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디맨
프리다 맥파든 지음, 조경실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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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리건주의 한 주택에서 애런 니어링이라는 남자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그의 지하 작업실에서는 25살 맨디 요한슨의 시신뿐 아니라 지난 10년간 실종된 여성 17명의 잘린 손이 추가로 발견됩니다. 언론에서는 그에게 핸디맨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현재, 애런 니어링의 딸이자 외과의사인 노라 주변에서 다시 손목이 잘린 시체들이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끔찍한 연쇄살인마로 밝혀진 아버지가 체포될 당시 노라는 불과 11살이었습니다. 방조범으로 체포된 어머니마저 구치소에서 자살한 뒤 노라는 성()을 데이비스로 바꾸곤 철저히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유능한 외과의사가 됐지만 노라는 연애나 결혼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평생을 비밀로 해야 할 과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끔찍한 연쇄살인마의 피를 후대에 물려주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범행을 완벽하게 모방한 듯한 연쇄살인마가 등장하고, 하필 그 피해자들이 자신과 연관 있는 여자들로 밝혀지면서 노라는 세상이 무너질 듯한 충격에 빠집니다.

 

연쇄살인마의 자식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설정은 아니지만 핸디맨이 흥미롭게 읽힌 이유 중 하나는 노라가 보호받아 마땅한 가련한 주인공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작가는 11살 시절의 노라 이야기를 간주처럼 끼워 넣으면서 혹시 연쇄살인마의 피는 정말로 유전되는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도발을 툭툭 던지곤 합니다. 더구나 노라가 인간의 몸에 직접 메스를 대는 외과의사가 된 게 단순한 우연은 결코 아니라는 인상도 지울 수 없어서 독자는 마지막까지 노라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를 유발한 것은 이런 설정으로 시작된 스릴러가 막판에 가서 난데없이 나타난 범인을 지목하지는 않는다는 점, 즉 노라 혹은 노라의 주변인물 가운데 범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작가는 용의선상에 오를 법한 인물을 여럿 배치해놓았고, 독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전개가 다소 느려 보이긴 하지만 막판에 두어 명으로 좁혀진 용의자들의 행적들을 돌이켜보면 제법 설계가 잘 된 스릴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분량도 적당하고, 페이지도 잘 넘어가고, 클라이맥스와 엔딩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던 건 사건이 몇 개 없다는 점, 경찰의 압박과 조사가 다소 느슨했다는 점, 그리고 사족이 많았던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느린 만연체처럼 읽혔다는 점 때문입니다. 딱 필요한 하이라이트만 정리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올해 엇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하우스메이드역시 이 작가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어지간히 호평을 받은 작품이 아니라면 더는 심리스릴러를 읽고 싶지 않아서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던 작품입니다. ‘핸디맨을 읽은 뒤에 어느 정도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인데, 일단은 다른 독자들의 평가를 지켜본 뒤에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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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케이지 : 짐승의 집
보니 키스틀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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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서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아오다 결국 최악의 밑바닥에 이르고 만 30살의 셰이 램버트는 가까스로 패션 대기업 사내변호사로 취직합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만에 셰이는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늦은 주말 밤, 인사부장 루시와 함께 탄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춰선 뒤 정전이 되더니 그녀가 느닷없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와 경찰은 루시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살인사건으로 몰아가기 시작했고, 이제 셰이는 죄가 없음을 스스로 밝혀야만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모든 정황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뿐입니다.

 

멈춰선 채 정전된 엘리베이터, 두 사람이 탔지만 한 사람이 죽어버린 상황, 진상을 보여줄 객관적인 단서는 전무한 상태. 셰이 램버트가 처한 상황은 살인자로 오인받기 딱 좋은 암담함 그 자체입니다. 그녀 자신이 변호사이긴 하지만 정황만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유일하게 기댈 것이라곤 인사부장 루시의 자살동기가 밝혀지는 것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셰이에게 불리한 진술과 증거들이 튀어나오면서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맙니다.

 

이야기는 루시는 자살했다.”를 입증하려 분투하는 현재 시점의 셰이, 영광과 추락을 거듭했던 과거 시점의 셰이, 그리고 루시는 셰이에게 살해당했다.”며 셰이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려는 회사 고위층 배럿 등 세 명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갑자기 멈춰선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죽음은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우연 그 자체지만, 세 가지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 혹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구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됩니다. 인생 막장을 헤매던 셰이가 하필 이 회사에 들어온 일도, 하필 주말 늦은 밤에 루시와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탄 일도, 그리고 하필 배럿이란 인물과 대립하게 된 일도 어찌 보면 예정돼있던 일처럼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그 많은 변수 가운데 하나만 방향을 조금 바꿨어도 셰이에겐 이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아이러니들 덕분에 이야기는 더욱 쫄깃하게 읽힙니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이야기는 셰이의 무죄입증 분투기에 법정 스릴러까지 가미되면서 더욱 속도감을 높입니다. 그 자신이 변호사인 셰이는 무죄입증과 함께 복수를 계획하며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을 자신의 뜻대로 구워삶기도 하는데, 전직 변호사인 작가의 이력이 십분 발휘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나름 재미있게 읽었지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가장 큰 이유는 허술한 악당 설정때문입니다. 셰이를 살인범으로 만들려는 악당들의 동기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그들이 은폐하려는 악행 자체가 다소 현실감이 떨어졌고, 셰이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그들이 동원한 수단들 역시 어설프고 빈틈투성이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2014년에 어울리지 않는 조악한 수준의 누명 씌우기대목에선 웃음만 나올 뿐이었는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바람에 주인공인 셰이에게 몰입하는 것마저 어려워지곤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셰이의 매력이 뒤로 갈수록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갑자기 비현실적인 슈퍼 히로인이 되는 것도, 그녀를 돕는 조연의 힘이 너무 막강해서 그 도움이 없었다면 셰이 혼자 뭘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모두 셰이의 매력을 반감시킨 요인들입니다.

 

초반 설정도 흥미로워 보였고, 법정 스릴러를 좋아해서 선택했지만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은 작품입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테니 이 작품이 궁금한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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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노웨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
제프리 디버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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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트(Phate)라는 닉네임을 쓰는 천재 크래커(cracker) 존 패트릭 핼러웨이는 자신이 사냥감으로 삼은 사람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그()의 일상을 장악한 뒤 무참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입니다. 그에게 살인은 일종의 게임에 불과하며 피해자는 게임 속 캐릭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좀더 난이도가 높은 미션을 추구하며 끝없는 살인행각을 저지릅니다. 한편 CCU(캘리포니아주 경찰 컴퓨터범죄반)는 새로운 종류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범행에 사용됐다고 판단하곤 해킹죄로 수감 중인 해커 와이어트 질레트를 가석방시켜 수사에 참여시킵니다. 전통적인 강력계 형사인 프랭크 비숍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질레트를 신뢰하며 수사를 이어나가지만 페이트의 신원을 파악해내고도 예기치 못한 사태가 거듭 벌어지자 큰 위기에 빠집니다.

 

인터넷 대중화의 초기를 통상 1990년대 중반으로 본다면, 이 작품이 출간된 2001년은 뉴스와 쇼핑과 SNS 등 인터넷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일상 속에 안착한 시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 이용자에게 가장 큰 위협은 트로이목마 같은 바이러스 정도였고, 그 누구도 피부에 와 닿는 공포를 느낄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파이웨어, 악성코드, 랜섬웨어 등 한 사람 혹은 기업이나 국가마저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을 누구나 체감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뉴스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블루 노웨어는 천재적인 크래커이자 연쇄살인범인 페이트와 역시 뛰어난 화이트 해커인 와이어트 질레트를 등장시켜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악몽을 리얼하게 그린 테크노스릴러입니다.

 

페이트의 주 무기는 단순한 바이러스를 넘어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물론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트랩도어라는 소프트웨어로, 오늘날의 스파이웨어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무기라고 할까요?

그가 사냥감을 선정하고 그()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일상을 장악한 뒤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게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성호신술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여자, 외부침입에 만반을 대비했다고 자랑하는 학교관계자, 크래커의 침입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다고 떠벌이는 기업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정치인 등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면서 쾌감을 얻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그의 범행이 사이버테러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흉기를 이용한 아날로그 방식의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과거 그가 즐겼던 게임에서 살인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제한, 살인자는 칼로 심장을 찌를 수 있을 만큼 상대에게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는 룰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야말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믹스된 희대의 연쇄살인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이트와 맞붙는 화이트 해커 와이어트 질레트는 페이트 못잖은 천재지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탓에 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CCU의 요구로 페이트 수사에 가담한 그는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지만 절대 드러내지 못할 비밀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한때 페이트의 공범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그런 상태에서 탈주극을 벌여 위기에 빠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목숨이 달아날 치명적인 상황에 마주치기도 합니다.

이런 그를 페이트 수사에 가담시킨 CCU컴퓨터범죄반이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인원도, 예산도 부족한 초라한 조직입니다. 더구나 페이트의 수사는 CCU의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라 마초 스타일의 강력계 형사 프랭크 비숍이 지휘하게 되는데, 질레트와 비숍의 조합은 처음엔 물과 기름 이상으로 뒤섞이기 어려워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묘하게도 매력적인 콤비 플레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는 물론 여러 편의 스탠드얼론에서도 막판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제프리 디버의 서사는 블루 노웨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초반에 공개된 범인 페이트의 잔인한 범행은 매번 예측불허로 전개되고, 누군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페이트의 공범의 정체는 사건이 일단락됐다고 여길 때쯤 새로운 반전과 함께 폭로되며, 질레트를 비롯한 CCU 내 수사관들의 어딘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캐릭터도 수시로 소소한 반전의 맛을 더해줍니다.

 

2022년의 독자에겐 페이트와 질레트의 대결이 고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2001년의 독자에겐 치명적인 소프트웨어를 통한 페이트의 가공할 사이버 테러가 (한 등장인물의 표현대로) ‘도시괴담처럼 읽혔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프리 디버가 내다본 온라인 세계, 즉 블루 노웨어의 공포는 오늘날 명백한 현실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작가 시가 아키라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가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스마트폰이 한순간에 악마를 자신의 일상으로 불러들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면, ‘블루 노웨어는 컴퓨터와 온라인 세상을 무대로 그 이상의 교훈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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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하우스
피터 메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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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아들을 사고로 잃고 절망감에 빠져있던 에든버러 경찰서 형사 핀 매클라우드는 상부의 지시로 18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 루이스 섬에 파견됩니다. 한 달 전 에든버러에서 벌어진 것과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이 벌어진데다 피살자가 핀의 지인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붕괴된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던 고향에 돌아온 핀은 어떻게든 과거와 마주치는 걸 회피하려 하지만 피살자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망령과도 같은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게 됩니다. 지독한 상처만 남긴 첫사랑, 애증으로 뒤얽힌 절친, 따돌림과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 그리고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런 절해고도에서의 2주간의 잔혹한 전통 집단사냥 등 핀에게 있어 루이스 섬은 모든 게 악몽일 뿐입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무대로 한 스릴러는 더 북쪽에 있는 북유럽 배경 스릴러와는 또 다른 서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과 분리를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가 스릴러의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땐 특유의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그 서늘함을 더욱 강조하곤 합니다. 또 이 작품의 주 무대인 루이스 섬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 자연환경과 그에 맞서온 사람들의 지난한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일 경우에는 (작가 본인의 설명대로) “휘몰아치는 바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깎아지른 절벽과 매서운 파도,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섬사람들의 가혹한 삶이 서늘함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맨 뒤에 실린 영국 및 루이스 섬 지도를 보면 주인공 핀의 고향이 얼마나 척박하고 거친 환경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시사철 폭풍우가 몰아치고, 본토와의 거리 탓에 생활양식마저 유폐된 루이스 섬은 지리적기후적심리적 고립감을 자아내며 폐쇄된 공간 특유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사실상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루이스 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섬 자체가 사람들의 삶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한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블랙하우스의 중심서사는 범인 찾기가 아니라 과거의 참혹한 유령들과 18년 만에 정면으로 마주선 핀의 고통과 회한으로 보입니다. 분량으로 봐도 핀이 태어나 섬을 떠나기까지의 시간들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더 많아 보이는데, 독자에 따라 그 대목들이 다소 지루하고 느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핀이 맞닥뜨려야 할 극적인 엔딩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설정이므로 작가가 집요하리만치 세세하게 그려낸 디테일들을 놓치지 말고 차분하게 읽어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루이스 섬에는 수백 년을 내려온 전통이 있습니다. 육지에서 80km나 떨어진 절해고도 안 스커에서 12명의 사냥꾼이 2주에 걸쳐 가넷새의 새끼를 사냥하는 것입니다. 수천 마리의 새끼 새를 잡아 목을 자르고 내장을 꺼내고 염장을 하여 육지로 돌아오는 이 참혹한 전통은 루이스 섬에서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단 한 번 이 사냥에 반강제로 끌려갔던 핀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의 삶을 불안하게 뒤흔드는 악몽입니다. 아들을 잃은 상태에서 영원히 잊고 싶었던 고향에 돌아와 과거의 인물들과 만나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핀의 캐릭터를 더욱 심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이 새끼 새 사냥은 왜 표지에 스코틀랜드 호러 스릴러라는 문구가 인쇄됐는지를 120% 공감하게 만드는 설정입니다.

 

핀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주력하던 이야기는 막판에 이르러 약간은 막장에 가까운 코드들이 터지면서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내는 쪽으로 급선회합니다. 동시에 살인사건을 놓고 제각각의 태도를 보여 온 섬사람들의 수상쩍은 행태의 이면도 속속들이 파헤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핀이 마주한 건 미친 듯이 날뛰는 바다와 그 너머에서 자행될 예정인 또 하나의 살육극입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 것만 같은 최악의 상황이 핀을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핀의 과거 장면이 다소 장황하게 이어질 때는 기대했던 스릴러 서사와 많이 달라 보여서 이른 실망감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대목을 견디고 마지막 장에 이른다면 이 작품의 깊이와 무게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이스 섬 3부작의 첫 편인 이 작품의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거친 자연, 폐쇄적인 공간, 잔인한 관습, 그리고 거기에 순응하거나 저항해온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이 한데 빚어낸 독특한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찾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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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여름이 남긴 기적
나타엘 트라프 지음, 이정은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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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는 없는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아무 정보 없이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8, 프랑스의 소도시 발미쉬르라크의 마르셀비알뤼 고등학교에 다니는 레오는 6일 앞으로 다가온 학년말 축제 때문에 긴장상태입니다. 짝사랑하는 발랑틴을 어떻게든 축제 파트너로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거리 곳곳에 30년 전인 1988년 축제의 밤에 호숫가에서 사체로 발견된 17살 여고생 제시카를 추모하는 포스터가 걸립니다. 당시 목격자는 제시카의 몸에 폭행의 흔적이 있다고 증언했지만 경찰은 단순사고로 결론을 냈습니다. 그 포스터를 볼 때까지만 해도 레오는 자신과는 무관한 과거의 일로 여겼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믿기 어려운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달력은 제시카가 살해당하기 6일 전인 19886월이었고, 얼굴과 몸도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타임슬립 청춘 성장소설살인 미스터리가 곁들여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타임루프. 타임리프, 타임워프, 타임슬립 등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작품들이 워낙 많아서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지만, ‘7번째 여름이 남긴 기적은 나름대로 독창적인 서사를 펼쳐 보입니다.

 

우선 하루가 두 번씩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1988, 또 한 번은 2018.”(p104)이라는 설정이 눈길을 끄는데, 말하자면 1988년의 월요일을 산 레오는 다음날엔 2018년의 월요일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레오가 두 번의 하루를 사는 건 모두 6일이며, 마지막 날은 1988년과 2018년 모두 축제일입니다. 특히 1988년의 그날은 제시카가 살해든 사고든 죽음을 맞이한 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1988년의 6일 동안 레오가 매일 다른 인물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두 제시카와 관련된 인물인데 때론 여학생의 몸으로 깨어날 때도 있어서 레오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과거를 바꿔도 현재는 달라지지 않는다.”라는 타임슬립 서사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점입니다. 레오는 매번 다른 인물로 1988년의 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이른바 자유의지운명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특히 자신이 빌린 몸의 주인들이 30년 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아는 경우에는 고민이 더욱 깊어지는데, 자유의지로 반짝반짝 빛나던 1988년의 17살 청춘이 30년 후 꼴사납거나 우울한 중년으로 전락하는 게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바꿔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레오는 소소한 말과 행동으로 변화를 시도해보기도 하는데, 그 결과는 다음날인 2018년이면 레오의 눈앞에 즉시 나타나곤 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1988년이든 2018년이든 17살 청춘의 열정과 사랑과 고민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좀더 빛나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치지만 현실은 좀처럼 청춘들에게 희망 한 조각 쉽게 내주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레오와 독자를 사로잡는 건 실제 1988축제날 죽음을 맞이한 제시카가 레오가 존재하는 1988에 과연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입니다. 레오의 목표는 어떻게든 제시카의 죽음을 막는 것이지만 그것은 2018년 현재를 어마어마하게 뒤바꿔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엔딩을 선사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청춘 성장소설의 분위기가 워낙 강해서 타임슬립 미스터리에 큰 기대를 건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인데다 프랑스 작품임에도 쉽고 평이한 문장들로 이뤄져서 금세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찾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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