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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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색창연한 언덕 위의 저택, 너무나도 완벽한 아내,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화가로서의 명성 등 43살 이한조는 삶의 절정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가 남겨놓은 몇 장의 소설 원고를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소설이지만 그건 분명 한조 본인의 이야기였고, 그대로 출간된다면 지금의 삶을 완전히 파멸시킬 만큼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원고를 읽으면서 한조는 25년 전 여름의 그날을 떠올립니다. 하천에서 발견된 이웃 여고생 지수의 시신은 한조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운명을 잔인하게 비틀어버렸습니다. 한조는 아내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에 대한 의문과 함께 오랫동안 외면하며 봉인해온 25년 전 사건이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폐인이나 다름없던 자신을 성공한 화가로 이끈 완벽한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 한 편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려 하자 패닉에 빠진 한조의 현재 시점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두 가족을 산산조각 낸 25년 전 이웃 여고생 지수의 죽음의 미스터리입니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복수극이라면, 25년 전의 미스터리는 어긋난 사랑, 진실과 거짓, 오해와 외면 등 치명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시간에 거기 없었더라면, 그녀가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p362에서 발췌)

 

운명적인 사건이 그렇듯 한조와 지수의 가족을 박살낸 25년 전 사건은 사소한 계기와 미묘한 엇갈림 때문에 벌어진 비극입니다. 더구나 지수의 죽음의 진실을 모두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다들 그 진실의 한쪽 면만 봤던 탓에, 또 자신이 본 그 한쪽 면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깊숙이 숨긴 탓에 비극은 예정된 것보다 훨씬 더 큰 폭발력과 후유증을 남긴 것입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조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내의 의도와 지수의 죽음의 진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면서 한조는 끔찍한 파국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현재의 복수극과 과거의 미스터리가 이정명 특유의 묵직한 문장 속에서 촘촘하고 정교하게 잘 엮인 작품입니다. 시종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팽팽함과 속도감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 특히 25년 전 진실이 밝혀지는 50페이지 남짓한 막판 반전은 (약간의 기시감이 드는 설정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엄청난 비극이란 게 실은 얼마나 사소한 것에 기인할 수 있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다만, 현재 시점의 한조가 처한 위기, 소설을 통해 한조를 파멸시키려는 아내의 복수는 다 읽은 뒤에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억지 설정으로 느껴져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동기도, 과정도, 목적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어서 25년 전 미스터리의 매력을 깎아 내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오히려 평범한 복수극 구도였다면 과거 지수의 죽음과도 개연성 있게 연결될 수 있었고, 독자 역시 아내의 심리와 한조의 공포에 좀더 명쾌하게 공감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과연 누가 저런 식으로 복수를 설계할까?”라는 아쉬움은 책을 덮은 뒤에도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이정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영상화될 계획이 선 걸로 나와 있는데, 제가 느꼈던 아쉬운 대목이 이 작품의 핵심 서사 중 한 가지라 과연 어떤 식으로 영상으로 옮겨질지 무척 궁금합니다. 그 대목이 시청자들의 납득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자칫 용두사미 드라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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