배경 탓에 ‘가족 같았던 이웃들이 숨겨온 어두운 진실’이라는 홍보 카피가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됐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한편의 뛰어난 한국 미스터리 작품을 만났다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일상 미스터리’겠지만, 그러기엔 왠지 작품과 작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밝혀지는 진실의 규모나 충격은 도저히 ‘일상’이라고 볼 수 없는 참혹함과 비극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인간관계와 사건들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공감하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는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사실감을 잘 부여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벌어진 사건은 무척 단순했고, 인물들 간의 관계는 대부분 탐욕, 시기와 질투, 사랑과 증오 등 가장 원초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1984년이었기에 그 단순함과 원초성은 좀더 거칠고 날것 같은 모양새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사건에 대처하는 다가구 주택 이웃들의 자세 역시 본능에 가깝긴 하지만 섬뜩함이 좀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읽는 동안 한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그린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이 떠올랐습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의 등장인물들이 다가구 주택의 이웃들이긴 하지만 실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들 속에서 비극이 벌어졌다는 점, 그래서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이 놀라움 뿐 아니라 서늘함까지 전해줬다는 점,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착잡함을 지울 수 없었다는 점 등 어딘가 닮은꼴이라는 뉘앙스를 짙게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괜히 스케일만 크고 눈에 힘만 잔뜩 들어간 채 정작 중요한 서사를 놓친 대작들에 비하면 훨씬 더 쫀쫀하고 알찬 미스터리입니다. 간혹 눈에 띄었던 작위적인 전개 – 주로 수빈의 탐문이 의외로 쉽게 풀려나가는 지점에서 목격되곤 했던 – 가 옥의 티처럼 느껴져 별 다섯 개까지는 어려웠지만, 네 개 반은 충분히 받을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소소한 배경 속에서 이처럼 큰 서사를 뽑아낸 작가의 이력이 궁금했는데, 띠지를 보니 ‘대형 신인의 첫 장편’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과 한국추리작가협회 황금펜상을 수상한 단편들도 소개됐는데 가능하면 다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송시우의 두 번째 장편이 기다려집니다. 더불어 이 작품이 ‘대형 신인의 성공적인 데뷔작’이라는 평을 듣게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