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책을 많이 읽느냐에 무관하게, 독서는 한국인의 주요 취미 중 하나다. 사실 책은 좋은 취미다. 여타 취미에 비해 책은 적은 돈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며, 장소의 제약 없이 향유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또한 책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세상이 온통 돈을 향해 줄달음칠 때, 책은 그게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래서 내게 <부자아빠>류의 실용서들은 책이 아니다. 책은 또한 소통이다. 책은 독자와 저자의 소통 뿐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독자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반가웠던 기억이 그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한국인은 책 앞에 늘 미안하다. 책이 꼭 읽어야 할 것이라는 걸 알지만, 시간적 제약 때문에 많이 읽지 못하니까. 우리가 취미란에 ‘독서’라고 수줍게 적어넣는 건, 그런 미안함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게임’ ‘TV 시청’이라고 쓰는 것보다는 ‘독서’라고 쓰는 게 훨씬 더 폼이 나는 측면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사실 게임이나 TV 시청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게임 역시 게이머들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듯, TV에서 하는 드라마 또한 시청자들간의 소통이다. 처음으로 <웃찾사>를 본 다음날 출근길, 여자애들 넷이서 전날 방영한 <웃찾사>에 나오는 명대사를 얘기할 때 얼마나 반가웠던가. 그건 마치 내가 읽은 책을 다른 이가 읽는 걸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과 비슷한 것일게다. 하지만 밤을 새워가며 게임을 하는 걸 ‘좋은 취미’라고 할 수 없듯이, 지나친 독서는 그만큼의 해악을 가져다 준다. 어릴 적 독서광이었던 김정란 시인의 고백이다.
“사춘기 시절은 고통스러웠다. 나는 책을 엄청나게 읽어댔고,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늘 혼자였다. 그것은 무리에 섞여 몰려다니기 싫어하던 내가 자청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독은 몽땅 내 몫이었다(<분노의 역류>, 134-5쪽)
김정란이 왜 고독을 자청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많은 독서로 인해 높아진 정신세계가 그녀로 하여금 타인을 거절하게 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독서광이었던 또다른 친구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으로부터 “책 좀 읽는다고 잘난체 하지 마라”라는 황당한 꾸지람을 들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책을 갑자기 많이 읽게 되면서 난 책이라고는 손에 잡지도 않는, 특히 책을 안읽은 결과로 무식한 소리만 골라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책 이외에도 그들과 내가 공유할 수 있는 다른 무엇-같이 지낸 시간들로부터 기인한-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게 전혀 없는 사춘기 때라면, 배용준과 권상우, 전지현 얘기만 해대는 동년배들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책을 좋아하는 이에게 고독은 그래서 숙명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멋지게 비판한 노혜경의 딸도, 나야 물론 그녀를 대단하게 여기고 있지만, 나름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그 폐해는 사춘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독서광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년에 300권이 넘는 책을 읽는다는 그는 시간만 나면 책을 읽으며, 그래서 부인으로부터 원망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낚시나 골프도 주말과부를 만들지만, 그것들은 저수지나 필드에서만 효력을 발휘할 뿐, 집에 오면 얼마든지 자상한 남편이 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독서는, 때와 장소를 가릴 필요가 없는 독서는, 집 안에 같이 있는 아내와 가족들을 더욱 외롭게 한다.
책은 다른 것들에 비해 조금은 더 나은, 권하고 싶은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취미가 그렇듯이 지나친 취미의 추구는 해악을 미친다. 설사 그게 책이라고 할지라도. 취미는 취미일 뿐이며, 자기 할 일을 다 한 후에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