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노웨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
제프리 디버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페이트(Phate)라는 닉네임을 쓰는 천재 크래커(cracker) 존 패트릭 핼러웨이는 자신이 사냥감으로 삼은 사람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그()의 일상을 장악한 뒤 무참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입니다. 그에게 살인은 일종의 게임에 불과하며 피해자는 게임 속 캐릭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좀더 난이도가 높은 미션을 추구하며 끝없는 살인행각을 저지릅니다. 한편 CCU(캘리포니아주 경찰 컴퓨터범죄반)는 새로운 종류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범행에 사용됐다고 판단하곤 해킹죄로 수감 중인 해커 와이어트 질레트를 가석방시켜 수사에 참여시킵니다. 전통적인 강력계 형사인 프랭크 비숍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질레트를 신뢰하며 수사를 이어나가지만 페이트의 신원을 파악해내고도 예기치 못한 사태가 거듭 벌어지자 큰 위기에 빠집니다.

 

인터넷 대중화의 초기를 통상 1990년대 중반으로 본다면, 이 작품이 출간된 2001년은 뉴스와 쇼핑과 SNS 등 인터넷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일상 속에 안착한 시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 이용자에게 가장 큰 위협은 트로이목마 같은 바이러스 정도였고, 그 누구도 피부에 와 닿는 공포를 느낄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파이웨어, 악성코드, 랜섬웨어 등 한 사람 혹은 기업이나 국가마저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을 누구나 체감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뉴스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블루 노웨어는 천재적인 크래커이자 연쇄살인범인 페이트와 역시 뛰어난 화이트 해커인 와이어트 질레트를 등장시켜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악몽을 리얼하게 그린 테크노스릴러입니다.

 

페이트의 주 무기는 단순한 바이러스를 넘어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물론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트랩도어라는 소프트웨어로, 오늘날의 스파이웨어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무기라고 할까요?

그가 사냥감을 선정하고 그()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일상을 장악한 뒤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게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성호신술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여자, 외부침입에 만반을 대비했다고 자랑하는 학교관계자, 크래커의 침입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다고 떠벌이는 기업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정치인 등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면서 쾌감을 얻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그의 범행이 사이버테러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흉기를 이용한 아날로그 방식의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과거 그가 즐겼던 게임에서 살인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제한, 살인자는 칼로 심장을 찌를 수 있을 만큼 상대에게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는 룰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야말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믹스된 희대의 연쇄살인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이트와 맞붙는 화이트 해커 와이어트 질레트는 페이트 못잖은 천재지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탓에 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CCU의 요구로 페이트 수사에 가담한 그는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지만 절대 드러내지 못할 비밀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한때 페이트의 공범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그런 상태에서 탈주극을 벌여 위기에 빠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목숨이 달아날 치명적인 상황에 마주치기도 합니다.

이런 그를 페이트 수사에 가담시킨 CCU컴퓨터범죄반이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인원도, 예산도 부족한 초라한 조직입니다. 더구나 페이트의 수사는 CCU의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라 마초 스타일의 강력계 형사 프랭크 비숍이 지휘하게 되는데, 질레트와 비숍의 조합은 처음엔 물과 기름 이상으로 뒤섞이기 어려워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묘하게도 매력적인 콤비 플레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는 물론 여러 편의 스탠드얼론에서도 막판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제프리 디버의 서사는 블루 노웨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초반에 공개된 범인 페이트의 잔인한 범행은 매번 예측불허로 전개되고, 누군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페이트의 공범의 정체는 사건이 일단락됐다고 여길 때쯤 새로운 반전과 함께 폭로되며, 질레트를 비롯한 CCU 내 수사관들의 어딘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캐릭터도 수시로 소소한 반전의 맛을 더해줍니다.

 

2022년의 독자에겐 페이트와 질레트의 대결이 고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2001년의 독자에겐 치명적인 소프트웨어를 통한 페이트의 가공할 사이버 테러가 (한 등장인물의 표현대로) ‘도시괴담처럼 읽혔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프리 디버가 내다본 온라인 세계, 즉 블루 노웨어의 공포는 오늘날 명백한 현실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작가 시가 아키라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가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스마트폰이 한순간에 악마를 자신의 일상으로 불러들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면, ‘블루 노웨어는 컴퓨터와 온라인 세상을 무대로 그 이상의 교훈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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