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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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속에서 30대 여성 오기현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실족사나 자살로 보였지만 성()이 다른 언니 윤의현은 담당형사 백규민에게 화원을 운영하는 동생의 의붓아버지가 의심스럽다는 암시를 준다. 백규민은 실제로 화원에서 여러 가지 수상한 정황을 찾아낸다. 한편, 자신이 출강하는 대학에서 교수에 의한 여학생 성추행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자 윤의현은 전력을 다해 피해학생을 도우려 애쓴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성추행 교수에 대한 응징을 꾀한다.

수사가 답보 상태인 가운데 또 다른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백규민은 무관해 보이던 사건들이 실은 서로 연결돼있음을 직감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릴 듯한 이 작품은 탐욕에 찌든 인간의 추악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고통스런 여정을 생생하게 그립니다. 폭력, 갈취, 갑질, 성폭력, 은폐, 살인 등 온갖 끔찍한 행위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부와 권력과 힘 앞에서 그저 무기력할 뿐인 희생자들은 물리적인 고통은 물론 정신마저 참혹하게 파괴당하면서도 좀처럼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사건 오기현의 죽음, 대학 내 성폭력 사건 이 병행되는데,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이 두 사건의 유일한 공통점은 시간강사 윤의현이라는 인물뿐입니다. 그녀는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백규민 형사를 돕는 한편, 성폭력의 트라우마에 벌벌 떠는 제자를 감싸주며 가해자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려 동분서주하기도 합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인 백규민은 슈퍼맨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라 수사 과정이 조금은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인간적이고 사실감을 갖춘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굳건한 믿음과 집요한 의심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데, 특히 한 번 사람을 믿으면 계속 신뢰하는 그의 인성 덕분에 사건 관련자인 윤의현에게 다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이입은 백규민의 수사를 혼선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미스터리 픽션이다 보니 결국 어떤 식으로든 악()은 응징될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폭력에 휘말려 인생의 일부든 전부든 망가지고 만 희생자들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가해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이 그에 비례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감정적인 이입이 어느 선 이상을 넘지 못한 것도 사실인데, 개인적으론 작가가 사건들을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혹은 최대한 담담하게 그리려 한 탓이란 생각입니다. 이 아쉬움은 결국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극복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특별한 여운이나 인상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분량에 비해 인물과 사건이 많고 이야기 전개도 빨라서 어느 대목을 소개하든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보니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긴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졌고 캐릭터와 구성과 문장 모두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딱 한 가지, 막판 반전 코드 때문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중반부쯤부터 혹시?”라는 예감을 가질 수 있는데, 개인적으론 제발 그것만은...”이란 바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코드가 진실을 여는 열쇠로 작동되자 앞서 읽은 이야기들이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맥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한 평이긴 하지만 얼마 전에도 이 코드가 활용된 한국 스릴러를 읽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어서 그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안정감 있는 필력과 문장 덕분에 이선영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출간된 작품들을 살펴보니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소재들이라 당장 찾아 읽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 작품이 출간된다면 반드시 읽을 한국 장르물목록 상단에 올려놓을 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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