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의 제야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내용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오자나 비문이 많다면, 내용의 탁월함이 상당부분 훼손되기 마련이다. 성격이 못되서 그런지, 난 책을 읽다가 맘에 안드는 표현이 있으면 빨간펜으로 고쳐놔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고종석의 책에는 감히 빨간펜을 댈 수가 없다. 외우고 싶은 마음에 줄을 친 적은 있어도, 뭔가를 고친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된다.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에 난 정신없이 빨려들어갔고,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아쉬운 맘에 입맛을 다셔야 했다. 각 단편마다 이혼남, 장애인, 실직자, 여자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소수자의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고종석답다.

고종석의 다른 책들을 여러 권 읽었고, 그래서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어느 정도 아는 나로서는,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저자 자신의 얘기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은 그래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로 읽힌다. '한민일보'에 대한 안티운동을 주제로 다룬 단편 '파두'를 보니 언젠가 강준만이 주장했던, 사회적 소재를 소설로 써서 메시지를 전파시키는 작업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 소설들이 주는 재미로 미루어 볼 때 그 작업은 성공한 듯 보인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분명 아니겠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도 충분한 고종석이라면 앞으로도 많은 활약을 기대해봄직하다.

이전 작품인 <제망매>에서도 느꼈지만, 누이의 볼에 입을 맞추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엘리야의 제야>를 보니 저자에게 혹시 근친xx의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긴 해도, 누나, 여동생과 그다지 친하지 못한 내가 보기에는, 누나를 많이 사랑하는 듯한 <누이 생각>의 주인공이 부럽기 짝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장일치는 무효다 - 좌파 자유주의자 변정수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변정수 지음 / 모티브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고대 유대 사회에서 의회 구실을 하던 산헤드린에서는 투표 결과 만장일치가 나오면 그것을 무효로 하고 다시 투표를 했다고 한다]

'자유주의자'란 말이 멋져 보이는지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강변하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만장일치는 무효다'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무엇인지, 자유주의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증명해 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모든 것을 획일적인 방향으로 몰고가는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대개는 공감했고, 가끔은 통쾌했으며, 나 스스로에 대해 많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 그 전에 읽었던 변정수님의 책,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에서는 저자의 전투적인 태도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 책은 아주 편안한 자세로, 시종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전에 내가 존경하던 어떤 분이 '북한과 우리나라의 관계가 일본과 우리의 관계만큼만 된다면, 굳이 통일이 필요없다고 본다'라고 했을 때, 난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인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라며. 그건 내가 '분단 아니면 통일'이라는 흑백논리에 빠진 나머지, 무엇을 위한 통일인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었던 탓일게다.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나처럼 어린 시절의 맹목적 학습에 의해 통일을 강요당한 탓이 아닐까. 저자의 말이다.

['통일'이라는 형식은 분단 극복의 유일한 대안이 아닐 수 있으며, 심지어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에 대한 문제의식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통일에의 염원'으로 환원되는 것은 사실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엄청난 비약이다(373쪽)]

이렇듯 저자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사이비종교에 대한 비난을 비판하는 저자의 사려깊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자기존중이 있어야 남도 존중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도 깊은 동감을 표하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나의 무식을 깨우쳐 준 책'으로 분류해 리스트에 올려놓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아멜리 노통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세번째로 읽은 이 책 역시 소재의 참신성과 풍부한 지식 등 노통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번 소재는 그 특이함이 단연 돋보이는데,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37세의 나이지만, 그녀는 장난꾸러기 소녀같다. 예컨대 다음 문장을 보자.

[성적 좋은 애들이 가는 길은 똑같아요. 문제를 외우고, 그 다음에는 정답을 외우고. 그리고 칭찬을 받는 걸로 끝나는 거죠(21쪽)]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던, 그래서 공부 잘하는 옆집 애-옆집 애는 왜 꼭 공부를 잘할까?-와 비교되어야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어딜 보나 이 책의 주인공은 노통 자신인데, 그녀는 극중 인물의 입을 빌어 자신의 외모를 이렇게 기술한다.

[당신의 이야기는 녹음했지만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처음 당신이 얼마나 못생겼는지 알고 나서 충격이 꽤 컸습니다(145쪽)]

하지만 사진을 보니 노통은 전혀 못생기지 않았고, 소설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십대 소녀같다 (노통이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까?) 이쁜 애가 자신을 못생겼다고 하는 건 분명 겸손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애를 얄미워한다. 이쁜 애가 이쁜척을 하는 것보다 더. 그러니 다음 책에서는 솔직하게 '나 이뻐!'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노통의 책이 선풍을 일으킨 것은 무려 십년 전이라는데, 왜 그녀의 책이 이제서야 소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노통의 나머지 책도 다 주문해 놨는데, 그걸 다 읽고 나면 심심해서 어쩌냐,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껴서 읽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좋아했었다. 그의 소설은 늘 기발했고, 내게 많은 것을 알려줬으며, 날 감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작년에 나온 <뇌>나, 올해 나온 <나무>를 보니 그가 보여줄 건 이미 다 보여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와중에, 아멜리 노통을 발견했다. 벨기에 태생인 노통의 소설은 하나같이 기발한 소재로 날 놀라게 하는데, 이번 책도 그 기대를 충족시켜준다.

소설의 배경은 공항 청사, 나중에 달려온 경찰을 제외하면 등장인물은 단 두명이다. 어찌보면 지루해지기 쉬운 설정이지만, 노통은 시종 흥미있게, 대화로만 소설을 전개하는 특유의 기법을 이용해 또하나의 멋진 소설을 만들어 냈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남자의 정체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책 중간중간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해박함도 이 책을 읽는 묘미다.

책 맨 뒤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보니까 영화 '아멜리아'의 주인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고보니까 이름도 '아멜리'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아멜리 노통 역시 발랄하기 짝이 없고, 착한 마음씨를 깜찍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적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에서 살았던 게 노통의 소설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많은 외교관들이 있을텐데, 그분들의 자제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마이서재'라는 게 생겼다. 책에 관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템인데, 나만의 favorite들을 소장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지만, 다른 분들의 서재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게 난 더 좋다. 다른 분이 쓴 마이리뷰는 나로 하여금 책을 읽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 깨닫게 해주는데, 영화를 고를 때 평론가의 현학적인 글보다 미리 영화를 본 관객들의 영화평이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다른 분들의 서평이 읽을 책을 고를 때 도움이 된 적이 꽤 여러 번이다. 어느 분이 써놓은 마이리뷰가 아니었던들, 내가 요즘 명성을 드날린다는 아멜리 노통을 만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다.

<오후 네시>는 정말 특별한 소설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대신 주인공 부부를 포함해 단 네 명만이 나오며, 수억달러의 금괴를 놓고 스릴 넘치는 음모가 펼쳐지는 대신 타인으로 인해 방해받는 두시간을 놓고 밀고 밀리는 신경전이 벌어진다. 어찌보면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싸운다 싶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이웃의 뻔뻔함에 화가 치미는데, 마지막엔 또다시 내 예상을 뛰어넘으며 소설을 끝낸다. 남녀간의 사랑이나 음모를 다룬 소설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오후 네시>는 무척이나 신선했는데, 이런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걸 보면 과연 25세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천재답다는 생각이 든다.

아멜리 노통이 나와 동갑이라 친근감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뭔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천재는 아무나 될 수 없는 것, 아멜리와 동시대에 사는 덕에 그녀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녀가 했던 인터뷰를 보니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 아직 수십편 더 있다는데, 그 작품들은 내게 어떤 즐거움을 줄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