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 도쿄 하우스
마리 유키코 지음, 김현화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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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방송국 개국 60주년 특별기획으로 ‘1961 도쿄 하우스라는 리얼리티 쇼가 제작됩니다. 1961년의 생활상을 그대로 구현한 집합주택 단지에서 불편함을 무릅쓰고 3개월을 살아내기만 하면 500만 엔이라는 거금의 출연료가 주어집니다. 원래는 가난해도 희망과 웃음이 흘러넘치던 살기 좋은 옛 시대를 만끽하는 리얼리티 쇼였지만, 제작회의가 거듭되면서 자극적인 구도와 갈등 조장 등 시청률을 위한 설정들이 가미됩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은 두 가족 나카하라, 고이케 은 이름과 성격까지 바꿔달라는 제작진의 기이한 요구를 수용하며 집합주택 단지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3개월간의 불편한 옛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출연자 한 명이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리얼리티 쇼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이 모두 일곱 편인데, 2016년 처음 소개된 고충증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을 읽었으니 나름 팬이라 자처할 만하지만, 실은 신간이 나오면 빨리 읽고 싶어 안달 나는그런 팬이어서가 아니라 읽고 나면 불쾌해져서 더는 읽고 싶지 않은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끌리는탓에 읽다 보니 어느 새 대부분의 작품을 읽어버린, 좀 이상한 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크 미스터리의 여왕혹은 이먀미스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마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렸다고 할까요?

 

시작부터 어둡고 음울한 게 마리 유키코의 특징인데, ‘1961 도쿄 하우스는 리얼리티 쇼라는 소재 때문인지 전작들과는 달리 가볍고 경쾌하게 출발합니다. 혹시나 마리 유키코의 전혀 다른 스타일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초반을 벗어나자마자 리얼리티 쇼 이면에 자리 한 갖가지 탐욕과 일그러진 감정들이 슬쩍슬쩍 그려지면서 예의 불길함과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리얼리티 쇼를 준비하는 제작자들 일부에게서 다른 의도가 감지됐고, 쇼의 무대인 재건축을 앞둔 쇼와 시대의 집합주택 단지자체도 뭔가 어두운 과거를 숨기는 듯한 인상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제 1961년에 이 단지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정보가 독자와 일부 등장인물에게만 노출되면서 그 사건이 이 리얼리티 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무척 궁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쇼는 일단 중단됩니다. 하지만 진짜 쇼는 그때부터 시작되고 거듭되는 사건과 연이은 반전이 폭죽처럼 터집니다. 독자 입장에선 은밀한 의도를 가진 채 이 리얼리티 쇼를 이용하려는 진범이 누굴까 짐작해보게 되는데, 문제는 챕터가 바뀔 때마다 그 짐작이 여지없이 빗나간다는 점입니다. 또한 쇼를 기획하고 준비했던 일부 인물, 그러니까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할 인물들조차 예상치 못한 전개에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곤 해서 독자로선 진범의 진짜 시나리오가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리 유키코의 전작들이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지독하리만치 불편하고 어두운 감정과 심리를 그리는데 주력했다면 ‘1961 도쿄 하우스누가, ?”에 충실한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듭되는 사건과 반전들은 평소 마리 유키코와 담을 쌓았던 독자들도 좋아할 만큼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으로 구축돼있어서 그녀에 대한 선입관을 확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녀 특유의 다크 미스터리와 이야미스는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미지의 힘에 이끌려 꾸역꾸역 찾아 읽은 작품들이라 그런지 그동안 읽은 마리 유키코의 작품에게는 모두 별 4개만 주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미스터리의 만족도가 무척 높았던 덕분에 0.5개를 더했습니다. 몇몇 애매모호한 설명 때문에 만점을 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마리 유키코의 새로운 진면목을 발견한 것 같아 꽤 만족스러운 책읽기였습니다. 아마 다음 신작 소식을 듣게 되면 그때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녀의 작품을 집어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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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의 참극 - JM 북스
도오사카 야에 지음, 김현화 옮김 / 제우미디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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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의 명문 도오고교에는 극과 극의 쌍둥이 자매가 재학 중입니다.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지만 성적은 바닥권인 후지미야 미야와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성적은 전국 톱클래스권인 사야가 그들입니다. 미야와 사야의 어머니가 꽤 극성스럽다는 소문은 동급생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상은 극성을 훨씬 뛰어넘는 가혹한 통제와 압력이 쌍둥이 자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편 폐교사의 교실을 근거지로 연실 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학생과 교사의 의뢰를 받아 비밀리에 해결해주는 심부름센터활동을 하고 있는 2학년생 다키 렌지와 우즈키 레이치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의뢰를 해온 미야와 사야의 일을 돕던 중 끔찍한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인형의 집의 참극2022년 제25회 보일드 에그즈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에 특화된 상은 아니지만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폭넓은 의미의 장르물을 대상으로 삼은 듯 해서 일단 눈길이 끌렸습니다. (제가 읽은 같은 상 수상작은 코믹+첩보+로맨스물이라 할 수 있는 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도쿠나가 케이)가 유일합니다. 그 외에 판타지 로맨스로 분류되는 가모가와 호루모‘(마키메 마나부)가 출간됐습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출판사가 공개한 정보를 검색하다가 무척 난감해지고 말았는데, ‘인형의 집의 참극이란 제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건이나 끔찍한 사건이란 표현만 있을 뿐 정작 살인이란 말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당연히 누가 살해당했는지도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살자를 공개하는 게 스포일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우니 다소 인상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더라도 피살자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은 도오고교 2학년생 다키 렌지와 우즈키 레이치입니다. 체격도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교내 심부름센터라는 특이한 동아리 활동을 하는 두 사람은 쌍둥이 자매와의 인연으로 인해 사건에 휘말립니다. 친할머니가 영국인이며 무난한 성격에 10대다운 순수함을 지닌 렌지가 쌍둥이 중 하나인 사야에 대한 걱정과 우정 때문에 사건에 뛰어들었다면, 냉정하면서도 때로 4차원 캐릭터를 보여주는 레이치는 말 그대로 집요한 탐정의 자세로 쌍둥이 자매에게 닥친 끔찍한 사건을 조사합니다.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 대부분이 10대인 고교 2학년생들이라 인형의 집에서 참극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마치 청춘 로맨스물 같은 흐름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어머니에 의해 가혹하게 통제당하는 것은 물론 서로를 깔보거나 원망하며 악연을 이어가는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가 병행되면서 세 모녀가 사는 인형의 집은 점차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참극 이후 렌지와 레이치의 조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명탐정이 추리하고 해결한다!’라는 본격 미스터리 서사로 급전환됩니다.

미스터리 해결에서 주역을 맡은 레이치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사소한 단서들을 끌어 모은 뒤 날카롭지만 살짝 비약에 가까운 추리로 진상을 파악하는 반면, 렌지는 감성에 의지한 수사로 레이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웁니다. 서로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희한하게 궁합이 잘 맞는 콤비라고 할까요?

 

‘10대 고교생 탐정물은 개인적인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인형의 집의 참극10대 청춘물과 살인 미스터리 서사가 잘 조합된 작품이라 거부감 없이 잘 읽혔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렌지와 레이치는 나름 흥미로운 명탐정 콤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시리즈화가 결정되어 20239월 후속편(‘괴물과 요람’)이 나왔다고 하니 어쩌면 한국 독자들도 두 사람의 활약을 좀더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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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협주곡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5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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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던 30년 전 어린 소녀를 토막 살해하여 시체배달부라는 별명을 얻었던 변호사 미코시바 레이지를 징계하라는 일반인들의 청구가 봇물처럼 쏟아집니다. 하지만 미코시바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무소 직원 구사카베 요코가 갑자기 연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더구나 흉기에서 그녀의 지문이 발견된 탓에 곧바로 구치소에 수감되고 맙니다. 미코시바는 자네가 살인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반드시 꺼낸다.”는 말과 함께 조사를 시작하지만 이내 자신이 요코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녀에게 누명을 씌운 자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코의 과거를 캐던 미코시바는 그녀가 30년 전 자신이 토막살인을 저질렀던 곳에 살았던 사실을 알아내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시체배달부였던 미코시바의 캐릭터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인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더는 그 과거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계속 그 과거에만 함몰된다면 어떤 사건이 등장하든 동어반복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2019년에 출간된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악덕의 윤무곡을 읽고 쓴 서평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때만 해도 진심으로 더는 과거와 얽히지 않은 사건들을 다루기를 바랐지만, ‘복수의 협주곡을 읽고 나니 실은 이 시리즈 자체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갱생과 속죄를 다룬 하나의 거대한 서사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즉 그의 과거가 얽히지 않은 사건은 이 시리즈에서 다룰 이유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30년 전 그가 저지른 토막살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정면으로 다뤄진 복수의 협주곡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줬습니다.

 

미코시바의 미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블로그를 통해 일반인들을 끌어 모아 자신을 징계하라고 청구한 블로거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징계청구자 전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익명을 이용하여 제멋대로 선의니 정의니 떠드는 자들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것은 물론 현실적인 이익까지 얻어내려는 미코시바다운 대응입니다. 또 하나는 살인혐의로 체포된 사무소 직원 구사카베 요코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유일무이한 직원이지만 미코시바는 그녀에게 조금도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직원할인을 받을 수 있는 의뢰인으로만 취급할 뿐입니다. “자네가 살인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반드시 꺼낸다.”는 건 그녀를 아끼고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평소 의뢰인을 대하는 미코시바의 태도이기 때문에 나온 말일 뿐입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미코시바를 당황하게 만든 건 자신이 요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의 고향도, 가족도, 살아온 이력도 전혀 몰랐던 미코시바는 누명을 씌울 만큼 원한 관계에 있는 자를 찾아내기 위해 요코의 과거를 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알게 된 그녀의 과거 30년 전 자신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점 - 는 미코시바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요코의 과거를 캐는 일은 곧 자신이 30년 전에 저지른 토막살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요코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미코시바가 품은 의문은 거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풀리는데, 그 해답 역시 미코시바를 꽤나 놀라게 만듭니다.

 

요코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은 다소 싱겁게 전개되고, 미코시바의 추리도 홀로 폭주하는 경향이 있어서 막판에 힘이 살짝 빠진 건 사실이지만, 미코시바가 지목한 진범의 정체는 다시 한 번 독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갱생과 속죄를 다룬 하나의 거대한 서사라는 점을 절감하게 만듭니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미코시바의 탐문과 조사는 실은 30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사건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스런 과정이었고, 요코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또 하나의 속죄의 계단을 올랐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속죄라는 주제는 그 어느 작품보다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20233월에 일본에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 살육의 광시곡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노인 요양센터에서 9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최악의 피고를 변호한다는데 과연 어떤 접점을 통해 미코시바의 속죄와 연결될지 쉽게 예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늦어도 내년 하반기에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빨리 출간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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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의 살인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이수은 옮김 / 창심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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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화장실에서 6세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고교생으로 밝혀지자 일본 전역은 경악합니다. 이후 소년A라는 익명으로만 보도되던 범인의 이름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한 주간지를 통해 공개됩니다. SNS에서는 범인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과 주거지를 추적하는 광기 서린 폭주가 이어집니다. 그런 와중에 상상치도 못한 피해를 입은 자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범인과 이름이 똑같은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입니다. 단지 이름이 같을 뿐이라고, 기분이 좀 나쁠 뿐이라고만 여겼던 그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크고 작은 피해가 벌어지자 격분합니다. 그리고 불과 7년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언론에 회자되자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은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고 진범의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심합니다.

 

대부분의 이름이 세 글자뿐인 한국에는 워낙 동성동명인 경우가 많아 이 작품의 설정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가진 경우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유명 드라마의 주인공과 (성은 달랐지만) 이름 두 글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만일 연쇄살인범이나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인물과 이름 석 자가 모두 같다면 그 난감함과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로축구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야간고등학생, 건실한 영업사원, 개인 과외교사, 만화와 게임에 빠진 오타쿠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오오야마 마사노리들6세 소녀 살인사건의 범인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크고 작은 좌절을 겪게 됩니다.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의 진로가 완전히 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잊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의 인생은 또다시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제안으로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살인범과 이름이 똑같다는 이유로 현실과 SNS에서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동성동명 등장인물들이 겪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그려나간다.”라고 돼있는데, 작품 속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이 겪는 건 단지 놀림과 조롱이 아니며 이야기 역시 결코 흥미롭거나 가볍지 않습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자신들이 살인마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아님을 입증하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SNS의 마녀사냥은 그칠 줄 모르는데다 부정확한 정보로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일까지 반복되면서 그들은 마녀사냥이 언제든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사실 초반만 해도 무슨 이야기로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채우려나?”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피해자 모임의 목표도 단선적으로 보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울 재료들도 딱히 충분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인물이라는 점을 잘 활용하여 예상치 못한 트릭과 반전을 수시로 끌어냅니다. 또한 피해자 모임 내부에도 시한폭탄 같은 장치를 심어놓아 서로를 100% 믿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거듭된 반전을 통해 독자를 이리저리 뒤흔들면서 앞선 페이지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앞서 한국에 소개된 시모무라 아쓰시의 전작 시체 찾는 아이들생환자를 모두 읽었지만 이만한 트릭과 반전을 맛본 적이 없어서 무척 의외였고 놀라웠습니다. 아이디어와 서사 모두 기발하고 탄탄해서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모두 23편의 작품을 출간한 걸로 나오는데 어쩌면 아직 한국에 그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머잖아 그의 또 다른 작품이 한국 독자들을 찾아오기를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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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마을에서
사노 히로미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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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이와타의 조사원인 마사키는 보육원에서 갓 독립한 소녀 마키와 함께 하토하 지구라는 부유한 마을로 향합니다. 19년 전 하토하 지구에서 살다가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곤 갑자기 실종돼버린 가족을 찾아달라는 마키의 요구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보육원을 나오자마자 가족 찾기에 나섰던 마키는 가까스로 어머니 료코와 절친이던 변호사 이와타를 찾아냈고, 이와타는 왠지 껄끄러워 하면서도 마사키에게 마키를 도우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사키와 마키가 찾아간 하토하 지구는 외부인에게 지독히도 폐쇄적인 것은 물론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에서 실종사건 같은 건 없었다고 잡아뗍니다. 즉 마키의 가족은 19년 전 자발적으로 마을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사키와 마키가 당시 이웃이던 기모토 지하루와 접촉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하고, 그때부터 두 사람을 향한 마을 전체의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세부 장르는 동조 압력 미스터리입니다. 즉 그것이 잘못된 일이나 생각임을 알면서도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집단 심리에 휘둘린 끝에 심각한 오판을 저지른 자들을 다룬 미스터리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다니던 자동차 회사의 결함 은폐를 알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눈감아버렸던 마사키, 학폭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 가해자 편에 섰다가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고 만 마사키의 딸 에리, 업계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진실 찾기를 포기했던 변호사 이와타, 그리고 죽은 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에서 계속 살기 위해 이웃의 비극에 눈감았던 기모토 지하루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대부분이 이른바 동조 압력의 피해자들이자 동시에 공범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현재의 이야기로, 19년 전 벌어진 마키 가족의 실종을 조사하는 마사키의 행보이고, 또 하나는 과거의 이야기로, 22년 전 유치원생 아들 다카유키가 납치 살해된 시점부터 19년 전 마키의 가족이 옆집으로 이사 온 뒤 실종되기까지의 사건들을 1인칭 시점으로 설명하는 기모토 지하루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 시점의 하토하 지구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22년 전의 유치원생 납치살해, 19년 전의 일가족 실종, 현재의 사건 등 모두 세 개의 사건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들은 하토하 마을에서 벌어졌다는 공간적 공통점뿐 아니라 실은 모두 동조 압력이라는 집단 심리에 의한 것이라는, 즉 크게 보면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비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품 속 하토하 지구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이한 마을입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남편, 전업주부이자 현모양처인 아내, 자녀는 둘 이상!”이라는 입주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방범대를 조직하고 외부인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것은 물론 마치 집단 세뇌에 걸린 사람들처럼 획일적인 사고와 행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지향점에 동조하지 않는 자에겐 노골적인 왕따를 퍼부어 굴복시키거나 떠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든 이 마을에 남아 살아가는 자들은 이런 기이함을 당연한 일인 듯 받아들이며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에서의 삶을 긍정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맹신과 동조가 마을 내부에서 벌어진 잘못된 일마저 오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납치살해범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마을에서 실종사건 같은 건 절대 벌어질 리 없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20여 년에 걸친 끔찍한 비극들이 양산된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왔지만, 동조 압력이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여러 가지 사건과 잘 엮어냈다는 점에서 누군가 이 마을에서는 오래 기억에 남을 개성 넘치는 작품입니다. 서론이 다소 길어 보였고, 하토하 마을의 비현실성이 자꾸만 발목을 잡은 점 때문에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 점도 이 작품의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내가 하토하 마을에 살았더라면, 또 만약 내가 동조 압력의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여러 인물들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과 행동을 했을까?”라는 자문이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노 히로미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꼭 찾아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왕이면 마사키-이와타 콤비가 다시 한 번 활약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면 좋겠지만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더라도 나름 기대되는 바가 큰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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