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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컨 브리프 ㅣ 존 그리샴 베스트 컬렉션 2
존 그리샴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법원 판사 두 명이 전문 암살범에게 살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튤레인 법대 교수인 캘러헌이 그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 이번 사건의 이면에는 대법원을 보수적인 대법관으로 채우려는 백악관의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자 스무 살 연하의 연인이자 법대생인 다비 쇼는 순전히 호기심 삼아 사건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성된 일명 ‘펠리컨 브리프’가 캘러헌의 절친인 FBI 법률고문을 통해 백악관과 유수의 기관에 배포되자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이후 다비의 가상 시나리오가 진실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펠리컨 브리프와 관련된 자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하고 다비 역시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존 그리샴,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 등 대가들의 작품이 한국에 봇물처럼 쏟아진 건 90년대 초중반의 일입니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까지 붐을 일으킬 정도였는데, 정작 읽은 존 그리샴의 작품은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등 세 편뿐입니다. 셋 다 무척 인상 깊게 읽었는데도 더 이상 존 그리샴의 작품을 읽지 않은 이유가 기억나진 않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도 간간이 개정판이나 신간 출간소식이 들리면 잠깐이나마 관심을 가질 정도로 그의 이름과 필력은 제게 깊이 각인돼있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읽은 그의 작품들(‘속죄나무’, ‘소송사냥꾼’, ‘잿빛 음모’)은 대체로 실망스러웠고, 그래선지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그의 열정이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명품재독’이라는 계획을 세우면서 존 그리샴의 초기작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고, 그 첫 번째로 고른 것이 ‘펠리컨 브리프’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자신이 작성한 대법관 암살사건에 관한 가상 시나리오 ‘펠리컨 브리프’ 때문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고 본인마저 위기에 빠지자 다비 쇼는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그레이 그랜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 도주극을 벌이면서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한편 패닉에 빠진 백악관과 정보기관들은 서로 다른 속내를 숨긴 채 다비를 쫓는 것은 물론 그녀가 작성한 브리프의 내용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아내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과 정보전을 벌입니다.
법대 교수, 변호사를 꿈꾸는 법대생, 대형 로펌 등 법정 스릴러에 필수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정작 법정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그리샴 특유의 ‘Legal Thriller’의 묘미를 내내 만끽할 수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 위기에 빠진 백악관과 유수의 정보기관들이 펼치는 치열하고도 절박한 정치+정보 스릴러, 그리고 다비의 파트너인 워싱턴 포스트 기자 그레이 그랜섬이 맹활약하는 저널리즘 스릴러까지 함께 맛볼 수 있어서 그야말로 각종 스릴러의 진수성찬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펠리컨’은 펠리컨이라는 새를 가리키기도 하고, 속어로 루이지애나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즉 ‘펠리컨 브리프’는 루이지애나 사람이자 장차 변호사를 꿈꾸는 다비가 ‘멸종위기종인 갈색 펠리컨의 서식지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이익을 도모하려는 세력과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법을 일삼아 온 정치인 간의 야합’을 폭로한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제목이란 뜻입니다. 다비는 환경주의자도 아니고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정의의 사도’도 아니지만, 루이지애나와 펠리컨을 파괴하려는 자들이 대법관 살해라는 중범죄와 연관 있음을 우연히 포착한 뒤론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진실 찾기에 도전합니다.
엇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중반부에 살짝 늘어지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존 그리샴의 진짜배기 스릴러를 만끽할 수 있어서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의뢰인’과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도 다시 읽어볼 생각이고, 존 그리샴의 초기작들 중 못 읽은 작품들도 검색해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줄리아 로버츠와 덴젤 워싱톤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도 찾아볼 생각인데, 그 무렵 최전성기를 달렸던 줄리아 로버츠의 풋풋한 법대생 모습도 사뭇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