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 보상
새러 패러츠키 지음, 황은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은행 상속자인 대학생 피터가 살해되고 동거하던 그의 연인 애니타가 자취를 감춥니다. 피터는 부유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허름한 아파트에 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거대 노조 대표의 딸인 애니타는 피터와 뜻을 함께 하며 장래 노동변호사를 꿈꾸던 여대생입니다. 사건에 뛰어든 워쇼스키는 조사를 진행할수록 단순 살인사건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시카고 최대 은행의 부행장, 막대한 자산을 소유한 거대 노조의 대표, 연금과 산재 등 각종 상품으로 이익을 내는 보험사의 간부, 그리고 마약과 청부살인을 일삼는 폭력조직 등 하나같이 부담스럽고 위험한 자들이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심증은 있지만 그 어디에도 확실한 단서가 없다는 점. 더구나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엉뚱한 자를 체포하곤 수사를 종결한 시카고 경찰의 행태도 워쇼스키에겐 악재 중의 악재입니다.

 

새러 패러츠키의 데뷔작이자 ‘V. I. 워쇼스키 시리즈의 첫 편인 제한 보상은 이야기 자체도 궁금했지만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에 읽게 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여성 주인공, 특히 형사나 탐정으로 국한시키면 그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더 주목과 관심을 받게 되거나 조금은 더 엄격한 잣대로 캐릭터가 평가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론 하무라 아키라, 히메카와 레이코, 피아 키르히호프, 제인 리졸리, 아멜리아 색스 등 예리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여성 캐릭터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V. I .워쇼스키는 이들에게는 큰언니이자 교과서와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급진적 운동이 전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배경인 1979년의 미국은 여성탐정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워쇼스키를 대하는 남성들의 시선은 연령과 계층에 관계없이 냉소적입니다. 아버지뻘인 남자들은 조신한 주부가 되기를 강요하며, 또래들조차도 독립심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워쇼스키를 경계합니다. 탐정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그들의 경계와 냉소는 더욱 노골적이고 차가워집니다.

국선변호사로 일하다가 사법체계의 부패함에 질려버린 뒤 사립탐정의 길에 들어선 워쇼스키는 여성이라는 편견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원래 풀 네임인 빅토리아 이피게니아 워쇼스키대신 일부러 ‘V. I. 워쇼스키라는 이름을 명함에 새겨 넣었으며 친한 사람들에게만 이라는 호칭을 허용합니다. 주저 없이 상대방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수 있는 가라데 유단자이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감정을 농락할 만큼 배짱도 두둑합니다. 강직한 경찰이던 아버지와 현명하고 자립심 강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자신만의 무기와 갑옷까지 갖춘 그녀는 그야말로 여성 장르물 주인공의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심증밖에 없는 상태에서 워쇼스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땡볕 아래 이어지는 고된 탐문과 행운이 따라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단서 찾기입니다. 하지만 사라진 딸 애니타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던 거대 노조대표는 물론 살해된 피터의 아버지까지 수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워쇼스키 본인은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등 끊이지 않는 시련이 잇따를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실낱같은 단서를 찾아내고 사건 관련자들에게서 중요한 진술을 얻어내 결정적인 실마리를 포착해낸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워쇼스키의 이러한 집요한 노력 덕분인데, 거기에 덧붙여 가라데 유단자다운 적절한 폭력을 구사하여 통쾌한 액션을 선보이는 장면은 일종의 보너스처럼 독자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워쇼스키 시리즈에서 언제나 경이로운 것은 V. I. 워쇼스키 그녀 자신이다.”라는 볼티모어 선의 평가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이야기 자체보다 워쇼스키의 캐릭터입니다. 분량에 비해 사건은 단순하고, 반전이나 트릭보다는 고전다운 정공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긴장감도 기대만큼 강렬하진 않습니다. 진범의 정체도 일찌감치 그 윤곽이 드러난 탓에 누가 범인?” 대신 어떻게 잡을까?”가 더 관심사가 되는데, 그러다 보니 독자의 시선은 오로지 워쇼스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한 보상외에 2000년대 들어서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블랙리스트’(2005) 한 편뿐이라 무척 아쉬운데, 언제라도 워쇼스키 시리즈가 출간된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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