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이
로미 하우스만 지음, 송경은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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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글 범위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된 서평입니다.)

 

14년 전에 실종된 딸 레나로 추정되는 여자가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마티아스는 이내 레나가 아니라 야스민이라는 여자임을 확인하곤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병원 복도에서 레나의 어린 시절과 꼭 닮은 소녀 한나를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조사 결과 실제로 한나는 레나의 딸로 밝혀집니다. 그런데 한나는 교통사고로 입원한 야스민을 엄마라고 불러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야스민은 괴한에게 납치당한 뒤 4개월간 납치범의 아내이자 한나의 엄마 레나로 살아오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털어놓습니다. 퇴원 후 야스민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납치범의 정체와 그가 레나와 자신을 납치한 이유, 그리고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숲속 오두막에서 아이들을 키워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애씁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한 사이코패스에 의한 잔혹하고 일그러진 납치극정도로 심플해 보이지만 사랑하는 아이는 평범한 소재라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특별한 서사와 개성을 지닐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14년 전 실종된 레나, 4개월 전 납치된 뒤 폭력과 공포 속에 레나로 살아야만 했던 야스민, 레나의 딸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야스민을 자연스레 엄마라고 부르는 소녀 한나, 그리고 딸을 잃은 상심을 손녀 한나를 통해 보상받고 싶은 것은 물론 야스민에게서 레나에 관한 단서 하나라도 알아내고 싶은 절박한 심정의 마티아스 등 다양한 화자들이 들려주는 기이한 납치극의 진상은 상투적이고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뛰어넘어 읽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출판사의 소개글만 보고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건 야스민은 레나라는 여자의 대타로 납치됐고, 무슨 이유에선지 레나로 살아갈 것을 강요당했다는 점입니다. 이 설정까지만 해도 남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끄는 점은 레나가 낳은 것이 분명한 한나가 아빠에 의해 납치된 야스민을 태연스레 엄마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또 야스민이 지독한 폭행을 당하는 걸 목격하고도 두려워하거나 동정하기는커녕 엄마가 실수해서 벌을 받는 거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장면도 그저 기이해보일 뿐입니다.

이 미스터리의 열쇠는 그들이 사는 숲속 오두막에 있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국경지대의 숲속에 자리한 오두막은 모든 창문이 틀어 막혀 햇빛 한 톨 들어올 틈도 없는 완벽한 감옥입니다. 이 기이한 공간이 한나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를 지켜보는 건 사건 자체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작품이 단지 탈출에 성공한 야스민이 진범의 정체를 밝히고 실종된 레나의 진실을 알아내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비슷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 대동소이했겠지만,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두꺼운 책을 통해 지식을 쌓아온 한나라는 캐릭터 덕분에 전혀 결이 다른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나는 납치범인 아빠와 공범이라도 되는 듯 야스민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더욱 요동치게 만듭니다. 또 자신을 실종된 딸이 남긴 소중한 손녀로 여기는 마티아스를 대하는 장면에선 마치 어린 소시오패스마냥 천진난만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발산하는데, 그래선지 과연 한나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독자와 마주하게 될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건 자체를 이끌어 가는 건 어떻게든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 자신과 레나를 납치한 이유를 확인하려는 야스민과 그녀를 통해 실종된 딸 레나의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마티아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다 극성스런 언론의 표적이 된 신세지만 레나의 진실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합니다. 평범한 일반인이다 보니 슈퍼히어로 같은 활약을 기대할 순 없는데, 이 부분은 마티아스의 친구인 게르트 브륄링 경감의 적절한 지원을 통해 해결됩니다.

 

완벽하게 통제된 숲속 오두막의 주인인 납치범, 14년 전 납치되어 아이까지 낳은 레나, 그녀의 대타로 납치된 야스민, 14년 동안 실종된 딸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마티아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소녀 한나가 펼치는 독특한 납치 스릴러 사랑하는 아이는 흥미진진함은 물론 여러 가족에게 닥친 끔찍한 비극의 여운까지 전해주는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딱히 납치극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충분히 기대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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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든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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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남편 서배스천을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30대 심리상담가 마리아나는 여전히 상실감과 암울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언니 부부의 사고사에 이어 남편까지 잃은 마리아나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은 서배스천과 함께 키워온 조카 조이뿐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조이는 어느 날 패닉 상태에 빠진 채 다급한 연락을 해옵니다. 유일한 친구인 타라가 끔찍하게 살해됐다는 것입니다. 초조해진 마리아나는 즉시 케임브리지로 달려가고, 충격에 빠진 조이를 보호하는 한편 타라 살인범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리아나는 속히 범인을 잡아야만 조이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심리상담가일 뿐인 마리아나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연이어 터집니다.

 

그리스 신화와 비극, 연쇄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된 심리학 스릴러!”라는 홍보카피 때문에 읽을지 말지 꽤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최근 심리스릴러 혹은 심리학스릴러(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조금 넓게 보면 결국 같은 이란 생각입니다)에 여러 번 질린 데다 그리스 신화역시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끼어들 때마다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기대감의 근거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는 작가의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였는데 아직 읽지 못한 상태라 일단 100페이지까지만 읽어보자, 라는 심정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첫 페이지의 프롤로그부터 마리아나가 범인으로 의심하는 자의 이름이 공개됩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고전문학 교수 에드워드 포스카입니다. 그는 특권층 출신에 뛰어난 미모를 지닌 몇몇 여학생에게 수상쩍은 개인지도를 하는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파티를 열거나 은밀한 비밀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스카 교수를 숭배하는 그 여학생들은 일명 메이든스’(처녀들)라 불리며 유명세와 경계심을 동시에 얻었는데, 마리아나는 그 사실에 주목하며 포스카 교수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킵니다.

 

사실, 평범한 심리상담가가 조카의 친구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설정은 그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잘 알기에 수양딸처럼 키워온 조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마리아나의 의지는 이해가 되지만, 단서나 증거를 찾기보다 포스카 교수와 메이든스를 심리상담가의 관점에서 관찰하며 진상을 밝혀내겠다는 태도는 다소 작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작가는 마리아나의 행보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녀가 지금도 겪고 있는 남편을 잃은 심연과도 같은 상실감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마리아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건 살해수법과 범인의 메시지입니다.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들은 마치 의식에 바쳐진 제물 같은 인상을 남겼는데, 마리아나에겐 그런 살해수법이 수사진들의 눈을 멀게 하여 중요한 것을 못 보게 하려는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또 마리아나는 경찰이 놓친 현장 단서를 손에 넣는데 그것은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엽서들입니다. 거기에 적힌 것은 고귀한 처녀를 데메테르의 딸에게 바쳐야 한다.”라든가 이제 곧 너의 목은 칼을 맞고 피가 솟구쳐 흐를 것이다.” 같은 그리스 비극의 끔찍한 인용문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포스카 교수를 향한 마리아나의 의심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지만, 정작 경찰은 마리아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떠날 것을 강하게 요구할 뿐입니다.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져서 애초 100페이지 정도만 읽겠다던 결심이 무색해지고 말았는데, 이 작품의 진짜 백미는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막판 반전에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동기가 폭로되는 순간, 그저 어설픈 독자일 뿐인 저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는데, 개인적으론 최고의 반전 목록에 넣어도 괜찮을 만큼 충격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작동하겠구나, 라는 감탄과 함께 소소해 보일 수도 있는 모티브를 그리스 신화와 비극, 연쇄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된 심리학 스릴러로 확장시킨 작가의 필력에도 적잖이 놀란 게 사실입니다.

물론 약간은 사족처럼 느껴진 내용들 19세기 시인까지 동원한 마리아나의 상실감에 대한 거듭된 묘사,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유년기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 살짝 과잉처럼 보인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소개 등 이 있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작가의 개성으로 인정할 만 했고, 약간 허술하거나 빈틈이 있는 미스터리와 의도가 빤히 보이는 캐릭터 설정 역시 무시해도 괜찮은 수준의 사소한 아쉬움에 불과합니다.

 

메이든스는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앞서 출간된 성공적인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뒤늦게라도 빨리 찾아 읽어야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출간될 그의 작품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0.5개를 뺀 만큼의 아쉬움이 있었던 것 맞지만 이만한 이야기꾼을 발견한 건 나름 큰 수확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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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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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 하나 없는 한직인 BANC(특이 사건국)로 좌천된 록산 몽크레스티앙 경감은 부임과 동시에 기이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센 강에서 알몸으로 발견된 여성이 이송 도중 탈출했는데, 그녀가 남긴 머리카락을 조사해보니 이미 1년 전에 사망한 유명 피아니스트 밀레나의 DNA와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도망친 여성의 시계와 문신을 통해 추적을 이어가던 록산은 밀레나의 연인으로 알려진 작가 라파엘과 만나는데, 문제는 라파엘이 밀레나에 관해 조금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라파엘 주위에서 끊임없이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 록산은 집요한 조사 끝에 도망친 여성과 밀레나, 그리고 라파엘의 관계를 파악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더불어, 술의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전복과 일탈의 신, 분노와 광기의 신이기도 한 그리스신화 속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그룹이 사건과 관련 있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남들은 다 좋다는데, 혹은 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데 유독 나와는 인연이 없는 작가는?”이란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한두 명쯤은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엔 그런 작가가 꽤 많은 편이고 그중 한 명이 바로 기욤 뮈소입니다. 선물로 받은 전집 세트마저 하염없이 방치할 정도로 관심 밖이던 기욤 뮈소와 처음 만난 건 통속성 강한 미스터리 아가씨와 밤이었는데 기대를 안 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고, 그 여세(?)를 몰아 시간여행을 다룬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까지 읽게 됐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큰맘 먹고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을 장바구니에 담기에 이르렀습니다.

 

제목부터 관심을 자극한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은 한겨울에 알몸으로 강에서 발견된 뒤 자취를 감춘 여성이 알고 보니 1년 전에 이미 죽은 여성으로 밝혀지면서 꽤 흥미로운 출발을 보입니다. 거기다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주인공 록산은 합리적이고 유능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반골 기질 탓에 부당한 처우를 당하고 마는다소 상투적인 여형사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초반부터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죽은 여성 피아니스트의 연인이자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모호한 작가 라파엘, 라파엘의 아버지이자 공교롭게도 록산의 전임자인 바타유 국장이 추적하던 정체불명의 그룹, 사방이 유리인 라파엘의 집에 출몰하는 미지의 인물들, 그리고 한직으로 밀려난 상태라 공식적인 수사를 포기한 채 오롯이 혼자 힘으로 뛰어다녀야 하는 록산과 그녀의 파트너인 박사논문 준비생 발랑틴 등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들이 빠른 템포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갑니다.

특히 별개로 보였던 각각의 사건들이 실은 복잡미묘하게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초반의 기대감과 매력은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다 읽은 뒤에도 머릿속으로 큰 얼개를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가 복잡하고 배배 꼬여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지만) 따라가기 힘든 장르의 믹스역시 난감할 뿐이었는데, 도플갱어 스토리인가 싶으면 갑자기 꿈과 환각과 정신의학이 등장하고, 기괴한 형태로 시신과 현장을 꾸미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스릴러인가 싶으면 느닷없이 그리스신화, 연극, 디오니소스 숭배, 제물과 제의(祭儀)가 튀어나옵니다.

말하자면, 미스터리인 줄 알고 따라가다가 난데없이 호러 혹은 신화 판타지와 맞닥뜨리고, 잠시 후엔 또 다시 미스터리로 급선회하는 혼란이 읽는 내내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도대체 이 작품의 장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수시로 들 수밖에 없었고, 중반을 조금 넘은 지점부터는 애초 주인공과 사건에 품었던 기대감과 매력은 더 이상 이어가기 어려워졌습니다. 잔뜩 연쇄살인을 설정해놓곤 막판에 가서 불가해한 영역으로 독자를 이끌어 납득하기 힘든 결론을 강요하는 일부 북유럽 스릴러의 닮은꼴이라고 할까요?

 

물론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깔끔하거나 선명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눈길을 끄는 이야기, 그리스신화를 차용한 신비주의에 가까운 서사, 숭배 혹은 제의(祭儀)를 통한 악의의 발산 등에 관심 있는 독자에겐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은 기대 이상의 만족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욤 뮈소와 친하지 않다고 해도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 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니 이 작품이 궁금하다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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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99
제프 린지 지음, 고유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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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의 도둑을 자처하는 라일리 울프는 천재적인 절도범이자 화려한 곡예로 빌딩 숲을 활주하는 파쿠르(Parkour) 실력자이면서 필요할 땐 살인도 서슴지 않는 냉혹한 킬러다. ‘21세기의 뤼팽이라 할 그의 목표는 상류층이다. 부도덕한 부자들로부터 그들이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빼앗는 행위 자체가 라일리에게는 쾌감의 원천이다. 그런 라일리 울프의 눈에 이란 황실의 보물, ‘빛의 바다라는 별명을 가진 세계 최대의 핑크 다이아몬드 다리야에누르가 들어온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 개선을 위한 국보 상호교환 전시로 다리야에누르가 미국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직접 테헤란까지 날아가 다이아몬드를 보고 완전히 매료되어 그것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헌신적이고 친절하고 달콤한 킬러덱스터 모건을 앞세운 덱스터 시리즈로 잘 알려진 제프 린지(Jeff Lindsay, 한국에 출간된 덱스터 시리즈에는 제프 린제이로 표기됨)가 이번에는 천재적인 대도(大盜) 라일리 울프라는 캐릭터를 창조했습니다. 백주대낮에 12.5톤에 달하는 동상을 태연히 훔칠 정도로 대담한 라일리는 언뜻 덱스터와 닮은꼴로 보입니다.

끔찍한 흉악범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긴 하지만 그 동기가 정의감과는 전혀 무관한, 즉 대상이 흉악범일 뿐 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잔혹한 소시오패스가 덱스터라면, 라일리는 부도덕한 부유층을 노리긴 하지만 부의 공평한 분배나 사회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개인적인 복수 같기도, 달리 보면 돈 그 자체를 위한 게임 같기도 한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필요하다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대목에선 덱스터 못잖은 소시오패스 기질까지 엿보입니다. 요약하자면 천재적인 도둑 재능까지 갖추게 된 덱스터라고 할까요?

 

라일리의 가장 큰 고민은 모든 일이 너무 쉽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 앞에서 초대형 동상을 훔치고도 보람도 자부심도 못 느꼈던 건데, 그런 그에게 도전욕구를 불지른 것이 바로 이란 황실의 보물 다리야에누르입니다. 15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가치뿐 아니라 보석으로서의 최고의 아름다움까지 지닌 다리야에누르는 가히 라일리가 탐낼 만한 명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석 자체보다 라일리를 들끓게 만든 건 철벽과도 같은 보안시스템입니다. 최첨단 장비에 전직 특수부대원으로 구성된 용병과 이란 혁명수비대까지 가세한 탓에 성공 가능성은 0.0001%도 채 되지 않아 보입니다. 흥분지수가 최고조로 올랐던 라일리가 절망에 사로잡힌 건 이 때문입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건 한 편의 복잡한 플롯의 영화 시나리오와도 같은,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몇 배 이상 발휘해야 하고 그만큼의 행운까지 따라줘야만 하는 고난이도의 전략입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치명적인 침입 작전이라고 할까요?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라일리를 쫓는 FBI요원 프랭크 델가도의 추격전입니다. 라일리의 본명도 얼굴도 모르지만 오직 그를 체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델가도의 집착은 그가 유능한 요원이 아니었다면 진작 FBI에서 쫓겨나고도 남을 만큼 강박에 가깝습니다. 이란 황실의 보물이 라일리의 다음 타깃이라고 확신하지만 끝내 상부를 설득하지 못한 델가도는 휴가를 내고 개인적으로 라일리에 대해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미약한 단서들을 쫓아 라일리의 유년기부터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델가도의 행보를 통해 라일리의 개인사와 가족사, 특히 그를 대도이자 소시오패스로 성장하게 만든 비극들을 접하게 됩니다.

 

요약하면 보물 하나 훔치는 이야기지만 역시 덱스터 시리즈의 창조자답게 작가는 흥미진진한 케이퍼 스릴러를 완성시켰습니다. 다만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희대의 도둑질 자체도 (준비과정은 엄청 치밀하고 정교했지만) 뒤통수를 치는 맛이 강렬하지 못합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주인공 라일리의 캐릭터인데, 필요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긴 해도 결국엔 도둑이다 보니 주특기(?)가 살인인 덱스터에 비해 말랑말랑해 보인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의문 도둑질의 동기 혹은 목적은 무엇인가? - 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아서 그의 화려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깊이 이입할 수 없었던 게 더 큰 이유입니다. FBI요원 델가도에 의해 밝혀진 그의 과거, 즉 평범한 소년이 괴물이 된 과정 역시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고, 덱스터와 마찬가지로 라일리도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은 걸로 설정돼있지만 무게감이나 충격의 강도는 훨씬 약해 보였습니다. 더불어, ‘정의로운 도둑이 선사하는 쾌감이라곤 전혀 맛볼 수 없는 라일리의 캐릭터는 독자에 따라 비호감으로 여겨질 여지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라일리 울프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찰(탐정)이나 살인자가 주인공인 경우와 달리 도둑의 이야기는, 그것도 라일리 같은 캐릭터의 도둑이라면 다양한 이야기를 펼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또 데뷔작에서처럼 라일리의 캐릭터가 다소 모호하게, 그리고 비호감에 가깝게 그려진다면 계속 지켜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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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가 여자들
파스칼 디에트리슈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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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을 무대로 마피아 집안의 세 모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대부 레오네의 아내이자 명예 마피아인 어머니 미셸, 아버지와 마피아에 대한 반감으로 인도주의 단체에서 일하는 장녀 디나, 현대적인 방식으로 가업을 이어가려는 차세대 보스 후보 차녀 알레시아. 어느 날, 알츠하이머를 앓던 남편 레오네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미셸은 그 사실보다도 남편이 사전에 써놓은 편지 때문에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편지엔 레오네가 자신을 배신한 아내 미셸을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했으며, 조만간 그가 미셸의 숨통을 끊기 위해 방문할 거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셸은 두 딸과 함께 킬러의 정체를 밝히고 살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마피아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은 매체를 불문하고 예외 없이 남성 중심의 서사를 펼치기 마련입니다. 비장미 넘치는 영웅도, 차기 보스를 노리는 야심가도, 심지어 사업에서든 권력투쟁에서든 덜 떨어진 모습을 보이는 조연이나 그저 총알 세례 장면을 위해 동원된 단역들조차 모조리 남자들의 몫입니다. 여자들은 무기력하거나 순종적이거나 성적 대상이거나 잘 해야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된 채 무의미한 저항을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목에서부터 도발적인 기운을 감추지 않은 마피아가 여자들은 기존의 마피아 물과는 정반대의 성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혼수상태에 빠진 마피아 대부의 아내와 두 딸인데, 그녀들은 마피아 세계에서 여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억지로 강요당할 수 있는 몇몇 삶의 방식을 사실감 있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부의 아내인 미셸은 마피아의 여자로서의 소극적인 역할을 수긍한 채 살아온 인물입니다. 낭만적이지만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남편에게 평생 순종해왔고, 마피아가 제공한 부유한 삶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피아 아내들이 뜻을 모으면 얼마든지 남편들을 구워삶을 수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깨달은 인물입니다.

장녀 디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마피아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혔고, 그로 인해 보란 듯이 인도주의 단체에서 활동하지만, 실은 마피아와 인도주의 단체가 이복형제란 사실을 깨닫곤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내를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한 아버지를 혐오하지만, 똑같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려는 동생 알레시아 역시 불편하게만 여겨질 뿐입니다.

약국을 운영하며 몰래 마약을 판매하고 돈 세탁을 일삼는 차녀 알레시아는 차세대 그르노블 마피아 보스 자리를 넘보는 야심찬 여성입니다. 기존의 마피아 서사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마지막까지 멍청한 남자들 대신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마피아를 이끌고 갈 여자들의 역할을 모색하는 인물입니다.

 

띠지에 인쇄된 낡은 전통과 침묵의 규율을 깨부수는 짜릿하고 통쾌한 코믹-여성-누아르!”라는 카피는 절반쯤은 맞고 절반쯤은 과장됐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인데, 짜릿함과 통쾌함에 대해선 기대치를 너무 높게 가져선 안 되고, 코믹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판타지 같은 남성 중심의 마피아 서사와 달리 차분하면서도 사실감 넘치는 여성 마피아 스릴러라는 카피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미셸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된 청부살인업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이나 알레시아가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차세대 보스 자리를 노리는 과정은 딱히 놀라운 반전이나 흥분을 일으키는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총격전 외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남성 마피아 서사에 비하면 훨씬 더 리얼하고 그럴듯하게 다가왔고,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피아가 여자들을 포함하여 파리의 대마초 여인’, ‘포커 플레이어 그녀등 최근 들어 프랑스 미스터리 스릴러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쓸데없이 어렵게 이야기를 풀거나 과장되게 폼만 잡는다고 여겼던 프랑스 작품들에 대한 선입견을 시원하게 날려줄 만큼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저와 그다지 코드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한 기욤 뮈소의 신작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을 곧 읽을 예정인데, 과연 기욤 뮈소마저도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전해줄지 사뭇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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