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사라진 날
할런 코벤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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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유능한 투자자문가 사이먼 그린은 직업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큰딸 페이지가 대학 입학 후 한 학기 만에 마약중독자가 되어 가출한 뒤로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어느 날 공원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던 페이지를 발견하고 쫓아가지만 에런이라는 남자의 방해 때문에 오히려 폭행범 신세가 됩니다. 가까스로 피소를 면했지만 사이먼은 얼마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을 방해했던 에런이 실은 페이지의 남자친구이자 그녀를 마약중독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으며 페이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이먼은 아내 잉그리드와 함께 직접 페이지를 찾기로 결심하고 위험천만한 마약소굴로 향합니다.

 

네가 사라진 날까지 한국에 출간된 작품이 18편이고, 그중 8편을 읽었으니 아직 제대로 된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명성과 필력에 비해 저에게 무척 야박한 평점을 받아온 작가가 할런 코벤입니다. 최근 읽은 작품들은 비교적 호평과 함께 만점에 가까운 평점을 줬지만, 초기에 만났던 작품들에겐 무슨 이유에선지 혹평이나 다름없는 서평을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개정판으로 출간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를 읽은 뒤에도 절감했던 바지만, ‘네가 사라진 날을 읽고 나니 혹평을 남겼던 그 작품들을 꼭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런 코벤의 진가를 뒤늦게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네가 사라진 날은 할런 코벤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실종이 또 한 번 매력을 발산한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마약에 중독된 채 끔찍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종적을 감춘 큰딸 페이지를 찾으려는 사이먼의 분투이고, 또 하나는 사이비종교단체와 연관 있어 보이는 살인청부사 커플이 도처를 돌아다니며 살인행각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는 사이먼이 사립탐정 엘레나 라미레스를 만나면서 접점을 맞이합니다. 바로 이 지점부터 사이먼의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되는데, 동시에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페이지의 비밀과 비극까지 드러나면서 사이먼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혹독한 시간들이 밀려듭니다.

 

나는 누군가 죽는 이야기보다 사라지는 이야기에 매료되는 편이다. 살인은 사건 해결에 초점을 두지만 실종은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자, 우리를 산산이 깨부술 만한 거대한 것이다.” (할런 코벤, 출간 인터뷰에서)

 

독자 입장에서 사이먼에게 이입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희망때문입니다. 만약 페이지가 살해당한 상태에서 사이먼이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면 이 이입의 쾌감은 결코 만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이먼은 페이지를 찾는 내내 자책과 절망을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희망하나로 위험천만한 고비들을 넘곤 합니다. 반면 우리를 산산이 깨부술 만한 거대한 것이라는 표현대로 희망은 순식간에 그 얼굴을 뒤집으며 사이먼을 심연 속으로 집어던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사이먼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희망에게 배신을 당하곤 합니다. 영영 페이지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가족들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사이먼의 희망에는 셀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납니다.

 

이야기는 긴박하면서도 무자비한 액션 장면과 함께 대미를 장식하지만, 독자는 에필로그에서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것은 희망이 사이먼에게 가한 가장 큰 배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이먼으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희망을 품게 만드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책을 덮을 때까지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반전이 거듭된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 복잡하게 얽힌 심리와 감정들, 그리고 놀라움과 함께 애틋한 여운을 품게 하는 반전 어린 엔딩에 이르기까지 할런 코벤이 직조한 정교한 설계도에 감탄하면서 마지막 장을 덮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된 작품의 절반도 못 읽은 상태지만 단언컨대 할런 코벤 최고의 작품이라는 해외언론의 호평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네가 사라진 날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조만간 보이 프럼 더 우즈를 읽을 예정인데, 점점 더 그 진가를 맛보게 되는 할런 코벤의 필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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