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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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부의 부촌 햄스테드 히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화가인 아내 앨리샤가 사진가 남편 가브리엘을 총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체포된 뒤 실어증에 걸린 듯 입을 다문 앨리샤는 알케스티스라는 자화상을 남긴 뒤 정신질환 범죄자 감호병원인 그로브에 수감됩니다. 오래 전부터 앨리샤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심리상담가 테오 파버는 그로브의 구인광고를 보곤 안정적인 직장에 사표를 냅니다. 앨리샤의 심리상담가가 된 것을 운명이라 여긴 테오는 그녀의 입을 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동시에 그녀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도 함께 진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테오는 놀랍거나 의심스러운 정황들을 다수 발견하게 되는데, 앨리샤가 침묵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인물들이 적잖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앨리샤가 드디어 반응을 보이고 자신이 쓴 일기장까지 내주자 테오는 머잖아 진실이 밝혀질 거라 확신합니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2019)가 스릴러 독자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건 올해(2022) 출간된 두 번째 작품 메이든스를 읽은 뒤였습니다.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심리학 스릴러라는 장르에다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까지 왠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았고, 그런 탓에 작품에 대한 반응조차 알아볼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메이든스에서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재미와 짜릿한 반전을 맛보곤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부랴부랴 찾아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으로 나올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신작은 무조건 장바구니에 담게 될 게 확실하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잔혹한 방법으로 남편을 살해하곤 6년째 입을 다물고 있는 앨리샤가 살인사건 직전 몇 주에 걸쳐 쓴 일기장의 내용, 앨리샤의 입을 열어 6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는 심리상담가 테오의 노력, 그리고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아내 캐시의 불륜을 눈치 챈 테오의 절망이 그것입니다.

테오는 주위의 만류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앨리샤의 입과 마음을 열기 위해 애씁니다. 동시에 앨리샤의 주변 인물들 살해된 가브리엘의 형, 거래하던 화랑 주인, 앨리샤의 친척, 과거 앨리샤를 치료했던 의사 등 을 집요하게 찾아다니며 앨리샤에 관한 작은 단서라도 잡기 위해 분투합니다. 테오가 볼 때 앨리샤의 범행은 결코 즉흥적이거나 우발적인 게 아니라 오래 전에 그 씨앗이 뿌려진 심리적 불안에서 기인한 듯 했고, 그 모든 걸 알아내려면 앨리샤의 유년기부터 샅샅이 조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테오는 앨리샤가 자신과 비슷한 트라우마 - 부모로부터의 끔찍한 학대 - 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테오와 앨리샤가 번갈아 화자를 맡아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사실 독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지 계속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척 단순합니다. 부모의 학대가 남긴 트라우마 때문에 심리상담을 받다가 스스로 심리상담가를 직업으로 택한 테오는 스스로 여전히 반쯤은 환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앨리샤와 상담을 하면서도 불안한 심리를 감추지 못하는데, 거기다가 가끔 즐기는 마리화나는 그를 몽환적인 상태로 몰아넣곤 해서 독자 입장에선 테오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앨리샤가 남긴 일기장 역시 조울증의 기록마냥 행복과 기쁨, 초조와 불안이 교차하기도 하고, 살인사건 직전의 몇몇 일기는 망상으로 가득 차서 독자는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까지가 착각인지 혼란을 겪게 됩니다.

 

메이든스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살인사건과 심리학 스릴러의 조합에다 그리스 비극 한 편을 끼워 넣었습니다. 그것은 남편 대신 목숨을 내놓았다가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지옥 문턱에서 이승으로 돌아오지만 그 뒤로 입을 다물어 버린 여인을 그린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입니다. 앨리샤가 병원에 수감되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의 제목이 알케스티스인데, 그 때문에 테오는 자화상 혹은 그리스 비극 자체에 앨리샤의 진실을 위한 열쇠가 숨어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막판에 테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며 공개됩니다.

 

메이든스의 서평에 이 작품의 진짜 백미는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막판 반전에 있습니다.”라고 썼는데, ‘사일런트 페이션트역시 그에 맞먹는 놀라운 반전을 선사합니다. 정신이상자의 진술처럼 어딘가 모호하기 그지없던 테오와 앨리샤의 이야기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명확한 접점을 이룬 끝에 6년 전 사건의 진실을 토해내는 대목에선 말 그대로 온몸이 굳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고, 같은 페이지를 서너 번은 되읽은 뒤에야 겨우 책장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작동하겠구나!”라며 감탄했던 메이든스의 서평 한 줄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말입니다.

 

(같진 않지만 같은 이라 볼 수 있는) 심리스릴러 또는 심리학 스릴러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장르이고, 스릴러에 끼어든 그리스 신화와 비극은 비호감 그 자체인 게 사실이지만,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두 작품은 오히려 그 두 가지 요소 덕분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스릴러 고유의 미덕과 함께 끝내주는 반전을 일궈낸 그의 글 솜씨는 읽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독자에게마저 부러움과 질투심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2년 간격으로 두 작품을 냈으니 (원작 기준으로) 대략 2023년에 새 작품이 나올 듯 싶은데, 부디 신작에서도 앞선 두 작품 못잖은 감흥과 여운을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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