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개주막 기담회 케이팩션
오윤희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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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영화나 드라마는 잘 못 봐도 무서운 이야기를 읽는 건 좋아하는 취향이라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대 괴담이나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삼개주막 기담회라는 제목에 바로 눈길이 끌렸는데, 특히 미야베 월드 2처럼 시대물 기담이라 더 관심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수록작이 실려 있는데, 수록작들의 공통점은 제목에서 떠올릴 수 있듯 삼개주막이라는 공간입니다. 마포나루의 다른 이름인 삼개나루 인근에서 30대 후반의 주모 김씨가 3남매를 키우며 꾸려가는 삼개주막엔 보부상, 방물장수, 전기수(傳奇叟, 돈을 받고 소설을 읽어주는 낭독가), 허름한 양반 등 그야말로 다양한 손님들이 드나듭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합석한 손님들이나 삼개주막 식구들에게 자신이 직접 겪은 기담 혹은 괴담을 들려주곤 합니다.

 

상대방의 얼굴만 보고 현재 혹은 미래의 배우자 얼굴을 정확히 그려내는 신비한 노인의 이야기(그림 그려주는 노인), 잔혹한 죽음을 불러온 처첩간의 혈투에 환생 코드가 버무려진 이야기(첩의 환생), 탐욕에 눈이 멀어 무차별 아동 유괴살인을 저지른 자들의 만행(유괴된 아이), 한밤중에 길을 잃은 선비가 만난 숲속 외딴 저택의 양반 일가족의 비밀(과거 보러 가는 길), 멀쩡한 며느리를 죽여 열녀문을 하사받으려는 사악한 음모(열녀) 등 호러와 판타지와 괴담이 골고루 포진돼있는 무척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두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남았는데, 하나는 수록작 대부분이 너무 익숙하고 낯익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작가는 매 작품마다 본 이야기가 일단락된 뒤 비하인드 스토리또는 마지막 반전을 마련해놓긴 했지만 그것이 너무 익숙하고 낯익음을 상쇄시킬 만한 큰 힘을 갖진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론 첫 수록작인 그림 그려주는 노인이 가장 눈에 띄었는데 아무래도 신선한 소재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이야기 자체가 대체로 정직하고 얌전하다는 점입니다. 소재가 진부하더라도 이야기가 예상 밖의 전개를 보였다면 이 작품만의 강점이자 미덕이 됐겠지만 대부분은 소재만큼 낯익은 전개에 머무르고 말아서 읽을수록 점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첩의 환생이나 열녀는 다 아는 (혹은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를 단지 조금 세련된 형태로 정리해놓은 느낌이라 실망감이 가장 컸습니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은 한국 역사 기담이라는 출판사 홍보카피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6편의 수록작 중 전자가 1~2, 후자가 4~5편 정도라고 할까요?

 

마지막 수록작인 옹기장의 꿈의 엔딩을 보면 작가가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그렇다면 다음 작품에선 좀더 과감하고 파격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줄 것을 바라고 싶습니다. 귀신, 환생, 예지력을 다루는 호러 판타지 기담은 작가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괜찮은 비교적 자유로운 장르지만 삼개주막 기담회는 왠지 틀에 박힌 점잖고 모범적인 교과서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후속작이 나온다면 꼭 찾아 읽긴 하겠지만 여전히 진부한 기담을 만나게 된다면 그 뒤로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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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김세화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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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실종됐던 세 어린이의 유골이 용무산에서 발견됩니다. 당시 경찰 수색에 참여했던 사회부 기자 김환은 이 잡듯 벌어졌던 수색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유골이 너무나 평범한 곳에서 발견된 점에 의문을 가집니다. 기자로서의 사명감 이상의 책임감을 느껴온 김환은 경찰과 법의학자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애쓰는 한편 스스로 과거의 취재영상들을 재검토하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그러던 중, 실종사건과 간접적으로 관련 있던 한 건설업자가 살해되자 김환은 두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미스터리 속 피해자가 어린이들인 경우 사건의 비극성은 심연 같은 분위기를 갖기 마련입니다. 유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이든 언론이든 사건에 개입한 사람들의 참담함이나 분노 역시 말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게 됩니다. 10년 전 세 어린이의 실종사건 보도를 담당했던 사회부 기자 김환은 오랜 시간동안 그 무게에 짓눌리면서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넘어 막대한 부채감까지 끌어안고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런 김환에게 10년 만에 발견된 어린이들의 유골은 남다른 의미와 함께 반드시 진실을 찾아내라는 강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10년은 진실이 훼손되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아무리 경찰 이상의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회부 기자라도 막연한 책임감과 사명감만으로 진실을 찾겠다고 뛰어들기 힘든 조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갑작스런 살인사건이 끼어들면서 김환에게 아주 작은 실마리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폴리스라인으로 봉쇄된 사건현장에 잠입하는 무모함까지 발휘하면서 김환은 기어이 10년 전의 진실을 찾아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살인사건 전문기자 잭 매커보이의 활약을 보면 의외로 경찰이나 탐정 못잖게 기자라는 직업이 미스터리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총기가 난무하고 잔혹한 연쇄살인이 수시로 벌어지는 미국과는 환경 차이가 꽤 크지만 어쨌든 사회부 기자라는 직업은 강력사건 수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민간인이라는 점에서 미스터리 해결사로서 활약할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김환은 관할서 형사과장은 물론 인연이 있는 법의학자를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얻는가 하면, 직접 발로 뛰어가며 10년 동안 자신이 놓친 게 있는지 확인하는 열혈 사회부 기자입니다. 부상을 입어가며 범행현장을 조사하는 행동력도 있고 입수한 단서들을 통해 차곡차곡 퍼즐을 완성해가는 추리력도 겸비한 인물입니다. 잭 매커보이만큼 엄청난 사건을 대한 건 아니지만 그의 성실한 활약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했습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사실 그만큼 아쉬움도 많은 작품이었는데, 무엇보다 다소 엉성해 보이는 몇몇 설정들이 초반부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습니다. 매장된 상태에서 유골이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사인은 저체온증이라는 황당한 추정을 합니다. 유골이 흐트러진 채 발견됐는데도 그 누구도 그 사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 허술한 대처들은 나중에 김환에 의해 모두 바로 잡히는데, 아무리 봐도 김환의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억지 설정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막판에 김환의 추리가 조금은 비약에 가까웠던 점이나 (등장인물 스스로 고백했듯) 경찰서 형사과장을 부하처럼 좌지우지하는 장면, 그리고 중반에 뜬금없이 나열된 과거의 황당한 제보들도 아쉬웠고, 김환이 방송국 내에서 겪는 갖은 핍박과 모욕은 그 맥락을 잘 알 수 없어서 그저 눈요기에 그쳤다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한국 미스터리 작가를 만난 건 무척 반가운 일이었지만 사회부 기자 김환이 시리즈 캐릭터로 자리 잡으려면 지금보다는 더 치밀한 설계와 함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문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김환은 좀더 매력적이어야 하고, 올드하거나 단선적인 문장들도 다듬어져야 할 것 같고, 사건 자체는 물론 그 해법 과정도 호기심과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게 설계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국 미스터리를 아끼고 응원하는 마음은 늘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까지 무조건 감쌀 수는 없는 일이기에 개인적으론 책 뒤편에 실린 적잖은 추천사들이 조금은 난감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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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수상한 서재 4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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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 인근 온계리에 살던 6살 지아는 어머니가 계엄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걸 목격했고 그 충격과 공포와 죄책감으로 인해 두 번째 인격인 혜수를 만들어냅니다. 지아가 극도의 스트레스에 빠질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던 혜수는 영리하고 악의에 찬 모습으로 무자비한 짓을 저질러놓곤 태연히 모습을 감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0세기의 마지막 밤, 혜수가 일으킨 상해사건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25살의 지아는 현실에서 도망치듯 몸과 마음을 혜수에게 내주고 말았는데, 문제는 지아가 다시금 자기 자신을 되찾은 게 무려 19년 뒤라는 점, 또 하필 그 순간이 강원도 항구도시 묵진의 깊은 산속에서 삽을 든 채 젊은 여자의 시체를 파묻는 중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승민의 데뷔작인 콘크리트는 바닷가 인근의 쇠락한 도농복합시인 안덕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미스터리처럼 시작되지만 뒤로 갈수록 불온한 태풍, 지독한 악취, 도시를 뒤덮은 거미 등 온갖 불편한 코드들과 함께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를 발산한 작품인데,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막판 전개에 다소 공감할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워낙 필력이 뛰어나서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은 혜수라는 이중인격을 지닌 지아가 19년 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서울을 떠난 혜수가 항구도시 묵진에서 보낸 그 19년은 지아로서는 조금도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남의 기억일 뿐이지만, 젊은 여자의 사체를 파묻던 순간 자기 인격을 되찾은 탓에 지아는 도저히 그 19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죽은 여자는 누구이며, 그녀를 죽인 게 혜수인지, 그렇다면 19년이나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혜수가 왜 하필 그 순간 자신을 소환한 것인지 지아로서는 풀지 않으면 안 될 수수께끼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쇠락한 항구도시 묵진에서 지아는 우여곡절 끝에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콘크리트의 서평에서 하승민의 탄탄한 필력을 인정하긴 했지만,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정유정, 김언수를 잇는 한국형 스릴러 작가라는 출판사 홍보글을 봤을 때는 솔직히 과장광고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읽는 도중 실제로 여러 차례 정유정의 ‘7년의 밤과 김언수의 뜨거운 피가 떠올랐는데, ‘7년의 밤의 공포와 귀기를 연상시키는 지아의 진실 찾기 여정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고, ‘뜨거운 피의 배경이었던 구암 바다의 비릿하고 음산한 분위기보다 더 강한 악취를 내뿜는 묵진의 쇠락과 음탕함은 잔혹한 두 번째 인격 혜수가 그곳에서 보낸 19년의 불길함을 더욱 고조시켰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전작에 비해 한층 더 깊고 묵직해진 문장을 통해 이 모든 위험천만한 캐릭터와 분위기와 소재들을 잘 버무렸습니다. 더는 새롭지 않은 이중인격이라는 설정을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냈고, 미스터리 역시 빈틈없이 촘촘하게 배치하여 막판까지 잘 끌고 갔으며, 비록 눈치 빠른 독자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반전은 반전 그 자체보다 인물들의 감정이나 심리에 더 방점을 찍은 덕분에 결코 허술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혜수에게 몸과 마음을 내준 채 19년간 자취를 감췄던 지아의 심리도, 또 애초 공포와 죄책감에서 태어나 악의로 똘똘 뭉쳤지만 결국 상처투성이 지아와 닮은꼴일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인격 혜수도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엔 그저 안타깝고 안쓰럽게만 여겨졌습니다.

 

나름 호평에 가까운 서평을 쓰고도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과도한 사족과 그로 인한 필요 이상의 분량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본류와 무관한 사족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고백하자면 중반쯤부터 클라이맥스 직전까진 스킵하면서 넘긴 페이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매력이 가득했던 문장들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조연들의 시시콜콜한 사연이나 동어반복처럼 느껴진 지나친 풍경 묘사 등 없어도 무방한 내용들을 되풀이하면서 피로도가 높아진 탓입니다. 작가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겠지만 500페이지 내외였다면 오히려 더 탄탄하고 내실 있는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이건 지극히 사적인 의견이고 601페이지의 분량도 모자라다고 생각할 독자도 분명 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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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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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색창연한 언덕 위의 저택, 너무나도 완벽한 아내,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화가로서의 명성 등 43살 이한조는 삶의 절정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가 남겨놓은 몇 장의 소설 원고를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소설이지만 그건 분명 한조 본인의 이야기였고, 그대로 출간된다면 지금의 삶을 완전히 파멸시킬 만큼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원고를 읽으면서 한조는 25년 전 여름의 그날을 떠올립니다. 하천에서 발견된 이웃 여고생 지수의 시신은 한조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운명을 잔인하게 비틀어버렸습니다. 한조는 아내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에 대한 의문과 함께 오랫동안 외면하며 봉인해온 25년 전 사건이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폐인이나 다름없던 자신을 성공한 화가로 이끈 완벽한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 한 편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려 하자 패닉에 빠진 한조의 현재 시점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두 가족을 산산조각 낸 25년 전 이웃 여고생 지수의 죽음의 미스터리입니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복수극이라면, 25년 전의 미스터리는 어긋난 사랑, 진실과 거짓, 오해와 외면 등 치명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시간에 거기 없었더라면, 그녀가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p362에서 발췌)

 

운명적인 사건이 그렇듯 한조와 지수의 가족을 박살낸 25년 전 사건은 사소한 계기와 미묘한 엇갈림 때문에 벌어진 비극입니다. 더구나 지수의 죽음의 진실을 모두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다들 그 진실의 한쪽 면만 봤던 탓에, 또 자신이 본 그 한쪽 면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깊숙이 숨긴 탓에 비극은 예정된 것보다 훨씬 더 큰 폭발력과 후유증을 남긴 것입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조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내의 의도와 지수의 죽음의 진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면서 한조는 끔찍한 파국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현재의 복수극과 과거의 미스터리가 이정명 특유의 묵직한 문장 속에서 촘촘하고 정교하게 잘 엮인 작품입니다. 시종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팽팽함과 속도감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 특히 25년 전 진실이 밝혀지는 50페이지 남짓한 막판 반전은 (약간의 기시감이 드는 설정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엄청난 비극이란 게 실은 얼마나 사소한 것에 기인할 수 있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다만, 현재 시점의 한조가 처한 위기, 소설을 통해 한조를 파멸시키려는 아내의 복수는 다 읽은 뒤에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억지 설정으로 느껴져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동기도, 과정도, 목적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어서 25년 전 미스터리의 매력을 깎아 내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오히려 평범한 복수극 구도였다면 과거 지수의 죽음과도 개연성 있게 연결될 수 있었고, 독자 역시 아내의 심리와 한조의 공포에 좀더 명쾌하게 공감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과연 누가 저런 식으로 복수를 설계할까?”라는 아쉬움은 책을 덮은 뒤에도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이정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영상화될 계획이 선 걸로 나와 있는데, 제가 느꼈던 아쉬운 대목이 이 작품의 핵심 서사 중 한 가지라 과연 어떤 식으로 영상으로 옮겨질지 무척 궁금합니다. 그 대목이 시청자들의 납득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자칫 용두사미 드라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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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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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속에서 30대 여성 오기현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실족사나 자살로 보였지만 성()이 다른 언니 윤의현은 담당형사 백규민에게 화원을 운영하는 동생의 의붓아버지가 의심스럽다는 암시를 준다. 백규민은 실제로 화원에서 여러 가지 수상한 정황을 찾아낸다. 한편, 자신이 출강하는 대학에서 교수에 의한 여학생 성추행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자 윤의현은 전력을 다해 피해학생을 도우려 애쓴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성추행 교수에 대한 응징을 꾀한다.

수사가 답보 상태인 가운데 또 다른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백규민은 무관해 보이던 사건들이 실은 서로 연결돼있음을 직감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릴 듯한 이 작품은 탐욕에 찌든 인간의 추악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고통스런 여정을 생생하게 그립니다. 폭력, 갈취, 갑질, 성폭력, 은폐, 살인 등 온갖 끔찍한 행위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부와 권력과 힘 앞에서 그저 무기력할 뿐인 희생자들은 물리적인 고통은 물론 정신마저 참혹하게 파괴당하면서도 좀처럼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사건 오기현의 죽음, 대학 내 성폭력 사건 이 병행되는데,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이 두 사건의 유일한 공통점은 시간강사 윤의현이라는 인물뿐입니다. 그녀는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백규민 형사를 돕는 한편, 성폭력의 트라우마에 벌벌 떠는 제자를 감싸주며 가해자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려 동분서주하기도 합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인 백규민은 슈퍼맨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라 수사 과정이 조금은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인간적이고 사실감을 갖춘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굳건한 믿음과 집요한 의심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데, 특히 한 번 사람을 믿으면 계속 신뢰하는 그의 인성 덕분에 사건 관련자인 윤의현에게 다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이입은 백규민의 수사를 혼선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미스터리 픽션이다 보니 결국 어떤 식으로든 악()은 응징될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폭력에 휘말려 인생의 일부든 전부든 망가지고 만 희생자들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가해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이 그에 비례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감정적인 이입이 어느 선 이상을 넘지 못한 것도 사실인데, 개인적으론 작가가 사건들을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혹은 최대한 담담하게 그리려 한 탓이란 생각입니다. 이 아쉬움은 결국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극복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특별한 여운이나 인상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분량에 비해 인물과 사건이 많고 이야기 전개도 빨라서 어느 대목을 소개하든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보니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긴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졌고 캐릭터와 구성과 문장 모두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딱 한 가지, 막판 반전 코드 때문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중반부쯤부터 혹시?”라는 예감을 가질 수 있는데, 개인적으론 제발 그것만은...”이란 바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코드가 진실을 여는 열쇠로 작동되자 앞서 읽은 이야기들이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맥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한 평이긴 하지만 얼마 전에도 이 코드가 활용된 한국 스릴러를 읽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어서 그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안정감 있는 필력과 문장 덕분에 이선영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출간된 작품들을 살펴보니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소재들이라 당장 찾아 읽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 작품이 출간된다면 반드시 읽을 한국 장르물목록 상단에 올려놓을 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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