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든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년 전 남편 서배스천을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30대 심리상담가 마리아나는 여전히 상실감과 암울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언니 부부의 사고사에 이어 남편까지 잃은 마리아나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은 서배스천과 함께 키워온 조카 조이뿐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조이는 어느 날 패닉 상태에 빠진 채 다급한 연락을 해옵니다. 유일한 친구인 타라가 끔찍하게 살해됐다는 것입니다. 초조해진 마리아나는 즉시 케임브리지로 달려가고, 충격에 빠진 조이를 보호하는 한편 타라 살인범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리아나는 속히 범인을 잡아야만 조이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심리상담가일 뿐인 마리아나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연이어 터집니다.

 

그리스 신화와 비극, 연쇄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된 심리학 스릴러!”라는 홍보카피 때문에 읽을지 말지 꽤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최근 심리스릴러 혹은 심리학스릴러(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조금 넓게 보면 결국 같은 이란 생각입니다)에 여러 번 질린 데다 그리스 신화역시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끼어들 때마다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기대감의 근거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는 작가의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였는데 아직 읽지 못한 상태라 일단 100페이지까지만 읽어보자, 라는 심정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첫 페이지의 프롤로그부터 마리아나가 범인으로 의심하는 자의 이름이 공개됩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고전문학 교수 에드워드 포스카입니다. 그는 특권층 출신에 뛰어난 미모를 지닌 몇몇 여학생에게 수상쩍은 개인지도를 하는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파티를 열거나 은밀한 비밀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스카 교수를 숭배하는 그 여학생들은 일명 메이든스’(처녀들)라 불리며 유명세와 경계심을 동시에 얻었는데, 마리아나는 그 사실에 주목하며 포스카 교수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킵니다.

 

사실, 평범한 심리상담가가 조카의 친구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설정은 그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잘 알기에 수양딸처럼 키워온 조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마리아나의 의지는 이해가 되지만, 단서나 증거를 찾기보다 포스카 교수와 메이든스를 심리상담가의 관점에서 관찰하며 진상을 밝혀내겠다는 태도는 다소 작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작가는 마리아나의 행보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녀가 지금도 겪고 있는 남편을 잃은 심연과도 같은 상실감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마리아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건 살해수법과 범인의 메시지입니다.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들은 마치 의식에 바쳐진 제물 같은 인상을 남겼는데, 마리아나에겐 그런 살해수법이 수사진들의 눈을 멀게 하여 중요한 것을 못 보게 하려는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또 마리아나는 경찰이 놓친 현장 단서를 손에 넣는데 그것은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엽서들입니다. 거기에 적힌 것은 고귀한 처녀를 데메테르의 딸에게 바쳐야 한다.”라든가 이제 곧 너의 목은 칼을 맞고 피가 솟구쳐 흐를 것이다.” 같은 그리스 비극의 끔찍한 인용문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포스카 교수를 향한 마리아나의 의심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지만, 정작 경찰은 마리아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떠날 것을 강하게 요구할 뿐입니다.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져서 애초 100페이지 정도만 읽겠다던 결심이 무색해지고 말았는데, 이 작품의 진짜 백미는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막판 반전에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동기가 폭로되는 순간, 그저 어설픈 독자일 뿐인 저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는데, 개인적으론 최고의 반전 목록에 넣어도 괜찮을 만큼 충격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작동하겠구나, 라는 감탄과 함께 소소해 보일 수도 있는 모티브를 그리스 신화와 비극, 연쇄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된 심리학 스릴러로 확장시킨 작가의 필력에도 적잖이 놀란 게 사실입니다.

물론 약간은 사족처럼 느껴진 내용들 19세기 시인까지 동원한 마리아나의 상실감에 대한 거듭된 묘사,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유년기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 살짝 과잉처럼 보인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소개 등 이 있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작가의 개성으로 인정할 만 했고, 약간 허술하거나 빈틈이 있는 미스터리와 의도가 빤히 보이는 캐릭터 설정 역시 무시해도 괜찮은 수준의 사소한 아쉬움에 불과합니다.

 

메이든스는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앞서 출간된 성공적인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뒤늦게라도 빨리 찾아 읽어야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출간될 그의 작품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0.5개를 뺀 만큼의 아쉬움이 있었던 것 맞지만 이만한 이야기꾼을 발견한 건 나름 큰 수확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