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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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987, 오하이오 주 남부의 소도시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는 행크 미첼은 어느 날 형 제이콥과 형의 친구 루와 함께 눈 덮인 숲에서 추락한 경비행기를 발견합니다. 조종사의 시신 외에 비행기에 남아있던 건 무려 440만 달러가 든 더플백. 무직에 가난하기까지 한 제이콥과 루는 당장 돈을 나눠 갖자고 주장하지만, 행크는 돈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진 그럴 수 없다며 6개월의 유예기간을 제안합니다. 결국 행크가 돈을 보관하다가 6개월 후 나누기로 합의하지만, 간단한 계획은 얼마 못가 균열과 함께 끔찍한 비극을 초래합니다.

 

출간 직후인 2009년에 읽었으니 자세한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세 남자가 눈 덮인 숲에서 추락한 경비행기와 돈다발을 발견하는 첫 장면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또한 스릴러의 쾌감보다는 외줄에 올라탄 듯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긴 기분 역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언젠가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서평을 쓰겠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뤄온 이유는 그 조마조마한 심정이 실은 쫄깃한 긴장감을 훌쩍 넘어선 불쾌함, 또는 눈에 빤히 보이는 비극적 결말을 목도하기 위해 페이지를 넘겨야만 하는 기분 나쁜 중압감에 가까웠다는 점 때문입니다.

 

주인공 행크 미첼은 한때 변호사를 꿈꿨지만 지금은 몰락한 소도시에서 평생 회계원으로 늙어갈 게 뻔한 평범한 소시민입니다.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정도로 순둥이 같기도 하고, 아내 사라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범적인 남성이기도 합니다. ‘심플 플랜지금껏 이 책에 견줄 만한 서스펜스는 없었다.”는 스티븐 킹의 극찬대로 거액의 돈을 둘러싼 팽팽한 서스펜스 스릴러이기도 하지만, 소시민 행크가 뜻밖의 큰돈을 발견한 뒤로 어떻게 탐욕의 화신이자 연쇄살인마로 변해가는 지를 그려낸 지독한 심리스릴러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상당한 분량이 행크의 요동치는 심리를 묘사하는 데 할애되고 있는데, 그 대목들이야말로 심플 플랜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돈을 발견한 세 남자는 6개월의 유예기간에 합의를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들 사이엔 비밀과 거짓말, 탐욕과 적개심, 불신과 배신이 끼어듭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은 그들 사이의 균열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까지 벌려놓았고, 그 균열은 끝내 피비린내 진동하는 참극을 유발합니다. 하지만 참극이 마무리된 후에도 큰돈을 둘러싼 위기는 그치지 않고, 행크는 돈을 들고 도망칠 수도, 돈을 포기할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고 맙니다. 행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돈에 대한 탐욕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그 탐욕을 구현하기 위해 끔찍한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타일러야 한다. 우리가 한 일은 그럴 법하고 용서될 만한 일이라고. 어쩔 수 없이 휘말린 상황에서 나왔다고. 그래서 우리 잘못은 전혀 없다고. 우리가 저지른 일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뿐이었다.” (p339~340)

 

앞서 긴장감을 넘어선 불쾌함 또는 기분 나쁜 중압감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건 이 작품이 재미없다는 뜻도 아니고, 불쾌감만 남기는 소설이란 뜻도 아닙니다. 다시 읽고 보니 그런 기분을 느꼈던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됐는데, 그건 주인공 행크에게 어떤 결말이 주어지는 게 맞는 건지, 즉 그가 제대로 처벌받기를 바라야 할지, 아니면 반대로 어떻게든 계획을 성공시켜 행복한 미래를 거머쥐기를 바라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화신이자 끔찍한 연쇄살인마로 추락했지만 선한 소시민이자 모범적인 남편 행크의 본질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행크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한 이 이중적인 정체성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불쾌함과 중압감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억측에 가까운 역설이지만 어쩌면 이런 감정들에 푹 빠지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평까지 쓰고 나니 미루고 미뤄온 큰 숙제를 마친 기분입니다. 물론 처음 읽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무겁고 씁쓸한 여운에 짓눌리긴 했지만, 왜 스티븐 킹이 이 작품을 극찬했으며 미국에서 전설의 데뷔작이라고 불리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심플 플랜의 여운이 좀 가시고 나면 스콧 스미스가 이 작품 이후 무려 13년 뒤에 내놓은 호러 소설 폐허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단 한 작품으로 서스펜스의 거장 소리를 들은 작가가 긴 공백 끝에 호러 소설로 복귀했다는 사실 때문에 늘 궁금했던 작품인데, 왠지 폐허역시 불쾌함과 기분 나쁜 중압감을 유발할 것 같아 기대감 못잖게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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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컨 브리프 존 그리샴 베스트 컬렉션 2
존 그리샴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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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법원 판사 두 명이 전문 암살범에게 살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튤레인 법대 교수인 캘러헌이 그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 이번 사건의 이면에는 대법원을 보수적인 대법관으로 채우려는 백악관의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자 스무 살 연하의 연인이자 법대생인 다비 쇼는 순전히 호기심 삼아 사건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성된 일명 펠리컨 브리프가 캘러헌의 절친인 FBI 법률고문을 통해 백악관과 유수의 기관에 배포되자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이후 다비의 가상 시나리오가 진실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펠리컨 브리프와 관련된 자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하고 다비 역시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존 그리샴,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 등 대가들의 작품이 한국에 봇물처럼 쏟아진 건 90년대 초중반의 일입니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까지 붐을 일으킬 정도였는데, 정작 읽은 존 그리샴의 작품은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등 세 편뿐입니다. 셋 다 무척 인상 깊게 읽었는데도 더 이상 존 그리샴의 작품을 읽지 않은 이유가 기억나진 않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도 간간이 개정판이나 신간 출간소식이 들리면 잠깐이나마 관심을 가질 정도로 그의 이름과 필력은 제게 깊이 각인돼있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읽은 그의 작품들(‘속죄나무’, ‘소송사냥꾼’, ‘잿빛 음모’)은 대체로 실망스러웠고, 그래선지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그의 열정이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명품재독이라는 계획을 세우면서 존 그리샴의 초기작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고, 그 첫 번째로 고른 것이 펠리컨 브리프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자신이 작성한 대법관 암살사건에 관한 가상 시나리오 펠리컨 브리프때문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고 본인마저 위기에 빠지자 다비 쇼는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그레이 그랜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 도주극을 벌이면서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한편 패닉에 빠진 백악관과 정보기관들은 서로 다른 속내를 숨긴 채 다비를 쫓는 것은 물론 그녀가 작성한 브리프의 내용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아내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과 정보전을 벌입니다.

 

법대 교수, 변호사를 꿈꾸는 법대생, 대형 로펌 등 법정 스릴러에 필수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정작 법정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그리샴 특유의 ‘Legal Thriller’의 묘미를 내내 만끽할 수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 위기에 빠진 백악관과 유수의 정보기관들이 펼치는 치열하고도 절박한 정치+정보 스릴러, 그리고 다비의 파트너인 워싱턴 포스트 기자 그레이 그랜섬이 맹활약하는 저널리즘 스릴러까지 함께 맛볼 수 있어서 그야말로 각종 스릴러의 진수성찬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펠리컨은 펠리컨이라는 새를 가리키기도 하고, 속어로 루이지애나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펠리컨 브리프는 루이지애나 사람이자 장차 변호사를 꿈꾸는 다비가 멸종위기종인 갈색 펠리컨의 서식지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이익을 도모하려는 세력과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법을 일삼아 온 정치인 간의 야합을 폭로한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제목이란 뜻입니다. 다비는 환경주의자도 아니고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정의의 사도도 아니지만, 루이지애나와 펠리컨을 파괴하려는 자들이 대법관 살해라는 중범죄와 연관 있음을 우연히 포착한 뒤론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진실 찾기에 도전합니다.

 

엇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중반부에 살짝 늘어지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존 그리샴의 진짜배기 스릴러를 만끽할 수 있어서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의뢰인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도 다시 읽어볼 생각이고, 존 그리샴의 초기작들 중 못 읽은 작품들도 검색해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줄리아 로버츠와 덴젤 워싱톤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도 찾아볼 생각인데, 그 무렵 최전성기를 달렸던 줄리아 로버츠의 풋풋한 법대생 모습도 사뭇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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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질은 부드러워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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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지구상에서 동물이 사라진 이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몇몇 정부는 제한적인 인육 소비를 허가했습니다. 수의사의 꿈을 접고 지금은 인육 가공 공장의 2인자가 되어 인육의 도축과 유통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지만 마르코스 테호는 인육을 절대 먹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릴 적 아버지와 자주 갔던, 하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빈 동물원에 가서 견디기 힘든 비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 애쓰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고기용 인간을 사육하는 업자가 최상급 암컷 한 마리를 선물합니다. 기르든 도살하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만 마르코스는 그 암컷을 헛간에 두고 보살핍니다. 갓 태어난 아들이 숨진 뒤 아내와 별거 중이던 마르코스는 어느 날 암컷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유명한 시라이 도모유키의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역시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동물이 사라진 뒤 인육을 소비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작품에서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인육은 오직 자신의 체세포로 생산된 식용 클론뿐입니다. 하지만 육질은 부드러워에는 끔찍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도축되는 진짜 인육이 등장합니다. 고기용 암컷과 수컷 간의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난 뒤 사육업자에게 길러지는 최상급 인육부터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 도축형을 선고받은 자들, 사고나 병으로 사망한 자들, 외국에서 수입된 고기용 인간 등 진짜 인간의 몸이 동물성 단백질의 원천으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개체, 고기, 제품, 암컷, 수컷으로 불리는 그들은 우리에 갇힌 채 물과 사료로 키워지며 때론 신속한 대량생산을 위해 성장 촉진제를 투여받기도 합니다. 그들 중엔 돈 많은 사냥꾼들의 수렵장에 끌려가 인간 사냥감이 되거나 생체실험 연구소에 팔려가 갖가지 실험에 이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건 도축 대상이 되는 건데, 도축된 그들의 몸은 무엇 하나 버려지는 부위 없이 완벽하게 소비됩니다.

작가는 식인이 합법화된 세상에서 인육이 어떻게 길러지고 소비되는지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한편, 사육업자, 육류가공업자, 가죽가공업자, 인간사냥꾼, 생체실험 연구소, 성매매 업소 등 이른바 고기용 인간들을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에 이용하는 다양한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잔인한 장르물을 어지간히 읽은 편이지만 사육-도축-가공-소비로 이어지는 식인의 일련의 과정에 관한 상세한 묘사에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나름 큰 각오를 하고 읽어야 할 작품입니다.

다만 흥미 위주의 식인 이야기를 기대해선 안 됩니다. 또 채식주의자인 작가가 육류 소비를 비난하기 위해 쓴 작품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먹어 치우며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와 끝을 알 수 없는 인류의 탐욕을 그린 작품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마르코스 테호는 인육을 권장하는 TV광고가 난무하는 미친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인데, 작가는 그와 그 주변사람들 - 과거 도축업자였지만 동물이 사라지고 인육이 등장하자 치매에 걸려버린 아버지, 아이가 돌연사한 뒤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친정으로 돌아가버린 아내, 어느 날 갑자기 마르코스의 집안에 머물게 된 최상급 고기용 암컷’,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도 마르코스가 매일 같이 만나야만 하는 비인간적인 인육 관련업자 등 - 을 통해 헤어날 수 없는 디스토피아의 비극을 절절하게 그려냅니다.

 

내용과 장르를 불문하고 디스토피아 스토리의 엔딩은 언제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을 남긴 채 마무리될지,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에게 한없이 무겁고 암담한 여운만 남겨 놓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인데, ‘육질은 부드러워의 경우 설정 자체가 작은 희망조차 남길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엔딩 때문에 여운의 무게와 암담함은 더욱 무겁고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동물은 절멸시키되 인간만 살려놓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에 하나 육질은 부드러워의 세상이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마지막 장을 덮고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며 그런 의문을 떠올려보니 책을 읽을 때보다 더더욱 착잡해지고 암울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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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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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 미국의 지성이자 존경받는 문학교수이며 국민작가로 칭송받는 해리 쿼버트의 자택 정원에서 33년 전 15살의 나이에 실종된 소녀 놀라 켈러건의 유해가 발견됩니다. 유해 옆엔 해리의 대표작인 악의 기원의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고 그는 즉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구치소에 수감됩니다. 33년 전 30대 중반이던 자신과 15살이던 놀라 켈러건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악의 기원은 두 사람의 사랑을 모티브로 한 책이라는 해리의 자백에 문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전역이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한편 데뷔작으로 정상에 오른 젊은 소설가이자 해리의 특별한 제자인 마커스 골드먼은 그가 결코 놀라 켈러건을 죽였을 리 없다는 확신을 갖고 직접 진상 조사에 나섭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13년에 처음 출간됐을 때부터 관심을 가진 작품이지만 개정판이 나온 11년 뒤에야 읽게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엄청난 분량(개정판 기준 1~2권 합계 1,100)에 대한 부담감이었고, 또 하나는 2019년에 출간된 스테파니 메일러 실종사건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탓에 조엘 디케르는 나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가라고 예단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밝은세상의 서평단 제안이 아니었다면 영영 읽지 못할 뻔한 작품인데, 이 매력적인 이야기와 가까스로 인연이 닿은 건 정말 행운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간단합니다. 국민작가인 해리 쿼버트가 33년 전 뉴햄프셔주의 소도시 오로라에서 15살 소녀 놀라 켈러건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의 진실을 그의 제자이자 미국 문학계의 신성인 마커스 골드먼이 강력계 형사 페리 게할로우드의 도움을 받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선 이 작품을 프랑스 문학으로 분류해놓았지만 미스터리 스릴러의 서사가 바탕에 깔려 있어서 프랑스 문학에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1,100쪽이라는 분량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범죄 청정지역으로 불려온 소도시 오로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탐문을 벌이는 마커스의 행보를 쫓아가다 보면 엄청난 디테일의 힘과 마력에 여러 차례 놀라게 되면서 왜 이토록 방대한 분량이 필요했는지를 쉽게 수긍하게 됩니다.

또한 단순히 범인은 누구?’라는 미스터리 외에도 다양한 서사가 포진돼있어서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오로라 주민들에게서 감지되는 비밀과 거짓말, 시기와 질투, 탐욕과 이기심은 33년 전 사건의 이면에 더럽고 추악한 진상이 숨어있음을 예감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 누구라도 놀라 켈러건 살해범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또한 각별한 사제관계인 해리와 마커스를 통해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소설가의 세계를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데, 사건 자체와는 무관해 보이던 이 소설가에 관한 심층적 고찰은 막판에 이르러 미스터리 서사와 결합되면서 큰 놀라움과 함께 그 존재의 이유를 드러냅니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의 가장 큰 매력은 시종 쉴 새 없이 터지는 반전입니다. 놀라 켈러건 살해용의자가 수차례 뒤바뀌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33년 전부터 지금까지 오로라 주민들이 품어온 숱한 비밀과 거짓말이 폭로되는가 하면, 15살의 나이에 30대 중반인 해리와 사랑에 빠졌던 놀라 켈러건의 충격적인 과거가 드러나기도 하고, 마커스의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자 사건의 핵심인물인 해리마저 여러 차례 마커스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일으키곤 합니다. 그야말로 반전의 불꽃놀이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많고 관계도 복잡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진 못했지만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홍보 카피의 헤드라인 정도만 참고한 상태에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도 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만 하루 안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니 저처럼 분량에 부담을 느끼는 독자라도 일단 100페이지만 읽어보자”,라는 마음으로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미 한국에도 출간된 조엘 디케르의 볼티모어의 서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이 이 작품과 함께 3부작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내용은 독립적이지만 마커스 골드만이 화자로 등장하는 등 일부 인물들이 겹쳐서 연작소설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역시 분량이 만만찮은 작품들이지만 언젠가는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론 중도 포기했던 스테파니 메일러 실종사건도 재도전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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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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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의 주인공은 유령과 대화할 수 있는 소년 제이미 콘클린입니다. 죽은 직후부터 그 혼이 사라지기까지 며칠간만 대화가 가능하며 유령들은 제이미의 질문에 진실만을 답한다는 특별한 설정이 있긴 하지만,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론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러의 대가 스티븐 킹은 독자의 예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이미의 능력을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하곤 연이은 반전을 선사하여 마지막 장까지 흥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6살 소년 제이미의 능력을 아는 건 싱글맘이자 작가 에이전트인 티아뿐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눈으로 제이미의 능력을 확인하기 전까진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거나 아들의 정신 상태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이미가 죽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자 티아는 충격과 함께 아들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편 티아의 동성 연인이자 뉴욕 경찰인 리즈 역시 그 자리에서 제이미의 능력을 목격했는데, 이후 리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이미를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뼈대만 추리면 짧은 중편으로도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스티븐 킹은 금융위기, 마약, 테러, 동성애, 근친상간, 폰지 사기 등 현대 미국 사회가 안은 민감한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호러물 이상의 풍성한 이야기를 완성시켰습니다. 제이미가 목격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유령들도 이웃의 노부인에서부터 엄마가 관리하던 베스트셀러 작가, 또래들의 가혹행위로 목숨을 잃은 소년, 10년 넘게 폭탄테러를 자행해온 흉악범, 마약 중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서 서사 자체를 튼실하고 볼륨감 넘치게 만듭니다.

가장 큰 사건이자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인 제이미 납치극은 막판에 짧고 빠르게 전개될 뿐이지만 그 전까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호러의 조각들이 하이라이트 못잖게 매력적이라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매번 스티븐 킹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낀 점이긴 하지만 나중에가 좀더 특별하게 읽힌 이유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도 맞은편에 앉은 스티븐 킹이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친밀감이 여느 작품보다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인칭 화자인 제이미가 수시로 독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스티븐 킹과 마주 앉은 듯한 친밀감이 고조되곤 합니다. 그래선지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인 제이미의 캐릭터 역시 조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나 리얼해서 세상 어딘가에 이런 인물이 하나쯤 있을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게 됩니다. 진정한 이야기꾼인 스티븐 킹의 재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스포일러까진 아니어도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킬 만한 내용이 많아서 줄거리가 거의 없는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사전 정보 없이 읽어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스티븐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소름 돋게 하면서도 유쾌하고 재미있는 뜻밖의 호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나중에를 꼭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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