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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ㅣ 수상한 서재 4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6월
평점 :
1980년 광주 인근 온계리에 살던 6살 지아는 어머니가 계엄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걸 목격했고 그 충격과 공포와 죄책감으로 인해 두 번째 인격인 혜수를 만들어냅니다. 지아가 극도의 스트레스에 빠질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던 혜수는 영리하고 악의에 찬 모습으로 무자비한 짓을 저질러놓곤 태연히 모습을 감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0세기의 마지막 밤, 혜수가 일으킨 상해사건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25살의 지아는 현실에서 도망치듯 몸과 마음을 혜수에게 내주고 말았는데, 문제는 지아가 다시금 자기 자신을 되찾은 게 무려 19년 뒤라는 점, 또 하필 그 순간이 강원도 항구도시 묵진의 깊은 산속에서 삽을 든 채 젊은 여자의 시체를 파묻는 중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승민의 데뷔작인 ‘콘크리트’는 바닷가 인근의 쇠락한 도농복합시인 안덕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미스터리처럼 시작되지만 뒤로 갈수록 불온한 태풍, 지독한 악취, 도시를 뒤덮은 거미 등 온갖 불편한 코드들과 함께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를 발산한 작품인데,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막판 전개에 다소 공감할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워낙 필력이 뛰어나서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은 혜수라는 이중인격을 지닌 지아가 19년 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서울을 떠난 혜수가 항구도시 묵진에서 보낸 그 19년은 지아로서는 조금도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남의 기억’일 뿐이지만, 젊은 여자의 사체를 파묻던 순간 자기 인격을 되찾은 탓에 지아는 도저히 그 19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죽은 여자는 누구이며, 그녀를 죽인 게 혜수인지, 그렇다면 19년이나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혜수가 왜 하필 그 순간 자신을 소환한 것인지 지아로서는 풀지 않으면 안 될 수수께끼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쇠락한 항구도시 묵진에서 지아는 우여곡절 끝에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콘크리트’의 서평에서 하승민의 탄탄한 필력을 인정하긴 했지만,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정유정, 김언수를 잇는 한국형 스릴러 작가”라는 출판사 홍보글을 봤을 때는 솔직히 ‘과장광고’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읽는 도중 실제로 여러 차례 정유정의 ‘7년의 밤’과 김언수의 ‘뜨거운 피’가 떠올랐는데, ‘7년의 밤’의 공포와 귀기를 연상시키는 지아의 진실 찾기 여정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고, ‘뜨거운 피’의 배경이었던 구암 바다의 비릿하고 음산한 분위기보다 더 강한 악취를 내뿜는 묵진의 쇠락과 음탕함은 잔혹한 두 번째 인격 혜수가 그곳에서 보낸 19년의 불길함을 더욱 고조시켰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전작에 비해 한층 더 깊고 묵직해진 문장을 통해 이 모든 위험천만한 캐릭터와 분위기와 소재들을 잘 버무렸습니다. 더는 새롭지 않은 이중인격이라는 설정을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냈고, 미스터리 역시 빈틈없이 촘촘하게 배치하여 막판까지 잘 끌고 갔으며, 비록 눈치 빠른 독자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반전은 반전 그 자체보다 인물들의 감정이나 심리에 더 방점을 찍은 덕분에 결코 허술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혜수에게 몸과 마음을 내준 채 19년간 자취를 감췄던 지아의 심리도, 또 애초 공포와 죄책감에서 태어나 악의로 똘똘 뭉쳤지만 결국 상처투성이 지아와 닮은꼴일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인격 혜수도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엔 그저 안타깝고 안쓰럽게만 여겨졌습니다.
나름 호평에 가까운 서평을 쓰고도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과도한 사족’과 그로 인한 필요 이상의 분량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본류와 무관한 사족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고백하자면 중반쯤부터 클라이맥스 직전까진 스킵하면서 넘긴 페이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매력이 가득했던 문장들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조연들의 시시콜콜한 사연이나 동어반복처럼 느껴진 지나친 풍경 묘사 등 없어도 무방한 내용들을 되풀이하면서 피로도가 높아진 탓입니다. 작가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겠지만 500페이지 내외였다면 오히려 더 탄탄하고 내실 있는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이건 지극히 사적인 의견이고 601페이지의 분량도 모자라다고 생각할 독자도 분명 있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