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늑대 스토리콜렉터 16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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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하임 경찰서 강력 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연이어 터진 미스터리한 사건들 때문에 곤혹스런 지경에 빠집니다. 성폭행과 학대의 흔적을 지닌 채 익사체로 발견된 소녀 사건은 신원확인조차 안 돼 막다른 벽에 부딪혔고, 유명 방송인 한나 헤르츠만이 지독하게 폭행당한 뒤 차 트렁크에서 발견된 사건 역시 단서 하나 잡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2년 전 정직 당했던 악명 높은 동료 프랑크 벤케가 갑자기 지역범죄수사국 내사팀이 되어 나타나선 복수를 다짐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던 세 개의 사건은 시간이 갈수록 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하고, 피아는 지금껏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끔찍한 아동 성범죄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좋아하지만 어린 소년, 소녀가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학대와 성범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데, ‘사악한 늑대는 이른바 아동 포르노 마피아의 끔찍한 만행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라 두 번째 읽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겁고 불편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앞선 시리즈들이 늘 그랬듯 굉장히 많은 등장인물과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여러 사건이 초반부터 독자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사악한 늑대는 세 개의 사건이 하나 같이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더 어지러웠는데, 누구나 막판에 이 사건들이 한 방향으로 수렴될 거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중반까지만 해도 과연 어떤 식으로 접점을 이룰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는 제각각 흘러가기만 합니다.

 

익사체로 발견된 소녀 사건이 3주가 되도록 성과가 없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유명 방송인 한나 헤르츠만의 납치-폭행 사건에 투입됩니다. 유력한 용의자를 두 명이나 포착했지만 행방이 묘연하거나 혐의점을 찾지 못해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나타나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이번 사건은 정말이지 꼬이고 꼬여서 풀릴 줄 몰랐다.”(p323)는 피아의 푸념처럼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사건은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합니다. 그만큼 난감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 당연히 흥미진진하고 긴장감이 넘쳐야 하는데, 실은 이 작품이 넬레 노이하우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3/4지점쯤부터 폭발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꽤나 야박한 점수를 주고도 남았을 만큼 중반까지의 이야기는 산만하고 느슨하고 지루하게 읽힙니다. 뭐랄까... 충격적인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위해 과도할 정도로 기초공사를 탄탄하게 한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세 사건의 접점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리고 그 접점이 다름 아닌 독일과 유럽의 권력층과 부유층으로 구성된 아동 포르노 마피아라는 게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 건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비롯하여 중요한 조연들에게 피해자 또래의 딸이 있다는 점, 그래서 그들 모두 진상에 다가갈수록 자신의 딸들도 늑대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겁에 질리는 모습들입니다. 또 사방팔방에 인맥과 조직을 갖춘 아동 포르노 마피아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가차 없이 파멸시키는 대목이나 어렸을 적 학대를 당했지만 성장하면서 더 끔찍한 가해자가 돼버린 인물, 그리고 늑대들에게 삶과 인격이 완전히 파괴당한 피해자들의 사연 등은 무거움이나 불편함 이상의 착잡한 감정을 독자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놓습니다.

 

아동 포르노 마피아 이야기만큼 독자의 눈길을 끈 건 피아와 보덴슈타인에게 복수를 선언한 예전 동료 프랑크 벤케의 과거사입니다. (사실 아동 포르노 마피아와 벤케의 과거사를 하나로 엮은 건 살짝 무리수처럼 보이긴 했습니다.) 애초 전직 군인 출신으로 유능한 형사였던 벤케를 개망나니에 악의로 가득 찬 인물로 만든 10여 년 전의 사건은 그 자체로 무척 흥미진진한데, 특히 그 사건이 아동 포르노 마피아 사건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 덕분에 피아와 보덴슈타인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건 물론 그들의 상관인 니콜라 엥겔 수사과장의 과거까지 폭로된다는 설정은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고조시키고도 남을 만큼 흥미롭습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분량이 늘어나더니 사악한 늑대에선 기어이 600페이지를 찍고 말았습니다. 중반까지의 산만하고 느슨한 전개만 아니었다면 아동 성범죄라는, 불편하지만 몰입할 수밖에 없는 묵직한 주제가 좀더 독자의 공감을 살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았는데,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넬레 노이하우스로서도 다소 과하더라도 탄탄한 기초공사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그저 막연하게나마 추정할 뿐입니다.

사악한 늑대는 완결되지 않은 거대한 두 개의 떡밥을 남긴 채 마무리됩니다. 비록 읽은 지 7년이 지나긴 했지만 다음 작품인 산 자와 죽은 자는 별개의 사건을 다룬 것으로 기억하는데, 과연 남겨진 두 개의 떡밥이 어떤 식으로 해소될지 다시 한 번 읽으면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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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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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부의 부촌 햄스테드 히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화가인 아내 앨리샤가 사진가 남편 가브리엘을 총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체포된 뒤 실어증에 걸린 듯 입을 다문 앨리샤는 알케스티스라는 자화상을 남긴 뒤 정신질환 범죄자 감호병원인 그로브에 수감됩니다. 오래 전부터 앨리샤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심리상담가 테오 파버는 그로브의 구인광고를 보곤 안정적인 직장에 사표를 냅니다. 앨리샤의 심리상담가가 된 것을 운명이라 여긴 테오는 그녀의 입을 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동시에 그녀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도 함께 진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테오는 놀랍거나 의심스러운 정황들을 다수 발견하게 되는데, 앨리샤가 침묵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인물들이 적잖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앨리샤가 드디어 반응을 보이고 자신이 쓴 일기장까지 내주자 테오는 머잖아 진실이 밝혀질 거라 확신합니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2019)가 스릴러 독자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건 올해(2022) 출간된 두 번째 작품 메이든스를 읽은 뒤였습니다.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심리학 스릴러라는 장르에다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까지 왠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았고, 그런 탓에 작품에 대한 반응조차 알아볼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메이든스에서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재미와 짜릿한 반전을 맛보곤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부랴부랴 찾아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으로 나올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신작은 무조건 장바구니에 담게 될 게 확실하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잔혹한 방법으로 남편을 살해하곤 6년째 입을 다물고 있는 앨리샤가 살인사건 직전 몇 주에 걸쳐 쓴 일기장의 내용, 앨리샤의 입을 열어 6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는 심리상담가 테오의 노력, 그리고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아내 캐시의 불륜을 눈치 챈 테오의 절망이 그것입니다.

테오는 주위의 만류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앨리샤의 입과 마음을 열기 위해 애씁니다. 동시에 앨리샤의 주변 인물들 살해된 가브리엘의 형, 거래하던 화랑 주인, 앨리샤의 친척, 과거 앨리샤를 치료했던 의사 등 을 집요하게 찾아다니며 앨리샤에 관한 작은 단서라도 잡기 위해 분투합니다. 테오가 볼 때 앨리샤의 범행은 결코 즉흥적이거나 우발적인 게 아니라 오래 전에 그 씨앗이 뿌려진 심리적 불안에서 기인한 듯 했고, 그 모든 걸 알아내려면 앨리샤의 유년기부터 샅샅이 조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테오는 앨리샤가 자신과 비슷한 트라우마 - 부모로부터의 끔찍한 학대 - 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테오와 앨리샤가 번갈아 화자를 맡아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사실 독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지 계속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척 단순합니다. 부모의 학대가 남긴 트라우마 때문에 심리상담을 받다가 스스로 심리상담가를 직업으로 택한 테오는 스스로 여전히 반쯤은 환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앨리샤와 상담을 하면서도 불안한 심리를 감추지 못하는데, 거기다가 가끔 즐기는 마리화나는 그를 몽환적인 상태로 몰아넣곤 해서 독자 입장에선 테오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앨리샤가 남긴 일기장 역시 조울증의 기록마냥 행복과 기쁨, 초조와 불안이 교차하기도 하고, 살인사건 직전의 몇몇 일기는 망상으로 가득 차서 독자는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까지가 착각인지 혼란을 겪게 됩니다.

 

메이든스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살인사건과 심리학 스릴러의 조합에다 그리스 비극 한 편을 끼워 넣었습니다. 그것은 남편 대신 목숨을 내놓았다가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지옥 문턱에서 이승으로 돌아오지만 그 뒤로 입을 다물어 버린 여인을 그린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입니다. 앨리샤가 병원에 수감되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의 제목이 알케스티스인데, 그 때문에 테오는 자화상 혹은 그리스 비극 자체에 앨리샤의 진실을 위한 열쇠가 숨어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막판에 테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며 공개됩니다.

 

메이든스의 서평에 이 작품의 진짜 백미는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막판 반전에 있습니다.”라고 썼는데, ‘사일런트 페이션트역시 그에 맞먹는 놀라운 반전을 선사합니다. 정신이상자의 진술처럼 어딘가 모호하기 그지없던 테오와 앨리샤의 이야기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명확한 접점을 이룬 끝에 6년 전 사건의 진실을 토해내는 대목에선 말 그대로 온몸이 굳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고, 같은 페이지를 서너 번은 되읽은 뒤에야 겨우 책장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작동하겠구나!”라며 감탄했던 메이든스의 서평 한 줄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말입니다.

 

(같진 않지만 같은 이라 볼 수 있는) 심리스릴러 또는 심리학 스릴러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장르이고, 스릴러에 끼어든 그리스 신화와 비극은 비호감 그 자체인 게 사실이지만,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두 작품은 오히려 그 두 가지 요소 덕분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스릴러 고유의 미덕과 함께 끝내주는 반전을 일궈낸 그의 글 솜씨는 읽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독자에게마저 부러움과 질투심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2년 간격으로 두 작품을 냈으니 (원작 기준으로) 대략 2023년에 새 작품이 나올 듯 싶은데, 부디 신작에서도 앞선 두 작품 못잖은 감흥과 여운을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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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심장 스토리콜렉터 100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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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내내 월반을 거듭해 23살에 범죄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LAPD 특수사건전담반 팀장으로 일하는 로버트 헌터는 FBI도 탐내는 뛰어난 프로파일러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파견 형식으로 콴티코의 FBI 아카데미에 오게 됩니다. 우연한 사고로 범행이 드러난 살인용의자가 헌터에게만 말하겠다.”며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터는 심문실에 도착해서야 용의자가 과거 대학시절 절친이자 범죄심리학도로서 라이벌이었던 루시엔 폴터라는 걸 알곤 크게 놀랍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동안 헌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희생자의 수조차 가늠할 수 없는 역대급 연쇄살인의 진실을 파헤치는 일도 고통스러웠지만, 오랫동안 봉인해온 끔찍한 트라우마까지 폭발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낯선 작가의 작품 띠지에 “‘양들의 침묵을 능가하는 충격 심리스릴러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면 일단은 과장 광고로 여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북로드에서 출간한 작품이라면 의심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발동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능가여부는 독자 개개인이 판단할 일이지만, 개인적으론 양들의 침묵에 못잖은 소름 돋는 소시오패스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연쇄살인마와 강력계 형사로 마주한 두 범죄심리학자, 끝을 알 수 없는 두뇌 싸움으로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다!”라는 홍보 카피대로 이 작품은 사건도 사건이지만 범죄심리학자간의 불꽃 튀는 심리공방전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미세한 표정 변화, 사소한 몸짓, 미묘한 말투만으로도 상대방의 심리와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데다 함께 범죄심리학을 전공하며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추억을 공유한 연쇄살인마와 강력계 형사의 만남은 양들의 침묵에서 그려진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과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심리전과는 전혀 다른 결의 긴장감을 초반부터 팽팽하게 부풀려 놓습니다.

 

이미 체포된 범인과 안전한 거리를 두고 심문을 벌이는 형사라는 구도 때문에 자칫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지루한 심문 일지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여러 개의 액자소설을 끼워 넣는 형식을 통해 연쇄살인마가 저지른 끔찍한 고문과 살인, 헌터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트라우마 등을 번갈아 그려내면서 조금도 느슨해질 틈이 없는 스피디한 스릴러를 구축했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설정은 어디에 묻혀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수십 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사체를 찾아야만 하는 헌터에게 루시엔이 그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운 기괴한 범행동기를 자랑스럽게 피력하는 것은 물론 헌터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자신이 제안하는 심리전에 가담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루시엔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헌터는 그가 던진 질문에 거짓 없이 답을 해야만 하는데, 문제는 루시엔이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가 헌터에겐 참혹한 고문과도 같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루시엔의 집요한 질문은 뛰어난 범죄심리학자이자 프로파일러인 헌터의 평정심을 요동치게 만들고, 결국엔 파국에 가까운 상황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제야 루시엔이 헌터를 콕 찝어 심문자로 선택한 이유도 함께 폭로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제대로 언급할 순 없지만 루시엔의 범행 동기는 그동안 보아온 어느 가공할 소시오패스와도 차별화되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 읽고 찬찬히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책이나 영화로 만난 소시오패스들은 루시엔에 비하면 잔챙이처럼 느껴진다고 할까요? 물론 중후함(?)에 있어서는 한니발 렉터가 으뜸이지만, 루시엔은 범죄심리학자 출신 연쇄살인마답게 그만의 확고하고 뚜렷한, 하지만 동시에 어이없으면서도 이상하게 공감이 가는 범행동기를 지니고 있어서 개성에 관한 한 한니발 렉터에 못잖은 캐릭터라는 생각입니다.

 

검색해보니 크리스 카터는 이미 로버트 헌터 시리즈로 큰 명성을 얻은, 그래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되는 게 이상할 정도인 스릴러의 대가입니다. 그의 홈페이지를 보니 악의 심장은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2014)인 듯 싶은데, 대단한 필력에도 반했지만 매력적인 주인공 로버트 헌터 때문에라도 이 시리즈가 앞으로 계속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습니다. FBI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연방요원 대신 LAPD의 강력계를 고집해온 그의 출발점부터 차근차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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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보상
새러 패러츠키 지음, 황은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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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상속자인 대학생 피터가 살해되고 동거하던 그의 연인 애니타가 자취를 감춥니다. 피터는 부유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허름한 아파트에 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거대 노조 대표의 딸인 애니타는 피터와 뜻을 함께 하며 장래 노동변호사를 꿈꾸던 여대생입니다. 사건에 뛰어든 워쇼스키는 조사를 진행할수록 단순 살인사건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시카고 최대 은행의 부행장, 막대한 자산을 소유한 거대 노조의 대표, 연금과 산재 등 각종 상품으로 이익을 내는 보험사의 간부, 그리고 마약과 청부살인을 일삼는 폭력조직 등 하나같이 부담스럽고 위험한 자들이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심증은 있지만 그 어디에도 확실한 단서가 없다는 점. 더구나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엉뚱한 자를 체포하곤 수사를 종결한 시카고 경찰의 행태도 워쇼스키에겐 악재 중의 악재입니다.

 

새러 패러츠키의 데뷔작이자 ‘V. I. 워쇼스키 시리즈의 첫 편인 제한 보상은 이야기 자체도 궁금했지만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에 읽게 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여성 주인공, 특히 형사나 탐정으로 국한시키면 그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더 주목과 관심을 받게 되거나 조금은 더 엄격한 잣대로 캐릭터가 평가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론 하무라 아키라, 히메카와 레이코, 피아 키르히호프, 제인 리졸리, 아멜리아 색스 등 예리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여성 캐릭터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V. I .워쇼스키는 이들에게는 큰언니이자 교과서와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급진적 운동이 전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배경인 1979년의 미국은 여성탐정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워쇼스키를 대하는 남성들의 시선은 연령과 계층에 관계없이 냉소적입니다. 아버지뻘인 남자들은 조신한 주부가 되기를 강요하며, 또래들조차도 독립심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워쇼스키를 경계합니다. 탐정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그들의 경계와 냉소는 더욱 노골적이고 차가워집니다.

국선변호사로 일하다가 사법체계의 부패함에 질려버린 뒤 사립탐정의 길에 들어선 워쇼스키는 여성이라는 편견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원래 풀 네임인 빅토리아 이피게니아 워쇼스키대신 일부러 ‘V. I. 워쇼스키라는 이름을 명함에 새겨 넣었으며 친한 사람들에게만 이라는 호칭을 허용합니다. 주저 없이 상대방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수 있는 가라데 유단자이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감정을 농락할 만큼 배짱도 두둑합니다. 강직한 경찰이던 아버지와 현명하고 자립심 강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자신만의 무기와 갑옷까지 갖춘 그녀는 그야말로 여성 장르물 주인공의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심증밖에 없는 상태에서 워쇼스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땡볕 아래 이어지는 고된 탐문과 행운이 따라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단서 찾기입니다. 하지만 사라진 딸 애니타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던 거대 노조대표는 물론 살해된 피터의 아버지까지 수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워쇼스키 본인은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등 끊이지 않는 시련이 잇따를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실낱같은 단서를 찾아내고 사건 관련자들에게서 중요한 진술을 얻어내 결정적인 실마리를 포착해낸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워쇼스키의 이러한 집요한 노력 덕분인데, 거기에 덧붙여 가라데 유단자다운 적절한 폭력을 구사하여 통쾌한 액션을 선보이는 장면은 일종의 보너스처럼 독자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워쇼스키 시리즈에서 언제나 경이로운 것은 V. I. 워쇼스키 그녀 자신이다.”라는 볼티모어 선의 평가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이야기 자체보다 워쇼스키의 캐릭터입니다. 분량에 비해 사건은 단순하고, 반전이나 트릭보다는 고전다운 정공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긴장감도 기대만큼 강렬하진 않습니다. 진범의 정체도 일찌감치 그 윤곽이 드러난 탓에 누가 범인?” 대신 어떻게 잡을까?”가 더 관심사가 되는데, 그러다 보니 독자의 시선은 오로지 워쇼스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한 보상외에 2000년대 들어서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블랙리스트’(2005) 한 편뿐이라 무척 아쉬운데, 언제라도 워쇼스키 시리즈가 출간된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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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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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북부 스카보로경찰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퇴직한 리처드 린빌이 자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케일럽 헤일 반장은 과거 리처드에게 체포당한 뒤 공공연히 복수를 다짐했던 전과자 데니스 쇼브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리처드의 딸이자 런던경찰국 형사인 케이트가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에 왔다가 의외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케일럽 반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수사를 벌이던 케이트는 또 다른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한 것은 물론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된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샤를로테 링크는 스릴러 카페 멤버 한 분이 대가라고 극찬하셔서 알게 된 작가로, 한국에 소개된 작품이 여섯 편이나 되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지금까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최근 넬레 노이하우스의 사악한 늑대를 다시 읽은 뒤 로미 하우스만의 사랑하는 아이까지 계속 독일 스릴러를 접한 탓에 올해 초엔 유독 독일 작품과 인연이 있나보다 싶었는데, 작가도 독일인이고 원제도 독일어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배경도 영국이고 주인공도 영국인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영국을 배경으로 집필됐다는데 무척 특이한 케이스라 그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두 개의 사건이 병행되는데, 하나는 퇴직형사 리처드가 피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어 발생하는 의문의 연쇄살인이고, 또 하나는 번 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진 산장으로 휴가를 떠난 크레인 가족이 맞닥뜨린 치명적인 위기입니다. 메인 사건은 연쇄살인이지만 크레인 가족의 위기 역시 거의 대등한 분량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조연들의 이야기에 불과한 크레인 가족 사건이 이만한 비중과 분량을 차지한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출판사의 소개글과 옮긴이의 말을 보니 작가의 특징 중 하나인 것 같아 나름 수긍이 가기도 했습니다.

 

연쇄 살인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참혹한 살인의 충격적인 정황에 집중하기보다는 그에 얽힌 (인물들의) 사연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중략)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페이지터너 스릴러이지만, 그 씁쓸한 분위기는 책장을 덮고 나서도 꽤 오래 여운을 남길 것이다.”라는 알라딘 소설MD 최원호 님의 소개글대로 이 작품은 사건 자체보다는 가해자, 피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 그리고 경찰에 이르기까지 본인 혹은 가족의 문제로 인해 크고 깊은 상처를 지닌 인물들의 사연에 더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결여된 자신감과 대인기피 증세로 인해 경찰로서도, 여성으로서도 무기력한 삶을 살아온 케이트, 유능한 형사지만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케일럽 반장, 불임 이후 입양을 통해 얻은 아들 덕분에 삶의 빛을 되찾았지만 그로 인해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게 된 크레인 부부, 밤낮이 따로 없는 형사로 일하면서 심각한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제인 등 대부분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진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자연히 각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풍부해질 수밖에 없는데, 연쇄살인이긴 해도 스케일도 크지 않고 그리 복잡하지도 않은 사건에 비해 다소 과도해 보이는 592페이지라는 분량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빚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래선지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든 조연들의 심리에 대해서까지 지나치게 친절하고 상세한 묘사를 할애한 점은 개인적으론 무척 아쉬웠던 대목입니다. 이 작품을 심리스릴러 범죄소설이라고 칭한 번역가의 해설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아마 그 때문에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스릴러답지 않게 난해하지도, 배배 꼬지도 않은 간결하고 선명한 문장들 덕분에 페이지는 엄청 빠른 속도로 넘어가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범인의 정체와 연쇄살인의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 반전은 어느 정도 파괴력이 있지만, 어지간한 독자라면 중반부쯤 어렵지 않게 사건의 윤곽을 점칠 수 있어서 미스터리 자체의 힘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은 왜 지금?”, 즉 사건의 출발점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거나 불친절하게 느껴졌는데, 작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거나 너무 당연한 일이니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의문이 끝내 해소되지 않은 탓에 이 작품의 미덕보다는 찜찜함이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큰 명망을 얻은 작가를 단 한 편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제 취향과 가깝지 않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심리보다는 좀더 사건 쪽에 비중이 실린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장 최근에 출간된 수사’(2020)까지 도전해보고 샤를로테 링크를 계속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과 관련된 자체 스포일러가 너무 많습니다. 중반부쯤에나 밝혀지는 연쇄살인의 계기가 (간접적이긴 해도) 뒤표지에 버젓이 표기돼있고,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에는 범인의 정체까지 다 공개돼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어떤 정보도 접하지 말고 바로 본 내용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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