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영국 동북부 스카보로경찰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퇴직한 리처드 린빌이 자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케일럽 헤일 반장은 과거 리처드에게 체포당한 뒤 공공연히 복수를 다짐했던 전과자 데니스 쇼브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리처드의 딸이자 런던경찰국 형사인 케이트가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에 왔다가 의외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케일럽 반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수사를 벌이던 케이트는 또 다른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한 것은 물론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된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샤를로테 링크는 스릴러 카페 멤버 한 분이 대가라고 극찬하셔서 알게 된 작가로, 한국에 소개된 작품이 여섯 편이나 되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지금까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최근 넬레 노이하우스의 사악한 늑대를 다시 읽은 뒤 로미 하우스만의 사랑하는 아이까지 계속 독일 스릴러를 접한 탓에 올해 초엔 유독 독일 작품과 인연이 있나보다 싶었는데, 작가도 독일인이고 원제도 독일어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배경도 영국이고 주인공도 영국인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영국을 배경으로 집필됐다는데 무척 특이한 케이스라 그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두 개의 사건이 병행되는데, 하나는 퇴직형사 리처드가 피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어 발생하는 의문의 연쇄살인이고, 또 하나는 번 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진 산장으로 휴가를 떠난 크레인 가족이 맞닥뜨린 치명적인 위기입니다. 메인 사건은 연쇄살인이지만 크레인 가족의 위기 역시 거의 대등한 분량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조연들의 이야기에 불과한 크레인 가족 사건이 이만한 비중과 분량을 차지한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출판사의 소개글과 옮긴이의 말을 보니 작가의 특징 중 하나인 것 같아 나름 수긍이 가기도 했습니다.

 

연쇄 살인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참혹한 살인의 충격적인 정황에 집중하기보다는 그에 얽힌 (인물들의) 사연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중략)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페이지터너 스릴러이지만, 그 씁쓸한 분위기는 책장을 덮고 나서도 꽤 오래 여운을 남길 것이다.”라는 알라딘 소설MD 최원호 님의 소개글대로 이 작품은 사건 자체보다는 가해자, 피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 그리고 경찰에 이르기까지 본인 혹은 가족의 문제로 인해 크고 깊은 상처를 지닌 인물들의 사연에 더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결여된 자신감과 대인기피 증세로 인해 경찰로서도, 여성으로서도 무기력한 삶을 살아온 케이트, 유능한 형사지만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케일럽 반장, 불임 이후 입양을 통해 얻은 아들 덕분에 삶의 빛을 되찾았지만 그로 인해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게 된 크레인 부부, 밤낮이 따로 없는 형사로 일하면서 심각한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제인 등 대부분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진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자연히 각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풍부해질 수밖에 없는데, 연쇄살인이긴 해도 스케일도 크지 않고 그리 복잡하지도 않은 사건에 비해 다소 과도해 보이는 592페이지라는 분량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빚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래선지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든 조연들의 심리에 대해서까지 지나치게 친절하고 상세한 묘사를 할애한 점은 개인적으론 무척 아쉬웠던 대목입니다. 이 작품을 심리스릴러 범죄소설이라고 칭한 번역가의 해설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아마 그 때문에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스릴러답지 않게 난해하지도, 배배 꼬지도 않은 간결하고 선명한 문장들 덕분에 페이지는 엄청 빠른 속도로 넘어가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범인의 정체와 연쇄살인의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 반전은 어느 정도 파괴력이 있지만, 어지간한 독자라면 중반부쯤 어렵지 않게 사건의 윤곽을 점칠 수 있어서 미스터리 자체의 힘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은 왜 지금?”, 즉 사건의 출발점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거나 불친절하게 느껴졌는데, 작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거나 너무 당연한 일이니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의문이 끝내 해소되지 않은 탓에 이 작품의 미덕보다는 찜찜함이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큰 명망을 얻은 작가를 단 한 편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제 취향과 가깝지 않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심리보다는 좀더 사건 쪽에 비중이 실린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장 최근에 출간된 수사’(2020)까지 도전해보고 샤를로테 링크를 계속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과 관련된 자체 스포일러가 너무 많습니다. 중반부쯤에나 밝혀지는 연쇄살인의 계기가 (간접적이긴 해도) 뒤표지에 버젓이 표기돼있고,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에는 범인의 정체까지 다 공개돼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어떤 정보도 접하지 말고 바로 본 내용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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